456회
106일차
아리오스는 불꽃에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꽃잎으로 하나가 된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몸 주변에 붙은 불꽃을 털어냈다.
껍질을 재생하고, 줄기를 휘두르고, 나뭇가지를 자라게하여 가시갑옷을 두르고, 뿌리를 바닥에 박아 표범수인들을 붙잡으려했다.
-이제는 틀렸다.
칼로포르가 좌절하며 뿌리의 재생을 멈췄다. 불꽃에 닿아 타들어가는 나무껍질은 더이상 재생되지 않았다.
-우리는 버림받았다.
-그렇지 않다!
리오아스는 혼을 담아 소리쳤다. 자신들은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군단으로서 승리할 것을 명령 받은 존재들이다.
-아스타로트 님께서는 우리가 이길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기에 자리를 피하신 것이다!
-머저리. 우린 이미 끝났어.
-끝나다니, 그럴 리가 없다! 설령 우리가 죽는다고 한들 군단장님께서는 우리를 부활시켜 주실 거야!
스리오아는 확신했다. 동생과 함께 던전을 운영하던 도중 아스타로트는 자신에게 파격적인 대우와 함께 군단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줬다.
태생의 한계를 뛰어넘어 몽마로서 다시 태어나게 해준 은혜를 갚아야했다. 안 그러면 오-
나는, 누구지?
리아오스의 정신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리자드맨인가? 인큐버스인가? 엘프인가? 기억이 섞이고 추억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다크엘프를 범한 인큐버스인지, 인큐버스에게 범해진 다크엘프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끼아아악----
군단의 몽마들이 하나 둘 소사했다. 얼굴부터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며, 그들의 얼굴은 검게 타버려 이목구비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나는!!
스리아로는 깨달았다. 자신은 군단이다. 색욕의 군단이다. 주인 아스타로트의 충실한 종복이자, 적을 물리치기 위해 강해진 괴물이다.
-몸을 재생시켜라!! 우리는 이겨야한다! 이길 것이다!
아리스오는 몽마들을 독려했다. 껍질이 불타면 강제로 껍질을 재생시켰다. 캠비어의 얼굴이 타들어간 곳에는 꽃잎에 박힌 자신과 똑같은 얼굴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다함께 이겨내자! 모두 하나가 되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
-군단장님을 위해!
-그러니까 그 군단장이 우리를 버렸다고.
로르칼포의 꽃잎은 말라 비틀어져 쪼그라들었다. 얼굴은 이미 찌그러져 있었고, 다른 꽃잎들에 비해 ¼ 정도의 크기로 줄어있었다.
-우리는 패배했다.
-우리는 이길 수 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싸운다면 이길 수 있다!!
-그 우리에 군단장은 없다.
리스아오는 할 말을 잃었다. 군단의 모든 병사들, 포로들이 인장과 함께 하나로 모였으나, 군단장은 여기에 없었다. 지하 1층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지상과 지하 2층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군단장, 아스타로트의 기척이 사라졌다. 그녀는 던전에서 사라졌다. 던전의 유일한 마물이자 5성이 된 괴물로서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스타로트는 던전에서 빠져나가버렸다. 어딘가에 숨는 것이 아니라, 그냥 던전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럴 리가 없다! 분명 인간 놈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잠시 밖으로 피신한 것이다! 우리는 그 분이 던전으로 돌아오실 때를 위해 침입자를 모두 죽여야 한다!!
시든 꽃잎이 다시 돋아나기 시작했다. 꽃잎의 앞에는 로이스아의 얼굴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나무껍질이 타들어가 내부의 고깃덩어리가 튀어나온 곳에도 그의 얼굴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아스타로트시여! 저희를 믿으십시오! 군단을 믿으십시오! 당신이 돌아오실 곳을 위해 저들을 죽이겠나이다!
앞발을 앞으로 내딛는다. 적이 우리로부터 빼앗은 하나의 개체. 저 개체가 있다면 다시 우리는 진정한 하나가 되어, 군단이 되어 적을 상대할 수 있다.
화륵, 화륵.
꽃잎 위에 얹혀진 신성력의 방패는 꽃잎의 얼굴들을 지져버렸다. 용광로의 쇳물에 얼굴을 들이민듯한 충격에 꽃잎들이 빠르게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아직, 아직이다아아아!!
오스리아의 얼굴이 꽃잎에 돌기처럼 돋아나기 시작했다. 신성력의 힘에 얼굴이 타들어가면 그 곳에 다른 얼굴이 돋아났고, 얼굴이 새로이 재생될 때마다 주변의 나무껍질도 다시 돋아나기 시작했다.
몸은 재생되고 있으나, 점점 괴물은 같은 이의 얼굴로 잠식되고 있었다. 얼굴이 없던 곳 마저도 똑같이 일그러진 얼굴이 돋아났다.
-줄기를 뻗어라. 군단은 승리할 것이다. 승리하여 그분의 은총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군단-
아.
무슨 군단이었지?
화륵.
불길 속에서 괴물의 모든 구멍에 똑같은 얼굴이 생겨났다. 불꽃에 전신이 타들어가는 고통은 얼굴이 늘어난 수만큼 배가 되었으나, 그에게 있어서 그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지막 순간.
-동생아….
의식이 불꽃에 타오르며 사그라드는 괴물의 머릿속에는 한 명의 이름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
“더럽게 안 죽네. 야, 좀 빨리 뒤져라 좀.”
우리는 캠프파이어처럼 활활 타오르는 러스트릴리스의 몸을 향해 장작을 집어던졌다.
장작은 망가진 목제 무기라거나, 던전 안에 있는 집기들이라거나, 우리가 이너아머로 착용했다가 찢어져 못쓰게 된 스타킹이 전부였다.
그런 장작을 있는 그대로 다 때려넣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스트릴리스는 좀처럼 재가 되어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주인님, 또 돋아났어요. 이번에는 정강이에요.”
“나 저 얼굴 이제 슬슬 무서워지려고 하는데.”
나에게 숱하게 죽었던 인큐버스, 오리아스의 얼굴은 마치 바이러스처럼 러스트릴리스의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거대한 나무를 숙주로 삼은 버섯이 돋아나는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륜아. 나 지금 입이 근질근질하거든?”
“저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무기를 든 채 러스트릴리스를 노려보는 모든 군단병들도 내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총대는 내가 들겠다.”
제발 이대로 끝나기를.
“해치웠냐?”
철컥. 모두가 무기를 꽉 움켜쥐었다. 우리는 그 어느때보다도 긴장했다. 그리고 나는 조심히 입을 열었다.
“하나, 둘, 셋, ...열여덟.”
숫자를 18이나 불렀는데도 러스트릴리스는 미동도 없었다. 우리 군단 모두가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솔직히 18초는 훨씬 넘게 기다렸는데 부활하면 쓰레기지.”
“그러게요. 갑자기 막 안에 있던 고깃덩어리들이 튀어나와서 괴물이 되는 줄 알았어요.”
“아아, 그래. 원래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는 패턴은….”
철컥. 우리는 잠시 내려놓으려던 무기를 들어올렸다. 과거 할파스의 대가리가 떠올라 난동을 부렸던 것이 떠올랐다.
“......육십구. 솔직히 1분도 훨씬 넘겼는데 여기서 부활하면 진짜 개쓰레기다.”
파스스. 너무 몸이 커서 불에 타오르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던 걸까. 러스트릴리스의 몸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전신의 껍질은 모두 불타버렸고, 내부에 있던 고깃덩어리들은 지글지글 끓으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숯불처럼 바싹 타버리나 싶었으나, 형체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슬슬 뭔가 반응이 와야하는데….”
군단장이 아닌 존재를 쓰러뜨렸으니, 던전주인이 아닌 존재를 쓰러뜨렸으니 완전히 죽었는 지 확인할 방법은 하나 뿐이다.
“레벨...레벨….”
나는 시스템창을 몇 번이고 새로고침하며 내 프로필을 확인했다. 아무리 남의 던전이라고 한들 내 정보는 확인할 수 있었고, 92레벨을 잡았다는 것에 나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제발 레벨업!’
90. 내게 있어서는 정말 크나큰 의미를 가지는 숫자. 군단이 강해지는 만큼, 색욕의 군단을 이기고 인장을 가진 만큼, 이제는 나도 훨씬 더 강력한 존재로 태어날 때가 되었다.
“...주인님!!”
륜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륜을 비롯한 엘프들의 표정이 변했다.
“통로 너머에서!”
“......!”
최악의 타이밍. 지상 1층에서 내려오는 통로인 미로에서 인간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젠장…!”
인장은 챙겼다. 인간들과 마주치겠다 싶으면 바로 냅다 도망쳐야 하는 것이 우리의 지상과제였다. 다크엘프들은 충분히 구출했고, 인간들과 싸우는 건 리스크를 넘어 후작령과 전쟁을 치르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대로...그냥 도망가야한다고?”
혹시나 막타를 인간 놈들이 치면? 목숨을 걸고 공략한 러스트릴리스를 이대로 두고가야한다는 생각에 나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안타까움을 참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이긴 건데 이걸 두고….”
“병력으로 통로를 막죠!”
메어리가 성검 비르고를 들고 통로를 향해 달렸다. 나는 메어리를 붙잡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행여나 성기방패를 쓰려고 하는 거라면 그만두거라. 너의 힘은 철저히 숨겨야 하니. ...젠장, 숨겨야 할 녀석들이 한 둘이 아니군.”
오크. 엘프. 슬라임. 안드라스. 하피. 듀라한. 유니콘. 구울. 플레어 판테라. 미노타우르스.
색욕의 군단 토벌에 동원한 병력들은 하나같이 우리 군단을 상징하는 병사들이었다. 아무리 후작가를 상대로 눈가리고 아웅으로 숨긴다고 해도, 이곳의 상황을 들키면 바로 전쟁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몽마 던전에 새로운 종류의 적이 나타나도 그건 이상하게 생각할텐데….”
[주인님, 들리십니까?]
시스템에 보랏빛 서큐버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은은하게 미소짓고 있는 그녀, 샤이탄은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직접 연결이 되었습니다.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그래. 이기긴 했는데 상황이 지금 많이 안 좋다. 몽마들을 버림패로 쓸 수도 없고.”
나는 상황을 간결하고 빠르게 전달했다.
[천장을 무너뜨려 입구를 봉쇄하는 건 어떻습니까?]
“그건 시도중이다. 하지만 적들은 기사단이다. 금방 뚫고 들어올 거야.”
단순히 대치를 하는 걸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적들에게 들키지 않고 ‘퇴각’을 해야했다.
[주인님, 지금 퇴각하지 않으면 들키게 될 겁니다. 연관성이 적은 병사들부터 먼저 퇴각시키지요.]
“쳇. ...어쩔 수 없나.”
미로 너머에 있을 아스타로트를 붙잡아야 모든 것이 끝날텐데. 나는 아쉬움에 자꾸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인장을 빼앗은 걸로 우리의 승리다. 그럼 이제-”
<알림> 던전 내에 남아있는 적 병력들이 아무도 없습니다!
“......?”
눈앞에 순간 무지개빛이 아른거렸다. 동시에 몸에 활력이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건 나 혼자만 겪는 현상이 아니었다.
“레벨...업?”
자신이 더욱 강해지는 것 같은 느낌에, 나는 스스로를 확인했다.
파후우 쿰 처쿠척, ★★★★☆, Lv.90.
레벨이 올랐다. 수많은 서큐버스를 때려잡아도 오르지 않았던 레벨이 드디어 90을 찍었다. 진화에 관한 생각이 들었지만, 레벨이 올랐다는 것 자체가 말하는 또다른 사실이 있다.
“저 새끼 드디어 뒤졌다!!”
경험치가 들어온다. 적을 쓰러뜨렸으니까. 적이 죽었으니까. 아직 러스트릴리스의 몸에 붙은 불은 사그라들지 않았으나, 불꽃 속에는 그 어떤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 잠깐만. 샤이탄아, 이거 모험 좀 걸어볼만 하지않냐?”
[......시간 싸움입니다.]
고민할 시간조차 없다.
“라임! 일단 통로를 막아! 천장 마음껏 무너뜨려!!”
“인간들이 죽으면?”
“아스타로트 짓이다!”
“바로 갈게.”
나는 라임에게 빠르게 통로 봉쇄를 명했다.
라임과 슬라미아들은 곧장 반대편 통로의 천장을 입구부터 빠르게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임시방편이라도, 마나가 실린 검으로 손쉽게 부순다고 해도 해야만 했다.
적이 없다는 건 인간들이 그만큼 미로를 빨리 빠져나올 거라는 말.
“전원 퇴각! 엘프, 인간, 듀라한, 유니콘들부터 퇴각해! 적에게 빌미를 주지 않는다!”
분노의 군단을 특정할 수 있는 고유종, 또는 기네비어나 갤러해드같은 특별한 존재들부터 퇴각시켰다. 후미에는 하피나 미노타우르스처럼 들켜도 무방할만한 이들이 남았다.
“하르파스! 미안하다, 그거 좀 해다오!”
“여, 여기서?!”
“제발!!”
“......아, 씨! 야! 아무도 보지마!! 알았어?!!?!”
하르파스는 눈을 찡그리며 러스트릴리스의 위에 날아올랐다. 그리고 그녀는 인상을 팍 찡그리며 손을 입 속으로 집어넣었다. 전투 후에 다시 챙긴 펭귄 후드가 그녀의 머리를 덮었다.
“읍-”
하르파스는 잠시 숨을 참더니.
“우웨에에에엑!!!”
엄청난 소리와 함께, 얼음장처럼 차가운 폭포수를 쏟아냈다. 죽긴 죽었더라도 아직 불꽃이 타는 러스트릴리스의 시체에서 뽀얀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다른 놈들은 다 퇴각해! 륜, 너는 아스모딘을 데리고 포털 입구에서 기다려다오!”
나는 러스트릴리스에게 뛰었다. 아직 남아있는 불꽃과 수증기가 내 전신을 뒤덮었다. 하늘 위에서 하르파스가 토해내는 얼음장같은 폭포수가 어깨를 적셨다.
“나는 파밍하고 간다!”
러스트릴리스.
비록 합성이 되기는 했지만 일단은 5성인 존재.
설령 시간 낭비가 되더라도, 적에게 들킬 지도 모르는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라도 찾아볼 가치가 있다.
찾아야 하는 것은 단 하나. 형체가 무너졌음에도 아직 집채만한 크기의 시신 속에 묻힌 주먹보다 작은 구체.
최상급 마석.
이것을 그냥 두고 도망치면 분명 인간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리라.
"우리가 다 잡은 걸 돚거 당할 수는 없지!!"
나는 불과 물이 뒤섞이는 한증막 속에서, 아직도 불타고 있는 러스트릴리스의 꽃잎 속으로 뛰어들었다.
"아오, 적당히 태울걸!!"
나는 새까맣게 탄 고깃덩어리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너무나도 뜨거워 넣자마자 화상을 입을 것 같았지만, 고통은 참을 수 있다.
"최상급!!"
인간들에게 빼앗길 바에는 차라리 후작령과 전쟁을 치르고 말 것이라는 일념으로, 나는 러스트릴리스의 잔해 속에 몸을 비집고 들어갔다.
화륵.
고깃덩어리 속에 남아있던 잔불이 내 얼굴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