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비만 오크-428화 (428/800)

428회

95일차

<그 시각, 여신교단 교황청 추기경실.>

"다시 한 번 말씀해보시지요."

퀘르벨스 추기경은 인자한 목소리로 눈앞의 서신을 가리켰다. 서신을 들고온 후작가의 기사는 근엄하고 당당한 목소리로 또렷히 말했다.

"존경하는 추기경 예하, 여신께서 인도하심에 녹음이 푸르르고 하늘이 청명하여 세상에 여신의 은총이 가득함에 따라-"

"...본론만 줄여서 말씀해주시지요."

"레비즈 기사단장이 마녀인지, 아니면 마족의 날조인지 명확하게 밝혀지기 전까지는 마족들과 섵부른 교전은 하지 않겠다는 게 후작가의 공식 입장입니다."

"......."

추기경은 일그러지는 표정에 간신히 미소를 유지했다.

"당장 눈앞에 마족이 있는데도 적을 토벌하지 않는다...? 이는 후작가도 마왕군과 결탁했다고 봐도 되는 것입니까?"

"말을 조심하시오, 추기경. 그대의 말은 이 음성기록마석에 녹음되고 있소. 나는 후작 각하의 대리로 온 자로서, 당신의 말을 그대로 전달할 의무가 있소."

"...실례했습니다. 하지만 교단으로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습니다. 엘프들이 마왕군과 결탁하여 혹세무민하는 게 아닐지요?"

"그에 대해 밝히는 건 교단에서 해야할 일. 레비즈 개인의 일탈로 벌어진 건지, 아니면...아무튼 교단에서는 해명해야 할 것이오. 후작가 뿐만 아니라, 전 인류에게."

추기경의 안면은 결국 뒤틀려버렸다.

"말씀드렸잖습니까. 마족의 농단이라고. 인류가 하나로 연합하여야 하는 이 시국에 마왕군이 인류를 분열시키려는 이간질이라고. 어디 말이나 된다고 합니까? 레비즈 경이 엘프 넷을 강간하여 다크엘프로 만들었다는 것에."

"나는 이곳에 오기 전 그들의 피부색을 직접 보았소. 추방해야할 다크엘프들을 엘프들이 직접 데리고 온 것 이유가 무엇이겠소? 그들이 마족과 간통한 것이 아니라, 사이하게 당했기 때문 아니겠소."

추기경과 기사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교단에서 아무리 레비즈의 결백을 주장한다고 한들, 엘프들이 가지는 이름값에는 이기기 어려웠다.

"...좋습니다. 후작가의 입장은 자-알 이해했습니다. 아무쪼록 돌아가시는 길 조심하기를 바랍니다."

"흠. 걱정마시오. 후작가의 기사로서 어디서 객사할 만큼 약하지는 않으니."

서로 날 선 말을 주고받으며 후작가의 기사는 자리를 떠났다. 추기경은 한숨과 함께 자리에 앉아 깃털펜을 집어들었다.

"레비즈...레비즈...!"

추기경은 붉은 피같은 잉크로 레비즈의 이름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썼다. 레비즈로 인해 불거진 문제는 이미 추기경 차원에서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젠장. 이런 와중에 성녀는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추기경은 아직도 소식이 없는 성녀에 초조함을 느꼈다.

갑자기 나타난 성검 타우러스의 용사를 데리고 세계를 돌아다니기 시작하더니, 성검이 성검을 부르는 것도 아니건만 성검의 용사들을 찾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성검 제미니.

성검 칸세르.

성검 타우러스의 주인은 지난 한 달 여간 성검의 주인 둘을 새롭게 각성시켰다. 마치 여신이 타우러스의 주인에게 잊혀진 성검을 찾아 각성시키라고 신탁을 내린양, 타우러스의 주인은 파죽지세로 성검을 찾아냈다.

"성녀가 사람들 앞에 나서서 이야기를 해야하는데...!"

안타깝게도 추기경 본인의 입으로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다. 교단 안의 사람들은 충분히 가능하지만, 일반 대중과 세계를 상대로 하려면 성녀의 힘이 절실히 필요하다.

"신성력만 있었어도...!"

추기경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려쳤다.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자라 수 십년간 여신교의 교리를 공부하고 사람들에게 전파하며 추기경의 자리에 올랐건만,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도 모르는 검은머리 여자애 하나가 갑자기 엄청난 신성력을 보이며 성녀가 되었다.

추기경에 대한 관심은 모두 사라지고, 대중들의 시선은 모두 성녀에게로 꽂혔다. 덕분에 아주 은밀한 곳에서 움직이기는 편했지만, 그 이상으로 짜증나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후우, 번민이 가득찼구나. 여신께 참회를 드려야지."

짤랑짤랑. 추기경은 종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흑발에 가까운 갈색 머리칼의 수녀가 추기경의 방으로 들어왔다.

"예하, 부르셨나요?"

"그래. ...여기는 아무도 없다. 문을 잠그거라."

수녀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질 뻔 했으나, 수녀는 문을 잠그고 추기경의 앞에 섰다. 추기경은 인자한 미소와 함께 수녀의 치마를 걷어올렸다.

"다리가 참으로 예쁘구나."

"가, 감사합니다."

"조금만 더 허벅지가 얇으면...흠, 뭐 거기까지 바라는 건 무리인가. 후후."

추기경의 손가락이 수녀의 허벅지를 따라 올라갔다. 특별히 제작된, 가운데 부분을 좌우로 걷어낼 수 있는 수녀복 사이에는 검은 스타킹이 눈에 비쳤다.

"상당히 값어치 있는 물건이다. 너는 그걸 입고 있는 걸 영광으로 생각해라."

"영광입니다."

추기경의 손가락이 수녀의 고간을 스쳤다. 여전히 추기경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수녀의 허리를 휘감았다.

"왜 표정이 그러느냐? 이것이 전부다 여신의 뜻이거늘."

"...흐윽!"

추기경의 방에는 추잡한 물소리가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 *

"모든 스타킹에는 공통으로 들어가는 것이 있지.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고간부가 쉽게 찢어져서 바로 자지를 박을 수 있는 기능이요?"

"...그건 특수한 경우고, 기본적으로 모든 스타킹에는 이것이 있다."

나는 륜이 입은 흰색 스타킹의 밴드 부분을 가볍게 튕겼다. 팬티 스타킹이 아니라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스타킹이었기에, 밴드 부분은 륜의 허벅지를 '팡'하는 소리와 함께 튕겼다.

"이 밴드에 우리 군단의 상징을 새겨넣을 것이다. 이 문구 그대로."

"음...어디서 본 문구 같은데요?"

"그래. Las Vegas. 라스토피아의 수도인 라스베가스를 상징하는 이미지다."

궁서체에 가깝게 휘갈긴 영어는 상당히 색다른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영어와 궁서체의 조합은 이 세계 인들에게 있어 아주 신선한 충격이 될 게 분명했다.

"사람들에게는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것이 중요하지. 그리고 이 문구를 새기는 건 쉬워. 그냥 새로운 실을 엮으면 그만이니까."

그 실의 재료를 구하기 위해 나는 엘프들을 잠시 모았다. 던전 밖에는 크림 엘프들이, 던전 안에는 쿠키 엘프들이 자리에 앉아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상징으로 너희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고자 한다."

"무슨 부탁까지 해? 여왕의 명령이면 다 그만인데."

다소 강압적인 루나의 말이지만 명령으로 해버리면 다소, 아니 분명 불만을 가질만한 부탁이었다.

"아니다. 이건 나의 부탁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엘프들을 향해 앞뒤로 허리를 숙이며 부탁했다.

"스타킹에 우리 군단의 상징으로 새길 실로 너희의 머리칼을 쓰고 싶다."

엘프들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륜과 루나마저도 내 말을 듣자마자 애매한 표정으로 자신들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무리한 부탁이라는 건 안다. 그냥 머리칼을 가져가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보상을 하겠다."

"보상이라고 하면 오크랑 섹스 아닌가요, 군단장 님?"

"정답이다."

"......."

엘프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민에 빠진 듯 했다.

크림 엘프의 금발과 쿠키 엘프의 은발은 분명 라스베가스 문구를 새겨넣기에 정말 아름다운 질감을 드러낼 것이다. 특히 검스에 박히게 된다면 더 눈에 띄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너희에게 삭발하라는 건 아니다. 단발...정도로 잘라내주면 정말 고맙겠구나."

"주인님, 단순히 색을 구분하는 거면 검스에다가 하피의 깃털로 짠 실을 박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반대도 그렇네. 흰스에다가 안드라스 실로 밴드에 새기면 되잖아."

"그건 이미 제작 중이다. 바로 보급형이지."

나는 코스프레가 미리 제작한 샘플을 꺼내들었다. 엘프들은 스타킹의 밴드 부분에 박힌 확실한 라스베가스 문구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거 보면 되게 궁금하기는 하겠다. 라스베가스가 뭐야? 그러면서."

"나는 무늬 없는 게 더 좋은데...."

"흰스에다가 흰실로 문구 새기면 되지 않아? 티 안나게."

"방금 그 말 한 엘프는 누구더냐?"

쿠키 엘프 중 한 사람이 손을 들었다. 솔라였다.

"좋은 아이디어다. 너에게 포상을 내리도록하마."

"포상이요? 어떤 포상 말씀하십니까?"

"갤러해드를 범해라. 하룻동안 갤러해드를 마음껏 쓸 수 있는 권한을 주마."

솔라는 빛처럼 던전 안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헛기침으로 다시 엘프들의 이목을 모았다.

"보급형 스타킹과 고급 스타킹을 구분할 것이다. 보급형은 아까 솔라의 말대로 기존의 실을 혼용할 것이다. 하지만 고급 스타킹은 달라. 너희의 머리칼이 실로서 사용된 스타킹이야말로 진정한 고급 스타킹이라고 할 수 있지."

"굳이 구분을 하는 이유가 있어요?"

"스타킹이 비싼 값에 거래되는 건 나는 반기지 않는다. 스타킹은 모두의 것. 여신께서는 전 인류에게 스타킹을 보급하라는 사명을 내게 내려주셨건만, 그것이 귀족들과 자본가들의 전유물이 되어선 안 될 일이지."

"보급형은 기존처럼 저렴하게 판매하고, 엘프들의 머리칼이 들어간 스타킹을 사치품처럼 판매할 생각이시군요!"

"그렇다. 저기 오크 한 명이 지나가는구나. 저 놈 잡아다가 하룻동안 마음껏 사용해도 좋다. 복상사시키면 내가 마석으로 부활시키도록 하마."

이번에는 크림 엘프가 오크를 납치해 숲속으로 사라졌다.

"흠흠. 그리고 언젠가는 최고급, 왕족만이 사용할 수 있는 스타킹도 만들어보겠다. 무엇일 것 같으냐?"

"스타킹 전체를 엘프들의 머리칼 실로 짜는 거죠!"

"완벽한 정답이다. 저기 시장에 팔 물건을 실어나르는 오크 셋이 보이는 구나. 저 셋을 마음껏 사용하도록 하라."

크림 엘프는 입맛을 다시며 세 오크가 나르는 짐 위에 올라탔다. 오크들은 한숨과 함께 엘프를 들어올리며 숲속으로 사라졌다.

"이미 륜과 루나의 도움을 받아 실험은 해보았다. 내가 입고 싶을 정도로 멋진 스타킹이 만들어지더군. 그러니까...."

나는 손날을 긋는 시늉을 했다.

"혹시 단발로 커트하고 오크를 하루 동안 원하는대로 다룰 사람?"

나는 오크의 몸을 팔아 엘프의 머리칼을 샀다.

* * *

<그 시각, 후작가 레굴루스 성.>

"흠흠흠~"

엘렉트라는 콧노래를 부르며 빵을 구웠다. 그녀가 집어든 단단한 바게트빵은 굵고 단단하고 속이 꽉 차있었다.

"아버님이 좋아하시려나~"

"...엘렉트라."

엘렉트라의 뒤에는 초췌한 몰골의 안다이할이 앉아있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처럼 두 눈에 피곤한 기색이 가득했다.

"왜 그러시죠?"

"내가 이런 말을 하기는 그렇지만...우리 부부 맞지?"

"어머. 그런 걸 물으시다니 실례예요. 제가 그러면 다른 분의 아내겠어요?"

"그렇지. 그, 그런데 말이야."

안다이할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엘렉트라의 눈치를 봤다.

"우, 우리 오랜만에 하룻밤-"

"안다이할 님."

엘렉트라는 정색을 하며 안다이할의 말을 끊었다.

"요즘도 밤에 다니신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저와 결혼하면서 안 좋은 습관들은 모두 내려놓기로 하지 않으셨나요?"

"......그래, 그랬지!"

안다이할은 역정을 내며 소리를 질렀다.

"다시는 그런 곳에 가지 않겠다고 약속했어! 그래서 안가려고 최대한 노력했어!"

"노력은 하셨지만 결국 가기는 가셨죠. 안다이할 님, 귀족 가문에 있어서 사생아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아십니까?"

"......."

안다이할은 침묵했다. 영주가 젊은 시절 저지른 불장난으로 인해 불거진 문제는 당장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제가 왜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내면서까지 경고하겠습니까."

"...나중에 문제가 생기지 않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후작이 되실 분이 여기저기 씨를 흘리고 다니시면 안 되지요. 분명히 말씀드렸을 겁니다. 저와 결혼하실 거면 오직 저만 바라보며 살아야 하실 거라고. 그게 아내에 대한 도리입니다."

"......."

안다이할은 대답하지 않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앞에서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속으로는 궁시렁거리고 있는 게 틀림없다.

같은 피를 타고 났는데 왜 이 인간은 이 모양일까. 엘렉트라는 속으로 깊게 한숨을 쉬고 요리에 전념했다.

"오랜만에 다함께 식사하는 자리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서로 인사를 나누며 식사해야하지 않겠어요? 웃으세요. 어린 아이처럼 이러시기 있는 겁니까?"

"......너는 오늘도 나를 가르치려 드는구나, 엘렉트라."

안다이할은 분노가 서린 목소리로 몸을 일으켰다. 왜소한 체격은 엘렉트라와 큰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정말...너는 나를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어. 나는 너의 남편이다. 내가 너를 취하는 것에 허락을 받아야 하느냐?"

"부부간에 가져야 할 최소한의 도리죠."

"그렇다면 묻겠다. 네가 나와 결혼하던 날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

"물론이죠. 그건 아직까지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엘렉트라는 손을 하복부에 올리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레오 후작가의 위대한 씨를 품어, 다음 레오 후작이 될 자의 어머니가 되겠다고요."

왜일까.

안다이할은 갑자기 사랑해마지않는 엘렉트라가 조금 멀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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