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6회
95일차
던전이 있으면 모험가가 있기 마련.
이 세상에는 무려 72개의 던전이 고정적으로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지나가는 이를 붙잡으면 열에 하나는 모험가와 관련된 직종에서 일할 정도로 모험가는 많다.
돈이 되니까.
마물을 죽여 나오는 마석은 마법사들에게 판매할 수 있고, 마물을 죽여 그 시체에서 얻는 부산물을 막대한 돈이 된다.
어디서 칼밥 좀 먹었다 싶으면 목숨을 걸고 한탕 크게 벌고 빠질 수 있을 정도로 모험가는 인간들에게 있어서 꿈의 직업이다.
인간들이 던전에 목숨을 거는 만큼, 던전에는 온갖 자원이 차고 넘친다.
‘그걸 내가 먹으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
어차피 나약한 던전은 인간에 의해 토벌되기 십상이다. 상위 던전에 하극상을 일으키고도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채 패배하는 던전은 당연히 도태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왕 도태될 거라면 우리에게 이득이 되고 사라지기를.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는 만큼, 던전 주인은 마물과 마석을 남기고 죽는다. 나는 거기서 얻는 재물을 바탕으로 후작을 상대로 팔아치울 생각이었다.
“트롤의 피라거나 미노타우르스의 뿔 같은 물건은 제법 잘 팔리지. 코카트리스 고기도 생각보다 잘 팔릴 걸? 놈들이 키우는 닭에 비해 생산 효율이 엄청나잖냐. 마석만 쓰면 되는 거지.”
“주인님께서는 마왕군에서 소환한 마족들을 죽여 팔아치울 생각이십니까?”
“그건 아니다, 에일라. 그것도 생각해보기는 했지만, 그건 마왕에게도 미안하고 죽을 병사들에게도 미안하고 그런 곳에 낭비될 마석에게도 미안하지.”
가령 아무거나 팔아치워 얻은 마석으로 트롤을 소환하여, 그 놈으로부터 피를 뽑아 다시 판매한다. 그리고 그걸 판매한 걸 바탕으로 새로운 트롤을 소환하여 피를 뽑는다.
경제적 이득만 있다면 무한히 반복하며 자본을 늘릴 수는 있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으니 그걸 택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적의 물건을 빼앗아 그걸 팔아치워 돈을 벌 것이다.”
“라스베가스에서 획득한 물건으로 아발론에서 판매를 했던 것처럼 말입니까?”
“물론. 단지 그 ‘적’이 인간이 아닌 마족까지 확장되는 셈이지.”
인간의 도시가 아닌 던전을 습격한다. 쟁탈전이라는 정당한 방법을 통해 마석과 재화를 빼앗아 인간들에게 팔아넘긴다. 인간들은 목숨걸고 던전을 가지 않더라도 우리 군단의 시장을 통해 웃돈을 조금 주고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다.
“아아, 이것이 주객전도라고 하는 것인가.”
“저희가 모험가가 되는 셈이군요.”
“그렇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 모험가든 쟁탈전을 일으킨 던전 주인이든 던전을 토벌하는 건 마찬가지이니까.”
그래서 나는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다. 72위부터 65위까지 쌓인 재화를 얻기 위해 륜을 총대장으로 하는 병력들은 포털을 넘어 적의 던전을 털러갔다.
그 사이 내가 해야할 일은 상대와 거래를 트기 위한 시장의 마련. 유니콘을 몰고 온 나와 에일라는 대로를 중심으로 좌우로 펼쳐진 시장 건물을 살폈다.
“오셨습니까!!”
“그래. 고생이 많다. 게으르게 일하는 자는 없고?”
“아무도 없습니다. 다들 저희 지시...대로 정확히 일하고 있습니다. 게으른 자가 하나도 없어, 이미 토대는 전부 구축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목수의 대표, 지브르 자르지어는 자신의 뒤에 있는 시장 건물을 가리켰다.
“군단장 님이 설계도를 잘 짜주신 덕분에 쉽게 지을 수 있었습니다.”
“무얼. 애초에 복잡하지도 않은 스케치였을 뿐이다. 그걸 이렇게 완벽한 모습으로 만들어낸 건 너희의 재능과 실력, 그리고 노고 덕분이지.”
나무로 공간이 나뉘어진 시장은 단순히 노점이 길게 들어선 게 아니라, 마치 현대의 상가처럼 꾸며진 모듈식 구조였다. 직육면체의 공간 안에 물건이 들어갈 수 있도록 가판대가 마련되어 있고, 각 공간은 벽으로 가려져 있었다.
“아아, 이곳은 오늘부터 라스마켓이라고 부르겠다. 너희들, 혹시 원하는 것이 있나?”
“엘프랑 하고 싶다고 하면 목장 갑니까?”
“혹시 목장에 가고 싶어서 그러느냐?”
“아, 뭐….”
지브르를 비롯한 목수들은 호탕하게 껄껄 웃으며 소리쳤다.
“마누라 눈치 안 보고 새끈한 누님들이랑 질펀하게 떡칠 수 있는 기회 아닙니까! 진짜로 죽이지만 않으신다면 제발 부탁드립니다!”
“좋다. 시장이 전부 완공되는 날, 너희들에게 무슨무슨죄를 물어 목장형을 내리도록 하마. 엘프 말고는 어지간한 건 다 괜찮지만 엘프는 안 돼. 엘프와 하기를 바란다면 스스로 쟁취하도록 하라. 엘프들한테 껄떡대면 되잖아?”
“......인간 취향인 엘프가 고작 셋 뿐이라 그렇습니다!”
"다른 엘프분들은 싸늘하게 노려보는게...자지를 화살로 쏴버릴 것만 같아서."
목수들은 울분을 토해냈다.
"근데 오크만 보면 바로 골목으로 데려가서는...크흑."
이미 오크 맛을 알아버린 엘프들은 인간과 굳이 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나마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엘프는 고작 셋 뿐이었는데, 그 마저도 한 명의 남자를 두고 셋이서 동시에 아내가 되겠다며 말썽을 피울 정도다.
"군단장님, 저희 진짜 엘프랑 한 번만 해보면 안 됩니까? 저희 진짜 열심히 할 자신 있습니다!"
"내가 시킨다고 될 문제도 아니고.... 아니, 시키면 되기야 되기는 하지만...."
따라서 인간들이 엘프와 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
오크들이 지나가던 엘프들을 보고 벽을 가리키면 엘프들 스스로 구멍을 만들어 엉덩이를 들이미는 것과는 달리, 인간들은 엘프와 하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을 해야만 했다.
'그래도 시장 되게 멋지게 만들어놓았는데 어쩔 수 없지.'
"알았다. 엘프들과 하게 해주마. 대신 마무리를 확실하게 해야할 것이야."
"우오오오오오!!"
목수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그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엘프들과 하겠다는 건 건방지지만...이만큼 성과를 냈다면 얘기가 다르지."
"주인님, 엘프들을 한 번 수배해볼까요? 루나를 통하는 게 아니라, 제가 개인적으로 알아보면 엘프들 스스로 자의로 나올 겁니다."
"그렇게 해다오. 하지만 굳이 희망하지 않는 걸 강제로 하게 할 수는 없는 법. 그럴 때는 서큐버스를 동원하겠다."
엘프와 직접 하지 못하면 엘프와 하는 꿈이라도 꾸게 해주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나는 힘도 딸리면서 직접 통나무를 들고 움직이는 목수들의 모습이 참 기특하고 안쓰러웠다.
"저 녀석들은 인간박이라는게 얼마나 험난한 길인지 모르겠지...."
엘프 80여명 중에 단 3명만이 인간박이의 길을 선택했다. 한 명 더 늘어나기를 그들은 바라고 있지만, 글쎄.
"역시 엘프가 같이 있어서 그런가?"
"처음에 미노타우르스들로 겁을 주신 건 다들 속았지만, 역시 주인님에 대해 다들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지금은 오크, 인간, 엘프, 미노타우르스 할 것 없이 다 같이 일하고 있습니다."
부족한 자재는 미노타우르스들이 인근 숲에서 공수해온다. 엘프들은 바람의 정령을 이용해 나무를 합판처럼 깎았다. 그들 또한 인간 목수들의 지시에 따라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인간과 마족이 공존할 수 있는 공간이라.... 흐흐, 이것이 바로 라스토피아인가."
"주인님을 그냥 서로 종족 구별없이 섹스하는 걸 바라시는 거 아닙니까."
"말만 했을 뿐인데 명치가 아프구나, 에일라야. 확 이 자리에서 인간박이의 시초를 보여줘?"
"그건 그거 나름대로 좋습니다만...저기 손님이 오는데도 하실 겁니까?"
에일라는 인상을 팍 찡그리며 안드라스의 탈을 뒤집어썼다. 협곡 너머에서 하얀 깃발을 든 우리쪽을 향해 날아왔다.
"손님이 오는군. 하얀 깃발이니 통행증을 받고 온 자라는 건데...두 팔 벌려 환영하는 대신 두 다리를 벌려 환영하는 건 어떠냐?"
"조금 늦었습니다. 아무래도 저들은 엄청 급한 모양입니다."
에일라의 말대로 후작가의 사람들은 급히 말을 몰고 대로를 달려왔다. 전부 비무장으로 온 건 분명 우리를 신뢰한다는 신호가 되겠지만, 말들이 뒤에 끌고 오는 거대한 수레는 조금 의심이 갔다.
"정지--!"
수염을 기른 중년 기사가 소리를 쳤다. 뒤따르던 이들도 모두 고삐를 잡아당기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에일라가 앞으로 나아가 그들과 마주했다.
"정체를 밝히라스."
"우리는 후작께서 보낸 사람들이오."
기사는 내가 후작에게 보낸 통행증을 들고 있었다. 에일라는 통행증을 건네받아 부리 앞에서 한참을 들고 확인했다.
"주인님, 진품이라스."
"그대의 이름은?"
"안서니우스 데네볼라. 후작가의 기사단장을 맡고 있소."
"......만나서 반갑다."
나는 팔을 뻗어 에일라의 허리를 휘감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표정은 어린 노예를 파는 악덕 노예 상인처럼 최대한 비릿하게, 자본주의의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이했다.
"이곳에 온 이유는 무엇이지? 또한 거기 수레에 있는 것은 무엇이고?"
"각하께서는 용기를 구매하고 싶으시오."
"......?"
안서니우스는 마치 연극을 하는 것 마냥 팔을 움직이며 소리쳤다.
"그 어떤 고난과 역경에도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한 용기! 드래곤을 앞에 두고도 물러서지 않는 자존심! 그 누구의 앞에 서더라도 결코 굴하지 않는 긍지! 후작 각하께서는 그것을 원하시는 바이오. 그에 따라."
딱. 안서니우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뒤에 있던 기사들이 수레의 천막을 걷어냈다.
"그대들이 원할만한 것을 가져왔소. 후후, 보시오."
"......저게 뭐지?"
나는 수레 안에 든 물건들에 진심으로 경악했다.
"설마 이것을 거래할 물건이라고 가져온 것인가?"
"그렇소. 수도에서도 천만금을 줘야 구할 수 있는 아주 고급스러운 물품이지."
"......천만금이라고?"
절로 콧방귀가 나왔다. 안에 자객이 들어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는 수레 안으로 손을 뻗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지금 천만금이라고 했는가?"
"그렇소! 물론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오. 그대들이 말한 기본적인 생필품을 비롯해 여러 가지 물품들이 있지만...그것 만큼은 후작께서 군단의 주인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라오!"
안서니우스는 진심으로 당당하게 소리쳤다. 나는 내 손에 든 작은 종이 상자에 갑자기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천만금...젠장, 제조번호 몇 번이야."
나는 박스를 뜯어 안쪽에 새겨놓은 작은 글씨를 확인했다. 안에 있던 물품은 바닥에 흘러내려 땅에 떨어졌고, 나는 번호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군. 이 번호면 엄청 초기인가."
자비야바를 점령하고 라스베가스로 명칭을 바꾸기도 전. 초기형 스타킹을 제작하던 시기의 물건이다.
'아마도 야간도주를 했던 놈들의 물건인 듯 한데.'
누군가 라스베가스에서 도망친 자가 스타킹을 고가에 팔고, 그게 수도를 거쳐 후작의 손에까지 들어간 듯 했다. 물론 스타킹이 천만금에 팔린다는 건 나로서는 기쁜 일이지만, 선뜻 이해할 수는 없었다.
'남작령에서 그렇게 헐값에 팔아댔는데 왜 수도에서는?'
박리다매로 헐값에 팔아넘긴 물건이 수도에서 엄청난 값어치를 자랑한다라. 나는 옆에서 안서니우스가 스타킹을 버린 것에 놀라건 말건, 그들이 가져온 정보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가격책정을 잘못했던 것에 대한 신의 마지막 기회란 말인가...."
"무,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후작께서 주신 선물을 그리 내팽겨치다니...!"
"아, 그게 다 이유가 있어서 그렇다."
나는 에일라에게 다가갔다. 검은 로브를 입은 그녀는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지만, 나는 에일라의 뒤로 다가가 로브를 좌우로 열었다.
"보이냐?"
"허억?!"
안서니우스를 비롯한 기사들의 눈이 순식간에 에일라에게 꽂혔다. 흰 와이셔츠에 검은색 스커트, 그리고 아래로 매끄럽게 내려가는 '검은 스타킹'.
"후작에게 전해라. 선물은 고맙지만, 이건 우리에게도 엄청나게 많이 있는 것이라고. 그래, 거기다가...."
"주, 주인님!"
나는 에일라의 스커트 끝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아아, 이것은 스타킹, 그리고 가터벨트라고 하는 것이다. 꼴알못들아."
나는 안서니우스를 서니우스로 만들었다.
잠시 뒤.
나는 안서니우스와 마주 앉아 진지하게 거래에 임했다.
굳이 스타킹이 아니더라도 그들이 가져온 생필품들은 앞으로 이런 물건들을 거래하겠다는 성향이 강했고, 우리로서도 군단의 인간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었다. 거래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그, 그런데 하나만 물어봐도 좋겠소? 어디서 스타킹을 그리 많이 구한 것이오?"
"구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든 것이오."
"......?"
나는 엄지로 우리의 뒤, 남작령을 가리켰다. 아주 짧은 순간에 낸 아이디어지만, 오히려 후작을 이성적으로 설득하기에는 좋은 날조였다.
"우리가 남작령을 공격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나는 바닥에 한 번 버려졌던 스타킹을 집어들었다.
"남작령에서 우리 던전을 급습했다. 내 부하들을 죽이고 우리가 만든 스타킹을 훔쳤다. 그리고 안드라스들을 무참히 학살했지. 그래서 복수한 것이다."
"그건 훔쳤다기 보다는 마물이라...그...."
안서니우스는 말실수를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정도 실수는 한 번은 눈감아 줄 수 있었다.
"후작에게 가서 전하라. 우리는 이제 한 배를 탄 몸. 우리는 천만금까지도 바라지 않아."
짝. 나는 뒤에 대기시켜놓은 크림엘프를 불렀다. 판자를 들고 이동하던 엘프는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다가, 에일라에게 귓속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후훗."
크림엘프가 상체를 가볍게 숙였다. 기사들의 눈이 크림엘프의 계곡으로 꽂혔다. 하지만 저것이야 말로 진정한 꼴알못.
스륵, 스륵.
상체를 숙인 크림엘프는 자신의 치마 속으로 양 손을 집어넣어, 흰 스타킹을 벗어내렸다. 그리고는 돌돌 말린 스타킹을 벗어, 협상 테이블 위에 올렸다.
"우리에게는 무수히 많은 스타킹이 있다. 후작가문에서 이것을 어느곳으로 판매하든 우리는 신경쓰지 않는다. 이걸로 우리 군단의 주민들이 필요한 물품들을 구매하도록 하지. 가격은...그래. 후작가에서 알아서 책정하라. 천만금보다는 훨씬 싸게 내어주도록 하지. 흐흐흐."
턱.
나는 크림엘프가 갓 벗은 흰스타킹을 안서니우스의 앞에 놓았다. 그는 침을 꼴깍삼키며 입맛을 다셨다.
"도, 도대체 어째서 우리를 상대로 이렇게까지...?"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지. 하지만 다른 걸 다 집어치우고 딱 하나만 들자면."
짝! 나는 박수를 쳤다. 이번에는 에일라 스스로 치마를 좌우로 살짝 걷어올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1cm만 더 들어올려도 음란하게 젖은 흔적이 드러날 정도였고, 나는 그녀의 엉덩이 아래로 손을 뻗어 고간을 가볍게 손가락으로 훑었다.
"여신께서 은빛으로 속삭이셨다. 널리 인류에게 스타킹을 퍼뜨려 이롭게 하시라고."
내 손가락에서 늘어진 투명한 선이 태양빛에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