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회
95일차
하르파스와 산란쇼를 하고 난 뒤, 나는 하르파스의 몸을 깨끗이 씻기고 라스베가스로 돌아왔다.
"군단장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흑과 백이 뒤섞인 정장을 입은 노년의 남자, 코스프레는 내가 도착하자마자 천막을 걷어냈다. 그 안에는 붉은 마네킹이 검은 정장을 입고있었다.
"고생했다. 완벽하게 재현해냈구나."
"샤이탄 님께서 협조해주신 덕분에 무사히 만들 수 있었습니다."
안드라스의 깃털로 만든 검은 정장.
하피의 깃털로 만든 흰 와이셔츠.
그리고 실크보다도 부드러운 다크엘프의 머리카락을 엮어 만든 은색의 넥타이.
비즈니스 정장.
현대 21세기를 살았던 나에게 있어 강철갑옷보다 너무나도 익숙한, 자본주의라는 전장에서 나를 싸우게 해준 갑옷이었다.
"검은 로브를 입고 피바람을 일으키는 오만의 군단장과 달리, 스마트하고 젠틀한 분노의 군단장에게는 역시 이런 옷이 어룰리는 법이지. 갈아입겠다. 잠시 자리를 비켜다오."
"도움이 필요 없으십니까? 제가 아니더라도, 저희 조합원들도 기대하고 있습니다만...."
"이것만큼은 내 스스로 입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코스프레와 조합원들을 물렸다. 이미 슬라임 샤워를 하고 온 덕분에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찐득하게 묻어있던 피와 하르파스의 애액은 말끔히 씻겨나갔다.
"후우."
정장을 입기 전. 가장 먼저 내가 입어야 할, 아니 차야할 물건이 하나 있었다. 나는 정장의 옆에 대기하고 있던 라인을 집어들었다.
"라인아, 정말 괜찮겠느냐?"
"응, 나는 슬라임인 걸."
라인은 이미 형체를 갖춘 상태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스로 내게 달라붙으면 될 것 같기도 했으나, 라인은 굳이 내가 자신을 입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메어리한테 했던 것처럼 똑같이 하면 되는 거잖아!"
"...그, 그러냐."
그건 몰랐네. 나는 벌써부터 빳빳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자지에 난감해졌다.
"정장을 입을 때는 이게 진짜 난감하지."
비즈니스를 할 때는 결코 화를 내선 안 된다. 화를 내도 되는 건 부하 직원이 폐급일 때나 가능한 것이며, 응당 내 존슨도 사시사철 딱딱하게 굳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
검은 로브로는 발기한 자지를 어느정도 숨길 수 있지만 정장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항상 화가 끓는 나의 분노를 잠재워야 할 필요가 있었다.
슬라인 기저귀.
성인이 되어 기저귀를 차는 건 분명 조금 부끄러운 일이지만, 업무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라면 어쩔 수 없다.
그리고 기저귀 역할을 라임이 아닌 라인이 한다.
라임은 남작으로서 앞으로 나서야했기에 라스피카에 있어야 했다. 따라서 내 자지를 머금을만한 믿음직한 슬라임은 라인 뿐이었다.
이걸 보면 분명 마왕은 나를 붙잡아 모가지를 뜯으려 하겠지만, 이게 다 인류 연합을 상대로 하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단장의 결단이다. 장수가 투구를 써서 머리를 보호하듯, 나 또한 급소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수단인 셈이다.
스륵.
팬티는 입지 않는다. 어차피 입어야 할 라인이 나의 팬티이자 기저귀가 되는 셈. 심정적으로 다소 걸리는 부분이 없잖아 있었지만, 이미 말박이부터 시작하여 온갖 곳에 박아온 내가 팬티박이가 된다고 크게 문제될 쏘냐.
"입겠다, 라인!"
"응, 아빠!"
마지막 말은 하지 말아줬으면 했는데. 나는 눈물을 머금고 라인과 도킹했다.
* * *
사수좌 전선의 소식은 당연히 후작가에도 들어갔지만, 그저 의심만 할 뿐 심증은 없었다.
"오크, 안드라스, 타천사, 거대 하피종.... 병력 구성이 상당히 비슷하군."
후작은 백작가의 패전을 두고 주도면밀하게 분석했다. 그리고 그 분석한 결과를 바탕으로, 자신의 맞은 편에 앉은 청년에게 질문했다.
"네 생각을 묻겠다. 이들이 과연 우리와 마주하고 있는 분노의 군단 같으냐?"
"......저, 저는 맞다고 생각합니다."
한껏 위축된 청년은 후작의 눈치를 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후작은 엄한 눈초리로 청년, 안다이할을 노려봤다.
"그 근거는 무엇이냐?"
"아, 안드라스라는 종은 남작령에서 최초로 발견된 마족입니다. 그런 마족이 다른 곳에 나타났다는 건, 같은 세력인 게 틀림없습니다."
"틀렸다!"
탕! 후작은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거칠게 내려쳤다.
"마족은 모든 던전에서 나오는 법! 나오는 빈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든 던전은 다양한 마족을 소환할 수 있다! 내 그리 던전에 대해 일렀거늘!"
"하, 하지만 이 정도로 대규모 병력을 편성하는 건 분명...."
"고작 100마리도 되지 않는 병력을 두고 대규모라고 하는 것이냐! 어떤 던전이든 저런 괴물은 나오기 마련! 그래, 네 말대로 저들이 안드라스라는 종이 있기 때문에 같은 세력이라 치자. 하지만 그에는 크나큰 문제가 있다. '그들'이 없어. 내가 반박을 하지. 너는 내 반박의 근거를 찾을 수 있겠느냐?"
"......."
안다이할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뇌에 빠졌다. 후작은 늘그막에, 자신이 한창 발기부전으로 고생할 때 힘겹게 낳은 아들이 반드시 이 답을 찾아내기를 바랐다.
아들이 편한 길을 걸었으면 하는 아버지로서의 마음과 원래 후작이었어야 했을 이가 후작가를 대표할 귀족다운 면모를 보이기를 바라는 후작가문의 일원으로서의 마음이 상충하는 가운데, 시간은 하염없이 째깍째깍 흘러만 갔다.
"아버님."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엘렉트라가 둘의 앞에 차를 내어놓았다. 안다이할의 앞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핫초코였으나, 고트다이할의 앞에는 붉은 기가 스며든 홍차였다.
"차 한 잔 하시죠."
"...평소보다 색이 붉은 것 같은데?"
"차를 좀 더 진하게 우려냈습니다. 그게 혈액순환에 좋다고 하여. 호호."
"......."
후작은 홍차를 한 모금 삼켰다. 농후한 홍차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고, 후작은 홍차의 향이 입에서 사라질때까지 안다이할의 대답을 기다렸다.
"...모르겠습니다."
안다이할은 포기하고 말았다. 후작은 소리내어 혀를 차려다, 며느리를 생각하여 홍차와 함께 잔소리를 입안으로 삼켰다.
"아버님, 제가 대신 답을 내도 되겠습니까?"
"엘렉트라 네가?"
"예. 저희가 결혼하던 그 날, 아버님께서는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제가 대신 대답을 하더라도 문제될 건 없지요."
"음...."
후작의 고민은 깊어졌다. 엘렉트라는 분명 뛰어난 지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후작은 아들이 답을 내기를 바라고 있었다. 우수한 아내의 내조를 받는 것도 후작으로서의 덕목이기는 했지만, 순서가 틀렸다.
"엘렉트라."
"예, 아버님."
"나의 허락을 구할 것이 아니라, 네 지아비의 허락을 구해야 할 것이다."
"......실례했습니다. 안다이할 님, 제가 대신 답변을 해도 될까요?"
엘렉트라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후작은 자신과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는 엘렉트라의 눈빛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챘으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추잡한 상상을 금방 지워버렸다.
아들은 파릇파릇한 20대.
그에 비해 자신은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70대 노인.
"안다이할 님? 아내가 묻고 있잖아요."
"...대답해도 좋아."
"후후, 감사합니다."
발기부전 직전에 늘그막에 낳은 아들이라 더욱 신경이 쓰이는 만큼, 차마 아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행동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후작은 애써 들끓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네 답은?"
"크게 보면 엘프들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요인입니다. 분노의 군단이라 칭하는 이들이 다른 마족과 다른 점은 역시 엘프들과 동맹을 맺었다는 것이죠."
"그러하다. 백작을 괴롭히는 오만의 군단이라고 하는 자들은 엘프가 하나도 없었지.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를 알 수 있다. 무엇일 것 같으냐?"
"어, 음, 엘프들이 분노의 군단 성노예가 되었다...?"
"갈!!"
후작은 진심으로 격정을 냈다.
"어찌 아직도 생각을 하는 것이 음란하기 짝이 없느냐! 엘프들이 오크들의 성노예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냐?! 그들이!!"
"죄, 죄송합니다!"
"말을 삼가거라. 우리 성에 왔던 엘프, 니프엘라 장로와 나는 면식이 있다. 그런 분이 오크들의 성노예가 되었다는 건 엘프 전체에 대한 모욕이다. 그것이 마녀 레비즈와 다를 게 무엇이 있단 말이더나!"
"노여움을 거두셔요, 아버님. 안다이할 님은 세간의 시선을 말한 것 뿐이니까요. 그렇죠?"
"으, 응. 그...사람들 하는 말이 다 그랬습니다. 당장 제가 아는 지인들만 하더라도...."
"내 그리 어울리지 말라고 했거늘...."
평민들과 어울리는 것에 비난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후작은 안다이할이 또다시 후작령에 있는 뒷골목 왈패들과 어울리는 것에 짜증을 낸 것이다.
"사람과 어울리는 것에 잔소리를 하는 게 아니다. 어울릴 사람을 가려가며 사귀라는 게야! 너는 왜 내가 하는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것이냐!!"
타앙!
후작은 테이블을 치며 몸을 일으켰다. 안다이할은 어깨가 찌그러지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움츠러들었고, 엘렉트라는 후작에게 다가와 어깨를 잡으며 그를 진정시켰다.
"아버님, 고정하셔요. 흥분하시면...아."
"......크흠."
평소보다도 화를 내던 이유가 다시 몸안에 들끓기 시작하는 혈기 때문일까.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했던 후작과 그걸 눈으로 본 엘렉트라는 서로 민망해졌다.
"...안다이할, 내가 만약 죽으면 네가 우리 후작가를 이끌어야 한다. 그러니 내 기대에 부디 부응해다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네가 이끌 우리 후작가를 위해서라도."
"그, 그러면 누님을 찾으면 되는게...."
"그 썩을 년은 입에도 담지 마라. 마음같아서는 당장에라도 가문에서 퇴출시키고 싶으니."
후작은 으르렁거리며 차를 단번에 들이켰다.
"집사장에게 전해다오. 슬슬 시간이 되었으니 외출을 다녀오겠다고."
"어디에 가시려고 하는지요?"
"협곡."
후작은 빈 찻 잔을 내려다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분노의 군단과 거래를 하러 간다."
* * *
"다 입으셨나요?"
"이거 하나 빼고."
거울 속 나는 완벽한 정장 차림의 오크가 되었다. 샤이탄은 내가 건넨 넥타이를 움켜쥐고 까치발을 들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얼마든지."
이 세계에 넥타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넥타이를 만들었고, 현대 지식을 조금이나마 접한 샤이탄은 능숙한 손길로 내 목에 넥타이를 묶었다.
"직접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다. 네가 던전의 중추에 있어서 내가 얼마나 든든한지 아느냐. 네 덕분에 오늘도 나는 안심하고 던전을 비울 수 있는 것이다."
꽈아악.
샤이탄은 내 넥타이를 끝까지 올렸다. 다소 갑갑하다 싶을 정도로 매듭이 목 아래까지 짓눌렀지만, 이런 갑갑함이야말로 전장에 나서는 자본주의의 기사의 갑주가 가지는 포인트였다.
"륜, 네게는 던전 공략을 부탁하마."
"맡겨주세요. 주인님이랑 같이 공략한 던전이 몇인데요."
륜은 쿠키엘프들과 함께 전투복 차림으로 활을 흔들었다.
륜을 제외하고도 평균 레벨이 60~70에 이르는 쿠키엘프들은 라택스처럼 반짝이는 바디 슈트를 입고있었다. 몸의 라인이 훤히 드러나는 복장이었지만, 방어력 만큼은 드워프제 중갑과 비교해도 맞먹을 정도였다.
"공략할 던전은?"
"72위, 안드로말리우스 던전!"
"포털위치는?"
"메어리의 지하 2층! 유사시 포털로 귀환!"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건?"
"적에게 최상급 마석이 있다고 하더라도, 목숨과 정조를 지키고 살아서 돌아올 것!!"
"방심하지 말고 절대로 죽지마라. 이왕이면 다치지 말고 돌아오는 게 좋겠지. 뭐...저 녀석이 따라가니 크게 위험하지는 않겠지만."
"후후후."
마족 여인, 벨리알은 검은 눈동자를 샐쭉이며 싱긋 웃었다. 본디 내가 잡았던 벨리알(나가)는 이번에 새롭게 잡은 벨리알(마족)을 먹어치웠다.
"이번 전투를 통해 제 가치를 증명해보이겠습니다."
"오냐. 륜과 쿠키엘프들을 한 명도 다치지 않고 살려서 돌려보내면, 네게 드래고니안의 알을 하나 하사하도록 하마."
그레모리가 발라크를 상대로 했던 것처럼 합성 포식을 한 것이다. 나는 공격대를 이끌고 포털이 위치한 지하 2층으로 내려갔다.
"오셨어요?"
메어리 또한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수박바를 손에 쥔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안드로말리우스 던전으로 넘어가는 포털 앞에 대기한 병력들을 눈으로 훑었다.
총대장, 륜.
참모진, 메어리. 벨리알.
병력으로 슬라미아 10, 쿠키엘프 40, 그리고 하서스가 이끄는 구울 50.
72위 던전을 상대로 과잉전력이 아닐까 싶었지만, 적은 72위부터 65위까지 하극상을 일으킨 자.
"적의 대장은 없다. 남아있다면 선발대 이후에 남아있을 잔여병력 뿐."
안드로말리우스는 우리에게 잡혀 목장에 갇혀있다. 부하였던 벨리알이 칼로 찔러 죽였던 걸 숨만 붙여놓은 상태로 목숨을 유지시켜놓았다. 이유는 '포털이 계속 이어지는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
"마음껏 약탈하고 빼앗아라. 잔존 병력이 있다면 모두 싸잡아 죽이고, 놈들의 시체부터 시작하여 동굴 속에 박힌 최하급 마석 하나까지 싹싹 긁어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 손에 낀 금반지를 엄지로 돌리며 비릿하게 웃었다.
"레오 후작령에 싹다 팔아버리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