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1회
95일차
<그레모리 던전.>
별 사고없이 지내기도 어느덧 나흘이 지났다.
굳이 나흘이라는 걸 이야기하는 이유는 사흘이 지나니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퍼시발, 상황 보고를."
"예. 사지타리우스 백작가에서 대규모 병력을 황야에 배치하였습니다. 그 수가 무려 천에 이르고 있으며, 대부분이 중무장한 병사들입니다."
드디어 백작가에서 칼을 빼들었다.
사수좌 전선 알로켄 던전 밖에 병력을 집결시켰고, 퍼시발은 정찰을 통해 적의 움직임과 병력 구성에 대해 어느정도 파악을 마쳤다.
"병사들 대부분 훈련된 병사들이며, 갑옷이 전부 강철로 이루어진 중보병입니다."
"철갑을 두른 병력이라. 최소 하피 에일로 급의 강철 깃털 정도 방어력은 가지고 있다고 봐야겠군."
공격력은 2성 이하인데 방어력은 3성 수준.
가죽갑옷이 전부거나 흉갑 정도만 철갑을 입고있던 남작령의 병사들과 비교하면 비교가 미안할 정도로 장비가 뛰어났다.
"그 외에 특별한 병력은 없었나?"
"마법사로 추정되는 이들이 대략 50여명. 그리고 드워프 10명 가량이 참전했습니다."
"로도페리."
그레모리는 드워프 공주의 이름을 곱씹으며 짜증을 부렸다.
"그 거유사기 년이 부른 게 틀림없어."
압박붕대와 철갑으로 전투에 방해가 되는 거유를 누르고 있었다더라. 그 크기는 그레모리의 이전 가슴보다 훨씬 큰, 샤이탄과 비슷할 정도의 D컵 거유.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는 사수좌 전선을 직접 진두지휘하겠노라 마음먹었다. 마침 오늘 기회가 왔다.
"힘을 기르기만 하고 다들 싸울 기회가 없었는데 마침 잘 됐군."
한 달 하고도 조금. 우리는 막강한 힘을 비축했고, 후작령이 달려들어도 싸울 준비가 되어있다. 잘만 하면 후작령과 백작령을 동시에 상대할 수도 있을만큼의 전력이 모였다.
"그레모리. 현재 이 사단에 있는 병력 현황은?"
"드라고니안이 된 뿔달린 오크 35, 워울프 35, 하피 에일로 30. 얼마전에 충원한 전투병 안드라스 100명까지 포함하면 전부 200이네."
"오크와 워울프는 한 쌍이니까 페어로 치지. 간부진까지 포함하면 대략 170인가?"
그레모리, 알로켄, 나, 그리고 하르파스.
"안드라스 100이 꼭 끝인 건 아니에요. 목장의 병력까지 동원하면 300까지 늘어나요."
"목장의 병력은 후방에서 식량 공급에 힘을 쓰자고 하자꾸나. 지금은 면전에서 적을 때려잡을 힘이 필요하니."
[다시 잘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나는 내 뒤에 서있는 리치 마법사를 소개했다.
"드래곤의 힘을 이어받아 새롭게 리치가 된 존재, 라스투자드다."
[군단을 위하여.]
라스투자드. 레벨이 55를 갓 넘었지만, 레벨과 진화조건을 달성하여 ★★★★ <구울 리치>가 된 존재. 나는 사단에 대한 지원 병력으로 라스투자드를 호출했다.
"너 혼자 왔니?"
[신을 모시는 열 두 명의 제자도 함께 왔습니다.]
라스투자드의 뒤에는 피부가 드래곤의 껍질로 덮인 마법사 구울들이 12명 서있었다.
"흐흐, 이제는 드라고니안 프리스트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어."
이무길라임을 공략하기 위해 임시로 뽑았던 ★★★ 구울 마법사들은 모두 드라고니안의 힘을 얻으며 ★★★☆이 되었고, 75레벨까지는 무난하게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얘들 주특기가 뭐야?"
"그냥 흑마법사, 네크로맨서들이다. 시체를 조종하고, 시체로 벽을 쌓고, 시체를 터뜨리지."
"...아하, 적을 죽이고 그걸 조종하려는 셈이구나? 나쁜 새끼. 넌 진짜 인간 입장에서는 최악의 적이야."
"마족이니까 당연하지."
억눌려있던 파괴 본능을 쏟아낼 곳은 레오 후작령이 아니다. 내가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나는 분노를 적절히 조절할 수 있는 지성을 가지고 있다.
"힘으로 때려잡을 수 있는 적은 힘으로 때려잡는 거지. 일단 이 병력으로 싸우다가 추가로 병력을 더 데려올 거다. 그러니까 지금은 이걸로 한 번 크게 싸워보도록 하자꾸나."
적을 맞이하는 건 던전 안에서. 나는 퍼시발을 향해 시스템 창을 두드렸다.
"너 정원 지금 넘쳐나지? 그럼 그걸로 구울 좀 소환해라."
내 등 뒤에는 무수히 많은 하급 마석들이 깔려있었다.
* * *
<오후, 후작령 레굴루스 성 훈련장.>
"후우, 후우."
후작은 땀을 뻘뻘 흘리며 훈련장을 달렸다.
그의 옆에는 후작가의 기사들이 함께 그의 뒤를 따라 달리고 있었지만, 후작은 젊은 기사들에 비해 전혀 뒤쳐지지 않고 오히려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가, 각하. 이제 그만 쉬시는 게...."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법!"
"하지만 벌써 세 시간 째 달리고 계십니다!"
"에잉, 녀석들. 마나를 쓰지 말고 달리는 게 그리 어렵더냐."
후작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의 뒤에 따르던 기사들은 하나같이 땀에 흠뻑 절어있었다.
"나 때는 말이다, 아침에 훈련을 시작하면 해 떨어지기 전까지 달리고 그랬다. 기초체력이 튼튼해야 모든 것이 좋은 법.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후작은 훈련의 종료를 알렸다. 땀을 닦기 위해 수건을 놓아둔 곳으로 가자, 그곳에는 금발의 여인이 후작을 기다렸다는 듯 수건을 들고 있었다.
"크흠, 아, 아가?"
후작은 그녀가 너무나도 껄그러웠다. 후작으로서, 그리고 시아버지로서 너무 못난 모습을 보였기에 인간으로서 다소 부끄러웠다.
"이걸로 땀 닦으셔요, 아버님. 아니면 제가 닦아드릴까요?"
"아, 아니다. 됐다. 내가 하지."
후작은 수건을 챙겨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훈련을 할 때보다 괜히 땀이 더 많이 흐르는 것 같았다.
"안다이할은 어디에 있느냐?"
"남편은...지금 서재에 박혀있어요."
"영지를 이끌 자라면 응당 지성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 법. 네가 이해해다오."
"그쵸. 지성을 갖춰야 하죠.... 그런데 아버님, 그거 아셔요?"
여인은 후작의 근처까지 다가가 차가운 수통을 건넸다.
"집사장 님이 요즘 젊은 메이드들에게 추파를 던지고 다닌다는 거."
"......에렉타일도 부인과 사별한 지 20년이 지났으니 그럴 수 있지."
"흠, 그러면 아버님께서는 나이 차이는 상관없으시다는 말씀이신가요?"
"사별한 내 아내가 말하더군. 사랑에 나이차이는 관계없다고 말이야."
"헤에...."
여인의 눈꼬리가 반달처럼 휘었다.
"그것 참 좋은 말씀이시네요. 후후후."
"...그런데 아가야, 그 때 그 일은 그 누구에게도 말아다오. 내 아들에게도 말이다."
"당연하죠. 후후, 아버님. 그러면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어요?"
"부탁?"
여인은 햇살처럼 밝은 얼굴로 환하게 미소지었다.
"아가야라고 부르시는 것도 좋지만, 이름으로 불러주셔요. 아가라고 하는 건...조금 부끄러워서."
"그래."
후작은 마른 손으로 여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맙다, 엘렉트라."
"......후훗."
* * *
<그 시각, 사지타리우스 백작가 토벌대.>
"공주님, 진짜 이번에 이 던전만 토벌하면 돌아가는 겁니다?"
"알았어, 알았어. 이렇게까지 했는데 내가 안 돌아갈 수 없지. 칫."
로도페리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그녀의 뒤에 늘어선 드워프들을 눈으로 흘겼다.
하나같이 수염이 덮수룩하고, 인간들에 비해 훨씬 키가 작았지만, 어지간한 성인 남자 30명 분의 전력은 혼자서 거뜬히 수행할만한 전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었다.
마이스터.
드워프 중에서도 쇠를 다루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장인 중의 장인들로, 무기를 만드는 솜씨 뿐만 아니라 무기를 다루는 솜씨도 일품인 이들이다.
"국왕 폐하께서는 아가씨를 진심으로 걱정하셔서 저희를 보낸 겁니다. 오해하지 말아주십시오."
"알았다고. 오해 안 하니까 이제 그만 해."
드워프 국왕은 로도페리를 귀환시키기 위해 마이스터를 무려 10명이나 보냈다.
"쳇, 무기를 회수한다는 핑계를 들지 말 걸 그랬어."
"하하, 빨리 회수하여 집으로 돌아와달라는 국왕 폐하의 부정이 아니겠습니까?"
"닥쳐. 너는 내가 여기서 떠나는 게 즐거운 모양이다?"
"그럴 리가요. 공주님 덕분에 저희 백작가의 무장이 얼마나 개선되었는데요. 단지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건 국왕 폐하께서 가진 부정입니다."
"...부정은 무슨."
로도페리는 드워프들의 눈치를 보며 빈정거렸다.
"넌 그 양반 실체를 몰라. 차라리 엘프들이 오크들에게 다리나 벌리는 창녀라고 하는 게 더 현실성이 있을 정도로, 그 작자의 성향은 너무나도 추악해."
"......못 들은 걸로 하죠."
"내가 너를 그래서 아낀다니까. 나중에 내가 드워프 국왕이 되면 너는 이 나라 왕 해라. 그러면 이야기 진짜 잘 통할 것 같은데."
"저는 백작입니다. 국왕했다가는 참수형으로 죽을 겁니다. 후우, 긴장은 이 정도면 충분히 풀린 것 같군요. 마침 도착하기도 했고."
저벅.
마갑을 두른 군마들이 일제히 발걸음을 멈췄다.
"정지. 적의 오크 라이더를 주시한다."
황야에 자리잡은 오크들이 대규모 병사들을 보자마자 바로 워울프를 데리고 던전의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그들에게 전장은 던전 안이라고 알리는 것처럼.
"함정일까요?"
"함정이라고 해봐야 계속 그 히스테리 부리는 타천사년이 마법쓰는 거지. 걱정마. 우리 선두에 대마법 결계는 충분해. 녀석이 쓰는 원소 마법은 내가 상대하면 되고."
부-웅!
로도페리는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며 앞으로 달렸다. 백작가의 기사들 또한 군마와 함께 던전을 향해 달렸다.
고오오오--
던전의 입구로 들어가자마자 마물들은 빼곡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전에는 보지 못한 마물들도 눈에 띄었고, 로도페리는 붉은 드레스 차림을 한 타천사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야, 그레모리! 오늘이야말로 결판을 내자!"
"오늘도 우리한테 무기 바치러 온 거야?...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쪽도 공감이야. 오늘, 진짜 결판을 내자고."
화륵. 그레모리가 손을 튕기자 던전 전체에 걸린 횃불에 불이 붙었다.
"이제 이 싸움도 지긋지긋해졌어.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거야. 어때?"
"두 말하면 잔소리지. 이번에야말로 분신 던지고 도망칠 생각이랑 추호도 하지 마라!"
"그럴 생각 없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있다면...."
할짝. 그레모리는 요염한 눈빛으로 로도페리의 몸을 끈적하게 훑었다.
"너를 침대에 눕히고 벗겨서 따먹겠다는 생각밖에는 없거든."
"......하여튼 이 놈이고 저 놈이고."
로도페리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오냐. 대신 내가 이기면 너는 내가 발가벗겨서 우리 드워프 아저씨들한테 돌림빵 당하게 해주마."
"어머, 짜리몽땅한 드워프들이 뭘로 찌르게? 내 손가락보다 짧을 것 같은데. 수염 돌돌 말아서 찌르나?"
로도페리의 뒤에 있던 마이스터들이 바로 얼굴을 붉혔다. 로도페리는 이미 그레모리의 도발에 내성이 생겼지만, 그레모리를 처음 마주하는 마이스터들은 바로 도발에 걸려버렸다.
"공주, 전력을 다하겠소. 혀를 뽑든 혀에 자지를 문지르든 아가리를 분질러버리겠소."
"저 년이 우리 불방망이 맛을 봐야겠구만."
"생긴 건 순진하게 생긴게 말 꼬라지는 서큐버스 뺨을 치는 년일세."
"풉."
로도페리는 걸쭉하게 욕지기를 내뱉으며 무기를 들어올리는 마이스터들에게서 든든함이 느껴졌다. 그레모리 또한 이전처럼 정체불명의 옷-펭귄 로브-을 뒤집어 쓴 마족과 갑옷의 오크를 옆에 세운 채....
"응?"
로도페리는 그레모리의 옆에 선 검은 로브의 오크에 기분이 싱숭생숭해졌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로브로도 감출 수 없는 살덩어리의 기운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등 뒤에 걸린 핼버드가 눈에 익었다.
"내 엘리자베스! 어디서 오크 놈이 내 엘리자베스를 잡고 있는 거야!!"
"......호오, 이름이 엘리자베스라고 하는 건가."
오크는 핼버드를 들어올리며 날의 면을 혀로 쓸었다. 로도페리는 마치 자신의 볼이 혀로 쓸리는 듯한 감각에 오한이 들었다.
"미안하지만 이 녀석은 엘리자베스가 아니다. 소개하지. 색스 마크3. 나의 애병이니라."
"섹스?"
"색스!"
"쎅스? 이 미친 변태같은 새끼들! 어디서 남의 엘리자베스에 외설적인 이름을 붙이고 있어!!"
로도페리는 진심으로 분노했다. 무기의 이름을 저런 식으로 붙이는 건 무기에 대한 예의도 아니며, 하물며 무기를 만든 장인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무기는 그저 무기일 뿐이다. 성검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병장기가 실은 외설의 정수가 가득 담긴 무기일수도 있는 거지. 그런데 좀 건방지구나. 어디서 나의 것을 두고 돌려먹네 마네 지껄이는 것이냐."
쿵! 오크가 핼버드를 바닥에 내리꽂았다.
"아무래도 네년에게는 진심으로 교육이 필요할 것 같구나. 로도페리, 모두가 보는 앞에서 너를 겁간하겠다."
"미친 새끼가 진짜...!"
"그런데 이상하군. 너희는 병신인가? 아무 대응도 없이 던전에 들어오고."
로브에 가려진 오크의 하관이 비릿하게 뒤틀렸다.
"바로 위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던전에 들어왔냐 이 말이다! 으하하하!!"
오크의 광소가 천장을 뒤덮었다. 동시에 오크들의 뒤에서 사이한 보랏빛 마나가 들끓기 시작했다.
"흑마법?! 이런 젠장! 모두 위를 조심해!"
로도페리는 천장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사아아아-----
바로 아래 바닥에서 보라색 빛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병신들. 위라고 하니까 진짜 위를 보네. 이래서 순진한 것들이란."
콰과과광------!!
아래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