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0회
92일차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는 공간.
협곡 한 가운데에, 나는 안드라스 탈을 쓴 에일라와 함께 말에 오른 채 에렉타일 집사장을 맞이했다.
"우선 환영하는 바이오. 설마 이렇게빨리 우리를 찾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군. 물건을 사러왔다고 했지. 그래, 무엇을 사러 왔는가?"
"......."
집사장은 멀리 물려놓은 기사단을 눈으로 훑은 뒤,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정력제."
"뭣?"
"그쪽에서 각하께 선물로 보내준 정력제가 필요하오."
"......벌써 사용해본 건가."
정력제의 효과가 너무 큰 것에 나는 속이 끓었다. 설마 받자마자 바로 사용한 것으로도 모자라 시장도 열리기 전에 물건을 사러 올 줄이야.
"미안하지만 지금 당장은 팔 수 없는 거라스."
"무엇? 왜?"
"오늘 우리는 건물을 지으러 온 거지, 물건을 팔려고 온 게 아니기 때문이라스."
"크윽...!"
집사장은 진심으로 억울해보였다. 그건 마치 자신의 앞에서 한정판매 물품의 수량이 다 떨어진 이의 표정이었다.
"음.... 후작 각하께서는 그게 그렇게 필요하신가?"
"각하께서 필요하신 건 아니오. 정확히는...각하의 자제분이 필요하시게 될 운명이오."
"그건 또 무슨 소리...."
"주인님."
에일라가 내 귀에 작게 속삭였다.
"레오 후작가의 집안 내력입니다. 나이가 서른을 넘어가면...조금 빠르게 찾아온다고 합니다. 예, 발기부전이요."
"세상에."
중년 남자들이 하나 둘 겪기 시작하는 문제를 서른부터 겪기 시작한다니. 심지어 그게 인간으로서 자연적인 현상도 아니고 유전적인 질환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크흠, 미안하오. 일부러 그런 걸 선물한 건 아니오."
"...알고 그런 걸 준 게 아니었소?"
"알았다면 그보다 더 신경을 썼겠지. 나는 상대의 약점을 조롱하는 파렴치한 자가 아니오."
애초에 내가 당장 신체적으로 큰 약점을 달고 있지 않은가. 후작을 두고 발기부전이라고 놀릴 의도는 전혀 없었다.
"이건 내가 잘못했군. 사과의 의미로 이걸 주겠소."
나는 에일라를 잡아당겨 그녀의 가슴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갑작스러운 외설행위에 집사장이 깜짝 놀라는 사이, 나는 에일라가 품속에 간직하고 있던 슬라임 점액 젤리를 꺼냈다.
"받아가시오."
"이, 이건 대체?"
"아아, 그것은 젤리라고 하는 것이오. 효과는 선물로 보낸 것보다 훨씬 덜하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오."
"...새벽에 라임에게서 받은 건데."
에일라는 안드라스 탈 아래에서 툴툴거리며 내게 불만을 드러냈다. 라임과 슬라미아들이 처음으로 만들어낸 이무길라임 젤리를 한순간에 다른 인간들에게 던져줬으니, 에일라가 불만을 가지는 건 당연했다.
"돌아가면 원액으로 챙겨주마."
"원액으로 바르고 해주시길."
"...오냐."
나는 에일라에게 추후의 플레이를 약속한 뒤, 젤리를 들고 멍하니 서있는 집사장에게 사용방법을 알렸다.
"하기 30분 전에 복용하시오. 그냥 삼키지 말고 씹어삼키면 더 빨리 효과가 나타날 것이오. 부디 후작의 성생활에 안녕이 가득하기를."
"자, 잠시. 얼마나 먹어야 하오?"
"...젤리 하나면 그 포션 1/3 정도의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오."
에일라의 안주머니에서 빠져나간 젤리 주머니에는 열댓개 가량의 젤리가 들어있었다. 집사장은 멀뚱멀뚱 젤리를 쳐다보다가 허리를 숙였다.
"감사하오. 마왕군이라고...꼭 말이 안 통하는 자들만 있는 건 아니었군."
"우리가 특별한 거지 다른 마물들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터. 다만 분명히 알아두시오."
나는 집사장을 향해 색스를 겨누며 경고했다.
"호의는 이번 뿐이오. 다음에는 그에 걸맞는 값의 물건을 가져와야 할 것이오."
"......어떤 물건이면 되겠소?"
"식량, 의류. 인간들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물품 전반. 그리고 다음부터는 올 때는 협곡 중간에서 대기하시오."
휘릭. 나는 에일라에게 보였던 통행증을 집사장에게 건넸다.
"만약 다음에 그것 없이 협곡을 통과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적으로 간주하겠소. 상행위에 있어 신용이라는 게 가장 중요하지 않겠는가?"
"......오크의 탈을 쓴 인간인가. 참으로 사람다운 말을 하는 군. 좋소. 그리 하리다."
집사장은 젤리와 통행증을 챙기며 기수를 돌렸다. 그의 뒤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단은 집사장과 함께 협곡 너머로 떠났다.
"후우, 정말 다행이군."
"적들의 전력은 약합니다. 우리의 수로 밀어붙이면 이길 수 있었습니다. 다행이라 하심은...?"
"가격 아직 안 정했거든."
"......예?"
정말 진심으로 식겁했다.
"팔 물건만 생각하고 얼마에 팔면 좋을 지 저어언혀 생각 안하고 있었는데 사러 온 거 아니냐. 어휴, 괜히 호구잡힐 뻔."
"......."
후작이 하루만에 사람을 보내 물건을 사러 올 정도로 수요가 높은 물건을 헐값에 판매할 수는 없었다.
"젤리 하나에 얼마나 팔았으면 적당했을까?"
"저라면 보석 하나 정도는 줬을 겁니다."
"음...마석으로 환산하면?"
"방금 그 주머니 하나에 상급 마석 하나라고 생각하시죠."
"아, 씨발."
호구잡혔다.
* * *
"오오, 이 무슨 포부란 말인가. 이걸 다 합치면 포션 다섯 개 분량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는 그 큰 뱃살만큼이나 인품과 포부가 가득한 자 같았습니다. 아마도...그가 우두머리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만."
"그건 나중에 확인해보세. 지금은 이 젤리라는 것의 효과를 확인해보는 게 중요하니."
두 남자는 테이블에 놓인 젤리를 하나씩 집어들었다. 한 입 크게 베어물자마자 안에서 터져나온 진한 초콜릿 향에 둘의 표정이 굳었다.
"이...이것은...!"
"분명합니다! 초콜릿입니다!"
왕궁에서 연회를 할 때나 나올만한 아주 값진 음식의 풍미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오랫동안 후작을 보좌했던 집사장이기에 그 또한 초콜릿의 맛을 알고 있었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마족들이...!"
"허어억!"
마족들이 초콜릿을 어디서 구했느냐 하는 문제도 잠시, 집사장이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리고 그는 바로 바지를 벗어내렸다.
"각하, 보십시오...! 저의 것이...!"
"...나도 보게."
후작 또한 바지를 벗어내렸다. 하반신만큼은 태어날 때 그대로 돌아간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스르륵.
나이가 들며 척추가 휘듯,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수직으로 내리꽂혔던 그들의 자존심들이 다시금 서서히 고개를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완전히 수평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자존심은 이전보다 무려 60도 이상 머리를 들어올렸다.
"하, 하나씩만 더 먹어보세."
"각하, 이거 너무 많이 먹으면 어떻게 되는 거 아닙니까?"
"...어떻게 되면 어떤가! 일단 세워보세!"
"알겠습니다. 각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둘은 동시에 하나씩 젤리를 집어삼켰다. 다시금 달달한 초콜릿의 향이 입안을 가득 채우자, 둘의 자존심도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고고고고.
그들의 자존심은 하늘을 향해 떠올랐다. 수평보다 더 높은 각도까지 치켜올라간 서로의 남근을 바라보며, 둘은 더럽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드디어, 드디어!"
"예! 오랫동안 후작가에 저주로 내려오던 발기부전의 저주를 이겨낼 수 있는 겁니다!"
"아버님, 차를 가져왔-"
문이 열렸다. 금발벽안의 여인은 따뜻한 허브티를 들고 들어오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 아가! 이건...오해다!"
"아가씨, 어떻게 문을...? 아, 아니. 그보다 이건 그러니까."
"......."
여인은 조용히 트레이를 테이블 옆에 놓았다. 그리고 허리를 숙이며 종종걸음으로 문을 향해 빠져나갔다.
"두 분이 그런 사이셨을 줄은.... 괜찮습니다. 저 또한 레오 가문의 여자가 된 몸. 이 일은 제가 죽을 때까지 함구하도록 하겠습니다."
끼이익, 쿵.
문이 닫혔다.
* * *
한창 오크들과 구울들이 인간 목수들의 지시에 따라 시장을 만들고 있는 동안, 나와 에일라는 라스피카로 잠시 돌아와 각 종족별로 아무나 한 명씩 불러냈다.
"이거 살래? 나 입은 거 보여? 후후."
"너무 꼴리니까 엘프는 탈락."
"스타킹을 사라. 만약 나와 싸워서 이기면 전리품으로 주겠다. 하지만 지면 무조건 이걸 사야할 것이다."
"물건을 팔라고 했지 누가 강매를 하라고 했냐. 오크 탈락."
크르르르르르.
"말이 안 통하잖아. 탈락."
"고객님, 요즘 날씨 추운 거 아시라스? 이 스타킹으로 말할 것 같으면 입기만 해도 금방 몸이 따뜻하게 되는 거라스. 엘프들이 한겨울에도 치마만 입고 다리는 내놓고 다니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은라스? 그게 다 이 살색 스타킹을 입고 있어서 그런 거라스. 지금 세 개를 사면 하나 덤으로 주고있는 행사를 하고 있는라스."
"끝에 라스라스 거리는 게 외설적이야. 안드라스 탈락."
"물건 사면 아주 좋은 꿈을 꾸게 해줄게. 돈과 여자에 휩싸여서 쾌락에 젖는 꿈을...후후후."
"내가 만들 건 암시장이 아니라 진짜 건전한 상업 지구다. 미안하지만 서큐버스도 탈락."
종족을 하나하나 살피며 나는 절망했다. 어떻게 하나같이 마음에 드는 종족이 없단 말인가. 어떻게 하나같이 전투와 싸움에만 재능이 있고, 상행위에 대해서는 자질이 있는 종족이 없단 말인가.
"지금부터라도 판매 병단을 하나 만들어야 하는 건가."
"이제부터 육성하려고 해도 조금 힘들지 않을까요?"
"시장이 만들어지는 속도가 더 빠를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후작령에서도 제법 적극적으로 물건을 구매하려고 하고 있고요."
"그러게나 말이다."
시장을 만든다는 것 까지는 확실히 좋았으나, 정작 적당한 가격에 물건을 판매할만한 자들이 없었다.
"젠장. 전장에서처럼 내가 앞장서서 나서기에는 너무 그래. 군단장의 위엄이 없어, 위엄이."
서비스업이 천하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군단장이라는 자가 어서옵쇼, 싸게 해드립니다 하며 손님맞이를 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더군다나 내 현재 외모가 접객에 좋은 것도 아니고.
"판매의 기본은 판매원의 외모다. 슬프게도 잘생기고 예쁜 종업원이 일하는 곳일 수록 장사가 잘 되는 법이지."
"주인님, 저 좋은 생각 났어요. 어차피 스타킹은 꼴리라고 파는 건데 엘프들을 종업원으로 세우는 건 어때요?"
"그렇습니다. 엘프들 검스 흰스 살스 세 개씩 입고 앞에 서게 하면 금방 다 팔릴 것도 같습니다만."
"바로 그것이 문제다, 에일라. 그건 종업원이 아니라 모델이라고 하는 것이다."
엘프들은 굳이 따지면 의류 매장의 마네킹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직접 물건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도도하고 고고한 자태로 옷맵시만 자랑하게 될 것이다.
"모델이 직접 옷을 입고 판매하는 건 안 돼. 엘프들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이야."
"그럼 엘프는 판매를 하지 않는다고 치고, 결국에는 또 원점으로 돌아가잖아요."
"...주인님, 왜 가장 적절한 인재를 동원하지 않는 겁니까?"
에일라는 다소 한심한 얼굴로 자신을 가리켰다.
"저희가 있지 않습니까."
"뭐? 너희를 앞에 내세우라고? 안 된다. 그럴 바에는 내가 직접 영업뛰고 말지. 에일라야, 영업이라는 게 말이다 보기보다 힘든...아니, 잠깐만. 나 지금 너랑 대화가 안 통하는 것 같은데."
"인간을 사용하십시오. 물건 판매에 특화되어 있는 이들이 아닙니까?"
"아, 맞아요! 메어리랑 같이 물건 판매도 했고. 요정 말이에요, 요정!"
"...걔들이 있기는 하지. 그런데."
점원으로 인간을 기용한다. 하지만 그건 가장 큰 문제가 있다.
"...한 번 사용한 전술이 또 후작에게 먹힐까?"
"언제는 한 번 통한 전술은 실패할 때까지 계속 사용하신다면서요."
"그래. 하지만 조금 불안하구나."
이무길라임을 상대하며 나와 똑같은 전술로 내가 당하고 나니, 나는 내가 사용하는 전술에 대해 다소 불안해졌다.
"인간의 욕망과 자본의 힘은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같은 것이야. 통제할 수 없는 혼돈이 시작되는 거지."
"이상한 말씀이시군요. 주인님께서는 정말 이상한 걱정을 하고계십니다."
상당히 드물게, 에일라는 내 의견에 정면으로 반박했다.
"상인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나, 그들은 어디까지나 나라의 백성일 뿐입니다. 저희 쪽으로 치면 군단의 주민에 불과하죠. 그들이 만약 자본으로 반역을 일으키려 한다면, 무력으로 제압하며 몰수하고 참수하면 그만입니다. 가끔가다 보면...주인님께서는 어떤 면에서는 저보다도 인간들을 배려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가끔."
"......아 참, 여기 판타지였지."
가끔 꿈속에서 현대의 향수를 느끼느라 미쳐 생각하지 못했다.
"에일라야, 예를 들어 마액이 음료처럼 판매된다고 하자꾸나. 매점매석을 일삼는 자들은 어떻게 다스릴 것이냐?"
"세금을 7할 물리겠습니다. 그럼에도 응하지 않는다면 감히 영주의 명령을 어긴 죄로 사형에 처하고 목을 베겠습니다."
"......비바, 중세시대!"
나의 가장 큰 약점아닌 약점. 그건 바로 가끔 현대적인 사고에서 모든 걸 생각한다는 것.
"그래, 보이지 않는 손보다 당장 국왕의 명령이 더 파워가 강한 세계지."
시장 경제를 교란하는 자, 복상사로 다스릴 지어니.
"좋다. 인간들을 판매원으로 내세우겠다. 오늘부터 아발론의 요정들은 자본주의의 화신이 될 것이다. 어차피 시장이라는 것은 욕망이 얽히고 설킨 곳. 거기에 성욕이 조금 들어간다고 해도 검정에 핑크를 섞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스타킹을 비롯한 온갖 의류.
정력제 겸 발기부전 치료제.
그리고 기타 온갖 우리 군단의 요체가 들어가있는 물건들.
"그들의 바짓 속 보이지 않는 좆을 세우게 만들어, 우리가 판매할 물건을 사게 만들자꾸나."
나는 이 세계에서 새롭게 국부론을 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