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비만 오크-416화 (416/800)

416회

90일차

성검의 폭풍은 역시 대단했다.

메어리가 날린 성기방패의 보-빔은 정확히 이무길라임의 몸통을 끊어냈고, 나는 한걸음에 달려나가 이무길라임의 머리를 안아들었다.

"이예스!"

나는 바로 원형의 대가리를 반으로 쪼개버렸다. 색스도 아니고 손으로 찢어버렸고, 좌우로 갈라진 이무길라임의 머리에서 큼지막한 덩어리가 튀어나왔다.

"어우야, 존나 크네."

겉모습은 상급마석이지만 크기가 어지간한 상급 마석 7개 분량을 합쳐놓은 것처럼 거대했다. 단순히 갯수로는 1개로 따지게 되더라도, 이건 분명 7개 분량의 상급 마석에 해당하는 마나를 가지고 있는게 틀림없었다.

푸화아악.

성검의 공격에 당하고 마석이 뜯겨나가자, 이무길라임의 껍질이 윤기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놈의 겉면은 점차 푸석푸석해졌고, 썩어 문드러지는 과일처럼 단단함을 잃어갔다.

끄, 끄이이익!!

슬라임 드래곤들은 비명을 지르며 몸안에서 튀어나왔다. 모체의 죽음을 직감한 듯 빠져나온 슬라임 드래곤들은 새로운 먹이를 찾아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쿵, 쿵쿵!!

우리를 중심으로 버지니움 실드가 겹겹이 쌓이기 시작했다. 슬라임 드래곤들은 버지니움 실드에 대가리를 박았고, 뛰어들던 그대로 소멸하여 바닥에 작은 마석만 남기고 사라졌다.

"성검 대단해."

"신성력의 힘이죠. 대신...중급 마석이 조금 손상이 오지만요."

"그 정도는 괜찮다. 어차피 중급 마석은 이미 많이 파밍했고, 원래 크기 생각해보면 그냥 하급 마석 수준이야."

이무길라임의 몸에서 튀어나온 놈들은 거의 대부분이 갓 3성이 된 듯한 크기였다. 신성력으로 인해 마석까지 타죽는다고 해도, 이미 상급 마석을 손에 넣은 이상 딱히 문제는 없었다.

'메어리가 경험치 안 오르는 것도 아니고.'

성기방패에 슬라임 드래곤들이 대가리를 박을 수록 메어리의 경험치는 조금씩 오르고 있다.

"아아, 이것은 오토라고 하는 것이다."

레벨이 실시간으로 오르고 있는 걸 시스템은 알려주고 있었고, 이대로 시간을 보내기만 하면 완벽한 자동사냥이 되는 셈이었다. 나는 기절한 륜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바닥에 앉은 자세로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자꾸나."

"네. 아빠, 그런데 조금 난감한 상황이 생겼어요."

"난감?"

"레오 후작령에서...."

"......."

잠시 뒤.

버지니움 실드가 반구형으로 회전하며, 공동 전체를 신성력의 레이저로 쓸어버렸다.

* * *

늦은 밤.

레오 후작이 이끄는 기사단은 라스피카 성의 앞에 도착했다.

스톤골렘이 틀어막고 있는 성문부터 시작하여 성벽 위에 활을 들고 경비를 선 엘프들은 남작령이 이미 누구의 손에 떨어졌는지를 잘 증명하고 있었다.

펄럭.

레오 후작은 하얀 깃발을 펄럭이며 앞으로 나섰다. 무기 하나 들지 않고, 갑옷조차 입지 않은 그는 전력으로 자신이 라스피카 앞에 온 이유를 어필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엘프 하나가 성벽 위에서 뛰어내려 레오 후작의 앞에 섰다. 어두운 밤이라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레오 후작은 엘프의 거대한 가슴을 보고 그녀의 정체를 깨달았다.

후작령에 다녀갔던 엘프. 니프엘라의 뒤에 호위기사처럼 서있던 강자.

"서신을 전하러 왔소."

"서신?"

말에서 뛰어내린 레오 후작은 정중한 자세로 허리를 숙인 뒤, 품안에서 양피지를 하나 꺼냈다.

"니프엘라 님에게 전해주시오."

"2장로에게? ...내가 확인해도 되겠나?"

"물론."

엘프는 양피지를 열어 안의 내용을 훑었다. 그리고 그녀는 안의 내용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물론이오."

"고트다이할 레오 후작이 사망하기 전까지는 서로 싸우지 않는다.... 불가침 조약이라는 말이렸다."

"그렇소. 내가 고트다이할이오."

엘프는 양피지를 붙잡은 채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다. 레오 후작은 그녀의 압도적인 몸매에 잠시 눈을 감고 평정심을 유지했다.

"니프엘라 선에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군. 아니, 잘 됐나."

"......?"

상대는 제법 높은 사람이던가? 아니면 마왕군에 편입되면서 엘프들의 체계도 바뀐 걸까. 엄연히 2장로인 니프엘라를 상대로 하대하는 엘프의 태도에 후작은 조금 불편함과 이상함을 느꼈다.

"실례하오만."

다른 건 참아도 후작은 이것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그대가 어떤 엘프인지는 모르나, 니프엘라 님은 오랜 시간 엘프들의 2장로였던 분이오. 예우를 부탁드리오."

"......아아, 이게 그 꼰대인가 뭔가 하는 그거네."

엘프는 피식 웃으며 딱딱한 말투를 풀었다. 레오 후작은 절로 주먹이 꽉 쥐어졌다.

"아무리 엘프라고 한들-"

"내가 니프엘라보다 훨씬 윗사람이라면?"

"......뭐요?"

"뭐, 왕관도 안 쓰고 있고 티가 안나기는 하지. 그럼 보여줄게."

스륵, 스륵.

엘프는 하얀 와이셔츠의 단추를 아래에서부터 풀며 좌우로 헤쳤다. 탄탄한 복근 아래, 어두운 밤에도 선명하게 보이는 은빛의 성흔이 자리잡고 있었다.

"......!!"

레오 후작은 소름이 돋았다. 엘프는 씩 웃으며 다시 성흔을 가렸다.

"만나서 반갑소. ...난 이런 거 못하니까 그냥 편한대로 할게. 루나. 엘프 여왕이야. 그래, 마왕군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자 하는 이유가 궁금한 걸? 진노하신 엘프 여왕님의 노여움을 달래고자 하는 방법도 궁금하고."

"......."

시작부터 말렸다. 레오 후작은 빠르게 정신을 가다듬고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 * *

"평화 사절이라고?"

"예. 놀랍게도 불가침 조약을 맺고자 왔다고 합니다."

루나가 받은 고트다이할의 서신은 포털을 넘어 내게 들어왔다.

모처럼 지하 2층의 문제를 해결해볼까 고민하던 찰나에 들어온 불가침 협정은 나로서는 행복한 고민에 빠지게 만드는 사안이었다.

"끙, 지가 죽을 때까지는 서로 싸우지 말자는 거잖아."

"오늘 내일 하는 몸이기에 영지 자체적으로 내린 결정이라는 명목입니다. 물론 자신은 국왕의 명령을 받는 입장이기에, 국왕이 직접 명령을 하면 따를 수 밖에 없다고 단서는 걸어뒀지만요."

"대신 그 경우, 미리 사절을 보낸다고 적혀있는데요."

정정당당.

그야말로 정도를 걷는 노익장에 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런 정도를 걷는 자야말로 나와 응당 같은 협상 테이블에 앉을만하지. 좋다. 고트다이할...이 죽을 때까지 우리는 레오 후작령을 공격하지 않겠다."

"마침 잘 됐네요."

"음...."

샤이탄은 뭔가 찝찝한 듯한 기색을 내비쳤다.

"뭐가 문제라도 있느냐, 샤이탄?"

"70이 넘은 노인입니다. 언제 죽을 지 모르죠."

"이런 시대에 70넘게 산 노인네면 보통 80까지 살기 마련이지. 설마 당장 내일 죽겠느냐. 스스로 말을 몰고 여기까지 온 걸 봐선 아직 정정할 터."

곧 죽을 자라면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는 않을 터. 한 달 동안 지켜보다가 온 전령이 평화의 사절이라면 얼마든지 나는 그걸 받아들일 수 있다.

"한쪽 전선에 집중하려면 역시 다른 전선은 최대한 안정시키는 게 중요하지. 흐흐, 우리에게는 호재로구나. 좋다. 이대로 보내도록 하자꾸나."

"따로 저희쪽에서 요구 사항은 없어도 되겠습니까?"

"음...아무 요구도 없이 선뜻 받아들인다면 이상하게 생각하려나?"

"저희가 냉큼 받아들인 것에 대해서 오해를 가진 자들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마왕군은 레오 후작령에 겁을 먹어서 냉큼 화친을 받아들였다고요."

"그건 안 되지."

상대가 우리 세력의 힘에 겁을 먹고 평화를 제안한 것이지, 결코 우리가 약해서 평화를 선택한 것은 아니다. 레오 후작령도 언젠가는 우리가 따먹을 땅이다.

단지, 지금 당장은 귀찮은 사수좌 전선을 정리하고 난 다음에 먹을 곳이라는 것.

"중간 지점에 요새를 하나 만들도록 하지. 그곳에서 상행위가 이루어지도록 하겠다."

"상행위...?"

"중간 지점에서 서로 필요한 물물교환을 하는 것이다. 아무리 마족의 것이라고 한들, 이미 여신교단의 위상이 떨어진 이상 마족의 물건이라도 사려고 하는 놈들이 있을 터."

특히 자본의 흐름에 가까운 놈들일수록 우리가 제작하는 물건들의 가치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드워프제 무기도 엄청나게 판매가 되지 않느냐. 흐흐, 그렇다면 우리도 물건을 팔지 못할 일이 없지."

"그렇다면 역시...!"

"그렇다."

나는 샤이탄이 입은 스타킹의 고간부를 손가락으로 찢었다. 진한 라벤다 향기가 내 코를 간질였고, 샤이탄의 안 또한 이미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반드시 후작령을 물리적으로 점령하는 것만 능사가 아니지. 흐흐흐. 아아, 이것은 문화 폭탄이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우리에게 성장의 기회를 마련해 준 고트다이할 후작을 위해 진심어린 선물과 함께, 그가 제시한 불가침 조약에 서명을 했다.

* * *

<잠시 뒤, 라스피카 인근 임시 협상장.>

"고트다이할 레오 후작이 사망하기 전까지 마왕군은 레오 후작령을 침범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레오 후작가에서도 마왕군이 점령한 남작령에 대하여 침범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움직이는 모험가들, 용병, 다른 가문의 병력, 그리고 여신교단의 병력들에 대해서는 어찌할 거야? 들어오면 우리가 죽인다?"

"...후작령에서는 최대한 그들을 자제시킬 생각이나, 그들이 스스로 사지로 들어간다고 하면 말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좋아. 그럼 우린 최소한 후작령의 군기를 걸지 않은 이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응징하겠어. ...응?"

한참 레오 후작과 루나가 대화를 나누는 도중, 성 위에서 악마의 날개를 단 검은 마족이 날아와 루나의 귀에 속삭였다.

"주인님께서 승인하셨습니다. 원안대로 받아들이시겠다고 합니다."

"뭐? ...흐음, 이쪽에서 이야기한 건 구두로 이야기 한 거니까 딱히 상관은 없지만.... 잠깐만. 흐음."

루나는 양피지를 슥 훑은 뒤 레오 후작에게 건넸다. 양피지에 정갈한 글씨로 적힌 내용은 레오 후작으로서는 신선한 충격을 받는 내용이었다.

"공동상업지구...?"

"남작령과 후작령의 경계에 상행위를 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드는 겁니다. 일종의 비전투 구역이 됨과 동시에, 인류와 마족이 서로 얻고자 하는 것을 거래하는 장터가 되는 셈이죠."

"끙...."

전혀 예상치 못한 제안이었다. 루나와 이야기를 나눈 것처럼 서로 침범하니 마니 하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겠다 싶었건만, 마왕군은 마치 실제 남작의 위를 이어받은 것 마냥 행동했다.

"남작령에는 새롭게 군단의 백성들이 된 인간들이 있습니다. 인간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마왕군에서 당장 준비할 수는 없는 게 현실이기는 하죠. 레오 후작령의 상인들이 물건을 판매하고자 한다면, 저희는 얼마든지 물건을 살 계획이 있습니다."

"...어차피 그 물건을 살 돈은 피묻은 돈이 아니던가?"

"후후후, 사람의 손에 피가 묻지 돈에는 피가 묻지 않지요."

"......."

레오 후작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림은 적의 악랄한 제안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을 때의 끔찍한 상상을 여과없이 나타내고 있었다.

마왕군은 각종 마물들로부터 얻는 재료를 판매하고, 손쉽게 던전에서 얻을 법한 물건들을 싸게 사러 오는 이들로 사람들은 북적거리게 될 것이다.

자연스레 경제적 교류는 활성화되고, 그 틈을 이용해 마왕군은 레오 후작령에 물밑에서 자연스레 공작을 펼칠 것이다. 그것이 어떤 방법이든, 한 번 거래를 시작하면 되돌릴 방법은 없을 것이다.

"음.... 좋다. 그렇게 하지."

레오 후작은 선택을 내렸다. 어떤 방법으로 레오 후작령을 공략하려고 한들, 자신이 살아있는 한 마왕군은 결코 레오 후작령을 도모할 수 없으리라.

"가급적이면 던전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면 가장 좋을 것 같군. 좋네. 거래를 하도록 하지. 단, 오랫동안 다져진 상인들의 거래술을 무시하지 마시게. 나중에 덤터기를 썼다고 사기를 당했다고 사람들을 인질로 삼는 순간...."

탕!

레오 후작이 단검을 꺼내 테이블을 내리쳤다. 70넘은 노년에도 불구하고 그의 팔뚝은 단련된 중장년의 것처럼 탄탄했다.

"내가 목숨을 걸고 마왕군을 토벌할 것이야."

"후후, 아무렴요. 다만, 저희 주인님께서 전하시는 말씀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마족은 보라색 안광을 흩뿌리며 웃었다.

"자본주의, 만만세."

잠시 뒤.

인류 최초로, 인간의 세력이 마왕군의 한 군단과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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