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4회
90일차
구구구구.
천장을 향해 날아든 하르퓨이어의 비명에 이무길라임은 행동을 정지했다. 마치 세계의 시간이 멈춘 것 마냥 이무길라임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흐흐, 말은 이상해도 성대는 강력하지."
다른 이들이 다들 드래곤의 힘을 이었듯, 하르퓨이어에게는 성대에 드래곤의 힘이 깃들었다. 고운 목소리를 바탕으로 적을 꾀어내는 가성(歌聲)을 주특기로 삼는 하피 종에게 실린 드래곤의 힘은 음파 공격으로 발현되었다.
흔히들 드래곤 로어라고 하지 않던가.
생물계의 정점에 이르러있는 드래곤의 목소리만으로 심약한 고블린은 심장마비로 사망한다는 목소리의 힘. 그것이 하르퓨이어에게는 하피의 특성과 융합하여 새로운 특징으로 발현되었다.
"아아, 이것음 음공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저 단순히 목소리를 높여 소리를 지른 게 아니다. 하르퓨이어의 소리는 동굴 전체를 흔들 정도로 막강했다. 이무길라임이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진동보다도 더 강력했다.
"이무기는 승천하지 못한 용이지.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천장에 그렇게 똬리를 틀고 버티고 있는 모양인데...."
던전의 시스템으로 지하 2층에 갇혔든 말든, 나의 머리칼을 태운 죄는 용서할 수 없다. 나는 기진맥진한 하르퓨이어를 안고 통로쪽으로 물러났다.
"어딜 감히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느냐. 나를 내려다봐도 되는 건...."
구구구. 천장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천장이 아닌, 이무길라임의 몸이 대가리부터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놈을 향해 색스를 겨눴다.
"내 자지 위에서 기승위로 올라타고 있는 여자 뿐이다."
쿠---웅!!
거대한 흙먼지와 함께, 하늘로 승천하려던 이무길라임은 땅에 고꾸라졌다. 그에이가 앞으로 나서며 흙먼지가 통로로 넘어오지 않도록 날개를 펄럭였고, 나는 점차 호흡이 안정되는 하르퓨이어의 등을 토닥였다.
"잘했다, 하르퓨이어."
"...하아, 하아."
하르퓨이어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다가 베시시 웃었다.
"섹스...하고 싶어요."
"그래. 지하 2층 공략이 끝나면 그에이와 실컷 하게 해주마."
"아뇨.... ....랑 같이...."
풀썩. 하르퓨이어는 내 품에 안긴 채 의식을 잃었다. 한계까지 주입한 마액의 마나를 전부 육성으로 바꾸어 내지른 바람에 생긴 일시적인 탈진 현상이었다.
"...어, 음, 그에이랑 하고 싶다는 얘기겠지? 흐허허."
"풋."
"주인님, 입꼬리부터 내리고 말하세요."
둘은 기절한 하르퓨이어를 슬라임 드래곤 11호기의 위에 가볍게 놓았다. 마석이 채워져 따갑지는 않을까 싶었지만, 다행히 11호기는 스스로의 몸을 동그랗게 말며 하르퓨이어가 엎어져 쉴 수 있게 만들었다.
"이것 참. 나는 자세히 못 들었다?"
"후우, 이래서 주인님 아이를 임신하기 무서운 겁니다."
"만약에 제 배에 있는 이 아이가 딸이 아니라 아들이라면...걔는 엄마를 노릴까요 아빠를 노릴까요?"
"무서운 얘기는 그만하자꾸나, 륜아. 무조건 딸이 나올 게 분명하니. 음, 됐다. 귀 청소 끝."
나는 귀 안에 남아있던 슬라임 점액을 손으로 꺼냈다. 점액이 다소 남기는 했지만 청각에 큰 문제는 없었다.
푸스스스.
흙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으며 공동의 모습이 한 눈에 보였다. 바닥에 고꾸라진 거대 이무기는 돌돌 말려진 순대마냥 또아리를 튼 채 몸을 떨고 있었다.
"그러게 슬라임이면서 왜 천장에 달라붙어있고 난리냐. 으휴."
나는 색스를 움켜쥐고 앞으로 걸어갔다. 혹시나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천장부터 미리 확인했다.
"다행히 아무도 없구만."
이무길라임이 떨어진 천장에는 간신히 남아있는 꼬리와 몸통이 자리잡고 있던 흔적만 있을뿐, 천장에서 자유낙하를 위해 대기하고 있던 슬라임 드래곤 같은 건 없었다. 나는 안심하고 이무길라임에게 다가갔다.
"하르퓨이어의 폭음, 그리고 하늘에서 떨어진 충격. 몸통을 내게 보인 게 너의 패착이다."
나는 색스를 높이 치켜들었다. 어차피 점액으로 더러워진 로브가 더 더러워진다고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원망할 거면 너를 여기다 가둔 바알을 탓하거라."
손등부터 시작하여 붉게 타오르는 문신이 핼버드의 날까지 퍼져나갔다. 나는 전신의 힘을 모아 힘차게 색스를 내리찍었다.
콰득!!!
그에이가 목덜미에 그었던 것이 자상이었다면, 내가 휘두른 색스는 날이 전부 들어갈 정도로 움푹 파일 정도였다. 물론 내 힘으로도 일격에 놈의 몸통을 잘라낼 수는 없었지만, 1/4라도 구멍을 만들었다는 게 주요했다.
"라스투자드."
[준비 끝났습니다.]
꾸물, 꾸물.
구울 슬라임들이 번개처럼 상처에 달려들었다. 이미 죽은 놈들인 만큼 성욕에 발정이 나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나는 얼굴에 튄 노란 점액을 손으로 닦아냈다.
"후우, 후우. 확실히 달아오르긴 하는구나."
안그래도 빳빳해진 물건이 더 빳빳해질 지경이었다. 나는 하복부의 압박감에 속옷 째로 바지를 내려버렸다. 강력한 해방감이 나를 상쾌하게 만들었다.
"목덜미도 드러나면 좋았을 것을."
그에이가 만든 상처도 분명 피부를 가른 상처다. 구울 슬라임들이 하는 것처럼 상처 속으로 대가리를 비집고 들어간다면 얼마든 상처를 넓힐 수 있었다.
으적, 으적, 으적.
구울들은 걸신들린 것 마냥 이무길라임을 먹어치웠다. 그것도 그냥 아무렇게나 먹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든 상처의 흔적을 따라 교묘히 껍질을 벗기듯 씹어삼키기 시작했다.
퍼---엉.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이무길라임의 몸통이 반으로 갈라졌다. 껍질이 반 넘게 찢어지면서 김밥 옆구리 터지듯 몸통이 터졌고, 구울 슬라임들이 미쳐 먹지 못한 체액들이 줄줄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
나는 입안에 근질거리는 말을 차마 입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행여나라도 말했다가 괜히 운명적인 힘이 발휘되는 순간, 나는 바로 후퇴할 것이다.
"해치웠나요?"
"륜아, 살짝 네가 미워졌다."
"네?! 왜요?!"
"......원래 그런 말을 하면 상대가 정신을 차리는 법이지. 그래, 할파스 때처럼. 이번에는 다행인 듯 하구나."
풀썩.
구울 슬라임들은 이무길라임의 몸통을 완전히 끊어냈다. 얼마나 몸이 길든 일단 중간이 끊어진 이상, 구울 슬라임들이 계속 먹어치우는 이상 다시 몸을 붙여 재생시키기에는 큰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부활하지는 않겠지."
그러니까 부활하기 전에 완전히 죽여놓아야한다. 나는 다시 색스를 들어올리며 앞으로 다가갔다.
"지금부터 확인 사살을 실시한다. 륜, 지금부터 내가 찍는 상처에다가 바람 구멍을 만들어라. 그에이는 후방을 지켜. 구울들은 륜이 쏘는 곳 이외의 곳을 전부 먹어치워라. 오늘...."
푹찍! 색스의 날이 이무길라임의 껍질을 가르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내 얼굴에 노랗고 붉은 점액이 튀어나왔다.
"슬라임으로 순대 잘라먹는...음? 왜 붉은 점액이지?"
나는 순간 문신의 힘으로 인해 내 시야가 붉어져서 그런가 싶은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면 전체 시야가 붉어져야 하건만, 내 손등에는 붉은 점액이 분명 묻어있었다.
"이거 뭔가 이상...."
꾸어어엉.
핼버드가 찍힌 곳 안에서 무언가 꿈틀대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나는 그 안에서 얼굴을 들이민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뀨잉.
"슬라임 드래곤...새끼?"
이제 갓 태어난 것만 같은 슬라임 드래곤이 몸을 흐느적거리며 갈려진 피부 사이로 빠져나왔다. 그 길이는 고작 1m가 되지 않을 정도로 몹시 작았다.
꾸륵, 꾸륵.
슬라임 드래곤은 좌우를 살피며 입을 쩍 벌리다가-
으적.
그대로 이무길라임의 몸을 향해 고개를 박아넣었다. 으적거리는 소리로 보아 분명 점액을 섭취하는 게 틀림없었다.
"이, 이거 설마...!"
"주인님! 저기 안쪽에서!!"
륜이 비명을 지르며 몸이 터진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구울 슬라임들이 무언가에 의해 먹히고 있었다. 점액 터지는 소리가 내 귀를 더럽히고 있었다.
"씨, 씨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아무리 슬라임 던전이라고는 하더라도 던전이 시스템에 의해 고립되어있는 이상, 도대체 어디서 이런 많은 슬라임이 태어날 수 있을까 하고.
"암컷...?"
하늘에서 떨어진 슬라임 드래곤의 정체가 이해가 갔다. 이무길라임은 슬라임 드래곤을 제 몸 속에 품고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알부터 시작하여, 새끼부터 성체까지!
푸화아아악!!
터진 옆구리가 다시 터졌다. 구울 슬라임이 전부 뜯어먹히고 튀어나온 슬라임 드래곤들은 물만난 고기처럼 기지개를 켰다. 나는 그제서야 이무길라임의 실체를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미친 놈.... 제 새끼들을 위해 제 몸을 던전으로 만든 셈이구나."
새끼 슬라임들이 자신의 체액을 먹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다. 자신의 껍질로 슬라임들을 안에서 키우고, 적당히 강해진 슬라임 드래곤을 밖으로 내보내고, 서로 동족상잔을 일으켜 강해진 슬라임들만 남긴다.
"그것도...선별했어!"
새롭게 낳은 알은 강한 슬라임 드래곤들의 먹이가 되었을 것이다. 슬라임은 서로 잡고 잡아먹히도록 프로그래밍되어있는 종족이니까.
으적, 으적.
하지만 이제 이무길라임은 상처를 입었다. 우리의 공격에 상처를 입었고, 상처입은 강자는 약자에게 있어서 좋은 멋잇감이다.
설령 그것이 자신을 낳은 모체라고 하더라도, 지성이 없는 슬라임에게는 먹이에 불과했다.
".....안되겠군. 여기는 불로서 정화해야겠다. 라스투자드여, 본진에 올라가서 횃불과 기름을 가져오거라."
[이 동굴 전체를 불로 다스리려면 막대한 양의 기름이 필요할 겁니다. 지금 그만큼 기름은 없을 것 같습니다.]
"젠장. 일거에 쓸어버릴 방법 없나? 그렇지 않으면...."
나는 차츰차츰 늘어만가는 슬라임 드래곤의 수에 초조해졌다.
"4성 90레벨 짜리의 마석이...슬라임 드래곤 새끼들에게 먹혀버린다고!"
용이 되지못해 여의주는 아닐지언정, 여의주가 되기 직전의 마석은 상급 중에서도 최상의 마나를 가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상급 마석 하나로 마액으로 만들면 오크통을 족히 수 개를 채우고도 남건만, 90레벨의 상급 마석이면 거진 최상급 마석이나 마찬가지인 물건이다.
그게 갓 태어난 슬라임 드래곤에게 조금이라도 뜯어먹히기라도 하는 날에는 나는 발 뻗고 잠 잘 수 없을 것이다.
"마석, 마석을 찾아야 해!"
나는 다시 색스를 쥐고 튀어나오는 슬라임 드래곤의 모가지를 쳤다. 일격에 목이 뎅겅 날아갈 정도로 약했지만, 하나를 죽이니 다섯이 껍질 밖으로 기어나왔다.
"젠장, 일단 레벨이고 경험치고 뭐고 싹다 죽여! 이무길라임 마석은 무조건 우리가 챙겨야 한다!!"
슬라임 드래곤은 이무길라임을 먹어치운다. 우리는 슬라임 드래곤을 하나하나 죽이며 이무길라임의 핵을 찾아야했다.
상처입은 이무기를 상대로 하는 치킨 레이스의 시작이었다.
* * *
아무리 슬라임이라고 해도 기본적인 지성은 가지고 있다.
등급이 높아질수록 당연히 지성도 높아지며, 한 때는 던전의 마물이었던 이무길라임 또한 엄연히 지성을 가지고 있는 개체였다.
잡아먹히고 있다.
침입자는 자신을 상처입혔다. 하지만 그 상처는 얼마든지 복구할 수 있다. 하지만 몸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꺾여버렸다.
으적, 으적.
몸이 안쪽부터 파먹히고 있다. 자신이 낳아줬던 슬라임 드래곤들은 감히 모체이자 창조주인 자신을 맛있는 먹이마냥 먹어치우고 있다. 단지 먹는 것에 대한 식욕의 본능만 남아있는 슬라임들은 자신들이 먹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마구잡이로 먹어치우고 있었다.
내가 이러려고 진화를 포기했던가.
이무길라임은 그 광경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한탄했다.
자신은 이곳에서 탈출하기 위해 몇 십년을 고생했건만, 그리고 그 몇 십년 동안 새끼들을 위해 승천을 포기하고 알을 낳아왔건만, 그 보답은 새끼들에게 잡아먹히는 말로였다.
콰득, 콰득.
침입자로 보이는 오크와 한 무리의 마물들이 이무길라임의 몸을 열심히 해체하고 있었다. 그들은 발정나는 것도 감수하며 이무길라임의 몸을 잘라냈고, 그 안에서 튀어나오는 새끼들을 무참히 도륙했다.
다 죽여버릴까.
이무길라임의 힘으로는 전부 다 죽일 수 없다. 돼지같은 오크는 생긴 것 답지 않게 제법 강력했고, 1:1로 싸워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저것만 먹으면 승천하는데.
이무길라임은 보라색 기운을 풍기는 서큐버스에게 자꾸만 눈이 갔다. 저것만 먹으면 자신이 옛 주인처럼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오크를 뚫을 수 없다. 오크를 제압하기에는 슬라임 드래곤들이 너무나도 무능했고, 거기에 배신까지 일으켰다.
그러니까 전부 죽이자.
모두 동굴 속에 매장해서 없애버린다음, 혹시나 무너진 통로에 깔려도 살아남는다면 그걸 먹고 밖으로 빠져나가자.
구구구구.
천장에 유일하게 닿아있던 다른 머리를 이용해, 이무길라임은 던전 천장을 긁어대기 시작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알들을 품어두었던 천장이 우수수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다 같이 죽어버리자.
고심끝에, 이무길라임은 천장을 무너뜨리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