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회
90일차
투두두둑.
하늘에서 슬라임 드래곤들이 비처럼 떨어지기 시작했다. 말이 비처럼이지, 그 크기나 무게를 생각하면 사실상 공사장의 철골이 그대로 내다 꽂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전부 슬라임 던져!!]
라스투자드가 조종하던 시체들이 하늘로 높이 뛰어올랐다. 12사도 또한 슬라임 드래곤들을 뛰어오르게 했다.
"젠장! 통로로 달려!"
그 사이 나는 륜과 샤이탄을 안고 뒤로 크게 뛰었다. 우리를 향해 떨어지던 슬라임 드래곤들은 구울 슬라임의 벽에 잠시 가로막혔다.
[시폭!]
라스투자드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구울 슬라임들이 연쇄폭발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폭발로 인해 자유낙하하던 슬라임 드래곤들의 낙하에 제동이 걸렸고, 그 잠깐의 시간동안 우리는 잽싸게 통로쪽으로 후퇴할 수 있었다.
"좆될 뻔 했군. 으으, 씨발. 내 장기에 내가 당하다니."
"주인님, 머리가...!"
샤이탄이 급히 시스템의 창을 이용해 내 머리를 거울처럼 비췄다. 그곳에는 산성 점액으로 인해 오백원 동전만한 구멍이 뚫려있었다. 붉어진 두피는 아직도 따가웠다.
"이...씨부럴놈들...."
오크 중에서도 풍성하기로 소문난 내가 탈모라니. 그것도 심지어 자연탈모도 아니고 정수리 부분의 머리칼이 녹아내려서 빵꾸가 나는 원형탈모라니.
"용서할 수 없다...!"
"맞아요. 정수리에 떨어졌으니까 망정이지, 자지에 떨어졌으면 어쩔 뻔 했어요!!"
"그렇습니다. 1초만 빨랐어도 분명 발기한 자지 위에 산성 점액이 떨어졌을 겁니다."
"......그렇네?"
화가 나는 건 화가 나지만 이미 일어난 일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까딱 잘못했다가는 자지가 녹아내릴 뻔 한 게 분명하니까....
'아니지, 그래도 머리가 녹아내렸는데.'
나중에 윗부분만 머리가 나지 않으면 어찌하겠는가. 모낭이 전부 산성 점액으로 녹아내려버렸다면, 더이상 그 부분만 머리칼이 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분노의 군단장은 원형 탈모다!'
.......
"이 방 안에 있는 슬라임 놈들 모조리 죽인다. 살리는 건 없다. 섬멸이다."
"공동 안으로 가는 건 위험합니다. 통로 안에서 요격하시죠."
"직선으로 오니까 상대하기도 쉬워요!"
통로 안에서 전선을 만들었다. 바닥에 떨어진 슬라임 드래곤들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우리를 노려봤다. 천장에서 떨어진 충격으로 굳어있던 몸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라도 하는 지, 놈들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
콰직!!
천장에서 새로운 슬라임 드래곤이 떨어졌다. 아래에 깔린 슬라임 드래곤의 대가리가 터졌다.
"......."
우두두두.
하늘에서는 여전히 슬라임 드래곤들의 비가 내리고 있었다. 거대한 흙먼지와 함께 떨어지는 놈들은 마치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강제로 바닥에 떨어지는 듯 했다.
"주인님, 이거...?"
"아 씨. 보통 이러면 등장 기믹이던데."
위치상 지하 2층이 끝자락이 틀림없다. 그런 만큼 이곳에는 대량의 슬라임 드래곤이 살고 있거나, 그 이상의 존재가 살고 있을 게 틀림없-
스르르.
맞은 편 벽면에 거대한 그림자가 스쳤다. 벽 전체가 꿈틀거리며 요동치는 것처럼 움직였다. 나는 스스로의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괴물딱지가 여기 있네."
과연 바알의 옛 던전.
슬라임 드래곤 따위는 단순히 움직이는데 거추장스러운 존재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벽부터 시작하여 천장까지 꿈틀거리는 거대한 존재는 한눈에 담기도 어려운 크기였다.
"쓰벌, 왜 슬라임 드래곤이 이 사이즈로 드래곤이라고 하는 지 알겠네."
지렁이를 한자로 지룡(地龍)이라고 하던가.
고작 3성의 마수에게 드래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면, 그 이상의 존재는 그보다 더욱 더 강력한 이름을 가지고 있을 게 틀림없기는 했다.
"3성이 지렁이 수준이었네, 젠장."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창이 내 가설을 증명하고 있다. 천장에서 뱀처럼 대가리를 아래로 떨어뜨리기 시작하는 놈의 몸통은 플라우로스의 둘레보다 더 두꺼워보였다.
<이무길라임> ★★★★☆, Lv 90.
용이 되지 못한 슬라임.
몸 길이가 족히 100m는 훌쩍 넘어보이는 거대 괴수가 공동의 천장에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저 놈이 포털을 넘어온 도적놈들을 사로잡은 게 분명하다. 그 공로를 인정하여 우리 군단의 부하로 영입할 수도 있겠지만...."
철커덕.
나는 색스 마크3를 놈에게 겨눴다.
"내 머리카락의 원수! 이 포르네우스같은 새끼, 넌 오늘 죽었다!!"
우리는 본격적으로 거대 마수의 레이드를 시작했다.
* * *
<레오 후작령 레굴루스 성 근교, 기사단 집결지.>
"각하, 역시 재고하시는 게...."
"그만하게. 솔직히 이렇게 많이 몰려가는 것도 오해를 살 수 있는 걸 왜 모르는가?"
"그러나 이제 남작령은 마왕군의 땅이 되었습니다. 언제 어디서 마물들이 튀어나올 지 모릅니다."
"사람들을 인질로 삼는 놈들이라면 분명 대화는 가능한 놈들일 터. 분명 대화가 가능한 자들이 있을 걸세. 그래, 최소한 하나 정도는 있겠지."
가솔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트다이할 레오 후작의 의지는 강력했다. 그는 투구도 없이 말 위에 올라, 스스로 하얀 백기를 내건 깃대를 들어올렸다.
"아무리 마왕군이라고 한들 평화의 사절이 없는 건 아니다. 자네, 이 백기의 기원이 무엇인지 아는가?"
후작이 흔든 백기에는 하얀 비둘기가 수놓아져 있었다.
"...압니다. 마왕군의 신호 아닙니까? 사절이라는."
"그렇다네. 마왕군 발호 초창기에 마왕군이 연합에 보낸 신호였지. 하지만 그도 금방 사라지고 말았어. ......그들이 이 신호를 알아채기를 바라는 수밖에."
후작은 싸울 의지가 없었다.
정확히는 남작령에 공격하러 갈 의지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남작령을 점령한 마왕군을, 엘프들이 합류한 군대를 상대하는 것은 후작령에 큰 피해를 끼칠 게 분명했다.
"여신교단에서 요청해도 무시할 것이야. 오직 나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건 국왕 폐하 뿐이니."
"각하...!"
"가세. 부디 우리가 공격하러 가는 게 아니라고 믿어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히히힝.
후작이 고삐를 잡아당기자 기사들도 함께 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주 느긋한 속도로, 마치 산책을 하듯 천천히 움직였다.
공격할 의지는 일절 없다고 천명하듯.
"그래. 우리가 싸우기에는 너무 억울하지."
후작은 처음으로 빈정거리는 말투로 짜증을 냈다.
"여신교단에서 다 알아서 해결할 문제인 것을."
후작은 품안에 든 양피지를 떨어지지 않게 단단히 고정했다.
불가침협정서.
아마 이것의 존재가 외부에 알려지면 후작은 상당한 정치적 타격을 입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후작은 자신의 모든 명예를 걸고 후작령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자 했다.
"내가 죽기전까지...부디 후작령에 아무런 피해가 없기를."
성검의 용사 하나가 갑자기 나타나 남작령의 마왕군을 쓰러뜨리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 후작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하며 대로를 따라 움직였다.
* * *
"시체들을 붙여! 그 다음에 폭파시켜! 륜은 견제 사격!"
이무기라는 이름 답게 놈은 똑똑했다. 단순히 굶주려 시체고 뭐고 처먹던 굼벵이들과는 달리, 철저히 구울이 된 슬라임들을 점액으로 요격했다.
투두두두두.
슬라임 이무기, 이하 이무길라임은 아가리를 벌린 채 입안에서 점액을 마구 뱉어냈다. 흡사 피칭머신에서 쏘아진 경식구마냥 단단한 힘에 나는 철저히 방어에 집중해야만 했다.
투두두두.
구울화 된 슬라임 드래곤 두 마리를 양손에 쥐고 휘둘러 점액을 요격한다. 이무길라임은 륜과 구울 마법사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나를 노리고 점액 덩어리를 쏘았다.
"샤이탄, 절대로 내 뒤에서 벗어나지 마라!"
놈은 내가 아닌, 내 뒤의 샤이탄을 향해 군침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인장 때문인지 아니면 마왕의 딸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놈은 몇번이고 샤이탄을 향해 아가리를 벌리며 달려들려고 했다.
키아아아아악!!
원거리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놈은 다시 나와 샤이탄을 통째로 집어삼키려고 달려들었다. 나는 구울 슬라임을 놈의 입안으로 집어던지고, 샤이탄의 옆에 꽂아놓은 색스 마크3를 집어들었다.
콰앙, 콰아아앙!!
이무길라임의 입안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놈은 잠시 입을 닫고 대가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역시 90레벨에 이른 괴수답게 저렙 흑마법사의 시폭 정도로는 끄떡도 없었다.
캬아아아....
주륵, 주륵. 아가리를 벌리며 드러낸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폭발한 슬라임 드래곤의 잔해가 흘러나왔다. 차라리 그게 놈이 상처를 입은 잔해였으면 좋으련만, 진물처럼 뚝뚝 떨어지는 뭉개진 점액은 붉은 색이었다.
이무길라임의 몸통은 전신이 노란색이었다. 마치 골드 드래곤으로의 승천을 눈앞에 앞두고 있다는 것처럼.
키아아악!!
이무길라임이 다시 아가리를 벌리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천장에서 내려온 놈의 대가리를 향해 색스를 들어올렸다.
"이 변태같은 이무기새끼! 샤이탄이 아무리 맛있어보여도!"
나는 문신의 힘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샤이탄을 먹을 수 있는 건 나 뿐이다!!"
콰----앙!!
핼버드의 면으로 놈의 인중을 위에서 아래로 후려쳤다. 이무길라임의 대가리가 땅에 꽂혔다.
"총공격 찬스! 대가리에 집중해!!"
나는 핼버드의 창대를 밟고 뛰어올라 놈의 대가리를 짓밟았다. 어차피 곧 놈의 저항에 튕겨나가겠지만, 힘으로 놈을 억제할 수 있는 건 나 뿐이었다.
파바바박.
륜의 바람 화살이 날아든다. 구울 슬라임들이 놈의 얼굴 근처에 달라붙는다. 이무길라임은 천장에 고정된 몸을 꿈틀거리며 대가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키아악!!
여전히 노리는 것은 샤이탄. 나는 샤이탄을 향해 뛰어올랐다.
"우오오오오!!
샤이탄을 안고 앞으로 슬라이딩을 하듯 미끄러진다. 당연히 샤이탄을 위로 하고 내가 등으로 미끄러져 등에 불이 난듯 따가웠지만, 그걸 신경쓸 상황은 아니었다.
콰득!
놈의 이빨에 샤이탄의 꼬리가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조금만 늦었어도 샤이탄의 몸이 일부나마 뜯겨나갈 뻔 했다. 놈의 인중을 누르던 색스가 옆으로 튕겨져나갔고, 검은 그림자가 색스를 허공에서 낚아챘다.
"그에이, 색스로 찍어라!"
"색스!"
날개를 펼치며 날아온 그에이는 색스를 치켜들고 이무길라임의 목을 후려쳤다. 드라고니안의 힘으로 찍은 핼버드의 날에 이무길라임의 목덜미에는 긴 자상이 생겼다.
꿀럭, 꿀럭.
갈라진 피부 사이로 노란 점액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그에이의 전신에도 노란 점액이 피처럼 튀었다.
"으, 으아악?!"
그에이는 색스를 잡고 화들짝 뒤로 물러났다. 혹시나 산성 물질이 있는 게 아닐까 싶어,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괜찮느냐?!"
"구, 군단장님!!"
색스를 든 그에이는 붉어진 얼굴로 점액을 닦아냈다.
"이, 이거...."
"독이냐?!"
"미약입니다! 아니, 발정제 수준입니다!"
"......슬라임!"
아무리 이무기라고 해도 슬라임이라는 종족의 특성은 변하지 않는 걸까. 그에이의 바지 앞섶은 터질 것처럼 부풀어있었다.
"젠장, 닿은 순간 발정나게 만들 정도로 강력하다는 건가?!"
"...그뿐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찌걱.
샤이탄은 눈을 찡그리며 몸을 일으켰다. 잠시 스친 그녀의 속옷은 가볍게 젖어있었다.
"공기 중으로도...퍼지는 듯 합니다."
"젠장, 광역 발정제라도 되는 건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생식 기능이 있는 자를 상대로 엄청난 위력을 가진 능력이 아닐 수 없다. 이무길라임은 나를 향해 피식 웃으며 대가리를 높이 치켜들었다.
크르르.
천장 전체에 소용돌이처럼 또아리를 튼 놈은 정중앙에서 기다란 대가리만 움직이며 우리를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여전히 놈의 눈은 샤이탄을 응시하고 있었다.
"...알겠다. 왜 저 놈이 자꾸 샤이탄을 노리고 있는지."
상대는 이무기. 용이 되지 못한 자.
4성, 90레벨, 비어있는 ☆.
"기본적으로 슬라임은 다른 개체를 포식하는 걸로 강해지고 진화하는 존재. ...드라고니안인 그에이와 하르퓨이어를 거르고 샤이탄을 노리는 건 분명 그런 이유일 터."
진화에 샤이탄이 필요하기 때문.
"레벨은 채웠어도 진화조건을 채우지는 못 했구나, 저 썩을 놈."
카르르르.
그리고 그 진화 조건이 샤이탄을 포식하면 충족되는 게 틀림없다.
"흐흐흐, 하지만 너는 상대를 잘못 만났다. 상대를 발정하는 상태로 만들어 전력을 약화시키는 게 네 주특기라면...상대를 제대로 잘못 만났어. 우리는 상시 발정 상태이기 때문이다!!"
"아빠, 준비 끝났어요!!"
하르퓨이어의 날카로운 비명이 공동 전체에 울려퍼졌다. 이미 부하들은 통로 안쪽으로 들어갔다.
"준비 됐나?!"
"네!"
"그러면 시작하자!"
둥, 둥둥, 둥둥.
나는 배북을 두드렸다. 붉은 오라가 나를 중심으로 공동에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앞으로 나선 하르퓨이어의 몸으로 서서히 깃들기 시작했다.
"전부 귀마개 착용해!!"
나는 빠르게 슬라임 점액을 귀에 집어넣었다. 륜과 샤이탄도 주머니에서 점액을 꺼내 서로의 귀에 점토처럼 빚어 집어넣었다. 그에이는 엄지로 귀를 막으며 크게 물러났다.
"하르퓨이어, 가라!"
"후우우----"
하르퓨이어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아아아, 섹스하고 싶다아아아아!!!!"
하피.
날카로운 발톱으로 적을 공격하지만, 그 전에 먼저 괴성을 통해 적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마수.
"쎅쓰으으으으!!"
나의 배북을 통해 강력해진 하르퓨이어의 7옥타브 넘는 보이스는 천장을 뚫을 기세로 이무길라임을 향해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