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2회
90일차
다시 가득 채워진 주머니를 비우기 위해 우리는 다시 본진으로 되돌아왔다.
[죄송합니다, 군단장이시여. 제가 괜한 소리를....]
"아니다. 네 잘못이 아니다. 잘못이 있다면 적이 눈앞에 있음에도 그딴 속도로 움직이는 슬라임 드래곤들이지."
라스투자드는 자신의 말로 인해 빚어진 느긋한 파밍에 자책했다. 하지만 그건 라스투자드의 실책도 아니고, 굳이 따지자면 나의 실책이었다.
'우리 애들이 너무 잘나서 착각해버렸다.'
슬라임 드래곤은 말이 슬라임 드래곤이지 실은 지렁이같은 놈들이란 걸 잊어버렸다.
우리 군단에서 운용하는 슬라임들은 나와 라임에 의해 엄청나게 단련된 정예병 중의 정예병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어버렸다.
...그래서 옛 바알의 던전에 남아있던 슬라임들도 그 정도의 스펙은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나의 실책이었다. 설마 진짜로 굼벵이처럼 기어가는 놈들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젠장. 3성짜리 마물들이라도 소환해서 밀어버릴까?"
"적당한 3성은 없지 않아요?"
"지금 3성은 없지. ...아니지, 그 방법이 있구나."
나는 시스템을 통해 두 가지 시설이 이용가능한지 확인했다. 그리고 다행히 두 기능은 무사했다.
마석소환.
그리고 마물합성.
"라스투자드여. 이제 네가 교주가 될 때가 되었다."
[그 말씀은...?]
"마침 3성이니 딱 좋겠군. 구울 마법사를 소환하겠다."
네크로맨서이자 흑마법사이자 4성으로 오르면 리치가 될 존재들. 이제 우리 던전의 규모도 많이 늘어났으니, 언제까지 라스투자드 혼자 인간들의 시체를 처리하게 내버려 둘 수 없는 노릇이기도 했다.
"네 휘하의 부하들을 늘려주마. 너의 전속 마법사들이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군단의 주인이시여, 괜찮으시면 12명을 소환하는 것이 어떠신지?]
"12명?"
막상 내가 교주라는 걸 던지고 라스투자드가 12명이라고 부르니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샤이탄은 애매한 얼굴로 나와 라스투자드를 번갈아봤다.
"굳이 12명인 이유가 있느냐?"
[여신교의 성검은 모두 12자루입니다. 성검의 수와 똑같은 수의 리치를 운용한다면 여신교에 대한 모독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만.]
"그런 거라면 인정이지. 휴, 난 또 12제자 만드는 줄."
[제자.... 교주의 아래에 있는 제자입니까? 어감이 입에 착 달라붙습니다.]
"그냥 12 사도라고 부르자꾸나."
잠시 명칭에 대한 언쟁 이후, 나는 라스투자드가 벌어들인 중급 마석을 이용해 12기의 구울 마법사를 소환했다. 특별하거나 고유의 종족이 아닌 무난한 종족이라 금방 소환되었다.
[던전의 주인을 뵙습니다.]
그들은 모두 던전의 주인인 내게 무릎을 꿇었다. 나는 12명의 구울 흑마법사를 늘어놓고 라스투자드를 가리켰다.
"구울 마법사들은 모두 라스투자드의 분대로 편성한다. 너희들은 라스투자드를 분대장으로서, 교주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할 것이니라."
[나를 믿고 따르라. 군단의 주인께서 우리를 리치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라스투자드는 바로 12사도를 휘어잡았다. 갓 슬라임 드래곤들을 학살하여 55레벨, 3성으로서의 만렙을 찍은 라스투자드는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 처럼 소환시설의 앞에 섰다.
[보아라. 군단의 주인께서 내게 내려주시는 세례를!!]
파-앗.
라스투자드는 소환시설의 위에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벌렸다. 그의 격한 몸짓에 나는 괜히 무안하고 쑥쓰러워졌다.
"...너 너무 제대로 하는 것 같다?"
[왠지 재미있어보여서 그만.]
"...쓰읍, 이거 괜히 합성하는 거 아닐까 모르겠네. 크흠."
나는 헛기침을 하고 라스투자드의 장난에 어울리기로 했다. 상황을 악화하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12사도는 나와 라스투자드에게 시선이 몽땅 꽂혀있었다.
"여신과 마왕의 이름으로!! 나는 분노의 군단을 지배하는 자! 이 몸의 인도하에 그대는 새롭게 태어날 지니! 마, 물, 합, 성!!"
위이잉.
나는 미리 준비해 둔 '레비즈의 알'을 라스투자드의 앞에 놓았다. 12사도들 또한 시스템을 통해 합성이 일어나는 걸 알고 있지만, 이건 여타 다른 던전에서는 보기 힘든 새로운 광경일 게 틀림 없었다.
"구울이 용이 된다!!"
고오오오오!!
라스투자드의 몸을 중심으로 거대한 코쿤이 생겨났다. 검푸른 피막은 마치 구울의 피부가 팽창한 것 마냥 창백했고, 그 속에서 라스투자드의 몸은 조금씩 뒤틀리기 시작했다.
"흐흐, 천천히 보아라. 내가 내린 세례를...응?"
푸쉬이이.
코쿤에서 보라색 안개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밥솥이 취사의 연기를 뿜어내는 듯한 모습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무슨 합성이 이렇게 빨리...?"
파지지직.
코쿤의 피막은 보라색 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가운데에 서있던 라스투자드의 몸이 서서히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군단의 기적을 보아라, 아둔한 죽은 자들이여.]
레비즈의 알이 섞여들어간 티는 말로서 팍팍 내고 있지만, 공중에 뜬 상태로 말을 하는 라스투자드의 목소리에는 위엄이 서려있었다.
[이것이 바로 군단의 힘이니라.]
라스투자드의 말에는 분명한 '힘이 실려있었다. 나는 귀를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절로 오한이 들었다.
"이거 혹시...?"
"언령이군요. 날개나 뿔은 달리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라스투자드는 성대를 얻은 듯 합니다."
드래곤의 목소리.
마물합성을 통해 생물의 정점에 있는 드래곤의 육성을 얻게 된 라스투자드는 12사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군단에 영원히 충성하라. 그대들이 군단에 척추뼈를 바치면, 그대들은 용의 힘을 얻고 다시 태어날 것이다.]
[[[군단을 위하여.]]]
12사도는 나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갓 소환하여 따끈따끈한 1렙 구울 마법사지만, 그들은 군단을 위해 목숨을 내걸 준비가 끝나있었다.
"음...라스투자드여, 이들이 부릴 수 있는 시체는 어느정도지?"
[빅슬라임 한 기 정도는 능히 다룰 수 있을 겁니다.]
"그 이상은 어렵다는 거군. 뭐...좋다. 너도 이제 드라고니안-구울이 되었으니 이제 슬슬 다시 공략 재개를-"
"군단장님---!!"
던전 전체가 쩌렁쩌렁 울린다. 라스투자드의 육성이 정신을 억누르는 힘이 있다면, 방금 들려온 소리는 그냥 육성 자체가 드래곤에 이르는 수준의 힘이 있었다.
"흐흐, 원군이 왔구나."
"저, 저희가 왔어요."
"환영한다. 하르퓨이어. 그리고 잘 왔다, 그에이."
"군단을 위해서라면."
드라고니안이 되어 더욱 강해진 나의 하피 딸, 하르퓨이어가 그에이와 함께 던전 공략에 합류했다.
* * *
<그 시각, 라스피카 성 남작의 방.>
"내가 활약할 기회인데?"
침대에 누워있던 루나는 눈을 반짝이며 박수를 쳤다.
"지하 던전 2층이라고? 그럼 내가 가야지. 지하 1층이 내 거잖아. 그러니까 2층도 내가 정리해야 되는 거 아닐까?"
"사실은 아빠 만나러 가기 좋은 핑계라서 그런 건 아니고요?"
"메어리, 알면 양해 좀 해줄래? 응?"
루나는 윙크를 하며 메어리의 곁에 엉겨붙었다. 메어리는 뒤에서 백허그를 하며 가슴을 비비는 루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안 돼요. 지금 얼마나 상황이 급한데. 하서스 씨, 지하 2층 던전 힘들어요?"
크르르륵.
"하서스가 자기도 지하 2층 발견하자마자 바로 달려와서 모른다네."
라임은 제법 매끄러운 말투로 말했다. 버지나니야 비르고 남작의 모습으로 집무를 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처음 보는 이라면 바로 남작이라고 생각할 만큼 자연스러웠다.
"그러면 위험한 지 안 위험한 지 모르는 거 아냐? 내 직감이 말하고 있어. 위험한 곳에 내가 필요하다고!"
"확실히 루나 엄마가 가면 금방 정리는 되겠지만...."
메어리는 포털의 위치를 가늠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발론 지하로 가면 라스베가스까지는 금방이어도, 던전까지는 직접 달려야 할 걸요."
"내가 하서스 업고 가도 하서스 달려가는 것보다 빠를 걸?"
크르르.
"하서스도 인정하는 부분이래."
"그런 말투는 어디서...하아. 알았어요. 여기는 그다지 위험하지 않으니까-"
"루나, 큰일났...."
벌커덕 열린 문의 밖에는 크림엘프, 2장로 니프엘라가 난처한 얼굴로 머리를 조아렸다.
"여왕님, 큰일났습니다."
"우리끼리 있을 때는 편하게 하셔도 돼요, 언니."
"하지만 어찌...."
니프엘라는 라임과 메어리 모녀의 눈치를 살폈다. 니프엘라보다 훨씬 군단장과 가까운 사이인 둘에게 여왕을 예전처럼 편하게 대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조금 난감해 질 가능성이 높았다.
"우리는 괜찮아."
"두 분이서 편하게 지내기로 하셨으면 사석에서야 뭐...."
다행히 라임과 메어리는 크게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니프엘라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레오 후작령을 정찰하던 수호대 애들의 보고야. 후작령 쪽에 대다수의 병사들이 집결 중. 후작령의 기사단일 것 같아."
"뭐? 그럴 리가. 언니가 분명 여신교단이랑 싸운다고 했잖아. 근데 후작이 왜?"
"후작이 어떻게 생각하는 지는 미지수지. 어떻게 할까? 먼저 요격해?"
갑작스러운 적의 움직임에 루나의 표정은 썩어들어갔다. 군단장이 즉각적인 움직임을 보일 수 없는 지금, 후작령에 모이는 기사단은 군단에 큰 위협이었다.
"......아무래도 루나 엄마는 성에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내가?"
"적 세력에 대한 억제력이 필요해요. 예, 엘프 여왕이 남작과 함께 있다면 그들도 쉽게는 무슨 짓을 하지는 못할 거예요. 라스피카의 주민들은 우리 군단의 백성들인 동시에, 저들에게 있어 인질이나 마찬가지인 사람들이니까요."
여왕의 힘과 권위. 메어리는 그 두 가지를 바탕으로 라스피카를 지키고자 했다.
"그럼 어떻게 해? 본진은?"
"간단하죠. 하서스."
메어리는 방 한 켠에 놓인 거대한 수박바를 들어올렸다.
"저 좀 업어주실래요?"
크르르르.
"꺄, 꺄아아악?! 쟤 뭐니?!"
"구울인데...아까부터 있었는데...."
"후우. 놀랐잖니. 전령으로 온 거면 빨리 메어리 양을 데리고 돌아가렴."
"......니프엘라 씨. 하서스는 군단 최고참이에요. 륜 엄마 다음 순번으로 아빠 부하가 되신 분인 걸요. 루나 엄마보다 훨씬 고참."
"......."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크르르.
"하서스가 신경쓰지 않아도 된데."
"죄송합니다...."
수 천년을 살아온 니프엘라는 살아 생전 처음으로 구울에게 사과를 했다.
* * *
"역시 사람 수가 늘어나니까 사냥 속도도 빨라지는 구나."
던전 지하 2층을 공략하는 공대원의 수가 늘어나니 사냥 속도도 배 이상으로 빨라졌다.
[주인님의 뜻대로!]
라스투자드의 12사도는 흑마법을 이용해 슬라임 드래곤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시체를 단 한 구만 흑마법으로 조종할 수 있음에도, 그들은 마석이 뜯겨나간 슬라임 드래곤의 시체를 조종하며 슬라임 드래곤들을 잡아먹었다.
[모두 죽여라.... 마석을 캐는 거다.... 군단을 위하여....]
라스투자드는 주문을 읊듯 12사도의 움직임을 재촉했다. 여전히 그는 빅슬라임의 시체를 조종하며 슬라임 드래곤의 배를 폭파시켰고, 죽은 슬라임 드래곤은 곧장 우리의 사냥감이 되었다.
서걱, 서걱!
철검이 반월의 궤적을 그리며 슬라임 드래곤을 무참히 베어 갈랐다. 마력조차 없음에도 불구하고 슬라임 드래곤은 젤리처럼 목이 잘렸다.
"크흐흐, 진짜 드래곤의 힘을 목도하라!"
그에이는 신이 나서 검을 휘둘렀다. 다른 이들과 달리 용인으로서의 면모를 완벽하게 갖춘 그는 5성답게 압도적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던전 공략에서 가장 성과를 내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하르퓨이어.
"라-라-라-----"
하르퓨이어의 맑은 노랫소리가 동굴 전체로 퍼져나갔다. 기나긴 통로에 부딪힌 소리는 슬라임들을 통과하여 우리의 귀로 메아리쳤다.
그리고 돌아온 소리는 하르퓨이어의 입에서 난 육성과는 확연히 다른, 슬라임 드래곤들이 찢어발겨지는 소리였다.
파바바박.
슬라임 드래곤들은 칼날에 갈려나가는 것 마냥 추풍낙엽으로 쓰러졌다. 라스투자드, 그에이를 비롯한 우리가 잡는 슬라임 드래곤은 그저 하르퓨이어의 음파 공격을 피해 살아남은 잔챙이를 처리하는 일 뿐이었다.
'폭렙하는구만.'
이전까지 성장이 더뎠던 보상이라도 받는 걸까. 하르퓨이어의 음파 공격으로 찢겨나간 슬라임 드래곤은 모조리 하르퓨이어의 경험치가 되었다.
"아아, 이것이 드래곤의 브레스라고 하는 것인가."
하르퓨이어의 숨결 덕분에 우리는 아주 수월하게, 불과 한 시간도 지나지않아 모든 슬라임 드래곤을 처리할 수 있었다. 이미 라스투자드가 많이 청소를 했지만, 하르퓨이어 덕분에 시간을 많이 단축할 수 있었다.
"고생했다. 이제 다왔다. 샤이탄?"
"예. 위치상으로는 던전의 입구 쪽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우리는 지하 2층의 심처에 도착하했다. 문은 따로 막혀있지 않았고, 우리는 거대한 공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역시."
공동 안에는 끈적한 체액의 줄이 사방팔방으로 늘어져있었다. 그곳에는 슬라임 코쿤 속에 갇힌 온갖 마물들이 있었고, 그 너머에는 작은 포털이 하나 있었다.
"저게 우리 던전을 습격한 거렁뱅이들의 말로인가. ......그런데 이상하군."
"적이 없어요."
사로잡힌 마물들만 있고 있어야 할 적이 없다. 단순히 이들은 슬라임 드래곤에게만 붙잡힌 걸까?
"뭔가...."
툭.
끈적한 무언가가 내 정수리에 떨어졌다. 푸쉬이이-하는 소리와 함께, 내 두피가 따가워지기 시작했다.
"으악, 씨발?!"
나는 손으로 내 머리칼을 빠르게 훑었다. 손에는 부글부글 끓으며 녹아내린 머리칼이 한움큼 가득했다.
"아, 젠장."
절로 욕지기가 나왔다.
"천장에서 기습하는 건 내 전용기인데?!?!?"
꾸르르르륵.
하늘에서 슬라임 드래곤들이 아가리를 벌리며 낙하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