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회
90일차
슬라임 드래곤들은 오랜 기간 굶주렸다.
주인이 던전을 떠난 이후, 그들은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는 던전에 갇혔다는 것을 직감하고 남아있는 마물과 마석을 먹으며 목숨을 이어나갔다.
가사상태에 이를 정도로 수면을 취하며 에너지의 소비를 막았고, 도저히 버틸 수 없겠다 싶으면 동족상잔을 일으켜 체력을 보충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한다면 한정된 공간 안에서 '먹이를 보충할 수단'이 하나는 있었다는 것.
살아남은 슬라임들은 살아남기 위해 더욱 강해져야만했고, 결국 약육강식이라는 말답게 강한 슬라임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 슬라임들은 오랜만에 바깥에서 들어오기 시작한 먹이에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심지어 너무나도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자들이라 어쩔 줄 몰라했다.
슬라임들은 당장이라도 그들을 뱃속에 집어넣고 사르르 녹여버리고 싶었지만,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 움직이는 것조차 잊어버린 슬라임도 있어 추격이 힘들었다.
움직이는 법을 까먹어버렸다. 그들의 움직임은 지극히 단순해졌고, 결국 던전 밖에서 온 것 같은 먹이는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느리기는 해도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언젠가는 끝에 닿으리라.
슬라임 드래곤들에게 내려진 명령은 침입자를 사로잡아 포식하는 것. 명령이 아니더라도 하겠지만, 명령까지 주어진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다.
엉금, 엉금.
달팽이도 이보다는 빠르겠다싶을 속도였지만, 슬라임 드래곤들은 열심히 앞으로 기어갔다. 먹이를 잡기 위해 그들은 전력을 다해 앞으로 기었다.
으적, 으적.
앞을 가로막는 것이 있다면 아가리를 벌려 먹어치운다. 자신이 앞에 있는 것을 치우는 사이, 다른 슬라임 드래곤이 등을 타고 앞으로 전진했다.
그들의 앞에는 공동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양식'하던 빅슬라임들이 배가 터지거나 핵이 뜯겨나간 상태로 죽어있었다.
으적, 으적, 으적.
일용할 양식이 전부다 죽은 것에 슬라임 드래곤은 슬펐지만, 그들으 눈물을 머금고 빅슬라임의 잔해를 먹어치웠다. 맛있는 먹이가 있기는 했어도 그들은 워낙 굶주려 빅슬라임의 잔해도 걸신들린 것 마냥 먹어치웠다.
슬라임은 먹어야먄 강해지는 마물이니까. 본능에 따라 슬라임 드래곤은 먹고 먹고 또 먹었다.
끼에에엑
앞을 가로막는 빅슬라임 중 일부가 격렬히 저항하며 슬라임 드래곤에게 이빨을 박아넣었다.
하지만 2성 빅슬라임의 수준으로는 3성, 그것도 대부분이 한계 레벨인 55레벨에 이른 슬라임 드래곤들을 이길 수 없었다. 빅슬라임의 이빨은 피부조차 뚫지 못했다.
콰득!
슬라임 드래곤은 빅슬라임의 대가리를 물어뜯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점액 한 방울 흘리지 않도록 말끔히 집어삼킨 슬라임 드래곤은 입가심을 하며 앞으로 계속 기어갔다.
그런데.
꾸르르르.
뱃속에서 무언가 끓기 시작한다. 뭐든지 산성액으로 녹여버리는 특성을 가진 슬라임이 배앓이라니. 선두에 있던 슬라임 드래곤은 자신이 뭔가 이상해진 건가 주변을 둘러본 순간.
끼에에에엑!!
바로 옆에 있던 슬라임 드래곤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거꾸로 엎어졌다. 전신이 보라색으로 물든 슬라임 드래곤은 몸을 푸르르 떨다가 더이상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잠시 뒤.
퍼---엉!!
슬라임 드래곤의 뱃속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슬라임 드래곤은 옆구리가 터졌고, 붉은 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점액질이 피처럼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끼익, 끼이익.
슬라임 드래곤은 제 몸에 흘러나오는 점액을 다시 먹으며 상처를 자가 치유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몸을 움직여야 했다.
으적, 으적.
옆에 있던 슬라임 ㄷ래곤들이 하나 둘 대가리를 돌렸다. 그들은 노려야 할 침입자를 노리는 게 아니라, 방금 옆구리가 터진 슬라임 드래곤의 상처를 향해 이빨을 들이밀려고 한 것이다.
콰득!
한 마리가 옆구리에 머릴르 집어넣었다. 서로 서로 단단한 피부를 가지고 있어 서로의 피부는 뜯지 못해도, 겉면이 터져 살점이 드러난 정도는 얼마든지 뜯어먹을 수 있었다.
으적, 으적, 으적.
보라색 빅슬라임을 먹어치웠던 슬라임 드래곤은 옆구리가 터지고, 다른 슬라임 드래곤들에게 먹혔다. 동료-?-를 순식간에 자신의 경험치로 만든 슬라임 드래곤들은 다시 앞으로 전진했다.
퍼엉, 퍼엉, 퍼어엉.
으적, 으적, 콰드득.
먹고, 폭발하고, 먹고, 폭발하고.
슬라임 드래곤들은 단지 '먹어야 한다'는 생각만 남아, 무엇이 이상한 지도 눈치채지 못했다.
* * *
그 시각, 라스피카 성.
"여성과 여성이 함께 사랑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자가 난입하여 끼어듭니다. 이 때는 어떤 형량을 적용해야겠습니까?"
"몹시 어려운 문제군…. 남자도 분명 두 여자의 틈바구니에 꼴려서 들어간 것일텐데."
"서로 키스하는 두 여자를 두고 발기하지 않을 남자는 없는 거라스. 그들이 섞는 혀 사이에 자지가 들어간다고 생각하면...끼, 끼요오옷."
"뭐라는 거야. 그건 여자 입장도 들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인간, 오크, 안드라스, 크림엘프가 한 자리에 모여 한창 회의를 하는 중이었다. 인간의 일원으로 자리에 배석한 살렘은 다양한 종족들의 열띤 토론을 기록했다.
"들어보게. 여자와 여자 사이에 하는 건 의미가 없지 않나? 보지를 쑤실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뭐래. 마녀 레비즈가 엘프들 보벼서 범한 건 잊었어? 군단장님이 말씀하셨잖아. '아아, 그것은 가위치기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한 번 해보고 싶은 거라스. 하지만 그런 취향의 상대를 찾는 건 몹시 어려운 거라스."
"그렇지? 거기에 동성끼리 하는 사람들이 남자까지 끼워주려고 하겠어? 안 될 거야."
"......저기."
대화가 길어질 것 같은 상황에 살렘은 손을 들었다.
"그건 여자분들 입장을 들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호오."
"구체적으로는?"
"그, 여자 두 명이서 오케이라고 하면 합법인 걸로."
"명안이라스!"
아인들은 살렘의 제안에 박수를 쳤다.
"두 여자가 동시에 남자 난입을 인정한다면 화간!"
"하지만 한 명이라도 거부한다면 그건 강간이지."
"원하지 않은 플레이는 라스가 아니야. 성행위를 거부하는 자를 상대로 강제 라스를 하는 건 어디까지나 군단의 적이나 포로를 상대로만 가능한 거지. 음, 괜찮네. 그럼 형량은 어떻게 하면 좋다고 생각해, 신입?"
"어, 음…."
살렘은 볼을 긁적이며 답했다.
"......남자의 경우, 목장에서 두 명의 아인을 상대로 라스해서 알을 두 개 낳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인간, 아니 살렘. 그대는 천재라스."
"...과연. 엘프 세 명의 자지가 되려면 이 정도의 머리는 되어야 한다는 건가."
"어떻게 하지…? 동생들한테 미안한 걸. 너 오늘 들어가기 전에 나랑 잠깐 얘기 좀 하자."
"하, 하하하."
살렘은 오한에 몸이 으스스 떨렸다. 마치 등 뒤에 누군가가 서있는 것만 같은-
톡톡.
"누구-"
살렘은 검은 투구를 뒤집어 쓴 구울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곧 기절하고 말았다.
* * *
"빡대가리라서 살았다. 흐흐, 저 놈들 시폭인 거 전혀 모르는 것 같은데?"
던전의 안으로 다시 들어온 우리는 천천히 빅슬라임들을 부활시키며 슬라임 드래곤들을 터뜨렸다.
몸이 터진 시체는 다른 슬라임 드래곤의 먹이가 되었고, 그들은 또다시 다른 빅슬라임을 먹다가 터지며 뒤의 슬라임 드래곤들에게 먹이가 되었다.
"아아, 이것이 바로 무한루프라고 하는 것이다."
사실 무한까지는 아니다.
시체폭탄으로 이용할 빅슬라임의 수가 떨어지거나, 아니면 시체폭탄을 만들 라스투자드의 마력이 떨어지면 더이상 사용할 수 없는 전술이다.
꿀럭, 꿀럭.
그러나 빅슬라임은 이미 엄청나게 많이 죽었다.
나와 륜이 합심하여 죽인 빅슬라임의 수만 100이 훌쩍 넘었고, 라스투자드에 의해 서로 잡아먹으며 죽은 빅슬라임도 기백이 넘을 정도였다.
슬라임 드래곤 두 명의 몸을 구슬만한 하급 마석이 가득 채울 정도까지 파밍을 했다. 그러니 시체폭탄으로 이용할 빅슬라임의 수가 적을 리가 없다.
"펑펑 터지는 게 꼭 불꽃놀이 하는 것 같구만. 륜, 혹시 그런 전술이 있는 거 아느냐? 인간폭탄이라고 하는 건데."
"그거 지난번에 주인님이 사용하신 거 아녜요?"
"그 때는 인간성폭탄으로 미약을 터뜨린 거고, 진짜 인간이 터지는 거지. 쾅, 하고."
"그건 좀 그렇지 않아요? 눈앞에서 사람이 터지는 건데."
"그렇긴 하지? 쟤들이야 전혀 신경 안쓰고 있지만."
동료가 옆에서 터지든 말든 신경쓰지 않는다. 오히려 터지자 마자 낼름 대가리를 돌려 동료를 먹어치운다. 동료라기보다는 그냥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군생체같은 느낌이 강했다.
"저걸 나중에 어떻게 써먹는 방법이 없을까...."
"시체를 먹게 하려고 하는 거예요...?"
"아니지. 역병을 퍼뜨리는 거다. ...연구를 좀 해봐야겠는 걸."
[시독을 사용하시려고 하는 겁니까? 그런 거라면 제가 조금만 더 강해지면 할 수 있을 겁니다.]
"아니다. 시독은 사용하지 않아."
시독말고 다른 독을 사용할 뿐. 나는 머릿속으로 레오 후작령이나 사지타리우스 백작령, 기타 다른 인간 세력을 정복할 계획을 생각하며 슬라임 드래곤들이 서로 잡아먹으며 자멸하기를 기다렸다.
"주인님, 라스투자드의 마력이 줄어든 것 같습니다. 마액을 보급하겠습니다."
[잠깐, 기다리시오. 마담이여, 나는 아직 마나가 쌩쌩한, 으어어억!]
샤이탄은 라스투자드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 점액 주머니를 집어넣었다.
서브 던전에서 잡은 슬라임 드래곤 껍질 안에 채워넣은 것은 당연히 마액이었고, 라스투자드는 마액을 원샷하며 마나를 회복했다. 마나를 회복한 만큼 더 많은 시체 폭탄이 일어나 슬라임 드래곤들을 터뜨릴 것이며, 이제 모든 사냥의 공은 라스투자드의 몫이다.
"레벨적으로나 마력적으로나 라스투자드가 전부 몰아서 잡는 게 가장 좋기는 한데...."
"뭐 문제 있으세요?"
"시간이 문제다."
느려도 너어어어무 느리다. 마력 소비와 경험치 상승의 효율은 극한으로 뽑아냈지만, 사냥의 시간이 너무 느렸다.
"저 놈들은 전생에 굼벵이가 아니었을까? 슬라임 드래곤이 아니라 슬라임 굼벵이가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나무늘보보다 더 느리게 움직일 수 있는 거지?"
우리가 본진에 올라가 재정비를 마치고 내려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직까지 던전 입구에 도달하지도 못했다. 저 정도의 속도면 한 시간에 1km는 제대로 갈지 모르겠다.
"그래도 제법 빨리 앞으로 오고 있지 않아요?"
"앞에 먹을 거 있을 때만 빨리 움직이잖냐. 심지어 그것도 라임이가 슬라임 시절이었을 때보다 더 느려. 젠장."
[군단의 주인이시여, 저것 혹시....]
라스투자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체를 다시 일으켜세웠다.
"응? 뭐가?"
[...아닙니다. 제 기우가 틀림없습니다.]
"말해봐라.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있을 수 있지 않느냐."
[......정원초과로 인한 이동의 패널티가 아닐지?]
"......호오."
역시 지능 높은 흑마법사. 제법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다.
"3성짜리 마물이 저런 속도를 일부러 내는 건 불가능하지. 음. 라스투자드여, 네 안목에 찬사를 보내마."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정원초과에 따른 이동 패널티가 있다면...아마도 이 층계에는 엄청난 수의 슬라임들이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천 마리는 훌쩍 넘겠네요?"
"흐흐, 그게 다 마석이라는 얘기지. 라스투자드, 언제든지 적이 본래의 속도를 되찾을 수 있다는 걸 생각해라. 시체폭탄을 만드는 속도를 늦춰선 안 돼."
[......왠지 입을 잘못 놀린 것 같습니다?]
"흐흐흐, 뭘 그러냐. 그게 다 네 경험치가 되어줄 놈들인데. 급하게 가지 말고 차근차근 가도록 하자꾸나. 그 동안 느긋하게 산책이나 하자고."
라스투자드가 열일하는 사이, 나는 륜과 샤이탄을 안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주인님, 그럼 그거 해요!"
"안 돼. 위험하다."
마음같아서는 당장 들박하는 자세로 산책하고 싶었지만, 언제 적의 수가 정원 이하로 줄어 속도가 빨라질 지 모른다.
눈으로 보기에도 제법 강해보이는 놈들이니, 중력 백 배를 받고 있다가 풀린다는 생각으로 언제든 대처할 수 있게 긴장해야했다.
"느긋하게."
한 시간.
"...조금만 더."
두 시간.
"......이 새끼들 그냥 이게 최고 속도 아닌가, 씨발?"
세 시간.
우리가 슬라임 드래곤들의 이동 능력이 퇴화되었다는 걸 깨달은 것은 라스투자드가 500이 넘는 슬라임 드래곤을 죽이고 난 다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