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비만 오크 40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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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스가 발견한 장소는 나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장소이며, 한동안 내가 신경도 쓰지 못했던 장소였다.
"...이런 곳이 있었습니까?"
심지어 샤이탄마저도 직접 본 적이 없었던, 우리 던전에서는 가깝지만 너무나도 멀었던 버려진 장소. 사실은 간부 급 이상의 존재들에게 있어서는 존재하지만 갈 필요가 없었던 장소.
"어. 내가 처음 식수원 확보하려고 길 뚫어놓은 곳이다."
우리 던전의 뒷 구멍. 깎아지른 절벽 사이에 나는 라임(당시 2성 슬라인 시절)과 슬라임 분대를 이용해 아래로 내려가는 비탈길을 파내려갔다. 덕분에 우리는 계곡의 시원한 물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주인님께서 물도 안 묻히게 하려는 배려 덕분에 발견하지 못한 셈이 되었네요. 어쩐지 1층 아무리 뒤져바도 안 나오더라."
"지하 1층으로 내려가는 입구는 던전 안에 있던 것만 생각하여, 던전 밖에도 새로운 입구가 열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건 참 난감하군요."
비탈길의 모퉁이. 오크나 구울 등이 물을 뜨러 가는 길 끝에 새로운 입구가 생겨났다. 계단이 아닌 안쪽으로 들어가는 구멍이었고, 누가봐도 던전의 등급이 올라감에 따라 생긴 새로운 장소였다.
"들어가지 않고는 안 되겠군. 이 안에 적의 포털이 열렸을 가능성이 높다."
"위험하지는 않을까요?"
"위험하지. 근데 진짜 위험한 건 포털을 열고 들어온 놈들이 아니야."
"...슬라임들."
샤이탄은 금방 정답을 꺼냈다.
"지하 1층에도 엄청난 슬라임 드래곤이 있었죠. 그게 D등급으로 올라가면서 개방된 곳이었습니다. 만약 그게 C등급으로 올라가면서 그 난이도도 올라간다고 가정하면...!"
"그래. 최소 4성급 슬라임이 판을 치고 있다는 거지."
최소 레벨 55, 최대 레벨 75. 어쩌면 5성짜리 마물이 나올 경우, 90레벨에 이르는 괴물이 튀어나올 수 있다. 이곳은 다름아닌 현 1위, 바알이 과거에 운영했던 던전이니까."
"이대로는 안 된다. 당장 들어가서 슬라임들을 때려잡아야 해...!"
조바심이 생겼다. 나는 당장 륜을 데리고 안으로 달려갔다.
"기다려주십시오, 주인님. 이건 오히려 좋은 게 아닐지?"
샤이탄은 꼬리로 내 발목을 붙잡았다. 마음만 먹으면 샤이탄을 질질 끌고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지만, 나는 샤이탄의 말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슬라임들이 얼마나 강할 지는 모르지만, 새롭게 포털을 열고 들어온 적들과 서로 싸우게 될 것입니다. 상처를 입을 것이고, 저희는 어느쪽이든 약화된 전력을 상대하면 되는 셈이죠."
"그러니까 주인님 자주 하시던 말씀 빌리면...손 안 대고 코 푼 격인가요?"
"맞는 말이다. 그건 내가 너무나도 바라마지 않는 이상적인 그림이지."
서로 헐뜯고 싸우고 내분을 일으키다가 결국 전력이 약화되고, 약화된 양쪽 세력을 잡아먹는다. 그건 확실히 우리 군단에 있어서 아주 좋은 상황이다.
"하지만 샤이탄, 중요한 걸 잊은 듯 하구나. 지하에 새롭게 생겨난 이 공간에 자리잡은 슬라임은 단순한 슬라임이 아니다!"
"......! 그렇군요. 주인님께서는 주인을 잃은 슬라임들을 군단의 일원으로-"
"저게 다 마석이라고! 경험치다!"
"...예?"
"우리 군단이 응당 가져야 할 경험치이자 마석이자 점액 덩어리란 말이다! 그런데 그걸 운좋게 포털을 연 놈들이 사냥을 한다? 안 돼! 경험치 손실, 마석 손실 때문에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이건 일종의 MMORPG에서 으레 일어나는 필드 사냥과 마찬가지다.
사냥터는 한정되어있고, 몹은 무한히 리젠되지 않으며, 오히려 한계가 있다.
"심지어 죽은 시체들도 가만히 있는 게 아니야! 슬라임 놈들은 동족상잔이 기본인 녀석들이라 죽은 놈들의 시체를 마석째로 집어삼킨다!"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우리 던전에 포털을 연 놈들은 단순히 우리 군단을 습격한 놈들이 아니라, 감히 우리 군단이 응당 가져야 할 3~4성 슬라임들의 경험치와 마석을 훔쳐가려고 하는 도적떼나 마찬가지다!
"샤이탄, 전령을 보내라! 라스베가스, 라스피카, 양 쪽에서 내가 지시하는 이들을 당장 이쪽으로 보내다오!"
"알겠습니다. ...잠시만요. 하서스와 라스투자드 중 누구를 보내면 되겠습니까?"
턱. 나는 샤이탄의 꼬리를 쥐고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샤이탄은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다가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미안하지만 걔들 둘은 전투원이라서. ......미안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유니콘 한 마리라도 던전에 남겨두는 건데."
"자, 잠시만요. 진짜요?! 제가...가는 겁니까?"
"히힛, 샤이탄 화이팅!"
륜은 얄밉게 주먹을 불끈 쥐며 샤이탄을 응원했다. 비탈길을 따라 내려오는 하서스와 라스투자드는 샤이탄의 뒤에 서서 볼을 긁적거렸다.
크아아아.
"응, 뭐냐? 하서스? 네가 직접 달려가겠다고?"
크르르르.
"샤이탄이 걷든 뛰든 날든 하는 속도보다 네가 라스베가스랑 라스피카랑 둘 다 달려가서 상황을 알리는 게 더 빠를 것 같다고? 하서스, 그러면 그만큼 네가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이 늦어지게 될 거다. 괜찮겠냐?"
크르르르르르.
"...몸 쓰는 건 자신있고, 서브 던전들 돌면서 힘을 기르면 된다? 당장은 네가 투입되는 게 더 나을지 몰라도, 강적이 있으면 그들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데려오는 게 쉽게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허락만 해주신다면 죽은 인간들과 구울 합성으로 더욱 강해지면 그만이다? ......하서스, 너는 전생에 성자였나?"
크르륵?
하서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서스의 말은 일견 타당했다.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날개가 있지만 하피(1성)보다 날아가는 속도가 느리다.
다리가 있지만 당연히 구울보다 달리는 속도가 느리다.
더군다나 레이디가 전력질주로 달려가는 것이 다소 경박한 일이듯, 마담이자 마왕의 딸인 샤이탄이 전력 질주로 달려본 적은 없다.
"미안하구나, 하서스. 네 이름을 잘못 붙인 것 같구나."
크르르.
"뭐? 하서스라는 이름도 나름 괜찮다고? ......약속하마. 너는 꼭 내가 언데드의 수장으로 만들 것이다. 다녀와다오."
크르륵.
하서스는 내가 급히 적은 양피지를 양손에 들고 비탈길을 다시 올랐다. 라스투자드는 그런 하서스의 뒤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해골바가지가 끝에 걸린 지팡이를 들고 바닥을 툭툭 쳤다.
[군단의 주인이시여, 하서스가 빈 공백은 제가 채우도록 하겠습니다.]
"가끔가다 너희 둘을 보면 정말 언데드 답지 않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 흐흐, 알았다. 그럼 가자."
전위에 탱커이자 근딜인 오크, 나.
중위에 원딜 하이엘프, 륜.
그리고 후위에 흑마법사인 구울 리치, 하서스.
그야말로 던전 공략을 위한 삼박자가 어우러지는 완벽한 배치였다.
"저, 저는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원군 요청을 했어야 했을 샤이탄의 일을 하서스가 대신하게 되었다. 따라서 샤이탄의 역할은 붕 떠버렸고, '전력'으로서의 가치는 다소 떨어지는 그녀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샤이탄, 네 역할은 이것이다."
나는 샤이탄에게 내 로브를 입힌 뒤, 그녀에게 빈 양피지 하나를 건넸다.
"매핑해라."
* * *
〈그 시각, 사지타리우스 백작령 케이론 성 대장간.〉
카앙, 카앙, 카앙.
맑은 망치소리가 대장간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속옷에 가까운 탱크탑만 입은 작은 소녀는 땀을 뻘뻘 흘리며 모루에 망치를 두드렸다.
"공주, 언제까지 여기서 헛짓거리만 할 건가?"
소녀, 로도페리의 곁에는 수염이 길게 늘어진 드워프들이 불만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몇몇은 당장이라도 로도페리를 잡아다가 끌고 가고 싶었지만, 같은 드워프로서 신성한 대장간이 있는 드워프의 작업을 중지시키는 건 죽자사자 싸워보자는 의미나 마찬가지였다.
"공주, 언제까지 여기서 이러고 있을 참인가?"
"조용히. 방해하지 마."
물론 정신은 집중하고 있는 대장장이에게 말을 거는 것도 무례한 건 마찬가지. 하지만 로도페리의 곁에 모인 장로들은 대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
"장난치지마라, 공주! 우리와 말을 섞지 않기 위해 쇠를 괴롭히고 있는 걸 뻔히 알고 있거늘!!"
로도페리는 드워프 장로들의 말을 무시하기 위해 망치를 들고 대장간에 들어갔다. 그건 일종의 시위였다. 드워프와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는.
카앙, 카앙.
망치가 다시 한 번 모루를 때렸다. 로도페리가 달구어진 쇠를 찬물에 집어넣으며 잠시 땀을 닦았다. 드워프들은 모두 눈에 핏발이 선 채 분노로 흥분해있었다.
"그래, 도대체 뭐가 문제야."
"조속히 왕성으로 귀환하라는 국왕폐하의 어명을 전하러 왔다고 몇 번을 말했나!!"
"그래? 그럼 지금 전했잖아. 그럼 돌아가면 되겠네."
"공주! 그대를 왕성으로 데려가겠다는 거다, 이 머저...크흠."
드워프 한 명이 성질이 나서 실언을 할 뻔 하자, 로도페리는 눈을 치켜떴다가 아쉬운 듯 혀를 찼다. 드워프에게 왕족모독죄는 없으나, 실언을 핑계로 드워프들을 물리기에는 충분한 명분이었다.
"음...공주님, 왕성을 다녀오시지요?"
당연히 성 내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드워프들의 소란을 잠재우기 위해 사지타리우스 백작이 직접 나섰다. 그가 아니면 드워프 왕국의 공주와 장로들을 상대할 이가 없기는 했다.
괜히 다른 이가 나섰다가 잘못하기라도 한다면, 드워프들조차 인류연합을 배신하고 마왕군에 붙을 게 분명했기에.
"국왕폐하께서도 공주님을 걱정하시어 부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개소리. 하나뿐인 딸이 강간 피해자가 될까봐, 그리고 그로 인해 자기 명예에 금이 갈까봐 왕성에 감금하려는 거 누가 모를 줄 알아?"
로도페리의 신랄한 말에 드워프 장로들은 침묵했다. 그들 또한 한 때는 로도페리의 외유를 눈감아줬던 이들이었고, 로도페리 또한 그들의 도움 덕분에 자신이 인간 세상을 영위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난 안 돌아가. 가서 아버님께, 국왕 폐하께 전해. 꼬우면 의절하고 왕족에서 내쫓으라고. 그냥 로도페리로 살 테니까."
"공주님!!"
"아, 그래. 명분이 필요하지? 음...그럼 이건 어때?"
타앙.
로도페리는 대장간에 즐비하게 늘어진 장비들-자신이 직접 만든 드워프제 무구들을 가리키며 씩 웃었다.
"내가 인간들에게 판 장비들이 마왕군의 손에 들어가고 있거든? 그러니까 내가 그걸 직접 되찾아올게. 그러면 되지 않겠어?"
"끄응...!"
"흐흐, 그치? 세상 어떤 드워프가 자기 장비가 팔지도 않은 자의 손에서 휘둘러지는 걸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있겠어. 안 그래?"
로도페리는 이전에 만들어둔 단검을 빙그르르 돌리며 씩 웃었다.
"내 아이들 되찾아오기 전까지는 절대 못 돌아가."
* * *
"흐허허, 이번 색스는 제법 튼실하구나!"
퍼억, 퍼억.
슬라임들이 추풍낙엽처럼 터져나간다. 앞을 가로막는 놈은 색스 마크3으로 베고, 다리를 공격하려고 하는 놈은 밟아서 터뜨리고, 옆에서 달려드는 놈은 엘보우로 벽에 찍는다.
"괜히 쫄았군. 빅슬라임 밖에 없다니. 흐흐흐."
새롭게 열린 지하 2층(임시 명명)은 입구부터 슬라임들이 차고 넘쳤지만, 그 대부분이 빅슬라임이었다. 그 수가 제법 많기는 많아서 내가 일일이 상대할 수는 없었지만, 이곳에는 나 혼자 온 게 아니다.
"주인님, 쏠게요!"
륜이 바람화살을 난사했다. 나는 핼버드를 위로 들고 몸을 빙글빙글 돌렸다.
"아아, 이것은 휠윈드라고 하는 것이다!!"
부웅, 부웅.
바람개비처럼 돌아가는 핼버드가 천장의 슬라임들을 짖이긴다. 옆에서 달려드는 빅슬라임들을 향해, 바람화살이 날아들었다.
파바박!!
륜은 바람화살을 내 '배'에 조준했다. 휠윈드로 돌아가는 배에 바람화살은 사방으로 튕겨나갔고, 나를 노리고 달려들던 슬라임들은 내 배에 튕겨나간 바람화살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륜, 조심해라! 몇 놈 흘렸다!!"
동료의 시체 사이로 숨은 슬라임들이 빛처럼 나를 제쳤다. 놈들은 좌우로 지그재그 움직이며 우리의 공격을 피했다.
노리는 것은 다름 아닌 륜-뒤에 있는 샤이탄. 그녀의 하복부에는 옷으로도 가릴 수 없는 보라색 빛이, 인장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슬라임들으 샤이탄의 인장을 범하려고 달려들었다.
"막아!!"
[뜻대로.]
꿀럭,꿀럭.
몸이 터진 빅슬라임들이 갑자기 륜의 앞에 탑을 쌓았다. 순식간에 만들어진 시체 슬라임의 벽에 빅슬라임들은 그대로 몸을 들이받았다.
으적,으적,으적!
슬라임과 시체슬라임들은 서로를 잡아먹으며 동족상잔을 일으켰다. 그 사이 나는 몸을 돌려 살아남은 슬라임들을 핼버드로 때려죽였다.
"흐흐, 잘했다, 라스투자드!"
[...마나 소비가 너무 비효율적입니다만, 쓰다 버리는 정도로는 충분합니다. 후방은 얼마든지 맡겨주시길.]
구울 리치.
라스투자드의 근처에는 점액을 흩뿌리며 죽어가는 슬라임들로 넘쳐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