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비만 오크 39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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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라스토피아 프로젝트를 위한 제 28회 회의를 시작하겠다. 참석자를 확인하지. 오크 대표 나, 군단장."
원형의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나는 가장 먼저 손을 들었다. 내 오른쪽부터 천천히 한 명 씩 손을 들기 시작했다.
"하이엘프 대표, 륜이에요!"
"슬라임 대표, 버지나니야 라임 비르고."
"쿠앤크엘프 대표, 여왕 루나."
"인간 대표, 라스베가스 책임자 에일라 아리에스다."
"서큐버스 대표, 샤이탄이옵니다."
"군단 내 던전 주인들의 대표, 그레모리 분신이야."
우리 군단의 미래를 책임질 주요 인사가 전부 한 자리에 모였다. 각 종족을 대표하는 이들이자, 우리 군단에서 중책을 맡은 간부들이자, 내가 지키고 아껴야 할 가족들이었다.
"우리는 레비즈의 토벌대로부터 승리를 거머쥐었다. 남작령 전체를 손에 넣었고, 거기에 성검까지 손에 넣었지.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위기가 남아있다."
레비즈를 이기고 남작령을 손에 넣은 것으로 우리의 위기는 끝나지 않는다. 전선이 확장됨에 따라 새로운 적이 등장하기 마련이고, 그 적은 남작령보다도 훨씬 강대했다.
"새로운 간부 겸 뉴페이스를 소개하도록 하지. 드라고니안은 앞으로 나오도록."
"그에이 칸세르. 군단의 위대한 피를 이어 다시 태어난 쿼터 드래곤입니다. 크크크, 너무나도 눈부신 아름다움에 눈이 부시나, 이 용안은 아름다움이 더 잘 보이지요. 크흐흐."
"라인! 라임 엄마 딸! 슬라임 드래곤 아니야! 드래곤 슬라임이야!"
"......둘 다 드라고니안 종족이다."
간부들은 이미 내 계획을 전해들었다. 하지만 새롭게 태어난 드라고니안 종족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간부들은 두 명의 모습을 하나 둘 살피며 드라고니안의 특징을 파악해나갔다.
"나는 내 아들들을 비롯하여 군단의 병사들에게 드래곤의 피를 섞을 생각이다. 군단 전체가 드라고니안이 되려면 제법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동안 우리는 또다른 위기를 극복해야할 것이다. 그에이."
"예."
진화한 그에이는 이상한 소리를 가끔 하더라도 진지한 상황에서는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다. 나는 그에이와 에일라를 번갈아보며 물었다.
"레오 후작령의 전력과 우리 군단의 전력을 비교하면 어떤가?"
"불리합니다."
에일라는 단언했다.
"제 견해로는 저희 가문의 힘과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비유하자면 성검의 용사 세 명 분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는 셈입니다."
"샤이탄, 내가 이해할 수 있게 치환해다오."
"성검이라는 변수를 일반 토벌군의 전력으로 변환하였을 때, 10위권 후반의 던전을 상대로도 1:1로 붙어볼 수 있는 수준입니다."
"대단하군."
아직까지 30위권은 커녕 40위권도 제대로 도모하지 못했다. 그런데 10위권 전력의 적과 얼굴을 맞딱드리게 생겼다? 머리에 경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군단장님, 걱정마십시오. 레오 후작령의 전력이 강하다고는 허나, 강력한 드래고니안 군단의 앞에서는 뼈도 추리지 못할 것입니다."
"하루에 고작 10명씩 늘어나는데? 레오 후작령 인구 몇이나 되냐?"
"......30만 즈음 될 겁니다."
그에이는 고개를 숙였다. 나는 순간 단위를 잘못 들었나싶은 착각이 들었다.
"30만? 아무리 후작령이라고 해도 30만은 갑자기 아니지 않냐?! 미친, 갑자기 왜 그렇게 단위가 많이 뛰는 거야? 남작령이랑 너무 많이 차이나잖아."
"비르고 남작령, 최하."
"주인님, 이곳은 왕국에서 가장 낙후된 영지입니다. 사실상 가문의 전통만으로 버텨온 셈이죠."
"오랜 역사라는 네임벨류가 없었으면 진작에 다른 영지에 먹혔을 곳이라 이거지? 크으...."
남작령이 쉬워서 그만큼 성장의 발판이 되기에 좋았지만, 발판을 디디고 올라서니 너무 큰 거인을 만나버리고 말았다.
"끄응. 그래도 갑자기 너무 올라가버렸잖냐. 3만도 아니고 30만...."
남작령의 인구라고 해봤자 고작 5천 정도가 전부였을 것이다. 아무리 비르고 남작령이 몰락 직전의 영지라고 해도, 이웃한 영지의 후작령이 30만이나 된다는 건 너무 스케일이 컸다.
"근데 30만이면 후작령 치고는 제법 많은 거냐?"
"공식적인 인구가 대략 그 정도입니다. 왕국령 안에서는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곳이기도 하고요."
"10%만 토벌대로 만들어도 3만이 나오겠구만. 으으, 비르고 남작령은 최약체였군. 괜히 알아버렸어."
우리가 마주한 첫 번째 위험 요소.
그건 바로 인구 30만이나 되는 후작령, 레오 후작가였다.
던전의 마물들이 인간들을 공격한 걸 넘어서 남작령 전체를 점령한 걸 알게된다면 후작령이 문제가 아니라 왕국 전체에 비상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그 선봉에는 레오 후작령의 토벌대가 서게 될 터.
"레오 후작은 어떤 자지? 우리 군단을 공격할만한 자인가?"
"자지가 아닙니다. 여자입니다."
"아싸! ...크흠, 에일라야. 알려줘서 고맙구나."
"에일라 님, 아닙니다. 남자입니다."
"......?"
그에이는 에일라의 말을 정정했다.
"여자가 자지가 되었다 그 말인가?"
"정확히는 이전 레오 후작이 자식에게 작위를 물려주고 행방불명되었습니다. 그렇게 된 지 얼마 안 됐습니다. 한 달이 조금 지났죠."
"자식? ...쯧, 됐다. 후작가의 작위를 물려받을 자식을 가진 여자라면 분명 세월의 힘을 제대로 맞딱뜨렸을 게 분명할 터. 그에이, 새 후작에 대해 알고 있...."
에일라가 나를 향해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었다. 나는 서서히 썩어들어가는 그에이의 표정에 아차 싶었다.
"그 새끼냐? 네게서 여자를 빼앗아갔다는 그 놈?"
"송구스럽게도."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갑자기 후작이 행방불명되고, 그에이와 악연이 있는 자가 작위를 이어받다니.
"레오 후작령을 점령해야할 이유가 하나 생겼군. 그에이, 군단을 위해 더욱 열심히 임무를 수행하라. 만약 우리가 레오 후작령을 도모하게 된다면, 내 특별히 너를 위한 포상을 내려주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위대한 피를 이어받은 것에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에이는 꾸벅 허리를 숙였다. 우리 군단과 그에이를 생각한다면 당장 레오 후작령을 도모해야했으나, 후작령은 너무나도 강대했다.
"행방불명된 후작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도록 하지. 후계자 놈은 후작가를 완전히 통솔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 생각해보면, 놈들은 아마 근시일 내에 남작령을 탈환하러 병력을 파견할 것이다. 그럼 또 싸워야 할 터. 륜아, 이럴 때 좋은 방법이 있다면 무엇이 있겠느냐?"
"음...싸우지 않고 이기는 거요!"
"그렇다. 그걸 위한 좋은 방법은?"
"불가침 조약 같은 걸 맺는다거나 하는 건가요?"
"절반 정도는 맞췄다. 정확히는 적이 우리를 공격하지 못하게 하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짝. 나는 간부들의 시선을 모았다.
"내게 계획이 있다."
* * *
〈잠시 후, 알로켄 던전.〉
"푸하하, 미친 새끼."
한참 전장에서 적을 향해 마법을 퍼붓던 그레모리(본체)는 배를 부여잡으며 큭큭 웃기 시작했다. 그레모리의 옆에서 그녀를 보호하던 퍼시발은 날아오는 화살을 검으로 튕겨내며 물었다.
"미친 놈들이긴 하지요. 그렇게 많은 물자를 빼앗겼으면서도 계속 싸움을 걸고 있으니."
"아냐, 아냐. 네 아빠 얘기하는 거야. 내 자지."
"......실언이었습니다."
"괜찮아. 나도 어이가 없어서 했던 말인 걸."
그레모리는 분신이 들었던 파후우의 계획을 속으로 삼켰다. 딱히 숨길 것 까지는 없지만, 워낙 기상천외한 계획이라 그레모리조차도 곱씹어봐야 할 정도였다.
"가끔가다보면 말이야, 내 남편은 오크가 아닌 것 같아."
"군단장님...아버님은 그 누구보다 오크 다우십니다."
"그래. 아주 머어어언 옛날에 한낱 미물로서의 오크랑 무척이나 닮았지. 고대 오크라고 하던가?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상식을 벗어나는 계획을 짠다는 거야. 들어볼래?"
그레모리는 파후우의 계획을 정리하여 퍼시발에게 전달했다. 퍼시발은 간략히 요약된 계획에 몸서리를 쳤다.
"역시 군단장님은 대단하십니다. 잘만 하면 레오 후작령과는 척을 지지 않을 수도 있겠군요."
"그뿐이겠어? 레오 후작령에 모이고 있을 성기사단도 와해 될 거야. 한 두명 피보는 게 아닐 걸? 와...진짜 생각하면 할수록 악랄하네. 나 진짜 선택 잘 한 것 같아."
"어떤 선택 말씀이십니까?"
"네 아빠한테 다리 벌린 거."
노골적이고 선정적인 그레모리의 표현에 퍼시발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항복이라는 좋은 표현도 있습니다만."
"아냐, 아냐. 단순히 항복으로는 부족해. 키메리에스도 암두시아스도 똑같이 항복했잖아. 인간 모험가들 중에서도 릴리같은 애들도 있고. 걔들이랑 나랑 차이가 뭐가 있을 것 같아? 던전 주인? 언제 걔가 던전 주인이랍시고 무조건 살려주는 거 봤니?"
"그레모리 대모님도 확실히 죽이려고 드셨죠. ...아더 형님으로 능욕하려고 했었고."
"그래. 나도 그냥 먹고 버릴 여자가 될 수 있었어. 그리고 나쁜 마음을 먹었으면 분명 그랬겠지. 56위 위의 놈들을 상대할 때 '네 이놈, 그레모리는 어떻게 했느냐?!'라고 하면 '따먹고 버렸다!!'고 할 놈이니까."
그레모리는 빈정거리며 웃었다. 퍼시발은 반론을 하지 않았다.
"진심으로 군단의 일원이, 가족이 되겠다고 마음을 먹으니까 걔도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더라. 아니었으면 아마 오크들 공공재로 돌려졌을 거야. 분신이랑 함께."
"거기까지는 안 그랬을 것 같은데...."
"아냐. 분명 그랬어. 지금 레비즈 상대로 생각하는 것만 하더라도 그렇잖아? 군단의 부하들은 죽어라 아낄지 몰라도, 군단 밖의 존재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배제하는 녀석이야. 으으, 진짜 한 편 먹기를 잘 했네."
"차라리 그런 표현으로 해주십시오."
퍼시발은 다시 검을 들었다. 그레모리도 높이 손을 들어올리며 마나를 끌어모았다.
"얘, 우리쪽도 한 번 작전 세워볼까? 나도 사랑받고 너도 사랑받는 완벽한 작전을 말이야. 비밀리에."
"......혹시나 저 자를 상대로 하는 비밀작전이라면 곤란합니다. 그도 그럴 게-"
다그닥, 다그닥.
던전의 입구로 들어온 군마는 강철의 판금갑옷을 입은 채 작은 체구의 소녀를 태우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군마의 위에 올라탄 소녀는 은빛이 번쩍이는 갑옷으로 중무장 한 채 도끼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새로운 종족의 미녀가 저기 떡하니 있는데, 군단장님께 당연히 보고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절대 안 돼. 그럼 분명 그 새끼 발정나서 드워프 따먹겠다고 올 거야."
"아무리 그래도 저런 어린 체형의 여인에게?"
"구멍만 있으면 검 손잡이에도 박을 새끼인데 뭘. 미성년자는 안 건드리지만 쟤 성인이잖아? 그럼 냅다 들이박을 걸. 성마법 걸고."
그레모리는 피식 웃으며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레모리의 손 위에 활활 타오르던 불꽃은 여덟 갈래로 흩어져 질주하는 군마를 덮쳤다.
"흐랴아아앗!!"
소녀는 정체불명의 기합과 함께 도끼를 사방으로 휘둘렀다. 그레모리가 마나를 모아 쏜 불꽃은 소녀의 부술에 불씨가 되어 흩어졌다.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그레모리는 소녀를 도발하기 시작했다.
"흥, 팔 짧은 꼬맹이가 잘도 요격하네."
"짧지 않아!!"
소녀는 빽 소리를 지르며 도끼를 겨눴다. 퍼시발이 검을 들고 그레모리의 앞으로 나섰다.
"내가 상대하겠다."
"오크? 꺼져! 저 타천사 년의 목을 베고 술 한 잔 걸쳐야 되겠어!"
"그냥 오크가 아니다. 나는 이 던전의 주인, 알로켄이다."
"......큭."
소녀는 인상을 찡그리다가 도끼를 비스듬히 내렸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고개를 높이 치켜들었다.
"드워프, 로도페리! 자기소개 끝!"
"어머, 목소리 엄청 크네."
그레모리는 드워프 소녀-로도페리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비릿하게 들어올렸다.
"가슴도 작은 게 어떻게 그렇게 소리가 크게 나온담?"
"네 이 년!!"
카--앙.
퍼시발과 로도페리의 병장기가 맞부딪혔다.
알로켄 전선.
전황은 백중세로 밀고 당기는 교착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 * *
"...그럼 계획대로 진행하도록 하지. 큰 불만없이 내 의견을 따라주어 고맙다. 모두."
다행히 간부들은 내 계획을 수용했다. 계획 자체가 엉뚱하다거나 불만스럽다거나 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고, 다들 계획이 제대로 통할까 하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우리가 할 일은 단 하나. 준비하는 건 내가 직접하겠다. 륜, 루나. 너희 둘이 아주 중요한 임무를 맡아다오."
"네!"
"얼마든지."
"...그래. 그럼 꼭 한 명 섭외해다오."
공갈 사기 연극을 위해 진실된 모습을 보여줄 배우가 한 명 필요했다. 레비즈의 민낯(날조)을 세간에 낯낯이 밝혀줄 명배우가.
"쿠키, 아니 다크엘프를. 딱 한 명이면 된다. 그녀는 다른 엘프들이 함께 데려가 줄 테니."
두 엘프의 표정이 점점 진지해졌다. 나는 둘의 손을 각각 붙잡으며 둘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딱 한 명. 딱 한 명만 구해다오."
"어, 음, 그러니까...."
"영원히 다크엘프로 살기로 한 쿠앤크 엘프. 내 대계를 위해선 그런 존재가 필요하다."
나는 연거푸 삼켰던 뒷말을 간신히 꺼낼 수 있었다.
"......레비즈 안에게 보빔강간을 당했다고 말해 줄 다크엘프 말이다."
엘프가 마왕군의 편에 들어간 계기로 이것만큼 적절한 계기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 작품 후기 ==========
한편 더 하고 하드모드 3 편 ㄱ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