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비만 오크 36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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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가 되었다.
성녀는 아무렇지 않게 눈앞에 앉아있는 엘프남자, 아니 피부색이 인간처럼 변했을 뿐인 오크를 유심히 쳐다보며 샐러드를 쿡쿡 찔렀다.
'잘생겼다.'
키가 2m를 훌쩍 넘는 거인이 아니라 적당히 180을 넘는 수준이었다면 얼굴로 세계를 재패했을 정도의 미남상이었다. 오크의 녹색 피부가 벗겨지고 나니 오크 특유의 엘프보다 다소 뭉특한 귀도 나름 귀여워보였다.
'아니다. 여신님의 농간이야. 정신차리자.'
성녀는 자신의 머리속에 야스를 외치고 있는 여신의 목소리를 악마의 속삭임으로 생각했다. 아무리 상대가 모습이 엘프에 가깝게 변했다고 하더라도 유전자가 오크인 건 변하지 않는다.
"무엇을 그렇게 빤히 바라보시는 건가?"
"당신이 어째서 여신님의 은총을 받은 건지 궁금해서요."
성녀는 미리 준비해놓은 대사를 읊었다. 차마 잘생겨서 쳐다봤다고는 말하기 어려우니, 얼굴을 찬찬히 뜯어볼 변명거리를 만들어 둔 것이다.
"아무리 성검의 용사라고 하더라도 오크인데 대체 왜?"
"글쎄.... 그건 나도 모르지."
트랄은 어깨를 으쓱이며 능숙하게 나이프로 고기를 잘랐다. 설산의 마물을 잡아 구운 스테이크를 써는 폼이 영락없는 귀족이었다. 물잔을 잡는 손도 우아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당신 예법은 어디서 배웠어요?"
"음...노예 시절에 배웠다고 하지."
"노예요? 당신이 왜 노예에요?"
성녀의 머릿속에 분홍빛 망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건장한 오크 취향의 귀부가 밤마다 오크를 잡아다가 침대로 들이기 시작하는데....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성검의 시련을 이긴 강자가 평범하게 노예가 될 리가 없어.'
"싸워서 졌다. 나를 이긴 자는 무기의 성능 차이로 이겼다고 했지만, 애초에 그런 무기를 준비하는 것조차 전투의 준비니 나의 패배였지."
"당신은 실력지상주의가 아니었나요?"
"실력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장비도 중요하다. 본인의 전투 실력이 부족해 장비를 준비한다면 그것 또한 본인의 실력이라 할 수 있지. 몸이 안 되면 머리를 쓰든. 결국 살아남는 자가 승리하는 법이다."
"...흠, 그런가요. 그럼 노예가 되었다는 것은?"
"나는 그에게 패배하여 그의 노예가 되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손님이라고 칭했지만, 명예로운 전투에 패배하여 죽지 못한 자는 노예가 되는 거지. 그의 아래에서 이것저것을 배우고 난 뒤, 나는 명예를 되찾았다."
성녀는 트랄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때문에 조금 궁금해졌다.
"이제 성검도 생겼으니까 그 사람을 이길 수 있어요?"
"애초에 무기 성능 차이 때문에 패배한 것이다. 같은 조건이라면 내가 무조건 이겼지. 그도 인정했다."
"흠...."
성녀는 트랄이 말하는 '그'가 누군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트랄의 검에서 느껴지는 검법을 보고 대충 감이 오기는 했다.
'아리에스 변경백.'
트랄과 비슷하거나 조금 아래의 무위를 가진 남자. 하지만 무기 차이로 이겼다는 남자. 트랄에게서 느껴지는 유서깊은 귀족가의 격식. 트랄을 옆에서 지켜본 결과는 그가 아리에스 변경백에게 패배했다는 결론에 귀결되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대천사까지 강림해서 당신을 인정했으니, 그 누구도 당신을 부정하지는 못할 거예요. 당장 새벽부터 난리를 치던 추기경처럼."
"전선에 나서달라?"
"그렇죠. 성검의 용사가 늘어났으니까 마왕군을 상대로 싸워달라고 요청하는 거예요. 무상으로. 대의를 위해. 인류연합을 위해 저 간악한 마물들을 처리해달라."
성녀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추기경의 속내를 읊었다. 실제로 추기경은 대의를 내세우며 수많은 사람들을 전장으로 보냈다. 추기경을 생각하니 바로 입맛이 떨어진 성녀는 식사를 마치고 식기를 내려놓았다.
"물론 그것도 당신이 선택하기 나름이지만...어떻게 하실래요?"
"여신의 뜻을 따라야지."
트랄은 식기를 내려놓았다. 성녀의 식사가 끝나자 일부러 속도를 맞추기라도 한 듯, 트랄의 그릇은 마침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여신의 뜻이요?"
"...성검을 탐색하라고 명하셨다. 나 이외에 아직 각성하지 못한 성검을 찾으라고."
트랄은 성검을 테이블 위에 검집째 올렸다.
"성검은 서로 이어져있다. 내게 타우러스를 인도한 그가 그러했듯, 나 또한 다른 성검을 깨우러 갈 의무가 있지. 그리고 성검을 찾다보면 나도...."
트랄은 뒷말을 흘렸다. 아무래도 거기까지는 성녀에게까지 말할 수 없는 신탁인 듯 했다.
"아무튼 나는 성검을 탐색하러 갈 것이다.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저요?"
"그대가 괜찮다면 나와 함께 가지 않겠는가? 제법 긴 여행이 될 지 모르지만, 그래도 혼자서는 쓸쓸하니."
트랄은 싱긋 웃으며 성녀에게 제안했다. 성녀는 갑작스런 트랄의 제안에 눈을 살포시 감았다.
두근, 두근.
남자와의 1:1 여행. 잘생긴 남자와의 장기 숙박 여행. 한 달이 걸릴 지 두 달이 걸릴 지는 모르지만, 어쩌면 같은 침대에서 잘 수 있는-
[예쓰! 잘생긴 남자랑 둘이서 자유여행! 끼요오오오옷!!]
"......잠시만요. 머릿속에 마구니가 껴서 생각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성녀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생각에 잠겼다. 과연 버틸 수 있을까. 나는 인간인데, 성녀인데.
"......좋아요. 이렇게 하죠. 성검이 성검을 찾을 수 있다? 그럼 당신이 다음 찾으려는 성검은 뭐죠?"
"〈성검 제미니〉."
쌍둥이 자리. 여인은 속으로 낮게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접었다. 하나, 둘, 셋, 넷.
"좋아요. 마침 저도 하나 찾을 게 있으니까 당신과 함께하도록 하죠. 괜히 당신을 가만히 내버려뒀다가는 어디서 바보같이 전선으로 끌려갈 수도 있으니. 용사를 이끄는 건 자고로 성녀의 몫이다 이 말씀."
성녀는 우쭐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트랄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성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성녀."
"......둘만 있을 때는 이름으로 불러도 돼요."
어디까지나 친해져서, 추기경이 멋대로 전선에 불려나가도록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결코 진심으로 친해지기 위함이 아니다.
'절대로 반하면 안 돼.'
성녀는 속으로 몇 번이고 다짐했다.
* * *
끼이익, 철컥.
"보고드립니다. 투석기 10대의 배치가 끝났습니다."
"고생했다. 진지에서 휴식을 취한 뒤 돌아가도 좋다."
레비즈는 땀을 뻘뻘 흘리며 경례하는 청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담아 웃었다. 그들은 비록 검을 들지는 못했지만, 자비야바를 탈환하고 던전을 토벌하기 위해 기꺼이 후방 지원에 나선 이들이었다.
공성병기의 수송.
토벌대가 급히 진군한 이후, 남작령에서 급히 마련한 투석기는 쉬지않고 바퀴를 굴리며 진지에 도착했다.
인구 천 명을 조금 넘는 도시를 공격하는데 뭘 굳이 공성병기까지 동원하냐 싶냐만, 토벌대는 지난 토벌의 실패에 따른 교훈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울타리를 파괴할 필요가 있다. 성벽을 파괴할 필요가 있다. 대규모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이상, 공성병기는 필수였다.
"고생했다. 그대들의 노고에 힘입어 인류는 승리할 것이다."
"단장님. 저희들도 싸우고 싶습니다."
"그건 안 된다."
레비즈는 청년들의 참전의사를 단호하게 꺾었다.
"적은 괴물들이다. 그대들은 아직 적과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 그러니 지금은 내 지시에 따라다오."
"...정녕 안 되는 것입니까?"
"물론. 의기만으로 칼을 드는 건 자살행위다. 그대들이 수송해 준 투석기 만으로도 충분한 전과다.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여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레비즈는 청년들을 귀환시키려했다. 에둘러 말하기는 했지만, 청년들은 검과 방패를 들고 싸우기에는 너무 젊고 어렸다.
"정 활약하고 싶거든 이걸 남작님께 전해주겠는가?"
"이, 이건…?"
레비즈가 건넨 편지의 봉인에는 여신교 교단의 인장이 박혀있었다. 설령 청년이 평민이라고 할지라도 편지는 남작에게 무조건 전해질 것이다. 인장은 기사단장 고유의 것이었으니.
"하나는 남작님께, 이건 피스케스 가문에, 이건 칸세르 가문에, 그리고 이건 레오 후작령으로 보낼 편지다."
편지는 여러 장이었다. 조디악 왕국 내 비르고 영지와 인접하거나 전장에 관계가 있는 귀족가에 보내는 편지들이었다.
"남작님께 이 편지가 가문들에 전해질 수 있도록 해다오."
"이 편지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원래는 기밀이니 알려줄 수 없지. ...하지만 그대들이 입소문을 내어주는 것이 좋겠군."
레비즈는 청년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기사단 차출 요청서. 그리고...성기사단 소집 명령서."
"......!!"
레비즈는 사납게 웃었다.
"이 위험한 던전은 아주 뿌리째 뽑아야 할 것 같다. 전력으로."
* * *
구구구구.
슬라임 드래곤들이 4중날이 되어 시계방향으로 회전한다. 바로 뒤에는 또 한 무리의 슬라임 드래곤들이 4중날이 되어 역시계방향으로 회전한다.
선두의 클리안이 이끄는 슬라임 드래곤들이 구멍을 파내며 뒤로 흙더미의 일부를 배출한다. 그러면 그 뒤를 따르는 니프란의 슬라임 드래곤들이 잔해를 삼키며 토굴을 깔끔하게 닦아낸다.
비록 그 높이는 내가 네 발로 옆드려 가야할 정도의 높이였으나, 높이는 지금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당장 메어리를 구하러 가야한 다는 것.
'속도는 제법 빠르다.'
공업용 드릴도 이것보다는 작업속도가 느릴 것이다. 낮은 포복으로 기어가는 수준이었지만, 그 엉금엉금이 지하 십 수 미터 아래에서 길을 만들어나가는 것임을 생각하면 그 속도는 엄청나게 빠른 수준이었다.
"라임, 슬슬 위치가 목적지에 가까워진 것 같은데?"
"...맞음. 여기서 위로 올라가야함."
내 앞에 먼저 기어가던 라임은 클리안과 니프란에게 지시해 방향을 선회했다. 그러자 토굴이 완만한 오르막을 그리며 서서히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
나는 좌우로 흔들거리는 라임의 엉덩이에 얼굴을 박고 계속 앞으로 밀었다. 결코 사심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조금이라도 더 빨리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제발 성검의 주인이 되지 말아라...메어리!'
성검의 주인이 되면 평생 처녀를 지켜야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메어리라면 '아버지의 도움'이 되기 위함이라며 성검의 주인이 되려 할지도 모른다.
나와 메어리는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우리 둘만 아는 약속으로, 그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중요한 약속이었다. 메어리가 성검의 주인, 오직 처녀만이 가능한 성검 비르고의 주인이 된다면 그 약속을 어기는 셈이었다.
'여신님 제발!'
내 기도가 하늘에 닿은 걸까. 슬라임 드래곤들의 회전이 멈췄다. 나는 좌우로 벌어지는 틈 사이로 몸을 날려 뛰쳐나갔다.
"메어리!! 괜찮으냐!!"
"아, 아빠?!"
누가봐도 음습한 기운이 넘쳐나는 지하실 한 가운데. 나의 딸 메어리의 눈앞에 요사스러운 분홍빛을 뿌리며 날아다니는 성검이 있었다. 나는 재빨리 주먹으로 내가 튀어나온 땅을 내리쳤다.
"입구 일단 막아!"
라임은 급히 토굴을 무너뜨렸다. 같은 공간에 있기만 해도 따가운 신성력은 당장이라도 살갗이 벗겨지는 것만 같았다. 루나 덕분에 적응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지금쯤 전신에 화상을 입었을 것이다.
우우웅---!!
성검은 내 등장에 격하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한 번도 성검을 본 적은 없지만, 나는 루나의 인장보다 더 진한 신성력이 담겨있는 검에 절로 오한이 들었다.
살해당한다.
왜 마왕군이 병력을 하루에 720마리씩 늘어날 수 있어도 인류 연합을 이길 수 없는 지 직감했다. 눈앞의 성검은 포르네우스보다도, 루나보다도, 할파스보다도 나를 긴장케 만들었다.
저것은 마족의 죽음이다.
검에 가득 담긴 신성력은 마족을 죽이기 위해 깃든 힘이다.
그러나 나는 그 힘을 이겨내야했다. 인간들이 내가 인질로 잡아둔 가족들을 구하기 위해 스피카 성에서 던전까지 달려온 것처럼, 나 또한 메어리를 지켜야만 했다.
"......메어리를 유혹하지 마라, 이 마검!"
우웅, 우웅, 우웅---!!
성검이 내 말을 알아듣는 건지 격하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마치 마검이 아니라는 듯 부정하는 움직임에 나는 소름이 끼쳤다. 성검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소문이 사실인 걸까.
"메어리는 네 놈의 주인이 될 수 없어!"
우우웅!
어째서일까. 성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성검은 분명히 나를 향해 외치고 있었다.
메어리만큼 순결한 처녀는 없다고.
이제 메어리가 아니면 각성할 수 없는 검이 되어버렸다고.
메어리가 아니면 자신은 영원히 박물관에 처박혀서 발가벗겨진 채 관람객들에게 구경당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웃기지 마라! 메어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정을 나눌 것이다! 그 때까지, 이 내가 메어리를 지킬 것이다!"
성검은 소리친다. 네가 누구냐고. 오크인 너와 메어리가 무슨 관계냐고. 혹시 메어리를 범하려고 드는 자가 아니냐고. 그래서 나는 당당히 소리쳤다.
"메어리는 내 딸이다!!"
내 외침에, 성검은 갑자기 막대한 분홍빛을 뿌려대기 시작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메어리의 아버님!"
의식을 차린 순간, 내 앞에는 치렁치렁한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내게 절을 하고 있는 왠 여인이 나타났다. 생전 처음 보는 그녀는 왠지 모르게 비르고 남작을 닮은 듯한 얼굴이었다. 선명한 분홍빛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에는 진한 은빛이 신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시아버님, 따님을 소녀에게 주십시오!"
"...너 누구냐?"
누구인지는 대충 감이 온다. 하지만 너무나도 믿기지가 않아, 나는 멍청하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여인은 무릎을 꿇은 채 메어리만한 가슴에 손을 올리며 씩씩하게 웃었다.
"소녀, 〈비르고〉라 하옵니다."
========== 작품 후기 ==========
지키려는 자 vs 지키려는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