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비만 오크 36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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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던전에서 스피카 성까지 가는 길은 제법 멀다.
어떻게 지하까지 포털을 연결해놓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제법 먼 길을 지나가야 하는 점이 다소 불편하기는 하다. 그러나 그 불편은 내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머나, 주인님...?"
"메어리는 어디에 있느냐!"
아발론의 지하에서 나를 반긴 요정, 니무에는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지상을 가리켰다.
"...남작성에 있어요. 아직 남작성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신 것 같아요."
"젠장!"
지상은 이제 태양이 떠올랐다. 어둠을 틈타 남작성까지 가기에는 너무 무리수가 크다. 그렇다고 인간이 아닌 내가 남작성을 드나들 수도 없는 노릇.
"라임, 너 어떻게 던전까지 온 거냐?"
"몸을 비틀어서...."
라임은 바로 부정형의 액체가 되어 바닥을 기어가기 시작했다. 확실히 지하라고는 해도 유동체라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을 터.
"그냥 구출대를 만들까? 크으...병사들을 지금 꺼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작전의 마스터 피스는 스피카 성의 점령이다. 그런데 그걸 내가 망가뜨리면 모든 대계가 어그러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메어리를 성검의 마수로부터 안 구할 수도 없는 노릇.
"뭔가 방법이...방법이...아!"
순간, 나는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지상으로 이동이 불가능하다면 지하로 이동하면 될 일.
"니무에, 당장 스피카 성의 지도를 가져와라! 영지성 전체가 보이는 전도를! 그리고 내 예비 로브도 가져와!"
"네, 네!"
니무에는 급히 지상으로 올라갔다. 나는 그 사이 아발론에 대기시켜놓은 병사들을 확인했다.
"그 녀석들이...있다!"
간밤에 병력을 이동시켜놓은 샤이탄에게 감사를. 나는 니무에가 돌아올 때까지 라임과 간단한 작전을 짜냈다. 좌표와 방향만 알면 나머지는 얼마든지 믿고 맡길 수 있었다.
"주인님, 찾았습니다!"
방 문이 열리고 니무에가 나타났다. 그녀의 손에는 고급스러운 양피지가 들려있었고, 나는 스피카 성의 전도가 그려진 지도에 침이 꿀꺽 넘어갔다.
"이 정도면 거의 전략물자 수준인데?"
"남작이 행정관 죽이고 나서 장물로 나온 거, 스타킹으로 판 돈으로 샀어요! 메어리 님께서!"
역시 메어리. 나는 메어리에게 감사한 뒤, 적당히 내 몸을 숨길만한 로브를 건네받았다. 혹시나 해서 놔둔 예비 로브는 지상에서도 내 몸을 충분히 가려 줄 것이다.
"응?"
"왜 그러십니까?"
"이거...내가 최근에 보낸 게 아닌데?"
다소 조잡하다고 할 수 있는, 초기형 스타킹의 재질로 만든 로브였다. 분명 포털을 통해 메어리도 입으라고 고급스러운 로브를 하나 만들어 보냈건만, 니무에는 진짜 예비 로브를 가져와버렸다.
"그거 어디갔냐? 우리 군단의 인장 무늬가 박힌 거."
"아.... 그게 그거였구나...."
니무에의 표정이 안좋아졌다.
"그, 성녀라는 자가 멋대로 가져갔어요! 메어리 님을 협박하시면서...자기 옆에 데리고 다니는 덩치 큰 기사가 입을 로브를 내놓으라고!"
"뭐? 성녀가? 이런 젠장. 어째 교단 놈들은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군."
여신은 나를 위해 루나와 갤러해드를 보내주고 마왕을 자지러지게 하는 미약 레시피까지 알려줬건만, 정작 여신의 종복이라고 할 수 있는 교단의 놈들은 하나같이 죄다 나를 방해하고 있다.
"하여튼 여신의 진짜 뜻을 알고 나면 기겁할 놈들이.... 잠깐."
순간, 나는 머리속에 비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번 전쟁과는 크게 관계는 없지만, 전쟁이 끝나고 나면 인간 세상에 침투하기 좋은 아주 훌륭한 아이디어였다.
"......흐음, 호오. 과연. 제법 괜찮군."
"주인, 지금 딴 생각 할 때가...."
"크흠. 미안하다, 라임. 근데 너무 개쩌는 아이디어라서."
"이 순간에도 메어리는...성검이랑 사투를...."
"그래, 그래. 미안하다."
미안하기는 하지만, 메어리도 듣고 나면 정말 대단한 아이디어라고 솔선수범 나서지 않을까. 나는 전전긍긍하는 라임을 진정시킨 뒤, 모인 병사들과 지도를 챙겼다.
"그럼 메어리 구출 특공대, 지금부터 이동하겠다. 클리안, 니프란!"
""명령하시옵소서.""
우리 군단의 유이한 존재인 슬라미아. 그리고 그 뒤로 넷씩 나뉘어진 슬라임 드래곤 3~10호기.
"지금부터 너희는 2교대로...스피카 성까지 토굴을 뚫는다!"
메어리가 있을 스피카 성의 지하실까지, 나는 땅굴을 파기로 마음먹었다.
"이번에는 이 몸이 직접 지시한다."
지도를 보는 나.
가라로 공사하지 않는 라임.
그리고 이전보다 한층 더 강력해진 슬라임 드래곤과 그들을 이끄는 슬라미아.
"가자. 메어리를 구하러."
바야흐로, 우리 군단 최강의 공병 조합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 * *
〈그 시각, 라스베가스 근처 토벌군 진지.〉
"병력이 벌써부터 15%나 줄어버린 건가...끔찍하군."
진지로 돌아와 지휘관 용 막사에 들어온 레비즈는 사제의 보고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누군가는 그저 간단히 사망자와 인질만 계산했지만, 자연 치유가 늦는 인간들은 중상자도 전력에서 열외 판정이나 마찬가지였다.
약 180. 사망자, 인질, 그리고 중상자의 비율이 거의 1:1:1이 되어버렸다. 죽거나 다친 이들은 남작령의 병사들이 대부분이었고, 인질들은 모험가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인질들이 아직은 살아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건데...."
인질이 도시와 던전 양쪽으로 생겨버렸다. 점점 더 머리가 아파오는 전황에 레비즈는 당장이라도 창을 들고 날뛰고 싶은 심정이었다.
"젠장, 이런 쪽은 내 체질이 아니란 말이다...."
기사단의 단장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전장은 참모들의 역할이 중요한 법. 굳이 따지자면 레비즈는 압도적인 무력과 전술을 보이는 장군이지, 전략을 바탕으로 싸우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에이 경까지 납치를 당했다....젠장."
그나마 자신을 보좌할 수 있는 유일한 참모도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병사들을 인솔하여 더이상 사람들이 납치당하지 않도록 잘 유도했지만, 정작 본인이 유니콘을 탄 듀라한들에게 납치를 당하고 말았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군. 마물들에게 범해진다니. 으으...오크 놈들, 분명 남녀 가리지 않고 범할 게 틀림없어. 여신께서 부디 굽어살펴주시기를."
레비즈는 그에이에게 애도를 표했다. 그리고 기도가 끝난 즉시, 레비즈는 토벌대를 재편하였다.
"흩어지면 죽는다. 또다시 각개격파 당할 바에는 천천히 도시부터 공략하는 게 맞지."
병력의 수를 양분하여 동시에 상대의 수완이 짜증나게 좋다. 따라서 먼저 도시를 다시 탈환하여 전진기지로 삼는 편이 훨씬 나을 지도 모른다.
"그래. 이미 남작 성에서 공성 병기들이 출발했을 터. 우리는 그걸 기다리기만 하면-"
"단장님, 큰일났습니다!!"
사제가 급히 막사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레비즈는 또다시 뭔가 급한 일이 생겼나 싶어 눈앞이 아뜩해졌다.
"또 뭔가."
"지,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무엇을 보든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귀뜸이라도 해라."
"......프란시스, 사제 프란시스가!!"
사제 프란시스. 레비즈에게는 성기사단 영입 1순위인 '기네비어 피스케스'.
"살아있는가?!"
"사, 살아는 있는데...."
사제는 침통하면서도 흐트러진 호흡으로, 자신이 본 바를 그대로 읊었다.
"성벽 위에서...오크에게 범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미친!"
이래서 차라리 죽었기를 바란 건데. 레비즈는 한걸음에 막사를 뛰쳐나와 성벽으로 향했다. 이미 한 무리의 모험가들은 굳은 얼굴로 성벽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여신이시여."
그곳에는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알고있는 소녀와도 같은 얼굴의 청년-기네비어 피스케스가 오크에게 안겨 범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상대와 체위는 레비즈가 생각한 것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와...오크 여자 처음본다. 씨발 존나 예쁜데? 피부만 어떻게 하면...씁."
"남자를 들어서 자기한테 박게 한다고...어우야, 저게 가능하긴 가능하구나."
여자 오크는 기네비어와 입위 상태로 토벌대를 향해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거만한 표정은 도저히 인간 남자에게 박히고 있다는 여인의 표정이 아니었다. 기네비어는 여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사제복을 입은 상태로 오크 여인의 손에 따라 허리를 앞뒤로 움직여야했다.
"...왜 남자 오크가 범하지 않는 거지?"
"예? 단장님,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크흠, 아니다."
레비즈는 괜히 얼굴이 붉어져 헛기침으로 시선을 돌렸다.
"병사들을 뒤로 물려라. 우리를 도발하기 위한 적의 술책이다. 적은 금기를 저지르는 바...."
"단장님, 이미 늦었습니다. 통제가 되지 않습니다."
"와, 씨발. 미쳤다. 엘프도 있다고?"
"뭐야?"
레비즈는 모험가의 말에 고개가 확 돌아갔다. 그곳에는 인간 남자를 바닥에 깔고 금발 머리칼을 찰랑거리는 엘프 하나가 남자의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에, 엘프가 왜 저기서 나와?!"
레비즈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다크 엘프도 아니고 그냥 엘프가 마물들이 가득한 성에 있는 것도 놀랍건만, 다크 엘프보다도 더 요염한 표정을 지으며 인간 남자의 위에 올라타는 모습은 너무나도 색정적이고 자극적이었다.
"......와, 씨발. 누구는 납치당해서 엘프랑 하네. 개같은 새끼...."
여자가 범해지는 것은 모두의 공분을 살 일이다. 남자가 범해지는 것도 모두의 공분을 살 일이다.
하지만 몸매좋고 예쁜 여인들이 인간 남자를 상대로 스스로 허리를 놀리며 범하는 것은, 일부 남자 모험가들의 허리를 구부정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광경이었다.
"미치고 환장하시겠네."
레비즈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으르렁거렸다.
"이 새끼들 왜 이렇게 섹스에 미쳐있는 거야...!"
레비즈는 차라리 살육과 광기가 넘치는 마왕군의 최정예 병사들을 상대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 * *
메어리의 인생은 결코 길다고 할 수 없다.
솔로몬의 시간 마법 덕분에 17년의 인생을 '산 것'처럼 태어났지만, 세상을 경험한 것은 고작 두 달도 채 되지 않았다. 그 두 달간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만, 메어리는 제법 많은 사람을 상대하며 자신이 충분히 성장했다고 생각했다.
[생각해봐. 죽을 때까지 처녀를 유지하라는 게 아니야. 아무렴 내가 부탁하는 입장인데 원래 조건을 내걸겠니? 그냥 나 사용하는 동안에는 처녀를 지켜달라 그거지.]
하지만 메어리보다 족히 몇 백 배는 더 넘게 살아왔을 성검의 말솜씨는 현란하기 그지 없었다. 절대로 처녀를 잃겠다고 다짐한 메어리조차도 성검의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처녀를 잃겠다며? 그럼 그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정조를 지키겠다는 거지? 내가 거들어줄게! 사랑하는 사람과 혼인해서 결혼하는 그 날까지, 그 어떤 남자도 너를 건드리지 못하게 만들어 줄 거야.]
"지, 진짜로?"
[물론! 나는 성검이고 너는 성검의 주인이잖아. 계약은 간단해. 네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여 처녀를 바치겠다면 나는 순순히 너와의 계약을 종료하겠어. 대신 그 때, 다른 처녀를 소개시켜줘야해. 이왕이면 나를 그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순수한 처녀로.]
"도대체 처녀의 기준이 뭐야?"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남자와 한 번도 이성적인 접촉을 하지 않은 순결한 여자!]
"......."
성검도 그렇고 솔로몬의 시스템도 그렇고, 정말 처녀를 감별하는 시스템은 이런 걸로 괜찮은 걸까. 메어리는 절로 한숨이 나왔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중요한 건 성검 스스로 부탁할 정도로 메어리가 나름 순수한 처녀라는 것.
"하나 질문. 여자랑 하는 건 괜찮아?"
[...괜찮아! 역대 내 주인들 모두가 여자랑 하고 그랬어! 처녀막만 지키면 돼!]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막 처녀막 늘어나서 끊어지기 일보직전이라도 달려있기만 하면 처녀라 이거야? 막 처녀막 위에다가 자지를 박고 싸버려도?"
[......처녀막은 찢어지지 않았으니 생물학적으로는 처녀니까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메어리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이 세계는 글러먹은 게 틀림없다. 인류의 희망이라고 하는 성검부터가 이런 상황이니.
"하아. 처녀라는 조건을 떠나서 솔직히 말할게. 나는 네 주인이 될 수 없어."
[왜? 내가 진짜 기존의 까다로운 제약들 다 버리고 부탁하는 거야! 제발! 주인이 되어주세요!]
"나는 마족의 편이야."
순간, 성검의 몸이 굳었다. 메어리는 순간 잘못했나 싶었지만, 진심으로 나오는 상대의 말에 본심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나는 마왕군의 일원이야. 성검의 주인이 될 자격은-"
[그런 거 전혀 상관 없는데? 조건만 맞으면 천족도 마족도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있어. 애초에 우리는 인간들의 전유물이 아닌 걸. 인류가 멋대로 자기들 것으로 만든 거지.]
"뭐? 그게 무슨?"
[조디악 왕국이 생겨나기 전부터 존재해 온 우리를.... 아 참.]
순간, 메어리는 자신의 눈앞에 놓인 성검이 웃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뒤부터는 내 주인이 되면 알려주도록 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