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비만 오크 328편
<-- -->
내가 지금까지 던전을 공략하면서 가장 짜증이 났던 미로는 안드라스의 미로다.
소용돌이 모양으로 던전을 만들고 거기다가 갈림길을 만들어 상대의 진격을 저지하는 구조는 침입자를 상당히 짜증나게 만들기 쉬웠다.
'만약 그 때 슬라임 드래곤 이렇게 있었으면 바로 직선으로 뚫었지.'
안드라스 던전에서 천장으로 도망치는 숏컷이 직선 루트였던 걸 생각하면, 결국 직선으로 공략하는게 최고의 루트였다.
함정이 바닥에 있으면 바닥의 함정을 전부 먹어치우면서 전진한다.
함정이 천장에 있으면 천장을 파먹으면서 전진한다.
안전을 추구하다보니 함정을 제거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지, 이런 식으로 갈림길 가운데를 파고들어간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다.
'역시 라임이다.'
가라공사의 대명사라 그런지 역시 가장 효율적으로 공사를 하는 방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함정을 정성스레 준비한 자들을 어떻게 하면 농락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함정은 피해가는 것.
가시바닥을 멀리뛰기로 뛰어가거나 날아가기라도 한다면 적은 열은 받더라도 그러려니 할 것이다. 개인의 능력으로 함정을 넘은 거니까.
하지만 함정을 피해가되, 정해진 루트가 아닌 전혀 다른 곳으로 파고 들어가면 그건 또 얘기가 달라진다.
"머저리같은 던전 주인 놈들. 어떻게 하나같이 원패턴에 당하는 거지?"
"그거야 상식을 뛰어넘는 작전이니까요."
"소문나는 구조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던전 주인들간의 커뮤니티가 있었다면 진작에 불타올랐을 소재다. 6X위의 미친 놈이 하라는 던전 공략은 안하고 슬라임으로 남의 던전 파먹으면서 쟁탈전을 이겨먹으려 한다고.
"륜, 우리 대충 얼마 정도 온 것 같냐?"
"한 1/3?"
"그래? 그런데도 아직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다고? 이 새끼 완전 개쫄보 아냐?"
하겐티는 아쉽지만 우리 군단과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다. 적이 현관을 넘어 거실에 자리를 잡고 행패를 부리고 있는데 아직까지도 병력을 보내지 않는 건 무슨 의도란 말인가.
'뭔가 꿍꿍이가 있다.'
그래도 명색이 48위인데 그냥 병력을 내버려 두지는 않으리라. 내가 생각에 잠겨있던 때, 라임이 슬라임 드래곤들을 황급히 뒤로 물렸다.
"역시. 뭔가 있지?"
"네. 앞에 거대한 방이 하나 있다네요. 적 마물들이 거기에 싹다 몰려있어요."
"얼마나?"
"대략...50?"
"많이도 모였군."
요격을 하러 나오기는 했는데 자신들이 유리한 전장에서 싸울 수 있게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양피지에 던전의 구역도를 그리며 위치를 대략 확인했다.
■□□□□□□□■
■■■■▲■□■■
■▒▒■▥■▒▒■
■▒▒■▥■▒▒■
■▒▒■▥■▒▒■
■■□■▥■□■■
■■□□▥□□■■
■■■□□□■■■
■■■■△■■■■
"함정(▒)의 방 사이로 길을 뚫고(▥)들어와서 현재 (▲)의 앞에 있지. 루나야. 너라면 어떻게 공략할 것 같아?"
"적이 싸우러 나온 곳에서 싸우는 건 바보같은 짓이야. 무슨 함정을 설치해놨을 지도 모르잖아? 우회하는게 좋겠어. 벽에서 튀어나와서 기습을 하는 거지."
"우회라.... 륜,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레모리 던전 때처럼 땅으로 파고들거나 벽으로 계속 숨어가는 건 어때요? 인원이 많기는 해도 다들 엘프니까 가벼워서 들키지는 않을 거예요."
륜과 루나의 의견이 엇갈렸다. 둘의 의견은 딱히 흠잡을 곳 없이 타당했고, 나는 선택을 내려야했다.
"정찰을 나가는 건 무리고 그냥 맞서 싸우는 것도 괜찮기는 한데 괜히 누구 죽기라도 하면 좀 찝찝한데."
"지금 우리 엘프들 무시하는 거니? 다들 한가닥 하는 애들이야. 마물 죽여본 경험은 누구나 다 있다고."
"다치면 나을 때까지 섹스 못한다?"
"......."
단지 죽는게 문제가 아니었다. 어디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요양하여 체력이 돌아올 때까지 격한 성행위는 금물이었다.
'조교실에서 수명 당겨쓰는 건 안 돼.'
환자를 보호할 간호원까지 수명이 100배 단축되는 만큼, 최대한 부상없이 전투가 이루어져야했다. 따라서 내가 처음 생각했던, 그냥 이대로 뚫고 나가서 무작정 싸우는 전면전은 하책.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야? 희생없는 전쟁이 어디있어?"
"전략과 전술만 잘 활용하면 12명이서 333명도 이길 수 있는 거야. 잠깐 머리를 굴려보자고. 너희 안건에서 더 덧붙일만한게...."
꾸르르륵.
라임이 손을 들어올렸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라임아. 혹시 이번 전투가 끝나도 어디 하나 다치지 않고 적진에서 바로 헐벗고 침대위로 가도 좋을 정도로 지치지 않으면서 적을 무참히 학살할 수 있는 좋은 작전이 혹시 있느냐?"
꾸르륵.
라임은 온몸으로 내게 작전을 설명했다. 통역을 해줘야할 륜은 라임의 작전을 듣고 입이 떡 벌어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뭐야, 무슨 작전인데?"
"그러니까...."
륜의 통역에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젠장,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그 전술을 계획하고 실행한 건 다름아닌 나와 샤이탄이었건만, 정작 그걸 내가 생각해내지 못했다. 그리고 라임은 그 전술의 스페셜리스트였다.
"라임아. 근데 여기는 적진이다. 가능하겠어?"
"라임이 한 번 시도해보고 안 되면 말고라는데요."
"...그래. 그게 정답이지."
우리가 가진 전술 중 가장 피를 흘리지 않고 적을 이길 수 있는게 있다면, 그게 통하지 않을 때까지 써먹는게 정답이다.
"다행히 시간은 많아."
나는 쿠키엘프들을 일시적으로 후퇴시켰다.
* * *
〈그레모리-알로켄 전선.〉
"짠!"
그레모리는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적의 전차부대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그레모리의 마탄은 포털을 넘어온 적의 선두를 무참히 박살내버렸다.
"초전 승리! 이것만큼 짜릿한 전술이 없다니까."
"......."
퍼시발은 그레모리의 뒤에 시립한 세 마리의 조 카멜들을 보며 소름이 돋았다.
"끄어어엉, 다크엘프! 다크엘프!!"
열 마리 중 다섯이 전차 부대의 진격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렸고, 둘이 그레모리의 마법에 함께 폭사했으나, 그들은 동료의 죽음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살아남은게 즐거워보였다.
"오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전우애입니다. 동료가 죽었는데 그걸 깡그리 잊어버리고 기뻐하다니."
"오크들이 특이한 거야. 원래 마족은 다 이래. 자기만 살고 자기 욕구만 채우면 그만인 놈들이지."
그레모리는 살아남은 조 카멜들을 보며 난감한 듯 웃었다.
"...어쩌지? 약속 안했는데."
"세상에. 그럼 진짜 막 던진 거였습니까?"
"그래. 에이, 알로켄 던전에 다크엘프 하나 없을까?"
"그건 군단장님이 분명 싫어하실 겁니다."
"알아. 그냥 해본 소리야. 칫. 살아남았으니 어떻게 할 수도 없고."
그레모리는 아쉬움에 혀를 연신 찼다. 그녀는 조 카멜이라는 고기방패들을 일거에 쓸어버리려고 했으나, 유감스럽게도 다크엘프와 하룻밤을 보내겠다는 그들의 욕구는 생존본능과 맞물려 끝까지 살아남고 말았다.
"운좋게 살았으니 어쩔 수 없지. 나중에 전투 끝나면 낙타 취향인 애들 한 명한테 부탁하는 수밖에."
"만약에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음...강제로 재운 다음 서큐버스라도 하나 불러서 꿈에서라도 먹게 해줘야하나?"
퍼시발은 그레모리의 독함에 치를 떨었다. 그나마 토사구팽하듯 써먹고 죽이지 않는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였다.
"군단장님께서는 왜 당신같은 마녀를 중용하시는지. 쯧."
"성격은 좀 까칠하더라도 유능하잖아. 전장에서도 침대에서도. 깔깔!"
그레모리는 따로 자신을 위해 마련한 유니콘의 등에 올랐다. 그레모리 본인이 타고다니기 위해 소환한 유니콘은 투레질을 하며 앞으로 달려나갈 준비를 마쳤다.
"적의 선두는 박살났어. 인연소환 리스트를 보고 분명 일거에 쓸려나간 걸 깨달았을 거야. 우리는 이제 적진으로 넘어가서 유린하면 돼."
"3열로 서겠습니다."
"아냐, 그럴 필요없어. 그냥 포털 넘어가면 활짝 펼쳐지면 돼."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십니까?"
"너 잊었니? 내가 너희 던전 공략할 때 어떤 방법을 썼는지? 정찰병 보냈잖아. 고블린 몇몇 던졌어."
"......군단장님과는 정말 확연히 다른 병력 운용이십니다."
미지의 포털이 눈앞에 있으면 파후우는 자신이 먼저 얼굴을 들이민다.
미지의 포털이 눈앞에 있으면 그레모리는 죽어도 무방한 정찰대를 파견한다.
오크와 (옛)마녀라는 종족의 차이일까, 아니면 그저 던전 주인으로서 던전을 운영하는 방식의 차이일까. 퍼시발은 옆에서 그레모리의 전술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얘, 무슨 생각을 하는 거니. 달릴 준비해야지?"
"죄송합니다."
"넌 남자잖아? 마액 마실 거 아니면 싸우고 적을 죽여서 힘을 길러야 해. 훈련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어디 52위 던전 공략할 준비는 끝났어?"
"물론입니다."
대장의 성향이 어떻든, 퍼시발은 대장의 옆을 지키는 부관이자 우수한 병사였다.
"돌격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그레모리 님."
"물론! 분노의 군단 그레모리 군, 포털을 향해 돌격---!!"
그레모리가 가죽 채찍을 전방으로 휘둘렀다.
히히힝--!!
유니콘의 힘찬 울음소리와 함께, 그레모리는 워울프를 탄 오크들과 포털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나갔다.
* * *
〈플라우로스-오리아스 전선.〉
"적에 대해서는 하등 걱정할 것 없습니다. 적은 바퓰라 바로 위의 세력. 아군의 힘이 훨씬 더 강합니다."
쿠키엘프와 슬라임이 섞인 하겐티 전선.
오크, 워울프, 그리고 소수의 조카멜이 섞인 알로켄 전선.
그리고 샤이탄이 맡은 오리아스 전선에는 총 세 종류의 부대가 투입되었다.
"플레어 판테라, 포털로 넘어온 적을 다 구워버리세요."
머리카락이 활활 불타오르며 입에서 막대한 불꽃을 내뿜어대는 화염 표범 수인 부족. 그들은 오리아스가 포털 너머로 보낸 정찰병들을 상대로 불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살면서 이런 경험을 다 해보네. 마물들끼리 던전에서 이렇게 치고박고 싸우는 걸 보고 말이야."
"이미 주인님의 아래에서 몇 번 보셨지 않았습니까?"
"나는 주로 라스촌이랑 라스베가스에 있어서 이런 건 자주 못 봤어. 그리고...."
릴리는 날카롭게 벼려진 검을 검집에서 꺼내며 사납게 웃었다. 라스사로 만들어진 이너아머의 위에 사자의 가죽으로 갑옷을 입은 그녀는 중무장한 병사들의 방어력과 맞먹을 정도였다.
"모험가들을 이끌기도 하지만, 서큐버스의 지휘를 받아보기도 처음이고."
"인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알아. 주인님이랑 제일 가까운 여자인데, 아무렴 못할까. 내가 걱정하는 거는 그거야, 그거. 진짜 우리쪽이 '당첨'이면 어떻게 되는 거야?"
릴리의 말에 싱글벙글 웃고있던 모험가들의 얼굴에 긴장이 내려앉았다. 파후우가 무리하게 전선을 확장하며 무언가를 찾느라 혈안이 되어있기는 했지만, 하필 자신들이 맡은 전선에서 그런게 발견되기라도 한다면 조금 난감했다.
"걱정마십시오. 상급 마석을 가지고 있다고 해봐야 활용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니. 당신들은 최대한 정체를 숨기셔야 합니다."
"알겠어, 알겠어. 칫. 살면서 마족 흉내도 다 내보네."
릴리와 모험가들은 준비된 검은 로브를 뒤집어썼다. 얼굴에는 검은 마스크까지 착용해 외형을 완벽에 가깝게 가렸다.
"분노의 군단 모험가 부대, 던전 공략을 시작한다라스."
"알았다라스"
인간 모험가들은 장난스럽게 어미를 붙이며 저마다 무기를 빼어들었다. 샤이탄은 바로 긴장이 풀어진 인간들의 상태에 잠시 머리가 아파왔다.
"주인님께서는 이들을 어찌 다루신 건지...."
"의외로 군단장은 우리를 잘 이해하고 써먹었라스."
"그거야 당연히.... 아니, 그보다 당신들이 안드라스입니까? 왜 자꾸 뒤에 라스라스 거리는 겁니까?"
"마물답게 하라고 해서 제일 마물스러운 소리를 내본거다라스."
"...하아, 알겠습니다."
샤이탄은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대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기로 했다.
"목적은 상대 던전의 점령. 최우선 과제는 '상급 마석'의 확보."
세 곳이나 찔러보는데 어디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파후우는 전선을 세 곳으로 늘려버렸다.
"상급 마석을 찾은 이에게는 주인님께서 큰 상을 내어주실 겁니다."
"""라스!!!"""
모험가들은 남녀 상관없이 킬킬대며 큰 소리로 외쳤다. 그들은 벌써부터 자신이 원하는 파트너와 함께 전투 후의 일을 즐길 생각이 만만이었다.
과연 인간들은 알고 있을까. 간부진만 알고 있을 이번 〈3:3 미팅〉작전의 진짜 목적을.
"제발 셋 중 하나는 '당첨'이어야 할텐데."
샤이탄은 불안감에 자신의 인장을 손으로 쓸었다.
========== 작품 후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