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비만 오크 32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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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모리.... 하아, 주인님께서 아시면 상당히 신경쓰실텐데."
샤이탄은 그레모리가 저지른 참상을 보고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마족의 싸움 방식이라는 말 답게, 그레모리의 전투 방식은 정말 마족 다웠다.
약하지만 체력이 높은 마물들을 고기방패로 내세우고, 그들이 방어선을 펼친 다음 그레모리가 대형 마법을 투하하는 방식.
그레모리가 원래부터 좋아하는 전투방식이며 가장 잘 하는 전술이기도 했지만, 벽이 되는 부하들을 일방적으로 희생시킨다는 전제가 필요했다.
"주인님 아시면 기겁을 하시겠네요."
"반대 아닐까요? 벽으로 세운 마물들이 뭔지 알면 오히려 좋아하실 것 같은데."
"륜, 일어났습니까?"
플라우로스 던전에서 의식을 잃고 기절한 륜은 어느새 가볍게 씻고 왔는지 옷매무새를 단정히 정돈하기까지 했다. 샤이탄은 륜에게 외투를 건네며 질문했다.
"주인님께서 그레모리의 잔학한 손속을 좋아하신다는 겁니까?"
"아뇨. 잔학하다기보다는 효율적이라 이거죠. 그레모리의 낙타 괴물들은 주인님께서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종족이기도 하고."
"그레모리에게 한 번 박았기 때문입니까?"
"그런 셈이죠. 그런데도 그레모리가 굳이 걔들을 부활시킨 이유가 뭐겠어요? 일종의 과거와의 결별같은 느낌이 아닐까요?"
"...그것 참 화려하게 저지르는 군요. 효과가 대단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과거의 부하들을 스스로 희생시키는 그레모리의 전술은 샤이탄으로서는 차마 따라하지 못할 과감하고 잔인한-그야말로 마족다운 전술이었다.
"할파스의 전술과 흡사하네요. 부활을 안 시켜준다는게 다르지만."
"고기방패라.... 주인님께서는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일단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 바로 주인님께 얘기하도록 하죠. 륜, 포털 넘어가서 본대와 합류하면 그레모리가 어떻게 적의 선두를 박살냈는지 전해주세요."
"알았어요. 언니는요?"
"저는 이쪽에 집중해야합니다."
샤이탄은 가지를 벌벌 떠는 플라우로스를 가리켰다. 무엇이 그리도 불안한 지 플라우로스는 줄기에서 본체까지 꺼내 오도방정을 떨고 있었다.
꾸르르륵.
"걱정마십시오, 플라우로스. 화염표범들이 다 알아서 할 것입니다."
"어...여기는 어디로 공격하기로 했어요?"
"59위 오리아스입니다. 세 던전 모두 자기보다 더 높은 던전을 상대로 하극상을 벌이는 셈이죠. 주인님, 그레모리, 그리고 플라우로스가 지휘를 맡았습니다. 플라우로스 쪽에는 제가 보조를 나서지만."
"그럼 사실상 샤이탄이 지휘봉을 잡은 셈이네요?"
"...그렇긴 하죠."
플라우로스는 전권을 샤이탄에게 일임했다.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다른 두 대장과 달리, 종족의 기반이 촉수나무인 그녀로서는 수성에는 뛰어나도 공성은 약할 수밖에 없었다.
"플라우로스를 공성에 쓰기에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주인님의 자비 덕분에 살아있는 플레어 판테라, 화염 수인 부족들은 그들만으로 하나의 세력을 구축하고 있죠. 비록 마액의 효과는 받기를 거부하고 있으나, 이들은 충분히 강해졌습니다."
샤이탄은 플라우로스를 중심으로 도열한 표범 수인들을 가리켰다. 그들은 벌써부터 사냥감을 사냥할 생각에 머리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시작합시다, 여러분. 주인님의 자비에 보답할 때입니다."
"명령대로!"
전 플라우로스, 아그니는 표범 수인들을 이끌고 던전의 입구로 달렸다. 샤이탄은 그들의 뒤로 추가 병력을 보내며 전황을 살폈다.
파후우(63) 대 하겐티(48).
그레모리(56) 대 알로켄(52).
플라우로스(64) 대 오리아스(59).
한 쪽의 등위 차이가 극심하기는 했지만, 이미 파후우의 세력은 38위 할파스 조차도 이기고 왔다. 그 힘이 1/3씩 파편화되기는 했으나, 할파스 던전을 공략할 때도 분노의 군단은 모든 힘을 쏟지 않았다.
"비 신성력 사용 부대. ...오로지 마물만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륜. 가는 길에 하나만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뭔데요?"
검은 로브를 꼼꼼히 감싼 륜은 막 포털로 떠나려던 발걸음을 돌렸다.
"주인님께서 하겐티의 이름을 잠시 가지고 계실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서브던전으로 만들지 말고, 제가 갈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전해주십시오."
"그거야 어렵지 않지만...무슨 생각이에요?"
"개명."
샤이탄은 자신만 볼 수 있는 솔로몬 72 던전을 위에서부터 차근차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님의 등위를 바꿀 생각입니다. 저 높은 곳으로."
* * *
〈파후우, 하겐티 전선.〉
"와, 독한 놈. 진이 구축될 때까지 어떻게 꼼짝을 안 하냐."
포털 방향이 바뀌고 한 번도 공격을 들어오지 않았다고 할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대놓고 구울들을 동원해 입구에 진을 만들고 있는데 공격 하나 오지 않는 건 상당히 이상했다.
"이러면 둘 중 하난데."
"뭔데?"
"하겐티 놈이 구제불능의 쫄보거나, 아니면 병력을 보낼 수 없는 상황이거나."
설마 진지가 구축되고 있는데도 자기는 그걸 일격에 박살낼 수 있다며 자만하는 멍청이는 아닐테니,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까웠다.
"입구에 미노타우르스 달랑 한 마리? 우리 던전으로 공격하려고 했으면 족히 수 십은 더 있었어야 해. 우리보다 선객이 있다."
"선객이라고 하면...모험가? 아니면 이전에 쟁탈전 걸었다가 진 애들이 있나?"
"그럴 수도."
내가 바퓰라 던전을 공략하자마자 할파스가 내게 쟁탈전을 걸었던 것처럼, 공교롭게도 타이밍이 맞물려 떨어진 걸지도 모른다. 그건 하겐티가 크든 작든 우리에게 병력을 보낼 수 없는 전투를 겪었다는 말이나 다름 없다.
"루나. 네가 보기에는 어떠냐. 전투의 흔적이 있어? 내가 보기에는 딱히 보이지는 않는데."
"나도 안 보여. 오히려 사람 발자국도 없는데? 여기 진짜 하겐티 던전 맞아?"
"포털은 거짓말을 하지 않지. 솔로몬의 시스템이 여기로 인도했다면 이곳이 하겐티 던전이 맞다."
왜 아무도 없는 걸까. 그 답을 알기 위해서는 칠흑같은 어둠을 뚫고 앞으로 달려나가야 한다. 혹시나 저 어둠의 너머에 하겐티가 있을 수 있으니.
"문제는 양갈래 길이란 말이지."
막다른 길이거나 함정이거나. 아무리 악랄하게 만들어놓은 구조라고 하더라도 결국 포털은 상대의 소환 시설이 있는 심처와 하나의 통로로 연결되어있기 마련.
"안되겠다. 한 발 쏘자."
나는 루나의 뒤로 다가가 루나의 배를 쓰다듬었다. 루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루나포!"
루나의 하복부에서 성흔 모양의 레이저가 쏘아졌다. 어둠을 밝히는 달빛은 왼쪽 통로의 모습을 순간적으로 밝혔다.
"어우, 함정 제대로다."
바닥은 길이 없었다. 대신 날카로운 가시들이 발판처럼 튀어나와 누구든 찌를 기세로 놓여있었다.
"보통 던전에 저런 함정 깔아두기 마련이긴 하지. 근데 쟤는 저걸 당하라고 설치해둔 건가?"
"너무 어둡긴 하잖아. 밤눈 밝은 애들 아니면 무조건 당할 함정이야."
루나의 말대로 하겐티 던전은 몹시 어두웠다. 던전이라면 어디든 있는 야명주같은 발광물체들의 수가 희박하다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소리 들었어? 루나포 벽에 박혔다. 저기는 막다른 길이야."
"그럼 오른쪽으로 가?"
"아니. 오른쪽에도 한 번 쏴봐야지."
나는 루나를 오른쪽으로 두고 배를 두드렸다. 루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배에 힘을 줬다.
고오오오---!!
신성력을 머금은 은빛이 오른쪽 길을 밝혔다. 다행히 오른쪽은 길이 뻥뻥 뚫려있었다.
"진짜 더럽게 짜증나네."
나는 오른쪽 천장에 순간적으로 보인 종유석에 치가 떨렸다.
"이 새끼 함정마스터야 뭐야?! 잼민이도 맵 이 따위로 안 만들겠다!!"
"소리지르지마. 우리 화나게 만들려고 던전 이렇게 해둔 거잖아."
"그렇지. 후우. 이런 거에 화내면 내가 지는 거지. 젠장, 하겐티 놈 분명 던전 제일 안쪽에서 우리 이러는 거 구경하고 있을 거야. 그러면서 웃고 있겠지. '내가 만든 함정에 당해봐라!'하면서. 씨발, 그렇게는 안 되지."
죽으라고 놔둔 함정은 자고로 무용지물로 만들어야 제맛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공략법에 있어 이미 도가 튼 사람이다.
"라임! 지금부터 작업을 시작한다!"
꾸르륵.
내 등 뒤에 달라붙어 있던 라임이 갈림길의 앞에 섰다. 그리고 4열로 선 쿠키엘프들의 뒤에서 꿈틀거리던 그림자가 라임의 옆에 도열했다.
슬라임 드래곤 10기.
기존의 5호기에 더불어 마물합성을 통해 억지에 가깝게 수를 늘렸다. 한창 마석 소환 가챠를 하던 때부터 우리 던전의 터를 마련한 터줏대감 슬라임들이 어느새 다들 슬라임 드래곤이 된게 참 감개무량했다.
"하겐티에게 우리 군단의 정수를 보여주자꾸나. 라임, 왼쪽으로 할래 오른쪽으로 할래?"
나는 작업반장에게 작업의 방향을 맡겼다. 라임은 가만히 있다가 손을 들어올려 루나의 가슴을 크게 흔들었다.
"꺅?! 뭐하는 거야?!"
꾸르륵.
라임은 루나의 가슴을 좌우로 비틀다가 가운데로 모았다. 나는 그 의미가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륜이 있으면 바로 알 수 있는데. 씁, 아깝군."
"저 불렀어요?"
"마침 왔구나. 륜, 통역을 좀 해다오."
륜은 오자마자 라임이 루나의 가슴을 희롱하는 것을 보고 잠시 허탈해했지만, 곧 라임의 말을 진지하게 듣더니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저기요."
"......역시 라임이다."
우리 집 슬라임은 아무래도 천재가 아닐까.
* * *
하겐티.
48위 던전의 주인이자 황금갑옷을 입은 날개달린 미노타우르스는 휘황찬란한 옥좌에 앉아 느긋하게 시스템창을 열었다.
"또라이같은 놈들. 포털 열어놓고 사흘 동안 코빼기도 비추지 않다니."
처음 63위가 쟁탈전을 걸었다고 했을 때, 하겐티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개쌍욕을 퍼부었다. 어디서 63위 따위가 48위나 되는 자신에게 쟁탈전을 건단 말인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하겐티의 자만은 의심과 근심으로 변해갔다.
'상식적으로 나한테 싸움을 거는게 말이나 돼?'
지극히 평범한 마족이라고 자부하는 그로서는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하극상의 배경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첫째날, "씨발, 이거 그 군단에서 아랫것들 동원해서 하극상 일으키는 건가? 그 말로만 듣던 파견부대?"
둘째날, "뭐지? 쟁탈전을 걸어넣고 입구로 들어온 모험가나 용사들과 싸우는 건가? 그럼 나는 기다렸다가 뒷통수만 치면 되는 건데?"
셋째날, "이 병신들 포털 잘못열었구나! 58위를 48위로 착각한 거지! 암, 그렇고 말고!"
포털의 방향이 바뀌어 역공이 가능해진 넷째날, "이놈들 설마 나를 안달나게 해서 자기 던전에 들어오면 잡아먹으려고 하는 거지? 흐흐, 어림도 없다!"
그리고 닷새째.
포털이 양방향으로 바뀌자마자 입구에 놔둔 정찰병 미노타우르스는 곤죽이 되어 죽어버렸다. 첫 손님은 검은 로브의 망치든 오크로, 그 뒤를 따르는 많은 적들에 하겐티는 병력을 후방으로 전부 다 빼버렸다.
"씨발, 역시 윗대가리들이 파견한 거 맞잖아! 다크엘프가 뭐 저리 많아!"
무려 41명이나 되는 다크엘프들이 복장까지 통일한 채로 던전에 들어왔다. 하나같이 단련된 사냥꾼들로 보이는 그들의 등장에 하겐티는 심혈을 기울여 만든 던전의 함정을 믿어야만 했다.
"전력을 최대한 깎아놓고 싸운다!"
던전에 방이 10개 있다면 그 중 8개 가량이 전부 함정으로 구성되어있다. 방과 방을 잇는 통로마저도 함정이 가득하다.
가시발판을 통과해 지나갔더니 막다른 길이라거나.
통로를 지나가다가 종유석들 사이에서 가시창이 떨어진다거나.
땅에 숨어있던 구울들이 위를 지나가던 이의 발목을 붙잡아 독을 묻힌다거나.
사방에 숨겨둔 마법결계로 들어온 이의 마나를 갈취하는 방이라거나.
미로와도 같은 던전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공략하지 못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하극상으로 도전한 모든 마족들은 하겐티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죽었다.
"네놈들도 별반 다를 게 없을 것이다. ......응?"
갈작, 갈작.
하겐티는 시스템을 통해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통로 근처에 기습을 위해 숨겨둔 마물들의 시야를 공유하니, 그곳에는 충격적인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벽을...먹는다고?"
갈작, 갈작.
붉은 슬라임 드래곤 열 마리가 벽을 갉아먹고 있었다. 두 갈래 갈림길로 나뉘어진 '사이의 벽'을 갉아먹고 있었다.
적의 세력은 갈림길을 뚫어 통과하고 있었다.
"이, 이런 미친 놈들! 이건 아니지!!!"
하겐티는 옥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막 함정의 방에 있던 고블린과 검은 로브의 오크가 눈이 맞았다.
씨익.
오크는 사납게 웃으며 입으로 무언가 말했다. 하겐티는 옥좌의 옆에 놓아둔 황금의 양날 도끼를 들어올렸다.
"못참겠다!! 저 새끼 반드시 죽이고 엘프년들 내가 다 차지하겠다! 저 오크를 죽이는 자에게는 다크엘프 다섯을 하사하겠노라!!"
"""끄어어어어어!!"""
하겐티의 외침에 옥좌의 방을 가득 채우고 있던 마물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너 방금 뭐라고 그랬니?"
"어. 하겐티 부모님 안부를 좀 물었다."
김치맛 패드립을 차마 들려줄 수는 없어 복화술로 전했을 뿐.
========== 작품 후기 ==========
(매우 심한 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