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비만 오크 32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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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루나와 쿠키엘프 부대를 이끌고 가며 적 던전을 습격할 방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대략적인 작전 계획이 잡힌 이후, 나는 다시금 확인했지만 충격적인 사실을 들었다.
"진짜로 한 놈도 안 기어나왔어?"
"그럼. 상대도 당황했나봐. 사흘 동안 포털만 열리고 감감무소식이었으니. 하루동안 개미 한 마리도 안 넘어오던데?"
"흐흐. 플라우로스랑 그레모리 쪽은 그래도 간이라도 보던데, 이 녀석은 어지간히 겁쟁이로군. 좋다, 그럼 겁쟁이에게 우리 군단의 뉴페이스들을 보여줘야겠지?"
다크엘프들은 저마다 활을 들어올렸다. 엘프의 숲에서 가져온 본인들의 활을 검게 물들인 활은 들고 때려도 될 정도로 단단했다.
"샤이탄. 니프엘라에게 전해서 입구를 막으라고 전하라. 작전 〈3:3 미팅〉의 최종단계, '애프터 신청'을 시작한다."
[알겠습니다. 남은 시간, 5분....]
샤이탄의 카운트를 들으며, 나는 포털이 열려있는 지하 1층의 심처 앞에 도착했다. 예전에 할파스 던전과 한바탕 난리를 펼쳤던 바로 그 포털이 있던 곳에 새로운 포털이 생겨나있었다.
내가 열었다.
내가 쟁탈전을 걸어 만든 포털이었다.
[48위 하겐티 던전, 52위 알로켄 던전, 59위 오리아스 던전. 각각 포털이 양방향으로 열리기까지 앞으로 10초 남았습니다.]
"하겐티 놈, 우리가 먼저 포털을 열었으면 답장이라도 해줘야지. 가만히 앉아있어? 쳐들어간다."
나는 해머를 번쩍 들어올렸다. 생긴 건 돈까스 망치처럼 둔탁했지만, 내가 양손으로 들어야 할 정도로 무겁고 단단했다.
"셋, 둘, 하나."
〈알림〉 포털이 양방향으로 바뀌었습니다.
"진겨------억!!
나는 힘찬 외침과 함께 망치를 들고 앞으로 달렸다. 적이 무슨 방비를 하고 있든, 언제나 선두는 내가 들어가 적진을 확인해야했다.
우우웅---
포털에 들어가자마자 세상이 일렁거린다. 나는 어지러움을 이악물고 견뎌내며 앞으로 아무렇게나 망치를 휘둘렀다.
퍼---억!
무언가를 때리는 감각이 분명히 들었다. 그리고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 새끼, 똑같은 생각 했구나!'
생명체로 추정되는 무언가를 후려패니 흐릿했던 시야가 번뜩였다. 해머를 마저 휘두르니, 그 너머에는 허리부터 꺾인 미노타우르스가 바닥에 고꾸라져있었다.
"여기는 미노타우르스가 주력인가?"
미노타우르스는 과연 소고기 맛일까, 아니면 먹지 못할 고기일까. 포르네우스 던전에 있을 때부터 한 번도 먹지 못해본 녀석이라 나는 괜히 긴장되었다.
"소고기 맛들리면 돈 장난아니게 깨지는데."
마기가 깃든 고기라고 해도 맛들리면 분명 자꾸만 찾게 될 것이다. 나는 제발 미노타우르스가 그냥 한 마리만 나온 것이길 바라며, 내가 넘어온 포털을 향해 슬라임 구슬을 하나 집어던졌다.
"클리어!"
내 외침과 함께 포털로 쿠키엘프들이 튀어나왔다. 흔히 마족들의 노예가 되어 의기소침한 다크엘프들과는 달리, 우리 쿠키엘프들은 적극적으로 적을 사냥하는 숙련된 헌터들이다.
평균 등급 3.5성.
평균 레벨 60.
5성으로 진화 가능한 존재가 어째 하나도 없는게 흠이기는 했으나, 40명이서 30분만에 바퓰라 서브 던전을 공략한 전력은 거치레가 아니다.
"윽, 소똥냄새."
그리고 남의 던전을 넘어와서도 여전히 성흔이 반짝이고 있는 우리 던전 최강자, 루나 또한 쿠키엘프들의 사이로 포털을 넘어왔다.
"악취가 너무 심한데. 그냥 돌아가면 안될까?"
"안 돼. 48위 던전 아니냐. 혹시 알아? 상급 마석 한 두개 정도는 저장고에 쌓아뒀을지."
"칫. 돌아가면 옷들 전부 세탁할 거야. 아니다. 그냥 새로 한 벌씩 맞추는 게 좋겠다."
"들어오자마자 벌써부터 뒷일을 생각하다니. 자만심이 가슴만큼 크구나, 루나여!"
"뭐래. 38위도 그렇게 이겼는데 48위도 못 잡을까봐. 알았어, 진지하게 할게. 아무도 안 죽고 아무도 안 다치고.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며. 알았으니까 눈에 힘 빼."
"미안하다. 혹시나 무슨 일 있을까 싶어서."
"이해해. 그런데 힘주는 건 침대에서 허리에만 주고, 지금은 우리한테 편히 맡겨. 지시만 내려주고."
너무 눈치를 준걸까. 루나는 내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주변 쿠키엘프들의 시선을 신경도 쓰지 않고 가슴을 밀착했다. 쿠키엘프들은 그러려니 하는 얼굴로 사주경계 임무에 충실했다.
"한 잔 짜줄까?"
"나중에 소환시설까지 점령하고 나면 그 때 한 잔 받지."
서서히 전투의 긴장감이 올라오기 시작했고, 나는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동굴 벽의 폭과 높이는 미노타우르스 다섯이 손잡고 달려도 될 정도로 넓고 높았다.
"우리 던전 통로의 서너배는 되겠어. 근데 이 새끼는 시작부터 장난질이네? 입구부터 던전을 두 갈래로 만들어놔?"
우리가 들어온 포털이 던전의 가장 심처라고 가정한다면, 하겐티는 쟁탈전으로 인한 포털의 위치를 일부러 이곳에 열리도록 조정해놓은 셈이나 다름 없었다. 마치 모험가들이 입구에서부터 차근차근 공략하듯이.
"정찰병력은 없는 듯 하고."
천장에 숨겨둔 슬라임이라거나 바닥에 숨구멍을 뚫고 올려다보는 화염표범 같은 건 없었다. 차근차근 앞에서부터 정리해나가는 방법밖에는 없다.
"이거 영 찝집한데. 그냥 갔다가는 조질 것 같다."
"무슨 근거로?"
"내 감이."
정찰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적을 상대로 그냥 공격하러 들어가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차근차근 한 걸음씩 내딛는게 낫다.
"어차피 다른 애들한테도 똑같이 시켜놨으니까 문제 없을 거다. 여기는 오히려 더 만들기도 쉬울 거고."
나는 포털을 향해 슬라임 구슬을 두 개 던졌다. 그러자 시간이 잠시 지나니 한 무리의 구울들이 어깨에 통나무를 들고 포털로 넘어왔다.
"벙커 만들자."
포털로 넘어간 즉시 각이 보이면 진 구축하기.
할파스 때와 마찬가지로 적 던전 포털앞에 진지를 만드는 건 이전과 똑같은 원패턴의 전략이지만, 그게 어느 누구에게나 통하게 되는 경우 그것을 이렇게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정석이라고.
"앞으로 이게 던전 쟁탈전의 정석이다."
* * *
〈그 시각, 그레모리 던전.〉
"되게 오랜만에 병력을 운용하네. 쟁탈전으로 공성하는데 군단 병사들을 움직이기는 이번이 처음이야."
[불안하면 더 보내드리겠습니다.]
"아니야, 됐어. 이 정도면 충분해. 말동무 해줘서 고마워."
그레모리는 자신의 뒤에 시립한 30여기의 워울프 라이더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워울프 위에 올라탄 오크들은 당장 전투를 치를 기세로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52위 던전이잖아. 나 걔 알아. 기동전으로 들어가면 내가 걔 이겨."
[하지만 조심하십시오. 53, 54, 55위가 전부 없었습니다. 52위에게 먹혔을 수도 있습니다.]
"괜찮아. 내가 그냥 가만히 있어서 56위에 있었지, 원래 실력은 40위권에 놀아도 모자랄 여자라니까?"
[근데 주인님한테 졌잖아요.]
샤이탄의 농담에 그레모리는 순간 울컥했다.
"...걔가 30위권, 아니 20위권 실력을 가지고 있는 거지. 아니다, 그 위인가? 키히힛."
그레모리의 자폭에 샤이탄은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샤이탄이 반박이라도 했다가는 누군가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셈이었다.
[그러니까 주인님한테 진 것 말고는 내가 질 수가 없다?]
"당연하지. 얘, 던전 주인으로서 죽인 마족이 얼마나 많은데. 이쪽은 전혀 걱정하지마. 네가 걱정할 애는 촉수야, 촉수."
[안 그래도 지금 그쪽에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그럼됐네. 혹시나 안되겠다 싶으면 바로 퇴각할 거니까."
그레모리는 자신의 날개를 쓰다듬으며 시간이 되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포털 앞에는 털이 수북한 낙타 괴물들이 주먹으로 땅을 치며 콧김을 내뿜고 있었다.
조 카멜.
그레모리가 예전부터 주력으로 사용했던 낙타 괴물로서, 그레모리는 그나마 인간형을 유지하고 있는 2성 마물들을 싸그리 부활시켰다. 시간이 점점 다가오자 그레모리는 조 카멜들을 향해 으름장을 놓았다.
"너희, 이제 다르게 살아야 한다? 니들이 박았던 몸은 이미 갈아치워서, 나는 완전히 새로 태어난 여자라고! 니들 좆은 상대 던전 점령하고 포로 년들한테나 박아, 알았어?!"
끄어어엉.
조 카멜들은 구슬프게 울었다. 누가봐도 먹음직스럽고 박음직스러운 그레모리와 하지 못한다는 것에 슬펐고, 그레모리의 주인이 자신들은 감히 넘볼 수 없는 군단의 주인이라는 것이 더욱 슬펐다.
"그레모리 님, 굳이 저것들을 부활시킬 이유가...?"
워울프 라이더의 대장을 맡은 퍼시발은 포털의 입구를 막아선 조 카멜들에 난색을 표했다. 군단장이 허락을 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그레모리의 난잡한 과거를 상기시키는 존재였다.
"왜? 찝찝해?"
"조금 그렇습니다만."
"그렇게 찝찝하면 아더부터 좆대가리 잘라야지. 깔깔."
그레모리의 수위높은 말에 퍼시발은 침묵했다. 그에 그레모리는 퍼시발의 어깨를 팡팡 두드리며 웃었다.
"걱정마. 그래서 새롭게 태어난 거니까. 그 걸레마녀는 죽었고, 이제 이 곳에 있는 건 성행위를 딱 한 명이랑만 해본 고결한 타천사님 밖에 없으니까."
"아, 예. 그러시군요."
"너 어째 반응이 영 그렇다? 흥, 됐어. 너희 아빠놈한테 따지지 뭐. 아, 시간됐다. 슬슬 열린다?"
그레모리는 서서히 변하기 시작하는 포털을 확인한 뒤, 포털 앞을 막아선 조 카멜들에게 힘차게 소리쳤다.
"야! 기껏 부활시켜 준거다? 살고 싶으면 살아남아야 해!"
꾸어어엉....
조 카멜들을 구슬프게 울었다. 한 때는 그레모리의 든든한 방패박이였던 그들이 고기방패로 전락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너희 열 명! 살아남으면 내가 다크엘프랑 한 번 하게 해준다!"
끄어어어엉!!
조 카멜들을 힘차게 소리를 지르며 팔을 들어올렸다. 그레모리는 낄낄 웃으며 퍼시발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렇게 막 질러도 되는 겁니까?"
"뭐래. 너희 대장이 더럽게 잘 하는 거 아니야. 이기고 돌아오면 한 번 찐하게 박아준다고. 나는 그걸 다크엘프로 했을 뿐이야."
"어디 걔들이 쟤들한테 한 번 해준답니까?"
"모르지. 낙타 취향인 애가 한 명이라도 있을지. 그리고 어차피 쟤들 다 못 살아."
그레모리의 냉정한 말에 퍼시발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등에 달린 하얀 날개와 대비될 정도로 이상하리만큼 그레모리의 머리칼은 핏빛처럼 붉었다.
"부하들은 내다버리는 소모품. 여차하다 죽으면 다시 부활시키거나 새로 뽑으면 그만. 너희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전투지?"
"...조금 그렇습니다."
소모전. 분노의 군단에 있어서는 어울리지 않는 전쟁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레모리는 자신의 옛 부하들을 소모전에 투입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럼 잘 알아둬. 그리고 너희 형제들에게 전해. 이게 바로 던전 주인들의 싸움 방식이라는 걸."
구구구구---!!
던전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포털을 통해 넘어온 4족보행 괴물은 전차를 이끌며 그레모리 던전으로 툭 튀어나왔다.
"막아----!!"
꾸어어어엉!!
조 카멜은 괴물 전차의 진격을 몸으로 막아냈다. 10마리가 한 마음 한 뜻으로 포털을 넘어오는 전차를 틀어막았다.
"52위, 알로켄. 수비를 던전에서 하지 않고 자기 던전 근처의 넓은 황야에서 싸우는 녀석이야. 주력은...늑대형 괴수들이 이끄는 전차."
쿠워어어어!!
전차의 위에 올라있는 3m 거인-오우거가 괴성을 지르며 곤봉을 들어올렸다. 피가 눅진눅진 묻어있는 곤봉은 앞길을 막아선 조 카멜들을 사정없이 후려치고 있었다.
"전장을 자기 던전으로 쓰지 않아. 그래서 역으로 공격할 거라고 생각했지. 후후, 어때? 네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잔혹한가?"
"......그레모리 어머님의 모습과는 잘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퍼시발은 속내를 최대한 꾹꾹 눌러 말했다. 그레모리는 그런 퍼시발의 표정을 읽고 낄낄거리며 등을 두드렸다.
"하여튼 '인간다운' 녀석들이라니까. 뿌리부터가 달라서 그런가? 너희들은 진짜 인간이 반쯤 섞인 하프오크라고 봐도 되겠다, 얘. 아니, 너희 심성은 거의 인간인야, 인간."
"친어머니가 인간이니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농담이야. 그래도 내가 틀린 말 한 건 아니다? 네 모친이 인간이기는 하지만, 인간보다도 더 인간같은 마족이 하나 있잖아."
"...대장님. 적이 슬슬 늘어나고 있습니다."
퍼시발은 호칭을 바꾸며 화제를 바꾸었다. 시시콜콜한 농담을 나누기엔 포털 너머로 밀려오는 전차의 수가 너무나도 많았다.
꾸어어엉, 크웅, 끄어어어!!
전차를 막는 벽이 된 조 카멜들은 비명을 지르며 전차를 막아섰다. 괴수들에게 목이 물리고 머리를 얻어맞으면서도, 마치 이런 상황이 익숙하기라도 한 듯 전차의 진격을 막아냈다.
마치, '시간'을 벌기라도 하듯.
"군단장은 이해하지 못할 싸움 방식이지. 하지만 이 쟁탈전의 지휘권자는 나야. 잘 봐."
그레모리가 손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손에는 막대한 마력이 뭉치기 시작했다.
"이게 마족의 싸움 방식이야."
그레모리는 씩 웃으며, 폭발할 것만 같은 마나의 덩어리를 조 카멜의 벽 너머로 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