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비만 오크 31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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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각, 엘프의 숲 근처.〉
"도착했어요. 여기가 엘프의 숲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요."
성녀는 주변과 별반 다를게 없는 숲에 멈춰섰다. 타고온 말조차 멀찍이 묶어두고 몇십분을 걸어오는 동안 풍경하나 변하지 않았는데 입구라는 말을 하니 트랄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입구? 문도 없고 표시도 없는데? 나를 바보로 아는가? 아니면 엘프들은 영역이라는 개념이 일반 상식과 다른가?"
"엘프들이 무슨 야생 짐승인 줄 알아요? 영역표시라도 해두게? 이 숲 전체가 엘프의 숲이에요. 당신 마나 못 느껴요?"
"마나를 느끼지 못 해. 그래서 내게는 그저 평범한 숲으로 보인다. 엘프의 숲은 마나로 이루어진 결계같은 건가?"
담담한 트랄의 말에 성녀는 얼굴이 붉어졌다.
"미안해요, 마나를 느끼지 못 하는 줄 몰랐어요. 흠흠. 같은 게 아니라 결계에요. 정해진 길로 들어가지 않으면 영원히 숲을 헤메이게 되는 미로가 설치되어있고, 그 미로를 통과해도 호의적인 자가 아니면 수호대가 와서 철저히 응징을 하죠. 잘 봐봐요."
성녀는 전방을 향해 신성력을 흩뿌렸다. 은빛의 안개가 허공을 두둥실 떠다니더니, 트랄의 눈에도 보이는 기하학적인 무늬의 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멋지군."
"예쁘기는 하죠. 엘프들의 손속이 잔혹해서 침입자가 어떻게 될 지 모르기도 하지만. 그럼 잘 따라와요. 괜히 어디 어슬렁거리다가 이상한 곳으로 흘러가지말고."
성녀는 타우러스 영지에서 성기사단이 단체로 미아가 되었던 것을 떠올렸다. 덕분에 오크 용사의 정체를 은폐할 수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또다시 미아를 만드는 건 사양이었다.
"엘프들이 당신 피부를 먼저 볼 것 같아요, 아니면 로브 아래에 가지고 있는 성검을 먼저 볼 것 같아요?"
이 오크 용사까지 길을 잃어버리면 대책이 없다. 행여나 엘프들과 마주쳐 오크라는게 드러나기라도 한다면?
"그러니까 제 정신건강을 위해서 순순히 따라오세요."
"잠깐만. 따라오라니? 결계안으로 들어가라는 말인가? 그러다가 엘프들이 내 존재를 눈치채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게 더 위험한 것 같은데?"
"...당신은 오크이기 전에 용사니까 마을 앞까지는 괜찮을지도 몰라요. 제가 옆에 있으니까. 후드를 벗지말고 무조건 성검부터 꺼내세요. 알겠죠?"
트랄은 장갑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가 열심히 밀봉을 한 덕분에 그는 적어도 녹색 피부가 드러날 일은 없었다.
"가요. 가는동안 심심하니까 이야기나 하죠."
"질문 하나 해도 되나? 엘프들도 성검의 용사를 지지하는 입장인가? 이야기를 들어선 성검이 엘프측에도 좋게 통하는 것 같은데."
"당연하죠. 성검의 제작 배경에는 엘프들도 한 몫을 했으니까."
"한 몫?"
성녀는 수풀을 파헤치며 빈정거리듯 말했다.
"교단에서 금기로 삼은 속설이긴한데 성검의 용사니까 알려드릴게요. 성검은 순결을 품고 죽은 하이엘프로 만들어졌다는 전승이 있어요. 불에 태우고 남은 뼈를 갈아서 검의 재료로 만들었다느니, 하이엘프의 정수를 녹여서 검에 벼려놓았다느니. 너무 잔인해서 교단에서는 금기로 정했어요. 성검의 위상이 깎이기도 하고."
후드 아래 트랄의 표정이 제대로 굳었다. 성녀는 트랄의 소매 끝자락을 붙잡았다.
"어디까지나 전설같은 거니까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이에요. 만약에 진짜였으면 성검을 엘프들이 가만히 놔뒀겠어요? 노발대발하면서 다 박살내려 들 지."
"그렇긴 하군. 전승이 그런 식이면 도대체 이 성검은 어디서 만들어진 거지?"
"저도 몰라요. 애초에 성검이라는 것 자체가 여신님께서도 잘 모르는 거고."
"......?"
"성검이 무한히 신성력을 뽑아내는 걸 여쭤봤더니 '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같은 답을 해주시는 분인 걸요. 여신님을 너무 믿지 마세요. 교단에서 말하는 대부분의 교리는 '여신님 가라사대'로 시작하지만 죄다 엉터리에요. 여신님은 분명히 계시지만 관심은 다른 곳에 있으시거든요."
"성녀가 해선 안 될 말 같은데. 그걸 나한테 굳이 하는 이유가 뭐지?"
"그러게요."
성녀는 지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하소연 하는 거죠. 여신님께서 지금 뭐라고 하시는 지 알아요? 오크를 데리고 엘프들 앞에서 덮치래요. 용사와 성녀가 남들 보이지 않는 수풀에서 배를 맞추는 건 국룰이라나 뭐라나. 제가 이해할 수 없는 말만 하시죠."
"알았다. 네가 가짜 성녀거나, 여신이 가짜거나. 둘 다 그럴 가능성은 낮으니 네가 나를 놀리려고 거짓말을 하는 거군."
"그래요. 거짓말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계속 씨부릴테니까. 남이 여자랑 하는 것도 옆에서 신경도 안쓰더니 참 인간세상에 관심이 없으시네요."
"인간세상을 신경써야하나? 신경 쓸 이유가 하등 없지. 목적만 이루면 인간 세상에 나오지 않을 거니까."
트랄은 자문자답하며 성녀의 뒤를 계속 따라 걸었다. 성녀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목적을 달성하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우리 타우러스의 용사님. 희생하는 셈치고 제 하소연 좀 들어주실래요?"
"들어는 주겠다."
트랄이 말하기 무섭게 성녀는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성녀라는 것도 그냥 왠 미친 년 헛소리 들어주는 게 일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무슨 거대 제국의 황녀급이니 시끄럽게 떠들죠. 저는 그냥 예쁜 아가씨들이랑 하하호호 하고 싶을 뿐인데. 그거 알아요? 중앙교단에 있는 고위직 대부분이 신성력도 제대로 못 쓰는 반쪼가리인 거?"
"됐다. 나는 더이상 안 들을란다. 인간의 언어는 이해할 수 없군."
"그래요. 그런 자세에요. 대신 나중에 교단에 갔을 때 괜히 현혹되지 말라는 거에요. 능구렁이같은 정치쟁이들이 얼마나 많은 용사를 전장에 처박았는데. 진짜 아리에스 백작처럼 변경백으로 대륙 끝에서 던전 틀어막는게 현명한 처사라니까요? 아주 환멸이 난단 말이죠, 환멸이."
"여기 엘프의 숲이면 엘프들이 다 듣는 거 아닌지 몰라. 나야 관계없지만, 혹시나 다른 엘프들이 들으면 그대를 사도로 규정하지 않을까 걱정되는 군."
"...알았어요. 그만할게요. 용사로서 가져야 할 여러가지 조언들을 해주는 건데 듣기 싫다면 어쩔 수 없죠. 그리고 지금 주변에 엘프 없…."
성녀는 숨을 죽였다. 트랄 또한 무언가를 느꼈다. 둘은 서로를 한 번 슥 바라보고는 바로 기척을 바꿨다.
"타우러스."
"이미 꺼냈다."
무언가가 숲을 열심히 가로지르며 달려오고 있다. 트랄은 진작에 성검을 뽑아 바닥을 향해 늘어뜨렸고, 성녀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자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하아, 하아!"
"...1장로님?"
성녀는 거칠게 호흡을 하는 익숙한 얼굴의 하이엘프가 1장로인 걸 눈치채고 화들짝 놀랐다. 살짝 표독스러운 눈매의 그녀는 1장로가 분명했다.
"여기까진 무슨 일로…?"
"그러는 성녀님이야말로 어떤 이유로 숲을…?"
서로가 서로를 떠보기 시작했다. 성녀는 왜 1장로가 숲 바깥까지 나왔는지 의아해하고, 1장로는 성녀가 이상한 호위 하나를 대동하고 엘프의 숲을 찾은 것이 의아했다.
"반갑습니다, 1장로 님."
성녀가 먼저 인사를 했다.
"...제가 온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엘프 여왕이 탄생한 것을 축하드리기 위함입니다."
"......감사합니다. 안부는 대신 전해드리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돌아가주십시오. 아니, 앞으로 숲을 찾아오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그 어떤 존재도."
성녀는 눈썹을 찌푸렸다. 옆에서 대놓고 타우러스를 꺼내 보이고 있는데도 1장로는 전혀 신경쓰지 못했다. 대화를 하면서도 1장로의 시선은 연신 뒤를 향하고 있었다.
"숲에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어떤 일인지 대답을 드리기 곤란한 지라 제가 나와서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까?"
"엘프 여왕님께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인간이 나설 일이 아닙니다. 죄송하지만 돌아가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실력행사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설령 성녀님이라고 해도."
서로가 서로를 과하게 간을 보며 떠보는 이들끼리 만나 실속이 전혀 없는 대화만 이어졌다. 성녀는 너무나도 완강한 1장로의 태도에 한 걸음 물러섰다.
"한 가지만 말씀해주시죠. 엘프는 누구의 편입니까?"
"......인류 연합도 마왕군의 편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1장로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으나 거짓말을 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 말이 틀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성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등을 돌렸다. 트랄은 짧게 목례를 하며 성녀의 뒤를 따랐다. 한시도 쉬지 않고 재잘거리던 성녀는 결계를 빠져나올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히히힝.
말을 묶어둔 곳까지 와서야 성녀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주저앉았다. 트랄은 당황한 말들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좀 더 따졌어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꼰대들이랑 기싸움하기 질렸어요. 여왕에게 인사는 전했으니 성녀가 할 일은 다 한 거죠. 흥, 내가 자기들 해코지하려고 간 것도 아니고…. 도와주려고 해도 그렇게 나오면 사람 기분이 섭섭하잖아요."
"그런 것 치고는 지금도 표정이 심각한데."
"성녀가 굴욕을 당한 건 중요치 않아요. 인간의 대표가 엘프들과의 교류가 끊겼다는 게 문제지. ......인류 연합 입장에서는 뭐 된 상황이죠. 엘프 여왕은 성녀보다 위라고 할 수 있는 존재에요. 대륙 전체 엘프들을 상대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존재. 그런 자가 그 대단하신 1장로를 보내서 성녀와의 대면을 거부했어요. 그게 무슨 의미겠어요?"
성녀의 빈정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이건 바깥과 더이상 교류하지 않겠다는 거죠. 마왕군의 편을 들지는 않겠지만, 이건 완전중립을 표방하는-"
"속단이군. 너무 나간 것 아닌가? 그저 마을의 혼란을 인간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하는 걸수도 있지 않나."
"......."
성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트랄은 나무에 묶어둔 고삐를 풀며 말의 털을 쓰다듬었다.
"차분히 이야기를 했다면 어떨까. 그대도 스스로 알고 있을 것이다. 문전박대를 당하자마자 그대의 목소리가 상당히 공격적으로 변했다는 것을. 당황한 상대를 상대로 언성을 높이는 건 좋지 않아."
"그래서 차분하게 이야기를 했으면 여왕 탄생으로 난리가 난 엘프의 숲의 문제를 알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대화는 아주 중요한 교류 수단이지."
"...당신한테 설교를 들을 줄은 몰랐네요. 알았어요, 참고할게요. 그래서 용사님 의견은 어때요?"
"보통 이런 경우에는 말이지."
트랄은 두 손바닥을 붙였다 떨어뜨렸다.
"내분이다. 예상외의 존재가 여왕으로 태어나 엘프들의 패가 둘로 갈린 것이지. 그런 상황에서 성녀에게 숲의 혼란을 보여줄 수 없는 상태에서 급히 1장로라는 자가 나온 것이고."
"풋. 그럴 듯 하네요. 그럼 예상외의 존재가 누구길래 저 난리가 났을 것 같아요?"
"......엘프이되 엘프가 아닌 자?"
"하."
성녀는 트랄을 향해 비웃었다.
"다크엘프가 여왕이라도 되셨나? 만약에 진짜 그러면 제가 당신 소원하나 들어드릴게요."
"내가 아는 이가 말하기를, 입은 만악의 근원이라 함부로 놀리지 말라고 했다네.”
"......사실 당신이 말하는 사람 전부 한 사람이죠?"
"흠흠."
트랄은 시선을 돌리며 두 필의 말을 끌었다. 성녀는 트랄의 뒤를 따르며 안장에 훌쩍 뛰어 앉았다.
"다크엘프가 여왕이 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어요. 다크엘프가 어떻게 다크엘프가 되냐면요, 마물에게 질내사정을 당하는 건데 여왕은 순결한 처녀만이 가능한…."
***
"어서와, 2장로님. 직책으로 부르면 너무 딱딱한가? 예전처럼 니프엘라 언니라고 부를까?"
"......우선 인사부터 받으시죠."
2장로-하이엘프 니프엘라는 루나를 향해 허리를 꾸벅 숙였다. 루나가 하복부에 자랑스럽게 내놓은 성흔은 분명한 여왕의 상징이었다.
"여왕님. 몇 가지 여쭤보겠습니다."
"얼마든지."
"......뒤에 있는 오크와 지금 뭘하고 있는 겁니까?"
니프엘라는 루나의 기묘한 자세를 지적했다. 기마자세를 취하고 있는 오크의 위에 걸터앉은 루나는 다리를 꼬며 상체를 숙였다. 검은 드레스 아래에 드러난 구릿빛 피부에 니프엘라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루나에게는 이전에는 없던 색기와 요염함이 물씬 풍기고 있었다.
"뭘하고 있는 것 같아?"
"...오크의 위에 올라타 계신 것 같습니다."
"맞아. 올라타있지."
루나는 기다렸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마침 잘 됐네. 니프엘라 언니는 자식을 낳은 적이 있던가?"
"저는 아쉽게도 신수님의 은총을 처녀때 이외에는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 그러면 이번에 새롭게 은총을 받으면 되겠네. 여왕의 명령이야."
루나는 정자세로 근엄하게 앉은 오크의 가랑이 사이에 무릎을 꿇으며 앉아 자지를 얼굴에 붙였다.
"오크랑 섹스해서 타락해. 다크엘프로."
"......여신이시여."
열망으로 이글거리는 여왕의 눈빛에 니프엘라는 눈을 감아버렸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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