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비만 오크 31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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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되었다.
에일라는 라스베가스 수비군의 강화를 위해 자리를 떠났고, 나와 샤이탄은 조합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조합장은 졸린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눈가의 다크서클은 짙다못해 검버섯이 핀 것만 같았다. 척 보기에도 피곤해 죽을 것 같은 얼굴이지만 내가 왔다고 해서 일부러 몸을 일으킨게 틀림없었다.
"언제 잤나?"
"...30분 전에 잠들었습니다."
"...그건 미안하군. 물건만 챙겨서 돌아가겠다. 그건 완성했느냐?"
"저기 있습니다. 아직 포장은 하지 않았지만...."
조합장은 벽면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여성의 모습을 본딴 슬라임 마네킹이 있었고, 마네킹은 내가 주문한 옷을 입고 있었다.
"스웨터인가요?"
샤이탄은 순수한 얼굴로 다가가 옷을 살폈다. 그리고 등 뒤를 본 순간 표정이 굳어버렸다.
"주인님...?"
"네가 입을 것이다."
"예?"
"날개와 꼬리를 꺼내느라 매번 옷 뒷부분을 잘라내야 하는 것이 얼마나 불편하겠느냐. 등 부분을 아예 열어버리면 그만인 것을."
동정을 죽이는 옷. 터틀넥 스웨터에서 시작되어 등 부분을 한껏 열어젖힌 그 옷은 의도치않게 서큐버스에게 최적화 된 옷이었다.
'등에 날개 달고 있는 애들한테도 입히면 좋겠지만 그거랑은 또 다르지.'
"입고와라."
"......."
샤이탄은 순순히 마네킹에게서 터틀넥 스웨터를 벗겨 창고로 사라졌다. 나는 샤이탄이 갈아입고 오는 사이, 조합장이 만들어놓은 다른 옷들알 차근차근 살폈다.
"하이니삭스부터 가터벨트까지...흠, 좋군. 이제 이것들도 슬슬 양산화 작업을...조합장?"
"예?"
"자러 들어가도 좋다."
"아닙니다."
조합장은 방금 막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일부러 자라고 침대에 내던져도 금방 오뚝이처럼 일어날 것만 같았다. 육체는 피로로 쩔어있지만, 뭔가가 그의 정신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게 틀림 없었다.
"......이보시오, 조합장."
"말씀하십시오."
"그대가 나의 여인들에게 다양한 옷을 만들어주고는 하지만, 나의 여인들에게 어떤 성욕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나는 믿고 있다."
"물론입니다."
"그러니 그대는 순수한 의류계 종사자로서, 어디까지나 디자이너로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딜레마였다.
옷을 만드는 장인이 여자였으면 직접 안에서 시착을 돕기라도 했을텐데, 조합장은 분명한 XY염색체의 인간이니 내가 조금 찝찝할 수밖에 없다.
'일류 모델들은 디자이너가 성적으로 자길 바라본다는 거 다 안다고 하던데.'
남자 디자이너가 과연 여자 모델을 아무런 음심없이 바라볼 수 있을까. 아무리 조합장의 겉모습이 반백이 넘은 노인처럼 보여도 그 또한 남자다.
"그러니 매번 그대에게 도움을 받고 있으나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대와 내가 서로 적정 선을 지켜야만이 이 관계도 계속 유지될 것이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군단장께서는 마음껏 만끽하십시오. 저는...당신께서 알려주신 의복들이 이 세계의 여인들이 입고 있는 걸 보는 낙으로 사는 노인일 뿐입니다. 흐흐."
변태가 여기있다. 그런 변태이기에 우리 군단의 큰 도움이 되는 남자이기도 했다.
"그래. 에일라 스쿨미즈 때도 그랬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옷을 만든 제작자로서...."
"다, 다 갈아입었습니다. 주인님."
샤이탄은 창고 쪽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부끄러울까 싶어,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창고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최대한 주인님의 의도에 맞게 갈아입어봤습니다. 어떤가요?"
"역시 서큐버스다. 역시 샤이탄이야."
나는 샤이탄을 안쪽으로 밀어넣고 뒤로 돌렸다. 터틀넥 아래로 환하게 드러난 등은 엉덩이 골이 살짝 보이는 부분까지 아무것도 없었다.
"브라끈도 없고, 치마 부분의 끝에 꼬리를 꺼내놓았구나. 검은 팬티와 스웨터 말고는 아무것도 입지 않았어. 심지어 스타킹마저도. 역시 샤이탄이로다!"
서큐버스가 이 옷을 입고 동정의 앞에 나타난다면 분명 동정은 심장마비로 죽을 것이다. 그만큼 샤이탄이 입은 스웨터는 파괴력이 상당했다.
'정면에서 보면 정숙한데 뒤는 거의 면적이 없는 거지.'
"그런데 샤이탄, 옆가슴 부분이 어떻게 이리 딱 달라붙어있는 거지? 안이 보이질 않는구나."
"그, 그냥 놔두니까 너무 헐렁해서 마나로 수습을 했습니다. ...주인님께서는 다른 이들이 제 옆가슴을 보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아니. 잘했다. 자, 이제 나가자꾸나."
나는 샤이탄과 팔짱을 끼며 밖을 가리켰다. 조합장은 천국에 오른듯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다.
"응?"
그런데 왠 걸, 샤이탄은 밖으로 나가기를 완강히 거부했다. 팔짱을 끼고 나를 잡아당기며 고개를 연거푸 가로젓고 있었다.
"이, 이 옷은 부끄럽습니다! 설마 이걸 입고 지금 밖에 나돌아다니게 할 생각이십니까?!"
"그럼 당연하지. 오늘 네가 나의 파트너가 되어주기로 한 거 아니었냐? 이거...데이트다?"
일과 데이트가 병행되기는 하겠으나, 그래도 함께 우리 군단의 세력을 산책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너를 위해 만들어진 옷이다. 다른 애들한테 자랑해야지?"
"그게 제일 부끄럽단 말입니다...."
"서큐버스가 야한 옷 입은 걸 부끄러워 하다니, 서큐버스 자격이 없구만!"
"차라리 마이크로 비키니를 입고 있으면 서큐버스답게 당당하게 나서면 되지만! 이, 이 옷은 뭔가...그러니까...."
샤이탄은 내 팔에 얼굴을 묻고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분명 가릴 곳은 다 가리고 있는데, 등이 다 뚫려 있어서 발가벗고 있는 것 같다고요...."
"...하긴, 너 서큐버스 마담이라면서 처음 여기 왔을 때부터 에스투처럼 정장 스타일로 입었지. 위에서부터 쫙 빼입은 옷이 아주-"
순간, 나는 지금까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를 떠올리고 말았다.
"......샤이탄. 나야 그렇고 그런 존재라서 이런 옷들을 알고, 너도 내 꿈에 접속해서 안 거 아니냐."
"그렇...죠?"
갑자기 진지해진 내 목소리에 샤이탄은 덩달아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비즈니스 슈트를 입은 OL 서큐버스라는 게 말이 되나? 너 그 옷 어디서 났어?"
"저 또한 알에서 시간가속 마법으로 태어난 존재라, 태어날 때부터 입고있었습니다. ...알고 있는 분이라고 한다면 역시-"
"에스투겠네."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솔로몬 말이야, 혹시...."
"......에이, 설마요. 그냥 우연이겠죠. 주인님 같은 분을 알게되어 그 사람에게서 지식을 가져갔다거나...."
"......."
"......."
잠시동안 나와 샤이탄은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눈빛만 봐도 서로 통하는 생각은 '덮자'. 괜히 마왕의 정체에 대해 파고들었다가는 머리가 복잡해 질 뿐이었다.
'그냥 마왕이 주는 떡고물이나 얻어 먹는 걸로.'
괜히 깝치다가는 시스템을 몰수당할 수도 있으니, 그저 그런 가능성도 있다는 것만 놔두고 더이상 깊게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에이, 잡생각은 그만. 샤이탄, 빨리 다음 곳으로 가자꾸나."
"예. 제가 모시겠습니다. 어디로 갈까요?"
"다음은...그래."
나는 샤이탄의 날개를 쓰다듬으며 포털을 가리켰다.
"새로 날개 생긴 여자한테 옷을 자랑하러 가자꾸나."
나와 샤이탄은 그레모리 던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간밤에 불편한 것은 없으셨습니까?"
"전혀요. 남작님 덕분에 편히 쉬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성녀는 떨리는 입꼬리를 간신히 붙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닭이 새벽을 알린 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지만, 성녀는 떠날 채비를 재촉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던전을 정리하고 가야했는데...."
"아닙니다. 바쁘신 와중에 이곳까지 걸음해주신 것만으로도 영지민들이 큰 안심을 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성기사단도 지원을 해주셨잖습니까. 혹시 뭐 더 필요한 것은 없습니까? 저희 가문의 기사라도 수행원으로...."
"아뇨, 괜찮아요. 이 남자 한 명이면 충분해요."
성녀는 자신의 뒤에 시립한 검은 로브의 거한을 가리켰다. 남작은 로브에 금빛으로 수놓인 자국을 보며 감탄했다.
"메어리 양 상단의 물건이군요. 그런 로브는 처음 보는 물건인데...."
"...따로 파는 물건은 아니고, 상단에서 쓰는 물건을 빌렸습니다. 장기 행상용 외투라고 하더군요."
실제로는 빌렸다기 보다는 성수로 로브를 산 셈이나 다름없었지만, 성녀는 남작에게서 흘러나온 께름칙한 기운에 대충 둘러댔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머지는 기사단장과 이야기를 나누어보시지요."
"예. 살펴가십시오. ...그래도 성녀님, 영지를 벗어날 때까지 저희 영지의 기사들이-"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버지나니야 비르고 남작님."
성녀는 인자한 미소로 인사를 남긴 뒤 빠르게 영주 관저를 빠져나왔다. 새벽부터 농사를 지으러 나온 이들은 말을 타고 달려나가는 성녀를 보며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
"무엇이 그리 마음에 걸리는가?"
"당신이 보기에는 어때요? 인간들이 '성녀'를 상대로 바라보는 시각이."
"많은 기대를 하고 있더군. 마치 그대가 내게 준 책속의 용사들에게 보이던 사람들의 시각처럼."
트랄의 말에 성녀는 살짝 울컥했다. 그리고 동시에 자괴감이 들었다.
"당신은 제가 이상하지 않아요? 남들은 다들 저를 떠받드는데, 정작 그 성녀라는 애가 여자를 침실로 들여서 분노를 삭이고 있다는 게."
"오크가 인간을 판단하는 기준은 단 하나다. 강한지 약한지. 그대는 강한 인간이다.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흥, 됐어요. 강한 건 나도 알고 있는데 그냥 투정 한 번 부려봤어요. 기도를 들어줄 분도 지금 그 모양이니...쯧."
성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에는 여신을 향해 기도를 하며 심신을 달랬으나, 마왕군과의 전쟁이 격화될수록 여신은 계속 '아이를 낳으라'와 같은 신탁을 내릴 뿐이었다.
"이제 엘프의 숲을 들렸다가 갈 거니까, 괜히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엘프의 영역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세요. 장로들 만나고 금방 들어올테니까."
"엘프들은 위험하지 않나?"
"당신이 엘프 영역 들어가는 게 더 위험해요. 엘프들 상대로 이길 수나 있어요?"
"직접 싸워봐야 알겠지."
"......엘프들은 성검의 용사라고 해도 봐주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순순히 제 말을 좀 들으세요."
성녀와 트랄은 옥신각신하며 엘프의 숲으로 나아갔다. 그 바람에 성녀는 눈치채지 못했다.
자신이 몇 번이고 마주쳤던 엘프의 숲 2장로가 엘프들을 이끌고 숲을 빠져나가는 것을.
* * *
"어서와, 타천사는 처음이지?"
"자기 몸도 아니면서 벌써부터 막 쓰기 시작하네. 자세 나빠져."
그레모리는 의자에 누워있는 자세로 우리를 맞이했다. 밤 사이 제법 많이 먹고 마셔서 더 쉬고 싶을 법도 하건만, 그레모리는 던전 주인으로 복귀하자마자 밀린 일들을 빠르게 처리하기 위해 일찍부터 일어나있었다.
"축제로 빠져나갔던 애들은 전부 복귀했어. 오후부터 본격적으로 목장을 다시 가동할 예정이야. 그러면 또 알들이 나올 거고, 우리 식량도 늘어나겠지."
"그것 때문에 왔다. 목장의 구성원을 조금 바꿔볼까 해."
"구성원을?"
"조류계 마물들을 빼는 거지."
나는 그레모리에게 나의 생각을 차근차근 읊었다. 그레모리는 한참동안 내 말을 경청하다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적으로 던전 구조에 맞게 애들을 살게 하자는 거 아니야. 하피 종이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게."
"그래. 하피들은 9할이 할파스 던전으로 갈 것이다."
목장을 차지하고 있는 대다수의 하피, 하피 엔젤 부대는 이제 새로이 할파스 던전에 둥지를 틀 것이다.
"하피 박이 애들은 좀 싫어하겠네. 안드라스들도 좀 슬퍼할 것 같고."
"일부 하피들은 남겨둘 거다. 그들은 진짜 순수하게 생산직으로만 남는 거지."
할파스 세력과의 전쟁을 돌이켜보며 반성하게 되는 것 하나.
- 알을 생산하는 쪽 마물들의 전력이 너무 낮아 전장에 투입조차 할 수 없었다는 점.
'하피와 안드라스의 수를 다 합치면 족히 200은 될 거야.'
하피들은 그 누구 하나 3성이 없었다. 안드라스는 3성인 아인조차 없었다. 즉, 두 종족은 오로지 알을 낳는 양계장의 일꾼들이었다.
"우리 정원의 1/4 가량이 비전투원이니까 너무 아쉽더라고. 그래서 걔들 조금이라도 싸울 수 있게 만들려고 한다."
전황이 긴급한 순간에는 일꾼도 나와서 싸워야 하는게 전장이다. 적이 공격해왔다고 던전 주인이 분신을 몇 번이나 보내서 대신 죽어야 하는 그런 일은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레모리, 첫 번째 지시사항이다."
"뭔데?"
"구조조정."
나는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칼을 빼어들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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