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2
〈잠시 뒤, 비르고 남작령 스피카 성 영주 저택〉.
"그럼 편히 쉬십시오, 성녀님."
"예, 배려 감사드립니다."
성녀는 남작이 자신을 위해 내어준 방에 어색했지만 예를 표했다. 주인이 자신을 위해 남작가문의 일원이 쓰는 방을 내어주는 것이 과하지 않나 싶었지만, 성녀는 자신의 신분을 신경쓰는 남작의 호의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여신교단이 만약 하나의 제국이라면 성녀는 그 제국의 황녀에 해당하는 존재이리라.
그만큼 성녀의 직위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높았고, 나름 큰 왕국이기는 하지만 일개 남작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신분의 차이였다.
"다른 기사 분들은...."
"저희는 괜찮습니다."
기사단장은 다소 날카롭다 싶을 정도로 빠르게 선수를 쳤다. 남작은 눈치를 슬쩍 보다가 고개를 숙이며 밖으로 나갔다.
"후우, 성녀님. ...정말 괜찮으십니까?"
"뭐가요."
"이 자 말입니다."
기사단장은 창문 가까이에 선 중무장의 남자를 가리켰다. 호위를 위해 고용한 자라고 성녀가 보증하기는 했으나, 역시 남작령 한복판에 마물이 활보하는 것은 문제가 많았다.
"용사잖아요."
"오크아닙니까."
"그건 신성교단의 본당에서 여신께 문의를 드리면 되는 거고요."
"여신께서 오크를 용사로 인정하시리라 보십니까? 분명 성검을 얻은 건 뭔가 요행으로-"
"아뇨. 무조건."
성녀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확신했다. 옴크는 성검 타우러스의 용사가 분명했다.
- 상대는 신사이니라, 나의 아이야. 네가 어떤 플레이를 제안해도 뭐든지 받아들일 사내 중의 사내-
"하아...."
그건 인류 연합이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는 대답도 하지 않으면서 연거푸 성녀의 아이를 보고 싶다고 조잘대는 누군가가 정말 미웠다.
'이래서야 스트레스 해소도 못하겠는데.'
오크를 항상 옆에 붙여놓아야 마음의 안정이 된다. 신성교단의 본당까지 가서 자신의 몸에 여신을 불러, 만인의 앞에서 오크가 용사임을 천명하지 않으면 그때까지 성녀는 머리가 아파서 터져버릴 것이다.
'문제는 던전을 눈앞에 두고도 가만히 떠날 수 없다는 거야.'
성녀가 비르고 영지까지 온 이유의 근본은 영지에 갑자기 나타난 오크 무리, 그리고 그들의 본거지로 추측되는 '던전'이다.
"기사단장, 그에이 경의 말은 틀림이 없었나?"
"표면적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검으로 어떻게든 던전을 탈출했다고 하기에는 충분히 실력을 가지고 있는 자가 분명하기는 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예. 의심되는 바가 하나 있기는 합니다만...."
"말해봐요."
기사단장은 바로 준비한 물건을 하나 꺼냈다. 성녀는 처음보는-정확히는 스피카 성에 와서 처음 보게 된 물건을 보고 흥미가 동했다.
"스타킹이네요?"
"예. 남작님께서 선물로 주신 물건이죠. 저희 일행에게 각각 두 개씩 지급된 것입니다. 문제는 이 색깔. 그에이 경이 죽였다고 하는 마물의 깃털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죠?"
기사단장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실은 그에이 경은 던전 마물의 하수인이고, 인류를 배신하여 살아남은 겁니다. 마물은 그걸 숨기기 위한 계략이고요."
"너무 소설을 많이 보신 것 같네요, 기사단장."
"역시 그렇죠? 인간이 마물의 편에 서다니. 하하. 그런 일이 있으면 마물이 인간의 편에 서는...."
기사단장은 인상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오크에게 으르렁거렸다.
"확실히 하라. 용사로서 인류 연합의 편에 설 것이냐, 아니면 네 근본대로 할 것이냐?"
"말했을텐데. 나는 나의 할 일이 있다고."
"......성녀 님, 말씀만 해주십시오. 제가 금방 처리하겠습니다."
기사단장은 험악한 분위기를 풍기며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들려했다. 성녀는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흔들었다.
"그만두세요. 당신까지 저를 힘들게 하지 말라고요. 안그래도 지금 여러모로 참고 있는데."
"...읏, 죄송합니다."
성녀의 눈총에 기사단장은 황급히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하아. 당신이랑 저 자랑 같이 있으면 제가 너무 힘들어지네요. 안되겠어요. 특명을 내립니다. 당신과 기사단은 이곳에 남으세요."
"예?"
"저 자만 데리고 교단에 다녀오겠습니다. 내일 아침, 날이 밝으면."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신은 남아서 던전을 토벌하고, 나는 저 자를 데리고 교단으로 가겠다는 말이죠."
"성녀님!"
기사단장은 언성을 높였다. 성녀는 바깥이 웅성대는 것을 깨닫고 혀를 가볍게 찼다.
"당신은 임무에 충실하세요. 교황께서 당신에게 내린 임무는 뭐죠?"
"...성녀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녀님."
"설마 성검을 지닌 용사를 믿지 못하겠다는 말씀? 아니면 저를 믿지 못하겠다는 말씀?"
"......죄송합니다."
기사단장은 꼬리를 말았다. 성녀는 콧방귀를 뀌며 오크를 가리켰다.
"설마 저자가 저한테 무슨 해코지를 하려고 할 것 같아요? 애초에 저한테 무슨 짓을 저지를 수나 있을 것 같아요?"
기사단장은 묵묵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성녀는 그제서야 표정을 풀고 기사단장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렇죠. 저 자도-"
"잠깐 나갔다 와도 되겠는가?"
오크의 말에 성녀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왜요?"
"아무래도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서."
"이상한 기운이라...."
성녀는 오크라는 색안경을 지웠다. 성검 타우러스의 용사가 말하는 이상한 기운이라 함은, 분명 뭔가 특이한 것이 있을 터.
"기사단장. 당신은 여기서 대기하세요. 잠깐 다녀올테니까. 혹시나 밖에서 저를 찾으면 자고 있다고 하시고."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기사단장은 주먹을 꽉 쥐며 성녀를 배웅했다. 성녀는 오크와 함께 테라스의 문을 열었다.
타-앗.
둘은 가볍게 영주 저택을 빠져나와 골목으로 들어갔다. 중무장한 오크도 물론이거니와, 사제복을 입은 성녀의 발걸음도 몹시 가벼웠다.
"제 한 몸 건사할 정도는 되는 군."
"됐어요. 바람 좀 쐬고 싶다고 말하고 나와도 되잖아요? 기사단장이랑 같이 있기 껄끄러우면 기사단장을 다른 방으로 보낼게요."
"...일단 장성한 남녀가 한 방에 있는 것은 안 될 말이지. 그리고 오해하지마라. 나는 진짜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서 나온 것이니."
"......예?"
성녀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자리를 피하고 싶어서 한 말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 그 말은 즉...?"
"저기, 사람들이 모여있는 저 곳."
오크는 빈민가처럼 보이는 허름한 뒷골목, 거나하게 술에 취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을 가리켰다.
"저곳이 뭔가 이상하지 않나?"
"......이상하겠죠."
성녀는 기사단을 통해 제보받은 남작령의 이슈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잡화점 옆 술집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오크는 그런 쪽으로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음? 자네는 관심없나?"
"...그거 성희롱-"
"마물의 기운이 느껴지는 여인이 있어서, 지금 계속 보고 있는 중인데."
"예?"
"저기 저 여인. ...아니, 소녀인가?"
성녀는 오크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저기, 머리가 분홍색인 여인 말이야."
"......메어리 양이잖아요. 마법사에요. 소환수의 흔적이겠죠."
성녀는 오크의 손목을 붙잡아 골목을 따라 움직였다. 오크는 순순히 성녀에게 붙잡혀 따라갔다.
"어디로 가는 건가?"
"메어리 양에게요."
"방금 내 말은 무시하지 않았나?"
"그것도 확인할 겸, 당신 정체를 숨길만한 옷을 구하려고요."
성녀는 골목을 요리조리 파고들어, 잡화점 근처에 도착했다. 마침 메어리는 밖에 나와 홀로 밤바람을 쐬며 산책을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메어리 양. 아까 남작 성에서 남작님의 소개로 잠시 인사를 나눴죠?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암행 중이신가요?"
딱딱하게 굳은 메어리의 말에 성녀는 살포시 미소지었다.
"예. 실은, 이 자의 평복을 몇 벌 구할 수 있을까 싶어서."
"잠시."
오크는 성녀의 말을 끊고 앞으로 나섰다.
"......그대, 혹시 슬라임인가?"
"......네?"
메어리는 당황해서 목소리가 갈라졌다. 오크는 가만히 메어리를 바라보며 냄새를 맡기 시작했고, 성녀는 웃으며-
퍽.
뒤에서 오크의 오금을 걷어찼다. 오크는 조금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지만, 자신이 뭔가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오. 슬라임의 냄새가 너무 짙게 나서."
"아, 네, 네. 그렇군요. 스, 슬라임의 냄새...."
"메어리 양, 죄송합니다. 이 분이 오랫동안 산에서 검을 갈고닦아 실력은 좋은데 상식이 없어서...."
성녀는 허리까지 꾸뻑 숙이며 대신 사과했다. 메어리는 무거운 얼굴로 함께 허리를 숙였다.
"아, 아녜요. 스, 슬라임의 냄새가 나는 것도 당연하죠."
메어리는 손에서 마나를 끌어올렸다. 성녀는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고, 오크는 성녀의 앞을 막아섰다.
"제 소환수가 슬라임이거든요."
꿀럭, 꿀럭.
메어리의 드레스 안에서 슬라임이 불쑥 튀어나왔다. 인간의 모습을 한 붉은 슬라임은 성녀와 오크를 향해 두 팔을 벌리며 위협하는 자세를 취했다.
"...꽤나 독특한 슬라임이네요?"
"네. 제가 아끼기도 하구요. 충분히 헷갈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메어리는 슬라임을 쓰다듬으며 성녀와 오크의 눈치를 봤다. 오크는 여전히 험악한 표정을 풀지 못했고, 성녀는 그런 오크의 앞을 막아서며 눈치를 줬다.
"확인했죠? 자, 그러면 자꾸 그러지 말고 비켜요. 당신 옷 부터 구해야 하니까. 언제까지 갑옷을 입고 다닐 수는 없잖아요."
"음.... 나는 딱히 상관 없다만."
"내가 문제가 있어요. 당신이 그렇게 위압감을 주니까 다른 사람들이 자꾸 겁을 먹는 거 아니에요?"
"원래 이렇게 생긴 것을 어찌 하란 말인가? 얼굴이라도 꺼내놓고 다닐까? 내가 아는 자가 말하기를, 너는 얼굴이 호감형이니 얼굴을 무조건 내놓고 다니라고-"
"됐어요. 미안해요. 부탁이에요, 제발 위에 망토라도 쓰고 다니죠."
"......어, 음, 위에 덮을 옷이 필요하신 거죠?"
메어리는 떫은 얼굴로 안을 가리켰다. 잡화점 아발론이 아닌, 술집 아발론을.
"안에 적당한 옷이 한 벌 있기는 한데...."
* * *
〈그시각, 엘프의 숲.〉
엘프의 숲은 그야말로 전쟁통이 되었다.
2장로는 모두에게 솔라가 가져온 정보를 고스란히 밝혔다.
신수님이 말한 여왕은 수호자로서 실종된 루나라는 것.
현재 루나는 다크엘프인 상태로 여왕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걸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2장로가 솔라가 말한 던전으로 향하겠다는 것.
사실상 2장로는 목숨을 걸고 엘프들을 위해 확인하러 가는 셈이었다. 던전의 다크엘프는 대게 마족이나 다름없는 존재이며, 아무리 여왕이라도 다크엘프에 대한 배척은 오랜 세월 동안 이어진 관습과도 같았다.
"솔라, 미안하구나. 너에게 안내를 맡겨서."
"아닙니다. 제가 해야할 일입니다."
솔라는 2장로를 보필하는 사절단 일행을 눈으로 흘겼다. 수는 고작 7명. 하지만 그들은 모두 던전행에 2장로를 보필하겠다고 자원한 용맹한 이들이었다.
"....훗."
물론 그들 중 셋은 뱃속에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기도 했다. 솔라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셋이서 한 명씩, 그리고 내가 2장로 님이랑 한 명 데려가는 꼴이니까 두 명. 그러니까 나는 조금 더 많은 씨를 받을 수 있어.'
누군가가 계획한 다단계 반반엘프 플랜이 먹혀들어가기 시작했다. 솔라는 그 계획의 앞잡이로서, 미리 몇 가지 준비를 해야했다.
"2장로 님.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자 합니다."
"무엇이냐?"
"미리 던전에 들어가서 엘프여왕님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초대는 했다고 하나, 그들도 온다는 얘기도 없이 갑자기 방문을 하면 당황하지 않을까요?"
"...그 말이 맞구나."
반반엘프들은 안도했다. 그들이 하얀 상태로 갈 수 있는 것은 던전의 입구 전까지. 함께 던전에 들어가면 피부색이 변해 혼란을 빚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여왕님이 정말 루나라면...괜히 그랬다가 마중을 나오려 할 것이다. 루나는 착한 아이니까. 됐다. 다 함께 들어가자꾸나."
"...네?"
"물론 내가 선두에 설 것이다. 마물들과 접촉한다고 다크엘프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래, 루나도 필시 뭔가 사정이 있었겠지."
"2장로 님, 그 말씀은?"
순수 엘프의 질문에 2장로는 한참을 멈춰선 채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마물과 접촉하지 말라는 말은 엘프들의 특성 때문이긴 한데.... 자고로 오래 전부터 엘프들은 마물들에게 잡히면 능욕당하기 일쑤였다. 성적으로."
"네?"
"마물의 씨가 뱃속에 뿌려지면 다크엘프가 되는 거지. 그러니까...너희들은 마음을 단단히 먹거라."
2장로는 굳은 얼굴로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루나가 범해졌는지, 아니면 마물과 통정했는지. ...그에 따라 우리 엘프 전체의 운명이 바뀔 것이니. 자칫하다가는 엘프 전원이 다크 엘프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
솔라와 반반엘프 셋은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