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비만 오크-301화 (301/800)

# 301

〈그 시각, 비르고 남작령 스피카 성 영주 관저.〉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좋은 일로 모셔야 하는데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아니에요, 던전은 자연재해 같은 거니까요."

환영회라고 하기에도 어색한, 상당히 조촐한 상차림에도 성녀는 웃으며 음식을 반겼다.

빵에 샐러드, 그리고 육류, 치즈가 조금. 전형적인 귀족가문의 가정 식사였고, 성녀를 수행하는 사제들 중 일부는 빈약한 식사 준비에 노골적으로 불편함을 내비치는 이들도 있었다.

"던전의 등장에 따른 피해가 다소 심한 모양이군요."

"기사단장."

결국 기사단장은 볼멘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성녀는 무안해져서 얼굴이 붉어졌다. 손님으로 온 이들이 대놓고 주인에게 면박을 준 셈이었으나, 남작은 쓰게 웃으며 오히려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메어리 양 덕분에 그나마 부족한 물자를 채울 수 있었죠."

"메어리 양?"

성녀는 남작이 누군가를 소개하려고 운을 띄웠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되살려봐도 남작가문에 '메어리'라는 존재는 없었다.

"그에이 경."

"예."

성녀도 익히 잘 알고 있는 기사, 그에이 칸세르는 기다렸다는 듯 밖으로 나가 한 여인을 데려왔다. 분홍 머리에 처음 보는 복색을 한 여인의 모습에 성녀는 잠시 넋이 나갔다.

"인사올립니다. 메어리라고 합니다."

"음...."

기사단장은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성이 없는 것으로 보아 평민같으나, 위에서 아래로 아무리 살펴봐도 평민 같지는 않았다. 입고있는 옷부터가 남작보다도 더 세련되어 보였다.

'주객이 전도된 것 같은데.'

성녀는 남작과 메어리를 눈으로 흘기며 둘의 관계를 의심했다. 남작이 메어리를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찮았다.

'설마?'

성녀의 머릿속에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외딴 영지. 금전적으로 힘들어하는 귀족. 그의 옆에 기적처럼 나타난 미인 상단주. 귀족은 영지의 경제적 위기를 해결해 준 상단주에게 끌리게 되고, 상단주와 깊은 관계에 빠지게 된다.

허나 미인 상단주는 귀족의 작위를 노리고 온 여인. 몸은 섞지만 마음은 섞지 않으며 귀족이 가진 것을 이용하고, 귀족은 그걸 알면서도 여인의 매력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되는데....

'아주 머릿속으로 희곡 한 편을 쓰는 구나.'

성녀는 머리속에 떠오른 잡념을 지워버렸다. 자신의 망상이 일어날 가능성은 전무했다. 남작은 여인이고 메어리도 여인이 아닌가.

자신과 기사단장의 관계처럼 되어있지 않다면, 그저 서로 적당히 이용하는 관계일 것이다. 사제들이 가져온 정보에 의하면 메어리가 사실상 영지민을 구원한 셈이고.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 스타킹이라고 하는 물건을 만들어 영지민에게 나눠주셨다고?"

"장사치가 이문에 맞게 물건을 판매하였을 뿐입니다."

"그렇군요. 혹시 지금도...?"

"예."

메어리는 드레스의 양쪽 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고개를 숙였다. 군더더기 없이 우아한 동작에 성녀는 괜히

찝찝해졌다. 너무나도 완벽한 '귀족 가문'의 예법이었다.

'성을 숨긴 건 뭔가 이유가 있을 터.'

왕국의 다른 가문인지, 아니면 타국의 영애가 상단주 놀이를 하는 건지. 성녀는 구체적으로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 너무나도 매력적이고 특이한 여인이라, 어차피 조사하면 금방 알게 되리라.

'저 나이 대 영애 중에 저런 마음씨를 가진 여인이 있던가?'

"끄응."

옆에 앉은 기사단장이 노골적으로 불편한 기색을 내비칠 정도로 여인의 가슴은 거대했다. 크고 아름다운 가슴은 검은 드레스로도 감출 수 없을 만큼 존재감이 대단했다. 심지어 가슴골 부위가 다른 곳보다 연하여, 안이 살짝 비치고 있었다.

"크흠."

기사단장이 헛기침을 하고 나서야, 남자 사제들은 시선을 거두고 저마다 음식을 먹는 시늉을 했다. 그만큼 한껏 꾸미고 온 메어리는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으셨다 들었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어디에 활용하실 계획이십니까?"

"다 여신의 가호가 있던 덕이지요. 남작님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성 외곽에도 성당을 짓는게 어떨까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든 와서 여신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예배당 같은 곳이라도요."

"올바른 마음가짐입니다. 여신께서도 당신을 굽어살피실 겁니다."

성녀는 짧게 물을 들이켰다.

"...한 가지 여쭤보겠습니다만, 물건을 거래한 대금으로 마석을 챙긴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녀님?"

남작은 가시방석에 앉은듯한 얼굴로 성녀와 메어리를 번갈아봤다. 성녀의 취조하는 듯한 분위기에 식사 자리는 금방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저희 상단은 마석을 전문적으로 매입하고자 합니다. 마석을 모아 마도구를 만들어, 인류에 공헌하고 마왕군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저희로서는 세계가 평화로우면 평화로울 수록 장사가 잘 되는 지라. 남작님께는 기업 비밀이라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마침 잘 되었군요."

메어리는 그에이에게 손짓을 하여 무언가를 부탁했다. 그에이는 복도로 나간 뒤, 무언가를 가져왔다.

"남작령에서 스타킹을 판매하여 얻은 대금의 9할입니다."

"이, 이건 도대체?"

"...지금 뭘 하자는 거죠?"

남작은 은화가 찰랑거리는 돈주머니에 군침을 흘렸고, 성녀는 눈앞에서 돈을 꺼낸 메어리의 태도에 표정이 굳었다.

"한 가지, 아니 두 가지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일단 들어나보죠. 무엇을 돈으로 사려고 하는지."

"성녀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이 영지에는 던전이 생겼습니다. 피스케스 가문에서 용병까지 보냈으나 아쉽게 패배했죠."

"피스케스 가에서?"

"예. 사제 프란시스 님이 오크들에게 납치를 당했습니다."

"...저런."

사제들이 성호를 그으며 사제 프란시스-기네비어-에게 기도했다.

"제가 사고자 하는 것은 성녀님의 시간입니다. 부디 던전을 없애주십시오."

"......과연."

성녀는 표정을 유지하며 속으로 감탄했다. 던전이라는 위협 요소를 제거함과 동시에, 남작과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한 신의 한수였다.

"죄송하지만 그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제가 시간이 없어서."

"...역시 무례했나요? 용서하십시오."

"아뇨. 괜찮습니다. 진짜 시간이 없어서 그런거라서. '헌금'은 기쁘게 받겠습니다만, 제가 시간을 내어드리기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남작님도 계시니, 말씀드리죠."

성녀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모았다.

"스피카 성에 들어오기 전, 여신님께서 어서 교황청으로 오라는 신탁을 받았습니다."

"아!"

"...저런."

여신의 뜻을 따르는 이에게 여신의 명령이 떨어졌다. 그것만큼 성녀에게 적당한 명분이 어디에 있으랴.

"그래서 저는 송구스러우나 최대한 빨리 일정을 마무리해야합니다. 던전에 대한 문제는 저를 수행하는 성기사단이 이곳에 남아 최대한 도울 겁니다."

"성기사단에서...? 그럼 성녀님은 어떻게...?"

"저는 이 분의 호위를 받습니다."

성녀는 자신의 뒤에 시립한 중갑의 거한을 가리켰다. 보기에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체구에 남작은 순간 겁을 먹었다.

"그, 그렇군요...."

"그래서 시간을 내어드릴 수 없습니다. 대신...."

"그렇다면 성녀님의 이름을 사도 되겠습니까?"

메어리는 성녀의 말을 끊고 은은하게 웃었다. 손은 자신의 앞에 놓인 돈다발을 살짝 자신의 쪽으로 잡아당기며.

"던전을 공략할 용사들은 많으면 많을 수록 좋죠. 성녀님께서 이름을 빌려주신다면, 이것을 '보수'로 모험가와 용병 분들을 초빙하고자 합니다."

"......좋군요.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요. 기사단장, 근처에 모험가 길드가 있습니까?"

"레오 후작령에 있습니다."

"제 인장을 빌려드리죠. 자세한 사항은 남작님과 협의하여 모험가들을 고용할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메어리와 성녀는 서로를 바라보며 한참동안 눈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메어리 양은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합니다?"

"어머, 그렇네요. 후후."

성녀는 메어리가 참 여우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두 명이 눈에 힘을 푸니, 자연히 연회장의 분위기도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메어리 양의 상단에서는 어떤 마도구를 만드는 겁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마도구로 대량생산이 가능한 설비를 만들고, 여러 가지 재료를 이용해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물건들을 제작합니다. 스타킹도 그런 물건들 중 하나구요."

"호오. 대단하군요. 스타킹이라는게 도대체 어떤 것이길래-"

"보여드릴까요?"

메어리는 도발적으로 웃었다. 남작의 표정은 굳었고, 성녀는 메어리와 똑같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한 번 보여주시겠습니까?"

성녀는 이미 스타킹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모른척, 자신을 도발한 메어리를 골탕먹이기 위해 오히려 맞받아 쳤다.

'그걸 보여 줄리가-'

스륵.

메어리는 드레스를 양옆으로 잡았다. 그에 오히려 성녀가 당황했다.

'불경! 수치심! 남자들!'

매력적인 여인이 스타킹을 신고 드레스를 걷어올린다? 벌써부터 옆에서 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심지어 여인인 기사단장마저도.

"메-"

"성녀님."

기사단장은 테이블 아래에서 성녀의 손을 붙잡으며 눈치를 줬다.

"좋은 기회입니다."

기사단장의 눈빛에는 정말 많은 의도가 담겨있었다.

건방진 성도 모를 귀족가의 영애 상단주에게 수치심을 안기고 사과 시킬 기회. 그리고 만약 실제로 저지른다면 메어리의 강단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 ...그리고 기사단장과 사제들의 은밀한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기회.

"......."

팔은 안으로 굽는다. 성녀는 사제들의 번뇌에 대하여 교도를 대표하여 여신에게 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 킹타킹! 킹갓킹! 검스! 쟤 뭘 좀 아네. 아이야, 너도 저거 한 번 입어보렴. 오크를 침대에서 이기려면 저 정도는 입어줘야-

"......."

성녀는 마왕에게 기도를 할까 진심으로 고민했다. 그리고 메어리를 멈추게 할 사람인 자신이 고민하는 사이, 어느덧 메어리의 드레스는 무릎까지 올라가고 말았다.

"아차."

더이상은 무리다. 메어리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이정도면 거의 성희롱이었고, 성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제 그만-"

"먼저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메어리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드레스는 다시 발치까지 내려갔고, 기사단장은 진심으로 아쉬운 한숨을 내뱉었다.

"...흠흠, 살펴가시죠.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네. 후훗. 남작님, 오늘은...?"

"먼저 가있으세요. ...늦어도 갈테니."

메어리는 사제들이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남작에게 윙크를 날렸고, 남작은 얼굴을 붉히며 몸을 움츠렸다.

"......?"

"음?"

성녀와 기사단장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봤다. 혹시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곧 상대에 대한 실례였다.

"흠흠. 성녀님. 그리고 기사단 여러분. 저도 여러분을 위해 자그마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메어리 양의 선물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지만...."

남작의 지시에 돈다발을 치우던 그에이는 부리나케 달려가 상자 하나를 들고 방에 돌아왔다.

"......식사 후에 스타킹 챙겨가시지요."

"......."

모두가 스타킹을 챙겼다.

* * *

"너 무슨 생각으로 거기서 그런 짓을 저지른 거야? 상대는 성녀라고."

"성녀? 뭐지, 성을 밝히는 여자라는 뜻인가?"

"무슨 헛소리야 지금?"

"아빠라면 이렇게 얘기하지 않았을까 싶어서."

"...물론 그럴 가능성이 높긴 한데, 그래도 너 이번에 심했어."

그에이와 메어리는 남들의 눈이 닿지 않는 아발론의 밀실에 내려와 성녀와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성녀는 우리 적이잖아. 안 그래?"

"...물론 가장 큰 걸림돌이기는 하지."

성녀는 마족에게 있어서 가장 큰 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인류 연합, 그 중에서도 연합의 핵심이라고 봐도 무방한 여신교단의 중요인사다.

"나로서는 앞에서 웃는 것 만으로도 짜증났다고."

"그래, 그래서 이제 어쩔 건데? 성기사단장이 저래보여도 거의 변경백 급의 강자라고."

"...그 성녀 옆의 여자?"

"그래. 강하니까 기사단장 하는 거지."

"...꼭 그런 것만은 아닌데."

메어리는 머릿속에 순간 누군가가 떠올랐지만, 그녀의 명예를 위해 입을 꾹 다물었다.

"씁, 성녀 암살하면 어떻게 될까?"

"아서라. 뒤에 떡대 못 봤어? 성녀 뒤에 딱 붙어서 성녀 지키고 있는데 틈이 없더라. 심지어 틈 좀 있나 간을 보자마자 바로 눈을 부라리는데...어휴. 그 분만큼 무서웠다고."

"...아빠'만큼'이 아니라 아빠'보다'같은데."

"어. 솔직히 말하면. 군단장님께는 비밀이다."

"알았어, 알았어. 그런데 그에이, 성녀 말이야...."

메어리는 남작이 매일같이 다녀가는 침대를 두드리며 씩 웃었다.

"성녀님도 섹스를 할까?"

"너 설마?"

"암살이 안되면 뇌살이라도 하지뭐."

메어리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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