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0
"직접 실험해볼래, 지금?"
"아, 아닙니다. 나중에...."
"나 신경쓰이는 거야? 흐흐, 알았어. 그럼 나중에 하렴. 아, 이렇게 하는게 이해가 빠르겠다."
에스투는 루시펠의 하복부에 손을 올리고 허공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워낙에 빨르기는 했지만, 그게 꼭 허공에 뜬 화상 키보드를 건드리는 것 같았다.
"음, 다 됐어. 한 번 봐봐."
에스투가 내게 손가락을 튕겼다. 내 앞에는 못보던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파종-마석〉 씨를 뿌린다. 열매는 무조건 마석이 나온다. (※전 인장 전용)
# 예상결과 : 루시펠 (★★★★☆)
★ 40%
★★ 35%
★★★ 20%
★★★★ 4.3%
★★★★★ 0.7%
# 군단장 이외의 씨가 들어갈 경우 사망.
"...확률 너무 좋아하시는 거 아닙니까?"
"뭐 어때? 애초에 확률이 들어가지 않으면 이런 외도마법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너 혹시 루시펠 상대로 애낳게 하고 싶은 거야?"
"......흠흠."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러고 싶기야 하지만, 그랬다가는 여기저기서 눈치가 보여서 시도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
보라. 군단장과 마왕군의 주요 인사를 두고도 대놓고 도끼눈을 뜨며 눈치를 주는 저 질투심많은 서큐버스를. 루시펠을 상대로 알이라도 낳았다가는 군단이 뒤집힐지도 모른다.
"알 대신 마석이라, 좋군요. 근데 이거 무조건 한 번 싸면 끝입니까?"
"하루 한 번? 귀찮으면 그 마액이라는 거 집어 넣어도 돼. 내가 온 이유가 인장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 때문이기도 하거든."
"마액 말씀이십니까?"
"응. 마석을 녹이는 정액이라는 거 듣도보도 못했단 말이야. 내가 알기로는 그런 효과를 지닌게 하나밖에 없는데...잠깐만."
에스투는 갑자기 내쪽으로 달려와 몸을 숙였다. 갑자기 꼴려서 펠라라도 하는가 싶어서 설렜지만, 에스투는 조용히 내 배에 귀만 대고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다.
"흥흥, 과연. 그렇구나."
"거 뭔가 알아낸 것처럼 얘기하지 마시고 좀 시원하게 알려주시렵니까?"
"그냥 알려주면 재미없지. 힌트는 줄게. 너는 엄청 특별한 존재야. 그건...5성으로 진화하면 스스로 깨닫게 될 거야."
"힌트 정말 고맙습니다. 진화 루트는 상관 없죠?"
"물론. 어떤 형식으로든 네가 한 단계 더 나아가면 그만이거든. 후후, 기대되는 걸. 끝까지 샤이탄을 아끼다가 너한테 보낸 보람이 있네."
"에스투 님!"
"어머, 쟤 소리지르는 거 봐. 군단장, 교육을 똑바로 시켜. 침대에서 도대체 뭘 하길래 쟤가 저렇게 빠락빠락 소리지르는 거야? 기가 허해? 아니면 서큐버스 밤기술이 너무 쩔어서 침대에서 잡혀사는 거니?"
샤이탄은 침몰했다. 에스투의 적나라한 표현에 그만 기가 질려 말문이 막힌 것이다.
"...그, 기강을 단단히 잡아두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아무리 샤이탄이 마왕님 딸이라고 해도, 너는 군단의 대장이야. 네 군단 안에서는 네가 마왕이라고.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잡혀살면 되겠니? 좆은 잡혀 살아도 여자가 네 좆말고 다른 좆 못 잡게 꽉 쥐어잡고 살란 말이야. 알겠어? 괜히 다른 자지 침대에 불러서 어떻게 해 볼 생각하지 말고."
"명심하겠습니다."
...역시 에스투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나 또한 반성하고 있는만큼, 에스투의 진정성 어린 조언을 뼈에 새겼다.
"그럼 나 간다. 마지막으로 뭐 하고 싶은 말 없니?"
"하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포르네우스의 행방에 대해서 혹시 알고 계십니까?"
"......."
에스투는 침묵했다. 나도 귀동냥으로 어느정도 들은 바가 있으니, 에스투라면 분명 뭔가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던전 주인들 간의 쟁탈전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건 공정하지 못하겠지?"
"그 말씀은...!"
"내가 직접적으로 말은 못하겠고, 그것만 알아둬. 네가 군단을 모두 먹어치우기로 작정했다면, 언젠가 만나게 될 거야."
"그것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궁금한 것은 모두 물어봤다. 나는 에스투에게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였다.
"살펴가십쇼."
"그래, 그래. ...나는 네가 내 정체에 대해 묻거나 한 번 대주는 지 물을 줄 알았는데."
"대주십니까? 저희 군단 특산물이 '모녀덮밥'이라는 건데...."
"마왕님 이기고 오면? 히히힛."
에스투는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검은 안개가 되어 소환진 속으로 사라졌다.
"......후아."
긴장감이 풀리자마자 나는 땅에 주저앉았다. 부활한 할파스를 상대로 2차전을 벌인 것보다 더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잘못 깝쳤으면 한 세 번은 죽었겠어."
"38위 던전을 꺾은 것 때문에 봐주신 듯 합니다."
에스투는 중간중간 나를 조질까 말까 고민하는 기색을 대놓고 내비쳤다. 다행히 아직은 쓸만하다는 판단을 내린 듯 했다.
또다른 딸인 루시펠을 내 멋대로 하겠다.
군단을 모두 내 지배하에 두겠다.
에스투를 덮치겠다.
한 마디 한 마디를 할 때마다 생사의 경계를 오가며 외줄타기를 했다. 다행히 에스투는 나를 죽이지 않고 살렸다.
루시펠에게는 특별한 시스템을 부여하여 내가 쉽사리 죽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나만의 것으로 만들어 루시펠이 승리한 나에게만 이용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범하겠다는 도발도 마왕을 이기고 오라는 위트 있는 농담으로 맞받아쳤다.
"샤이탄, 너도 언젠가 저런 여자가 되거라. 마지막은 빼고."
"그런 농담을 하는 자가 있으면 저는 주인님 전용이라고 말하고 다니겠습니다."
"좋다. 그 자세다. 그럼 이제 슬슬 루시펠을 시험해봐야 하는데...."
"히익?!"
모든 끊이 떨어진 루시펠은 그저 샤이탄의 노예가 되었을 뿐이다. 이복자매끼리 무슨 관계인지 나는 모르지만, 나는 샤이탄의 편이니 샤이탄이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이다.
"우선 가장 먼저 해야할 것을 하자꾸나."
"예, 그럼 침대로-"
"승전보를 울려야지. 할파스 군단 때문에 우리 군단 전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예."
샤이탄은 루시펠을 보며 아쉬운 듯 혀를 찼으나, 나는 루시펠을 써보고 싶어도 쓸 수 없었다.
'최소한 하루는 쉬어야 해.'
루나의 마력을 회복하느라 체력이 다했다. 예전처럼 해대려면 적어도 하루, 아니 사흘은 넉넉히 쉬어야 했다.
"돌아가자. 우리의 집으로."
전쟁은 끝났다.
우리의 승리로.
* * *
〈그 시각, 엘프의 숲〉.
와장창!
드워프들이 교류 때마다 친선의 표시로 보내준 도자기는 한순간에 쓰레기가 되었다. 인간 세계에 내다 팔면 족시 한 영지를 먹여살릴 정도의 값어치를 한 사치품이 1초만에 산산조각 나버렸다.
"다시 한 번 말해봐!!"
도자기를 깨뜨린 장본인, 1장로는 자신의 유일한 딸이 가져온 보고에 믿기지가 않았다. 엘프의 청력을 의심할 정도로, 딸인 솔라가 가져온 정보는 충격적이었다.
"엘프 여왕은 던전의 주인이었습니다. 그 자는...바로 루나. 전 엘프 수호자인 루나였습니다."
쾅!
1장로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나무로 된 테이블은 순식간에 박살이 났고, 그 파편이 한쪽 무릎을 꿇은 솔라의 허벅지에 튀었다.
"...금기에 대해 조사를 하고 멋대로 튀어나간 년이다. 경계를 넓힌답시고 숲을 버리고 떠난 엘프다. 그런데 그게 엘프의 여왕이 되었다고? 증거는 있느냐?"
"제가 보았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이냔 말이야!"
"......엘프 여왕의 상징인 성흔이 있었습니다."
솔라는 양피지에 그린 성흔을 1장로에게 바쳤다. 1장로는 자신이 알고있는 지식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성흔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아, 아아...."
솔라는 접근할 수 없는, 장로들 중에서도 수 백년 동안 장로로서 엘프 사회에 기여한 이들만이 접근할 수 있는 지식의 보고에나 적혀있을 성흔이 눈앞에 나타났다.
장서고는 자신이 아니면 열리지 않도록 되어있으니, 진실로 엘프의 여왕이 태어난 것이다. 그것도 하이엘프도 아닌, 일반 엘프로 수호자일 뿐인 루나가.
"이건 말도 안 된다.... 금기를 범한 자가 어째서 여왕의 재목이란 말이냐...."
단순히 루나가 엘프 여왕이 되었다면 이해라도 할 수 있다. 100여년만 지나면 루나는 차기 장로 후보로 거론 될 정도로 수호자 중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으니까.
"다크엘프가 무슨 말이더냐...!"
하지만 루나가 금기를 범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단순히 호기심에 마을을 떠났다거나 하는 상대적으로 문책이 가벼운 금기가 아닌, 마물과 통정을 한 다크엘프가 되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다크엘프가 엘프의 여왕이라니...이게 무슨 말이더냐! 증거, 증거를 가져와라!"
"...여기있습니다."
솔라는 품에서 은빛의 머리칼을 꺼내들었다. 다크엘프 특유의 회색에 신성력의 은빛이 스며들어있으며, 머리칼에는 명백한 루나의 마력이 깃들어있었다.
"아, 아아...."
1장로는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1장로님...!"
"신수, 신수 님을 뵈어야 겠다. 신수 님을 뵈어야 겠어...! 솔라, 나를 부축해서 신수 님께 가자...!"
솔라가 여왕이 되고 안 되고 하는 문제는 더이상 중요치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다크엘프가 여왕이 되었다면, 지금까지 수 백년 동안 평화를 지켜온 엘프의 숲에 피바람이 불어올 게 분명했다.
"어서 신수님께-"
"듣는 귀가 여럿입니다, 1장로."
1장로가 나가려던 문 밖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문을 멋대로 열고 들어온 이는 굳은 표정으로 솔라를 노려봤다.
"네가 보고한 것이 한치도 거짓이 없느냐?"
"...예! 제 목숨과 신수 님의 명예를 걸고."
"증거는...충분하군. 어쩔 수 없다. 이 또한 여신님의 뜻이겠지."
2장로는 성호를 그리며 기도를 올렸다. 독기를 가득 머금은 1장로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장난해?! 금기를 범한 자가 여왕이라고! 그걸 엘프들이 받아들일 것 같아?!"
"이상하군. 금기를 따른다는 건 전통을 따른다는 것. 그 누구보다도 엘프들의 규율과 전통을 따라야 한다고 했던건 1장로.... 큰 언니가 했던 말 아니었어?"
"야!"
장로들은 격식조차 내던지고 본심을 드러냈다.
"다크엘프래! 그냥 엘프도 아니야! 다크엘프라고!"
"다크엘프도 엘프지. 여신님이 괜히 성흔을 내려주셨겠어?"
"마왕군의 편에 서라는 거 아니야!"
"그게 여신의 뜻이라면."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그럼 어쩔건데? 여왕의 뜻을 따르지 않으려고? 금기를 범할 생각이야?"
"윽...!"
외통수에 걸렸다. 그 누구보다도 규율을 중요시하던 자가 1장로였기에, 2장로의 빈정거림에도 반박할 수 없었다.
"작은 언니가 밖에 나갔다가 배가 부풀어서 왔던 날, 언니는 규율을 주장하면서 작은 언니를 신의 곁으로 돌려보내려 했어. 그나마 아이만큼은 낳게 해달라고 빌어서 아이를 낳았지. ...하이엘프가 되어서, 어머니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말이야."
"걘 당연했어! 신수님께서 낳게 해주신 아이도 아니었잖아!"
"정작 신수님께서는 아무 문제도 삼지 않으셨지."
"성인식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셨던 거야! 성인식 때 처벌을 하려고! 그걸 눈치채고 그 요망한 것이 도망쳤을 뿐이야!"
"......대화가 안 통하네. 솔라, 네가 한 번 말해보렴."
2장로는 슬픈 눈으로 솔라에게 눈을 돌렸다. 충격적인 사실을 들은 솔라의 눈동자는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여왕님께서 내리신 첫번째 명령은 무엇이니?"
"그, 그게...."
솔라는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벗어나는 상황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여왕보다 더 위에 있는, 여왕의 뒤를 타고 오르는 진정한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자의 명령을 떠올렸다.
"...여왕께서는 엘프들을 던전으로 '초대'하셨습니다!"
"......."
2장로는 한참 동안 고민에 빠졌다. 1장로는 솔라를 냅다 밀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 이 미친...! 전부 다 다크엘프가 되라는 거야?! 루나 이 년이 엘프들을 다 멸망시키려고?!"
"......큰 언니, 1장로 님은 진정이 필요하실 것 같습니다."
2장로는 바깥을 눈으로 흘겼다.
"솔라. 여왕님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입장이지만, 엘프들의 혼란도 이해하실 거다. 어쩌다 다크엘프가 되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에게는 시간이 필요하지."
2장로는 하나 둘 모여드는 엘프들을 보며 쓰게 웃었다. 소란을 듣고 찾아온 엘프 중 분명 몇몇은 정황을 들은 게 틀림 없었다.
"1장로님께는 송구했습니다. 솔라 양, 던전에 직접 들어갔다 나왔나요?"
"...네."
"그렇다면 뭔가 여왕님 만의 특별한 방법이 있으신 거겠죠. 솔라 양이 마물과 접촉하지 않고도 엘프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방법이."
"......."
솔라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여든 엘프 중 셋은 딴청을 부렸다. 2장로는 모두를 눈으로 쓱 훑은 뒤,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제가 우선 대표로 다녀오지요. 여왕님의 의중을 살피고 오겠습니다."
"너!"
"만약 제가 다크엘프가 되어 돌아온다면...1장로님이 엘프의 숲을 이끌어주십시오."
2장로는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활짝 웃었다.
"그 누구도 스스로 원해서 다크엘프가 되고 싶어하는 자...없을테니까요."
"엣취!"
"륜, 왜 그러느냐?"
"아뇨. 갑자기 오한이 들어서...."
"오한? 그렇군, 한기가 문제인가. 오늘 연회의 음식을 추가하겠다. 그래, 코카트리스 백숙을 곁들이는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