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비만 오크-299화 (299/800)

# 299

샤이탄이 루시펠의 인장을 공략하는 사이, 나는 전리품을 챙기기로 했다.

"까마귀가 반짝이는 걸 좋아한다던데."

루시펠이 일부러 그래놓았는지 몰라도, 바닥에는 마석과 보석이 한 아름 뿌려져 있었다. 보석만 하더라도 얼핏봐도 저장고 두 개는 다 채우고도 남을 양이었다.

"마석은...에이, 씁. 이미 거의 다 써버렸잖아?"

중급 마석이고 상급 마석이고 거의 남아나는게 없다. 나는 던전을 정리하고 있는 부하들을 제외하고 륜과 루나를 불러 마석들을 정리했다.

"주인님, 저거 가만히 내버려둬도 되나요?"

륜은 샤이탄에게 농락당하는 루시펠을 가리켰다. 샤이탄은 물만난 고기처럼 루시펠을 마구잡이로 능욕했다.

혀를 쓰거나, 손을 쓰거나, 꼬리를 쓰거나. 여자가 여자를 능욕한다면 저렇게 하지 않을까 싶은 교본으로 만들어도 적당하겠다 싶을 정도였다.

"냅둬라. 지금은 마석을 찾는게 더 중요하니."

내가 먹어치우고 말고에 대해서는 신경쓰이는 존재가 하나 있으니, 일단 당장은 전리품을 챙기는게 중요했다.

"내가 중급을, 루나는 하급을, 륜은 최하급을 골라."

소환진에 있는 마석들은 하나같이 다 뒤죽박죽 섞여있었다. 무엇이 더 많은지 파악할 수 없었고, 결국 각자 한 종류씩 골라서 수거해야만 했다.

약 10분.

루시펠의 인장이 빨리건 말건, 나는 셋이서 정리한 마석의 양을 살폈다.

최하급 230개.

하급 345개.

중급 47개.

그리고 딱 하나 남은 상급 1개.

"마석으로 부활시키는데 오지게 많이 썼나보네...."

38위 던전에서 쌓아둔 마석의 양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정도면 우리가 서브 던전을 사나흘 정도 뺑뺑이 돌기만 하면 금방 얻을 수 있는 양이었다.

"샤이탄, 하는 도중에 미안한데 적 병력에게서 수거한 마석은 어느 정도지?"

"쯉, 하아. 중급 마석만 대략 50개 정도 됩니다. ...찾으시는 상급은 세 개 있습니다. 적의 간부진에게서 회수했습니다."

"세 마리 다 4성이었나? 크흐, 다행이군."

이걸로 네 개가 모였다. 중급 마석은 죽은 라임을 부활시키는데 사용할 것이며, 나머지 마석들은 마액으로 만들어 전력을 강화시킬 것이다.

이제 문제는 저 엄청난 양의 보석.

"내가 보석에 대해서는 문외한인데, 누구 아는 사람 있나?"

"저도 보석은 잘...."

"드워프들이라면 모를까, 여기 드워프 아무도 없지 않아?"

"그렇긴 하지."

포르네우스 던전에 있을 때는 간혹 드워프를 마주치기는 했다. 보석과 돈만 지급하면 얼마든지 무기를 만들어주던 종족으로, 나와 트랄이 쓰던 무기 중 일부도 드워프들이 만든 물건이었다.

"그 놈들한테 감정을 요청해야하나?"

"주인님 드워프 싫어하시나요?"

"전쟁 특수를 노리는 쓰레기 새끼들이라서."

드워프는 인류연합과 마왕군 사이에서 중립을 표방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양쪽에 줄을 대었다.

"인류도 마왕군도 똑같은 손님이다 이거지. 물론 자기들 나름 살아남으려고 하는 선택이긴 한데, 좀 고깝기는 하지?"

"어느 한 쪽 편을 들면 반대쪽한테 공격당할 수 있으니까?"

"엘프처럼 완전 중립을 지키는 것도 아니고, 양쪽에 발을 걸쳐서 이득만 쏙 빼먹고 있잖아."

엘프는 엘프 다웠고, 드워프는 드워프 다웠다.

"혹시나 드워프 세력을 마주칠 일이 있으면 그 놈들, 확실히 기강을 잡아둬야겠어."

"군단에 편입시키려고 하시는 거죠? 드워프들이 만든 무기를 독점하시려고."

"그렇지. 륜, 똑똑하구나."

드워프들 중에서도 분명 조합장 같은 자가 있으리라. 그런 자에게 온갖 갑옷 디자인을 보여주면 뻑 가지 않고는 못 배기리라.

'양산형 모바일 겜에서 대충 몇 개만 디자인 따와도 혹할걸?'

갑옷 디자인 하나 만큼은 멋드러진게 엄청나게 많지 않은가. 특히 여성들을 위한 아머는-

"아, 주인님 또 야한 생각 하신다."

"24시간 하는게 그건데 새삼스럽게."

"방금 하신 생각은 스타킹 생각하시던 때랑 비슷하신대요?"

"그래. 드워프들 잡으면 너희들 입을 갑옷 하나 생각해봤다. 저 보석으로 거래를 하는 거지. 도안을 드릴테니 만들어주십쇼! 하면서. 흐흐흐."

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지면 우리 군단 전체에 도입하는 건 또 어떨까. 생각만해도 짜릿하다.

"......그래도 이거 값어치가 얼마정도인지 모르니까, 아는 사람에게 맡겨야 할텐데."

"모험가들은 어때? 걔들 이런 쪽으로 대충은 알 거 아냐."

"...그렇군. 륜, 루나. 미안하지만 둘이서 여기있는 것들 챙겨서 가다오. 슬라임 드래곤 안에 한껏 넣어서 계단을 따라 이동하면 될 거다. 1,2호기는 마석을, 3호기는 보석을 챙겨라. 5호기는 여기서 대기. 그레모리는 던전으로 돌아가 정비를. 기네비어와 갤러해드는...고생했다. 가서 쉬어라."

다섯 마리 슬라임 드래곤은 제각기 지시에 따라 임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지상으로 내려갈 1~4호기의 슬라임 드래곤은 각각 륜, 루나, 그레모리, 갤러해드와 기네비어를 태우고 지상으로 내려갔다.

할파스 던전의 심처에 남은 사람은 나, 샤이탄, 그리고 루시펠 뿐.

'아직 덜 끝났나?'

분명 인장을 챙기는 작업이 끝났으면 나를 불렀을텐데, 샤이탄은 여전히 루시펠을 능욕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샤이탄의 꼬리가 루시펠의 허벅지를 휘감고 뒤를 향하고 있었다.

"샤이탄, 너 지금 뭐하는...?"

"주인님이 혹시나 쓰실 때를 대비하여 작업하고 있습니다."

"잘한다. 더 해라."

잠깐의 짬을 활용하여, 나는 할파스 던전의 용도를 정했다.

"할파스 던전은 멀티 던전으로."

본진, 멀티, 서브. 할파스 나는 할파스 던전을 나의 멀티로 등록했다. 그레모리 던전처럼 관리자가 하나 있으면 별개의 던전으로 운용할 수 있는 던전이 되었다.

'누구든 〈할파스〉의 이름을 부여받으면 던전의 주인이 되는 거지.'

우리 본진보다 더 삐까뻔쩍한 던전이지만 어떠랴. 앞으로 더 수비할 곳이 늘어나겠지만 그 또한 어떠랴. 집 주인은 정해져있고, 자신이 이 던전의 주인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뒷통수 때리면 내가 개쓰레기지.'

그런 포르네우스 같은 짓은 할 수 없다. 더군다나 이런 천혜의 요새를 두고 서브 던전으로 만드는 헛짓거리도 할 수 없다.

"하피들 둥지는 싹다 이쪽으로 옮겨야겠어."

그레모리 던전의 목장에 있던 하피들은 모조리 이쪽으로 옮겨질 것이다. 거기에 한 가지 떠오르는 아이디어도 있기는 하지만 그건 나중에 〈할파스〉가 부활하고 나서의 일.

"주인님, 끝났습니다."

샤이탄이 드디어 나를 불렀다. 고개를 돌려 샤이탄을 보니, 샤이탄이 키스를 한 하복부를 보니 인장의 무늬가 사라져 있었다.

쮸으으읍.

샤이탄은 마지막 한 획까지 정성스레 인장을 빨아마셨다. 루시펠의 뽀얀 하복부에는 샤이탄이 만든 진한 키스마크만 인장의 모양으로 남아있었다.

"옮겨지는 거냐?"

"예, 제 배에 잠시 보관하는 겁니다."

"잠시?"

"어떻게 관리할 지 물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샤이탄은 자신의 배에 새겨진 아주 작은 인장을 가리켰다. 원래의 인장에서 또다른 획이 추가되어 있었다.

"인장은 그저 상징일 뿐입니다. 하지만 저희 솔로몬의 딸-마왕님의 자녀들에게는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죠. 바로 그 분이 자신의 딸이라고 새겨놓은 증거죠. 그 어떤 마족도 쉽게 건드리지 말라는 표식입니다. 그런데 그게 사라졌다면...."

"아, 안 돼! 그러지 마! 제발!"

샤이탄이 소환진으로 올라서자 루시펠은 눈물을 흘리며 애걸복걸했다. 하지만 샤이탄은 상큼하게 웃으며 소환진을 향해 마나를 끌어올렸다.

"원래 마왕님께서는 일곱 군단이 함께 성장하기를 바라셨으나...이런 '예정 외의 상황'이 생겼다면 생각도 다르시겠죠."

"뭐?"

"군단과 군단간의 전투는 상정하셨을 겁니다. 이런 상황도 어쩌면 가정하셨을지도 모르겠군요."

샤이탄은 담담한 얼굴로 소환진에서 물러섰다. 그리고 소환진에서는 익숙한 검은색 안개가 뿜어져나오기 시작했다.

"...할파스의 잔당인가?"

나는 괜히 얼굴을 마주하기 쑥쓰러워 아무 헛소리나 지껄였다. 다행히 상대는 그런 내 개드립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나오자마자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래, 똑같은 색이니 오해할만하지. 좋은 태도야. 오랜만이네, 분노의 군단장."

"...반갑습니다. 그, 장모님이라고 부를까요? 아니면 장인어른이라고 부를까요?"

정말로 오랜만에 만나는지라 부르기도 어색하다. 정체에 대하여 확신을 할 수도 없으니 호칭도 애매하다. 그래서 나는 상대-에스투에게 공을 넘겼다.

"흠...그렇네. 사정상 구체적으로 알려줄 수는 없고.... 뭐 별 거 있어? 어머님이라고 불러."

"알겠습니다, 어머님."

할파스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상대다. 기분을 조금이라도 거슬리게 했다가는 모가지가 날아갈 것이다.

'샤이탄이랑 무슨 짓을 했는지도 대충 알 거 아니야.'

나는 괜히 침이 꼴깍 넘어갔다. 지금부터는 샤이탄의 몫이었다.

"흠흠, 에스투 님. 현재 놓인 문제상황에 대하여 한 가지 제안이 있습니다."

"그래, 말해보렴."

"저희 군단은 오만의 군단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인장 또한 승자인 저희 군단에서 챙겼구요. ...그럼 인장을 잃은 이 마족에 대해서는 저희가 어디까지 처분을 내려도 좋습니까?"

"......그렇네."

생물학적으로 루시펠은 마왕의 딸이다. 아무리 인장을 빼앗겼다고 해도, 우리 멋대로 다루기에는 여러모로 난감했다.

"...원의 딸이라서 어떻게 건드리기도 애매하고. 이럴 때는 역시 결정권자 의견을 따라야지. 거기 벌써부터 쥬지가 아프신 군단장님 의견은?"

"에, 에스투 님?"

"어차피 네 의견이라고 해봐야, 쟤가 뭐라고 하면 바로 '주인님의 뜻대로....'하면서 여우짓 할 거 아니야. 쟤랑 얘기하는게 내가 속이 편하단다."

"역시 말이 통하시는 군요."

에스투답다. 그래서 나는 직설적으로, 내가 원하는 대로 소상히 밝혔다.

"우리 군단에 한 걸 생각하면 가만히 두지는 못하겠고, 그런데 너무 예쁘고 먹음직스러우니 내버려두기는 아깝고, 그렇다고 그냥 침대에 들이자니 애들 고생한 거 생각하면 짜증나고.... 그래서 말입니다."

"결론은?"

나는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고 씩 웃었다.

"루시펠 양 강제 피임 마법 가능합니까? 아무리 씨를 뿌려도 수정이 이루어지지 않...는...."

"호오."

에스투는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싱긋 짓는 미소가 너무나도 무서워보였다.

'너무 객기부렸나?'

인장은 전리품이다. 하지만 너무 대놓고 마음대로 써먹겠다고 하는 건 마왕을 욕보이는 행위다. 더군다나 아이를 가지지 못하게 하겠다고 하니, 그것만한 능욕도 없을 터.

"얘, 루시펠이 몇 번 주인이 바뀌기는 했어도 마왕님의 딸이거든?"

"...그렇긴 하죠. 제가 말실수를 했습니다. 송구합니다."

"그래도 마왕님께서는 의욕없는 딸보다는 능력있고 잘나가는 사위가 더 좋으시겠지? 흠흠."

"...아무렴 그렇게 봐주시면 정말 고마울 따름입니다. 흐흐."

그랜절이라도 할까싶었지만 과례는 비례다. 나는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어머님."

"속으로 생각하는 거 그대로 얘기해도 딱히 상관없는데? 깨끗하게 쓰고 반납하겠다거나, 루시펠 상대로 조교 테크닉을 좀 갈고 닦겠다거나, 이참에 샤이탄 원하는 대로 하녀로 쓰겠다거나."

"...크흠흠."

들켰다. 역시 속내가 다 읽히고 있으니 뭔가 다른 수작을 부릴 수도 없다. 그냥 속마음을 그대로 내비치는 것이 훨씬 나았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물론 나와 에스투의 훈훈한 분위기에 초를 치는 이도 있었다. 거래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루시펠. 이제는 인장조차 빼앗긴 그저 한 명의 마족.

"어, 어째서...!"

"시끄럽네, 정말."

에스투는 차가운 눈빛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삽시간에 루시펠은 입에 재갈이 물렸다.

"던전 주인을 보좌해서 강해질 생각을 해야지, 그냥 가만히 앉아서 던전 주인 죽든 말든 내버려 두고 말이야. 마지막에는 지 살려고 조금 노력하기는 했지만...안되겠어, 너. 이건 벌이야."

찰싹!

에스투가 손바닥으로 루시펠의 하복부를 가볍게 내리쳤다. 그러자 루시펠의 하복부에는 핑크빛의 인장이 새롭게 새겨졌다.

"새로운 인장입니까...? 8번째 군단?"

"아니? 자궁문신인데. 음문(淫紋)."

"예?"

"성마법의 극한을 이끌어내는 마법진이지. 단순한 문신은 아니란다. 효과는...."

에스투는 낮게 웃으며 루시펠의 하복부를 쓸었다.

"......파종으로 열매가 맺히면 말이야, 생명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마석이 나오도록 만들었어. 어때?"

역시 나는 마왕의 축복을 받고 있는 것이 틀림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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