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8
"할파스 던전 천장이다."
나는 의식을 차렸다. 마지막에 분명 루나의 안에 꼽고 기절을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반듯한 자세로 땅에 눕혀져 있었다.
"이겼나?"
"네, 이겼어요."
나를 가장 먼저 반기는 이는 눈물을 글썽이는 륜이었다. 나는 손을 들어 륜의 눈물을 닦았다.
"울지마라. 이겼는데 왜 우냐."
"......상처가 너무 깊었습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샤이탄이 나를 향해 고개를 꾸뻑 숙였다.
"무조건 이겼을 때만 이쪽으로 넘어오라고 했더니 샤이탄이 있네? 그럼 끝났군."
"네. 뒷 마무리를 하나 해주실 게 있습니다만...할파스가 완전히 죽었으니 끝이지요. ...보고드릴게 있습니다."
샥스는 내게 시스템을 통해 스크린 하나를 보냈다. 나는 홀린듯 영상을 재생했다.
끼아아아아아악----!!
샥스가 입에서 거대한 물대포를 쏘았다. 할파스의 대가리를 정확히 저격하는 완벽한 각도였고, 물에 미미하게 섞인 신성력의 수탄이 물대포 속에서 할파스의 정수리를 저격했다.
"완벽한 각도로군. ...응?"
푸허억--!
샥스는 물대신 피를 토해냈다. 투명한 물대포는 붉은 피대포가 되어 할파스를 마저 덮쳤다.
"이, 이건 도대체?"
"자신이 마신 액체를 뱃속에서 섞어 토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신성력이 담긴 액체를 그대로 마셨다가 뱉었으니...."
"헐."
...염산이나 다름없는 것을 마셨다가 뱉어서 공격했다? 나는 샥스의 의지가 대단한 것도 대단했지만, 샥스의 상태가 걱정되었다.
"샥스는 어디에 있느냐?"
"여기에 있습니다."
샤이탄은 내 손목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반쯤 돌아온 시야에는 피웅덩이에서 마른 기침을 하는 샥스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랬느냐."
"......."
샥스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 대신 눈빛으로 내게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알림〉 포로 샥스가 정식으로 부하가 되기를 요청합니다.
"...그래. 알겠다. 대신-"
"죽...이...ㄱ."
샥스는 힘겹게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목은 갈라지고 피가 흘렀지만, 샥스의 의지는 분명히 내게 전해졌다.
"하...파스로...부...."
털썩. 샥스는 더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샥스의 옆에서 피가 묻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옆을 지키던 루나는 조용히 샥스의 눈꺼풀을 손으로 덮었다.
"......샤이탄에게 이미 들었어. 부활, 가능한 거지?"
"...물론. 없으면 구해서라도 부활시킬 것이다."
〈인연소환〉
# 샥스, ★★★★☆. 상급마석 9개 필요.
군단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자신을 증명했다. 이 정도 결의를 보이는데 어찌 아끼지 않을 수 있으랴.
'일단 휴식을 취하고, 최대한 방법을 강구해보자.'
상급 마석이면 4성급이니, 상위 던전을 털어서 서브 던전으로 만들어버리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인간 세계를 통해 얻을 수 있다거나.
그를 위해서 우선 할파스 던전을, 오만의 군단을 완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샤이탄. 너라면 벌써 찾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입니다. 안내할까요?"
"그래. ...어디 한 번 면상 좀 보자꾸나."
나는 샤이탄의 안내를 따라 또다른 계단을 내려갔다. 흩뿌려진 마석과 온갖 보석은 집어치우고, 내가 찾는 것은 단 한 명의 마족.
"꼭꼭 숨어있어야지. 머리카락 보일 수 있거든...."
무서워서 숨어있는게 아니라 당당히 앞으로 나섰다면, 나는 아마 목을 꺾어버리고 식도에다가 독액을 부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저벅. 저벅.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나는 샤이탄이 이끄는 대로 천천히 할파스 던전의 심처로 들어갔다.
* * *
"......흐끅."
루시펠은 소환진의 방에 비치된 나무상자에 웅크려 숨었다. 값비싼 보석은 모두 저장고에 몰아두었고, 마석은 소환진 근처에 흩뿌려놓았다.
저벅, 저벅.
상자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눈에 띄지 않을 뿐 문 하나만 열면 금방 들어올 수 있는 곳이니, 발견만 하면 누구든 들어올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저벅, 저벅.
루시펠은 입안이 바싹 말랐다. 손발이 달달 떨렸지만 걸리면 겁탈당한다는 심정으로 숨을 죽였다. 아니, 무조건 겁탈당할게 뻔했다.
'마나가 회복될 때까지 버텨야 해.'
루시펠은 자신의 손에 꽉 움켜쥔 물건을 잡고 숨을 죽였다. 자신을 찾지 못할 때까지 버틴 다음, 부활의 의식을 치르기만 하면 끝이다. 다행히 상대는 자신이 상자에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 마석에 신경을 쓰란 말이야! 할파스가 모은 보석을 챙기라고!'
눈앞에 있는 금은보화에 눈이 멀어 제발 허름한 상자를 찾지 않기를. 심지어 루시펠은 상자 안에 할파스가 취미로 모아둔 적들의 뼛조각 사이에 숨어있었다. 일부러라도 가장 안쪽의 상자를 살핀 뒤, 뼛조각을 파헤쳐 깊숙히 숨어있는 루시펠을 찾으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빨강이, 아니 노랑이만 부활시켜도 도망칠 수 있어!'
둘은 다행히 대화가 통하는 상대다. 할파스가 살해당했다는 것을 알면 자신들도 살기 위해 도망치려 할 터. 아직 인장은 루시펠에게 있다. 그 말은 즉 루시펠이 시스템을 활용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
루시펠은 할파스를 부활시키는 것에 대해 잠깐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 놓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시스템 상에는 〈할파스〉가 당당히 놓여있었다.
'이 무능한 새대가리! 최상급 마석 15개? 장난해?!'
아무리 5성급 강자라고는 해도 부활의 대가가 너무 크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데 뭔들 바치지 못하겠느냐만은, 그래도 최상급 마석은 너무 심했다.
'역시 비행 가능한 간부를 살리는 게 맞아.'
일단 소환하고 빠르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다음, 외부로 통하는 천장의 비밀 통로를 통해 날아가면 된다. 적들은 그 누구도 비행을 할 수 있는 자가 없었고, 뒷 일은 나중에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내가 밖으로 나가면...내가 직접 던전을 운영하겠어.'
안드로말리우스든 단탈리안이든 하위권부터 차근차근 밟아나가면서 세력을 구축하리라. 루시펠은 빨리 발소리가 사라지기만을 기다렸다.
투둑, 툭.
누군가가 마석을 한아름 챙겨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밀실을 떠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계단 위로 올라가는 발소리에 루시펠은 쾌재를 불렀다.
'지금이야!'
치지직.
시스템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순간.
'됐-'
"여기 있었나?"
나무상자의 문이 열리며, 우악스러운 손길이 뼛조각을 뚫고 들어와 루시펠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 * *
나는 나무상자의 안에서 금발의 여인을 붙잡고 들어올렸다.
"어, 어떻게 찾았...?!"
"두 가지. 샤이탄이 먼저 찾아놓은 걸 내가 따라왔고.... 냄새가 나거든, 냄새가."
루시펠에게서는 진한 레몬의 향기가 풍기고 있었다. 내가 루시펠을 붙잡으니, 곧 시스템창이 푸르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알림〉 할파스 던전/오만의 군단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 할파스 38위 던전을 공략함에 다라, 자동으로 해당 군단이 보유하고 있던 이름을 모두 회수하였습니다.
## 현재 부여 가능 이름 : 아미(58), 푸르카스(50), 샥스(44위).
## 이외에 남은 이름 없음.
# 상위 던전인 할파스 던전을 공략하였습니다.
# 오만의 인장 (〈루시펠〉, Lv55, ★★★★☆)을 확보하였습니다.
시스템 창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한쪽 눈에는 시스템 창이, 다른 쪽 눈에는 현실이 보이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만나서 반갑구나, 오만의 인장-아니 루시펠."
"으으읍?!"
루시펠은 내게 목이 졸린 채 들려 발광했다. 마왕의 딸이며 인장이기는 하지만, 루시펠 때문에 개고생을 한 것을 생각하면 화가 가라앉지를 않는다.
"할파스 대신 네가 병력을 운용했다고 들었다. ...무한으로 나오던 페일 라이더, 지상 2층에 날뛰던 가고일과 거대 까마귀들, 모두 네가 부활시켜서 보낸 것들이렸다?"
"으읍?!"
루시펠은 괴로워하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 '전리품'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을 하며 사람 한 명을 기다렸다.
"역시 바로 아셨군요, 군단장님."
"아니다. 귀찮은 일을 하게 해서 미안하다."
계단을 통해 정장을 입은 서큐버스, 샤이탄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나타났다. 루시펠은 샤이탄을 보자마자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 아으...?!"
"눈을 감았으니 보이지 않았을 겁니다."
이미 인장이 계단 아래 방에 숨어든 것은 진작에 파악했다. 그래서 나는 샤이탄을 안아들어 계단을 내려간 다음, 인장이 숨은 곳을 파악하고 샤이탄을 올려보냈다.
아니나 다를까, 뭔가 수작을 부리려 하더라. 나는 바로 달려가 루시펠을 포박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대로...죽여?"
"인장에게는 인장답게 죽는 방법이 있습니다. 주인님, 부디 여기는 제게."
"...그래, 어디 한 번 해봐라."
나는 살심을 억누르고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루시펠의 목에는 내 손자국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주인님. 잘 봐주십시오. 이것이 인장을 강탈하는 방식입니다."
샤이탄이 꼬리를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루시펠이 입은 순백의 하얀 드레스를 아래에서부터 위로 걷어올렸다.
"어우야."
한쪽 눈이지만 보일 건 전부 다 보인다. 병적으로 뽀얀 다리의 끝에는 때묻지 않은 하얀 팬티가 걸려있었고, 샤이탄이 꼬리를 조금 더 올리니 그곳에는 보라색으로 빛나는 인장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겉으로는 정숙한 여인인척 옷으로 꽁꽁 싸메고 있으면서 속으로는 자궁문신이라니, 쓰읍."
"그, 그런 저속한 표현으로 인장을 모욕하지 마라!"
"뭐래. 솔로몬도 노리고 박았을 건데. 그렇지 않냐, 샤이탄?"
나는 샤이탄의 허리를 끌어안고 하복부를 쓰다듬었다. 샤이탄은 느긋하게 내 손길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자연히 루시펠의 옷을 들어올린 꼬리도 떨릴 수밖에 없었다.
"흐흐. 할파스 던전의 모든 존재가 죽었다. 3마리의 새대가리 간부도, 잔존 병력도, 그리고 할파스도."
샥스의 마지막 일격. 신성력을 입안에 머금고 날린 물대포에 할파스는 소멸당했다. 샥스가 어느 군단을 선택한 지 확실하게 노선을 정한 완벽한 행동이었다.
'샥스가 딴 맘을 먹었다면 분명 끝났어.'
륜이 신성력을 화살에 담아 쏘았어도 끝나기야 했겠지만, 샥스가 그걸 나를 향해 쏘았다면 나도 끝장이기는 했다. 루나가 샥스를 계속 데리고 다닌 덕분에, 샥스는 우리 군단의 일원이 되기에 충분한 동기를 가질 수 있었다.
'굴복시킬 때만 하더라도 의욕 없어서 인형같았는데.'
샥스는 포로로 있을 때만 하더라도 그다지 의욕이 없었다. 박힐 때야 반응이 있기는 했지만, 직접 주도적으로 허리를 움직이지는 않아 가끔 목석같기도 했다.
'역시 행복라스 한 번이면 바로 생각이 바뀌지.'
하지만 정사와 라스의 방에서 격하게 박히고 나서는 성행위에 다소 흥미는 가졌고, 파랑이라고 불리우는 천둥군주와 코카트리스 부대를 스스로 설득하거나 묻겠다면서 우리 군단에 줄을 대었다.
'자기 부대를 가지고 싶었던 건가? 뭐, 이제는 관계없지. 코카트리스 말고 더 멋진 부대로 편성해줄테니까.'
샥스가 우리 군단에 완전히 돌아선 계기가 무엇일까. 하나 있다면 분명 할파스의 발언을 들은 것일 터.
'근친은 마왕도 거르는 사안이다. 그걸 저지르겠다고 하는 놈을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지.'
설령 마지막까지 갈등을 했다고 하더라도, 할파스가 자신을 겁탈하겠다는 발언을 한 순간부터 완전히 우리 군단의 일원으로 돌아섰을 것이다. 할파스를 직접 죽인 것은 그런 자신의 의지를 내게 천명하기 위함이 분명했다.
'자기를 부활시켜 줄 거라고 믿고 있는 거지.'
그러니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인장에 대한 처분을 정확하게 내려야했다.
"그래서 샥스도 우리 군단에 들어왔고...이제 인장 하나만 남았네? 샤이탄, 한 번 내게 보여봐라. 인장을 어떤 식으로 강탈하는지."
"후훗."
샤이탄은 요염하게 웃으며 드레스 아래에 다소곳이 무릎을 꿇었다. 머리에 난 뿔이 옷자락을 들어올렸고, 샤이탄은 자신의 얼굴을 루시펠의 인장에 들이밀었다.
쪽.
"히이이익?!!"
아주 짧은 키스였음에도 루시펠은 가버렸다. 살짝 옆으로 보니 하얀 팬티가 점점 짙어지는게 눈에 보였다.
쪽, 쪼오옥.
샤이탄은 인장을 연신 입으로 빨아당겼다. 그럴수록 루시펠의 몸은 붉게 달아올랐으나 저항은 하지 못했다.
"오만의 인장...저희가 가져가겠습니다."
루시펠의 몸은 마비에 걸린 것처럼 굳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