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6
높은 등급에 오른 던전의 주인일 수록 더 많은 전장에 불려다닌다.
할파스는 마왕의 하수인 역할을 할 생각이라고는 추호도 없었고, 시스템을 통한 제 욕구만 챙길 생각이었다.
전장에는 마족의 생에 치명적인 신성력이 몰아친다. 할파스는 아주 오래 전, 던전의 주인이 되기 전 스캐빈져로 전장을 돌아다니며 신성력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몇 번이고 두 눈으로 목격했다.
성검의 폭격.
신성력을 검에 불어넣어 날리는 용사의 일격에 수많은 마족들이 쓸려나가는 것을 보며, 할파스는 적당한 위치에 있어야 함을 몇 번이고 상기했다.
그런데 이건 뭐란 말인가.
어지간한 용사들보다 더한 신성력을 뿜어내는 저 다크엘프 여왕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건 사기다...사기라고!"
할파스는 전신의 마기를 내뿜으며 초승달같은 참격을 막아냈다. 전신의 근육이 터지고 내장이 뒤틀렸으나, 상대는 모든 신성력을 참격에 쏟아넣었다.
털썩.
다크엘프 여왕은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하복부의 성흔은 빛이 바랬다. 할파스는 이것만 막으면 승리가 자신에게 주어지리라 확신했다.
"흐하하, 막았-"
서걱.
할파스의 몸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졌다. 고개를 숙이니, 어깨부터 허리까지 비스듬한 상처에서 피분수가 치솟고 있었다. 분명히 막았는데, 몸이 잘렸다.
"아."
할파스는 루나의 손에 들려진 두 자루의 검을 보고 허탈해졌다. 한 자루는 진작에 불이 꺼졌으나, 다른 한 자루는 이제 막 불이 꺼지듯 명멸하고 있었다.
"망할 쌍검...."
할파스의 몸은 그대로 옆으로 고꾸라졌다.
* * *
"정말 이 길이 맞는 거야?!"
"군단장께서 올라가신 길이시니 맞겠지."
갤러해드와 샥스는 수직에 가까운 통로를 게처럼 기어올랐다. 팔과 다리를 교차하며 올라가는 데 있어서 샥스가 앞에 섰고, 그 아래에 갤러해드가 뒤를 따르고 있었다.
"너 위를 보면 죽을 줄 알아!"
"그러니까 내가 먼저 간다고 하니까."
"그러면 나한테 물 떨어지잖아!"
"......."
갤러해드는 스스로 신사임을 되뇌이며 참기로 했다. 수십 미터를 올라갔지만 둘의 체력은 충분했고, 이제 그 구멍도 끝이 보였다.
"윽."
둘은 나오자마자 펼쳐진 막대한 시체의 산에 코를 찡그렸다. 목이 비틀려 있거나, 눈동자에 가고일의 날개가 박혀있거나, 사지가 뽑혀있거나 하는 시체는 그저 평범한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이건 대체...?"
"오크는 상처입을 수록 더욱 강해지지. ...아무래도 군단장님께서 몹시 화가 나신 것 같군. 올라가지."
갤러해드는 계단 한가득 놓인 거대 까마귀의 사체들을 발로 걷어치우며 위로 올라갔다. 샥스는 갤러해드가 디딘 곳을 따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호,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할파스 죽었겠지?"
"까마귀들의 피가 따뜻하다. 올라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듯 하군. 저건...."
"빨강이 아저씨!"
샥스는 피칠갑을 하고 쓰러진 붉은 시체매에 깜짝 놀랐다. 시체매의 몸 곳곳에 남아있는 신성력의 흔적은 잔혹하기 그지 없었다.
물론 계단에 흩뿌려진 괴수들 보다는 훨씬 나았다.
"진짜로 여기까지 다 잡은 거야?"
"쉿. 위에...."
갤러해드는 조용히 흑요석 계단을 올랐다. 샥스도 갤러해드의 뒤를 따라 붙었다.
"세상에."
샥스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넋을 잃었다. 은빛과 검은빛이 춤을 추듯 싸우는 광경은 정상에서의 결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윽."
하지만 중간 소강상태에서 들린 할파스의 말에 샥스는 사색이 되었다. 본능적인 거부감과 혐오감이 벌레처럼 몸 아래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정신 차려라, 샥스."
"아, 응. 그래...."
"그리고 보아라. 우리의 승리를."
분노한 루나의 하복부로부터 은빛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엄청난 신성력의 향연에 샥스는 기겁을 하며 눈을 가리며 엎드렸다.
"뭐, 뭐야?!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별 거 아니다."
갤러해드는 침을 꼴깍 삼키며 씩 웃었다.
"검으로 베었을 뿐."
쿵.
무언가가 무릎을 꿇는 소리가 샥스의 귀에 울렸다.
* * *
"이긴 건가?"
나는 은빛으로 얼얼해진 시야가 돌아올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야했다. 루나가 스스로 검기에 실어 날린 루나포는 할파스 뿐만 아니라 나까지 피해를 끼칠 정도였다.
'박고 있을 때는 괜찮았는데.'
체력이 다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루나로부터 떨어져서 그런걸까. 바퓰라 던전을 공략할 때는 루나를 들고 자지로 배를 찌르며 포격을 날려도 아무렇지 않았다.
"주인님, 괜찮으세요?"
"조금 따갑군. 시야가 돌아올 때까지 당분간은 기다려야겠구나."
플래시뱅이 터진 것 같다. 시신경이 순간적으로 불탄 것 같다. 물론 오크의 회복 능력이라면 완전히 소멸되지 않는 이상 시간만 진득하게 있으면 상처는 회복되기 마련.
'그 동안 신세를 좀 져야겠군.'
당분간 장님 신세다. 정확히는 온 세상이 신성력의 은빛으로 물들어 있는 신세다. 뭔가 눈앞에서 아른거리지만 보이지는 않았다.
"륜아. 은근슬쩍 치마 걷어올리지 마라. 고간을 내 쪽으로 들이밀지도 마라."
"힉?! 어떻게?!"
"냄새가 나잖아, 냄새가."
눈은 안 보여도 후각은 더 예민해졌다. 나는 농후한 복숭아 향에 손가락을 들어올려 륜을 번쩍 들어올렸다. 고간부를 한 손으로 들어올리니, 륜은 당황해하며 다리로 내 팔을 휘감았다.
"죄, 죄송해요!"
"아니, 됐다. 너도 걱정이 돼서 한 거겠지. 그리고...그런 장난을 칠 정도로 우리가 유리하다는 말이기도 할 터."
"그래. 이긴 것 같네."
"할파스는 어떻게 됐지?"
"죽었어. 우리 승리야."
"......직접 보지 못하는 게 아쉽군."
마지막 순간 루나가 활에서 쌍검을 뽑아들며 X자로 긋고, 초승달같은 검기가 날아가는 것이 보였으니 분명 할파스는 죽었으리라.
"루나는?"
"...그, 그게."
그레모리가 말을 더듬었다. 나는 괜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루나가 상처를 크게 입지 않았을까 싶어서.
"...아니, 이런 미친."
나는 후각이 예민해졌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코를 찔러오는 찐득한 초콜릿 향은 벌써부터 나를 상상의 나래로 빠지게 만들었다.
"그렇지. 륜이 괜히 이런 진지한 전쟁 중에 나에게 그런 장난을 벌일 리가 없지. ......야, 루나야."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초콜릿 향을 따라 걸었다. 좌우로 흔들리고 있는 향으로 보아, 분명 흔들고 있는게 뻔했다.
"킁킁. 갤러해드랑 샥스도 있는 것 같은데...올라와라."
"예, 군단장님."
갤러해드와 샥스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계속 초콜릿 향을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툭.
정강이에 무언가가 닿았다. 그리고 그건 짧게 경련하기 시작했다.
"흠."
나는 한걸음 물러서 허리를 숙였다. 휴식끝에 감각이 살아난 손을 뻗으니 마시멜로우처럼 보드라운 무언가가 잡혔다.
"...지금 뭐하는 거냐?"
"지쳐서 쓰러진 거야."
루나의 목소리는 피로가 잔뜩 베어 있었다. 신성력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탈진 상태에 빠진 듯 했다.
"쓰러진 자세가 왜 이 모양이지?"
나는 내가 잡고 있던 부위에서 손을 옆으로 쓸었다. 둥근 언덕에서 탄탄한 라인이 매끄럽게 이어졌다. 촉감으로 봐선 스타킹의 허벅지 라인이 분명했다.
"orZ?"
"그건 뭐야?"
"딱 네 자세지."
손으로 대충 훑어도 알 수 있다. 루나는 바닥에 엎드린 채 엉덩이만 위로 들어올린 상태로 바닥에 뻗어버렸다.
"신성력을 그만큼 썼으면 피곤해서 기절했을텐데 왜 이런 자세지?"
"그거야...."
루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동시에 초콜릿 향이 더 진해졌다. 나는 루나의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치마를 조심스레 허리 너머로 걷어올렸다.
"이렇게 지쳐서야 누가 지나가다가 냅다 박아도 저항을 못하겠어."
"......흐흥, 그러게. 온몸에 힘이 안 들어가는 걸."
"그런 녀석이 뒤에는 힘 빡주고 버티고 있냐? 진짜 지쳤으면 1자로 엎드렸지."
"...이럴 때는 좀 그냥 모른척 넘어가주면 안 돼?"
"......후우."
모른척 넘어가고 싶다. 밥상이 떡하니 차려져 있는데 그걸 마다하는 병신은 아니다. 그저 지금 당장 밥맛이 없을 뿐.
"루나, 다음에 하자."
"...라임 때문에 그러니?"
"그것도 있고, 직접 보면서 하는 게 더 맛있을 것 같아서."
"알았어."
루나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당장 루나를 다시 엎드리게 해서 냅다 박는 것도 좋지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기 마련.
"할파스 죽은 거 맞지?"
"그럼요."
"...뭔가 이상한데."
쥐죽은 듯이 고요하다. 정말로 신성력의 참격을 맞은 걸로 죽은게 맞을까? 죽은 척을 하고 있는게 아닐까?
'적의 군단장을 죽였잖아. 혹시 뭔가 특별한 이벤트라고 있는 게 아닐까?'
그것이 아니고서야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끝날 리가 없다. 이런 찝찝함만 아니었다면, 나는 인연소환의 리스트에 올라간 라임에게 양해를 구하고 루나에게 포상을 내렸을 것이다.
'시스템 확인 어떻게 안 되나?'
보이지 않으니 알 수가 있-
[...인님? 들리십니까?]
"샤이탄?"
[이제야 들리시는 군요. 재밍이 너무 심해서 닿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신성력을 과도하게 쓰면 시스템마저도 영향을 받는 듯 합니다.]
"솔로몬의 힘이 들어가있으니...잠깐만."
나는 은빛의 세상 속에서 떠오른 시스템창에 경악했다. 시각은 지금 맛이 갔는데 시스템창이 보인다?
"자, 잠깐만. 샤이탄, 할파스를 죽이고 나면 어떻게 되지?"
[그야 다른 쟁탈전과 마찬가지로 알림이-]
"젠장, 모두 무기 들어!"
이런 식으로 감이 맞아 떨어지기를 바란 적은 없는데. 나는 급히 루나를 끌어안았다. 몸의 신성력을 다 사용한 이상, 지금 당장은 나보다 루나가 더 약했다.
"할파스의 상태는?!"
"......미치겠네."
"어떻게 된 거죠, 샥스?"
"나, 나는 몰라! 저런 거 처음본다고!"
샥스의 당황하는 목소리에는 진심이 느껴졌다. 할파스가 당한 것을 처음 봤을테니, 아예 모르는 듯 했다.
"포가년도 뒤질 것 같으니 변신 하더니...저건 왜 2단 변신을 하고 지랄이야. 지금 무슨 모습이냐?"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포르네우스가 거대 은갈치로 본색을 드러냈듯, 할파스도 크게 상처를 입고 원래 모습을 드러냈을 가능성이 있다.
"...주인님, 성인 남자 안드라스 머리만 떠올려보세요."
"그래."
나는 륜이 시키는대로 안드라스 성인을 차렷 자세로 세운 다음, 머리만 남겨두고 몸통을 날렸다.
"그게 지금 공중에 떠있는데, 아래에 검은 안개를 망토처럼 두르고 있어요."
촤---악!
"그걸 양옆으로 펼쳤어요! 안에서-"
"검이 날아온다! 실드!"
카가가강!!
그레모리가 펼친 실드를 무언가가 격하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소리로 판단하건대, 검처럼 날카로운 깃털들이 실드를 두드리는 셈이었다.
"이거 오래 못 버텨!"
"......갤러해드, 륜! 그레모리에게 신성력을 주입해라! 가능한가?!"
"네!"
"등에 손을 대면 가능합니다. 괜찮습니까?"
"해라! 시시콜콜한 거 따질 때가 아니다!"
내 지시에 따라 륜과 갤러해드는 그레모리의 등에 손을 올렸다. 실드를 두드리는 깃털의 소리가 점점 더 둔탁해지는게 들렸다. 좀 더 두터워진 실드를 뚫지 못하고 튕겨나가는 것이다.
"몰라...뭐야 이거, 무서워!"
"샥스, 네 도움이 필요하다!"
나는 루나를 번쩍 들어올렸다. 몸에 힘이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들고 있는 것이 한계였다.
"뭐, 뭐하는 거야?!"
"네가 우리의 옷을 벗겨라!"
"히익?!"
백이 넘는 3성 마물을 때려잡은 나도, 몸 안의 신성력을 모두 사용한 루나도 심각한 탈진 상태였다. 그나마 체력이 조금이나마 회복된 내가 루나를 들고 있는 것이 남은 체력의 전부.
"네가 하는 거다!"
"샥스...도와줄래?"
"오, 옷을 벗기라니...그게 무슨 말이야?! 이 상황에!"
"이 상황이니까 해야하는 거다!"
나는 품에서 남은 마석을 샥스에게 던졌다. 실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더욱 격해지기 시작했다.
깍, 깍까까깍!!!
광기어린 할파스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더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잘 들어라, 샥스! 지금부터 내가 하는 그대로 하는 거다!"
나는 양손으로 루나의 밑가슴을 받치듯 끌어안으며 하반신을 낮췄다.
"바지를 벗겨서, 자지를 꺼낸다음, 루나의 스타킹 고간부를 찢고 안에다가 마석을 집어넣어! 그다음에 내 자지로 찔러라!"
"어디를?!"
"루나 보지!"
마액은 없다. 하지만 혹시나 몰라 챙겨놓은 것과 거대 까마귀를 때려잡으며 주웠던 마석이 조금이나마 남아있다.
"이게 우리가 살 길이다, 샥스! 할파스가 되고 싶다면 당장 도와!"
마액이 없다면 만들면 그만.
"아까는 하기 싫다며, 아니 싫다면서요!"
"살아남을 방법이 이것밖에 없잖나!"
"샥스, 해! 찢고 넣고 빨기만 하면 네가 이제 할파스야!"
"...아, 진짜! 이 변태소굴에 발을 들인 내가 잘못이지!"
샥스는 시뻘게진 얼굴로 손톱을 들어, 루나의 스타킹을 찢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