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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비만 오크-292화 (292/800)

# 292

쿵쿵쿵쿵!!

달린다. 무너질 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위로 올라간다는 생각만 하며 달린다.

"세 번째 조심!!"

뒤에서 륜이 지시를 내린다. 나는 두 번째 계단을 발로 디디고 훌쩍 뛰어올랐다.

'환상.'

세 번째 계단은 검은 계단처럼 보이는 환각이었다. 그대로 발을 밟았다면 균형을 잃고 아래로 빠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쿵!

하지만 나는 그 다음 계단을 디디고 다시 뛰어올랐다. 아래에는 푸드득거리는 날갯짓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머리 옆으로!"

내 앞에 안겨있던 그레모리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였고, 그레모리의 손에서 은빛의 레이저가 쏘아졌다.

키에에엑!!

위에서 검은 깃털이 흩날렸다. 아마도 그레모리가 우리의 위를 덮치려던 거대 까마귀를 저격한 것이리라. 아마도라고 추측하는 이유는 내가 직접 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달린다.

그저 계단을 달릴 뿐이다. 나선형으로 벽에 딱 달라붙어 올라가기도 하고, 반대편까지 직선으로 달리기도 한다.

떨어지면 다리가 부러지는 걸로 끝나지 않을 높이.

난간도 없고 그 어떤 안전장치도 없으며, 오히려 계단을 오르는 이를 엿먹이기 위한 함정이 가득하지만 계단은 계단이었다.

'던전을 만드는데 기본적인 법칙이 있지.'

쟁탈전의 포털은 던전 최심부와 가장 먼 곳에 열린다는 것. 그리고 그 길이 막혀있는 경우, 마왕 솔로몬은 포털이 공격측에서 적 던전의 최심부까지 직행할 수 있는 위치에 열리도록 시스템을 설정했다.

즉 아래에서 천장-할파스의 소환 시설이 있을 최심부까지는 무조건 길이 연결되어있다. 그 길은 다름아닌 계단이고, 함정만 조심하면 끝까지 올라갈 수는 있다.

"주인님, 두 번째부터 쫙 깔려있어요!"

"큭?!"

함정만 조심하면. 나는 짧게 발을 구르고 위로 높이 뛰어올랐다.

"어디까지?!"

"열 번째까지요!"

"미친!"

계단 아홉 개에 전부 함정이 깔려있다니. 나는 죽을 힘을 다해 멀리, 높이 뛰어올랐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함정이 깔린 계단이 너무 많았다.

'이 상도덕도 없는 새끼!'

함정도 적당히 설치해야지, 이런 식으로 적을 무조건 죽이겠다고 설치를 해두면 어쩌잔 말인가.

'물론 그게 맞기는 한데.'

발이 살짝 계단 끝에 스쳤다. 계단은 내 발이 닿자마자 바로 아래로 무너져내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아래로 곤두박질 칠 터.

"으아아아!!"

나는 그레모리를 앞으로 집어던지고, 두 팔을 뻗어 함정이 아닌 계단을 붙잡았다. 몸이 진자처럼 휘청거렸고, 나는 그 반동을 이용해 백덤블링을 하듯 계단 하나를 디뎠다.

"후우, 살았다."

"야!"

흰 날개를 펄럭이는 그레모리가 나를 향해 발길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최소한 '그레모리, 던진다!'정도는 말하고 던지란 말이야!"

"원래 사자는 자기 새끼를 절벽에서 밀어 던지는 법이지."

"그딴게 어디있어! 내가 날지 못했으면 지금 꼼짝없이 죽는 거였다고!"

"괜찮다. 이렇게 살았으니까."

나는 다시 그레모리를 안고 호흡을 골랐다. 팔 힘을 생각보다 많이 사용한 탓에, 어느정도는 체력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후우, 후우."

"괜찮으세요? 내릴까요?"

"아니. 그러면 안 되지. 너희들은 체력을 보존해야해."

탑을 등반하는 과정에 있어서 나는 철저한 이동 수단이다. 륜과 그레모리는 신성력을 최소한으로 사용해야했고, 그 최소한은 당연히 저 망할 시체매에게 쏟아내야 했다.

"이제 절반 좀 넘었잖아. 후우."

"그리고 쟤들도 다 따라붙었지."

까악, 까악--!

아래에서 거대 까마귀들이 기회다 싶어 날아오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수를 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수는 아직도 두 자릿수는 거뜬해보였다. 옆에 달라붙어있는 가고일들까지 포함하면 거의 백이 훌쩍 넘을 정도.

"징글징글하구만. 말벌도 이 정도로 달려들지는 않겠다."

"쟤들은 저희를 떨어뜨려 죽이려고 하는 거잖아요."

"어떻게 할 거야? 여기서 작전 바꿀래?"

"그렇게는 안 되지."

나는 내가 디디고 있는 계단을 살폈다. 그리고 조금만 더 위로 올라가니 짜증나게도 가운데에서 'ㄱ'자로 꺾이는 부분이 나타났다.

중간중간 방향을 꺾어야 하는 우리와 수직으로 솟구치는 비행형 마수들. 아무리 내가 지름길을 활용하고 전력으로 뛰었다고 해도, 결국 뒤가 붙잡히는 건 당연했다.

"여기까지인가...."

* * *

"그래, 거기까지야."

루시펠은 이도저도 못하는 오크를 보며 쾌재를 불렀다. 자신이 따로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시체매는 알아서 가고일과 거대 까마귀-킬러 레이븐-을 잘 활용하여 오크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멍청이. 일일이 다 잡고 오는게 정석인데."

계단을 끝까지 오르기 위해서는 당연히 방해요소인 가고일과 킬러 레이븐을 전부 죽여야 한다. 그러지도 않고 꼼수를 부리며 위로 올라가는데 급급하니 어찌 비웃지 않을 수 있으랴.

"지상은 신경 안 써도 되겠네. 지하는...칫."

루시펠은 하나 둘 죽어나가는 코카트리스 부대에 혀를 찼다.

"지하는 끝났네."

원래라면 지상 1층도 유린하고 지상 2층까지 올라와서 계단을 올라가는 병력들의 뒤를 습격해야 할 후방 교란 부대는 변태 오크와 배신자에 의해 철저히 유린당하고 있었다.

"파랭이 혼자서는 못 이겨."

더럽기 때문이 아니다. 원래부터가 샥스는 파랭이 급 강자였고, 오크는 레벨은 낮아보여도 신성력이라는 사기 능력을 사용하고 있다.

'호수에서 빨리 나왔어야 했어.'

온갖 더러운 것들이 흩뿌려지고 있으니, 섬에 코카트리스들이 올라간 건 스스로 고사하겠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천둥군주가 마나를 흩뿌리며 버티고는 있으나,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할 터.

'샥스가 중간중간 뭔가를 마시고 있어. 그럴 때마다 마나가 회복되고 있다고. 뭐야? 마나 포션이라도 만든 거야?'

토해내고, 무언가를 마시고, 다시 마나를 끌어올려 토해내고. 작정하고 위에서 산성액을 꺼내 발사하는 샥스는 천둥군주와 코카트리스 부대를 죽이려고 작정했다.

그 마나도 샥스가 마족인 이상 한계가 있을 법 하건만, 샥스는 연거푸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입에 집어넣고 삼켜댔다.

처음에는 독극물인 줄 알았더니, 다시보니 샥스가 소모된 마나를 일부나마 회복하여 다시 위액을 토해내고 있더라.

"지상에서...지하로 원군을 보내야겠네."

페일 라이더들을 재소환하여 계단을 달리게 하면 된다. 중간에 방해가 되는 오크도 가고일들이 끌어내릴테니, 페일 라이더들은 곧장 지하로 달려가 샥스와 오크의 뒤를 치면 될 것 같았다.

"그러면...뭐야?!"

루시펠은 경악했다.

"계단에서...뛰었다고?!"

* * *

나는 한 번 더 문신을 활성화했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사용하면 나중에 근육통으로 고생을 하게 되겠지만, 지금은 문신의 힘으로 신체를 강화하는게 몹시 중요했다.

끼아아아악!!

까마귀들이 계단조차 박살낼 듯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나는 직선으로 되어있는 계단을 전력으로 달렸다.

"우오오오!"

가고일 일부가 계단 위까지 올라가 계단을 틀어막았다. 이대로 방향을 꺾어서 올라가면 앞뒤로 쌈싸먹힐 게 분명했다.

"작전명 J!"

그러므로 이런 상황을 가정하고 계획한 유일한 작전을 사용한다. 애초에 작전의 큰 틀에서 벗어나지는 않지만, 실제로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륜, 나 믿지?"

"물론이죠."

"그래. 그러면 가자."

"나는?"

"너는 중간에 날면 되잖아. ...알았다, 알았어. 꽉 잡아라."

나는 두 여자를 안고 직선으로 달렸다. 계단을 올라가기 위해서는 90도로 방향을 꺾어야 했으나, 무조건 앞으로 달렸다.

"간다, 신뢰의 도약---!!"

계단의 끝에서 나는 뛰어올랐다. 정면으로. 계단이라고는 일절 없는, 디딜곳이라고는 일절 없는 곳을 향해.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내가 정면으로 점프를 할 거라고 생각한 놈들도 없어서 그런지 가고일이나 거대 까마귀도 한 마리 없었다.

자연히, 중력에 이끌려 몸이 아래로 내려간다. 그레모리와 륜까지 달고 있으니 그 가속도는 어마무시.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내 몸은 아득한 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라임-----!!"

퍼--억!!

벽이 허물어졌다. 그리고 붉은 슬라임 무리가 벽에서 튀어나왔다. 나는 벽에 생긴 구멍을 향해 몸을 둥글게 말아넣었다.

"떨어져!"

그레모리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륜은 내 등을 디디고 뛰어올랐다. 나는 동그랗게 몸을 말고 벽에 난 구멍을 향해 떨어졌다.

쿵--!!

구멍의 안쪽으로 들어가 세 바퀴를 굴렀다. 벽에서 대기하고 있던 슬라임들이 쿠션이 되어 나를 받아냈다. 죽을 듯이 아팠지만 죽지는 않았다.

"후우. 죽는 줄 알았네."

전신이 뻐근하다. 문신의 불빛은 사그라들었고,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주인님!"

"신뢰의 도약 같은 소리를 하고 있네. 그냥 구멍에 갖다 박은 거면서."

"야야야, 나 아프니까 마음까지 아프게 하지 마라."

막무가내식 도전이었고, 실제로 목숨을 건 행위였으나 죽지 않았다. 죽지 않았으면 그만이다. 나는 륜의 부축을 받아 쿠션이 된 슬라임들을 들어올렸다.

"흐흐, 놈들 지금 벙쪘군."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는 말이 이런 상황이 아닐까. 가고일과 거대 까마귀, 그리고 시체매는 멍하니 내가 떨어진 구멍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계단 근처에 옹기종기 모인 놈들을 향해 중지를 들어올렸다.

"이 새대가리들아, 내가 너희 던전에 기술 혁명을 일으켰다."

꿀럭, 꿀럭!

내 바로 위에서 슬라임 드래곤들이 꼬리를 쭉 내밀었다. 나는 그들을 손으로 붙잡았다. 내가 안고 싶었지만 근육통이 생각보다 심해, 륜은 그레모리가 안았다.

"내가 계단을 그냥 올라온 줄 아냐?"

새들을 낚기 위해서는 먹음직스러운 미끼가 필요하기 마련. 나는 스스로 미끼가 되었고, 그 사이에 모든 작업은 끝났다.

"아아, 이건 리프트라고 하는 것이다."

꿀럭, 꿀럭!

슬라임 드래곤 두 마리가 벽에 딱 달라붙어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이 '수직'으로 만들어놓은 구멍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슬라임 리프트."

슬라임 드래곤들이 벽에 달라붙어 기어올라가고, 나는 그들의 꼬리를 잡고 끌어올려졌다. 그 속도는 내가 달려올라가는 것보다는 못했으나, 괴조들이 대처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흐흐, 흐흐흐!"

⅘ 이상 올라간 지점. 라임이 미리 뚫어놓은 구멍에 다다르자 슬라임 드래곤들은 상승을 멈췄다. 나는 슬라임 드래곤을 양 어깨에 올리고 구멍에서 뛰어내렸다.

"야, 네가 빨강이라며?"

시체매, 벌쳐는 검은 깃털에 핏빛과도 같은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나를 향해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지뢰 깔아둔 거 하나도 못 써먹었는데 어쩌냐?"

"...어리석은 놈. 부하들이 올라오기 전에 나를 죽일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시체매는 날개로 아래를 가리켰다. 계단 층에서 올라온 플로어에는 두 발을 '바닥'에 디디고 선 시체매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거의 중간 보스룸이네.'

할파스 군단의 2인자. 붉은 시체매. 할파스의 둥지 입구를 지키는 최후의 가디언.

"착각하고 있는게 하나 있는데."

나는 주먹을 꽉 말아쥐고 양 팔 위에 올려진 슬라임 드래곤들을 계단을 향해 겨눴다.

"네놈도 죽이고 네 부하들도 싹다 죽일 거다. 마석 파밍할 좋은 기회거든."

빨갱이는 날개를 펼치며 살기를 내뿜었다. 나는 빨갱이 매에게서 몸을 돌려 계단 아래로 몸을 돌렸다.

"륜, 그레모리, ...그리고 라임! 적을 잡아 죽여도 좋다! 나는 그 사이에 부하들을 쓰러뜨리마!"

쩌억.

슬라임 드래곤들이 입을 오물거리며 고개를 아래로 내밀었다. 바퓰라 던전을 공략하며 시행착오를 거쳤으니, 이제는 조금 더 효율적으로 쏠 수 있다.

"물 반 고기 반이니...대충 쏴도 되겠구만."

"나를 능멸하는 것이냐! 어디서 등을 보이느냐!"

"어, 능멸하는 거 맞다. 내가 아까 몸을 좀 다쳐서 너 따위랑 안 놀거니까, 우리 애들이랑 좀 놀고 있어."

나는 등뒤를 향해 중지를 들어올린 뒤, 슬라임 드래곤들을 가고일과 거대 까마귀들에게 겨눴다.

"하늘에서 점액이 빗발친다!"

두두두두두.

야구공처럼 단단하게 정제된 점액 덩어리가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모든 걸 녹여버리는 독성물질도 아니고, 날카로운 가시가 달린 것도 아니지만, 질량 만큼은 분명히 가지고 있는 단단한 점액.

"우박도 대가리에 얻어맞으면 아플테지."

어디 피해서 넘어올 수 있으면 넘어와 보던가. 물론 천장은 막혀있기에 그들이 올 수 있는 루트는 단 하나.

계단 뿐이다.

"먼저 오는 순서대로 지옥으로 보내주마! 선착순!!"

가고일이고 거대 까마귀고 할 것 없이 미친듯이 계단을 달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엄청난 인기에 괜히 뿌듯해져서 팔을 쭉 뻗었다.

"내가 장사지낸 까마귀 대가리만 몇인 줄 아느냐?"

안드라스 던전을 공략하며 666마리가 넘는 안드라스를 죽였다.

"오늘 한 번 1000마리 찍어보자, 이 썩을 놈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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