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1
지하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나는 당장은 확인할 수 없다.
확인할 방법이 있다면 갤러해드의 사망. 인연소환에 등록되어있는지 아닌지 알아보는 방법밖에 없으며, 다행히 아직은 등록되지 않았다.
'죽지마라.'
이미 샤이탄을 통해 샥스의 보좌로 함께 간 것은 알고 있다. 적들을 설득하는데 실패하는 즉시 적은 지상으로 쏟아질 것이고, 그러면 또다시 지상 1층의 모험가들은 싸우게 될 것이다.
피로는 누적될 것이며, 모험가 중에서도 사망자가 나올 터.
'사망자는 최소한으로 줄여야 해.'
마석은 마액으로 바꾸거나 가챠를 위해 쓰여야지, 부하들의 부활을 위해서 쓰이는 물건이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 전쟁을 치르면 당연히 사상자가 나오기 마련이기는 하지만, 사망자보다는 부상자가 많은 편이 훨씬 낫다.
그러므로 갤러해드와 샥스가 죽지 않기를, 샥스가 배신하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슬라임들이 뚫어놓은 통로를 올랐다.
"흐흐, 이 녀석들 아예 들어오지를 못하는 구나."
"아예 부리로 뚫을 수 없는 곳 까지 넓혀서 가니까요."
구구구구.
슬라임 드래곤 굴착기가 만드는 비탈길은 가고일도 대형 까마귀도 아무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공격을 한다 싶으면 벽으로 더 들어가면 그만이었다.
캬아아악!!
"딜레마로다, 딜레마야."
나는 비탈길의 열린 부분을 통해 나를 공격하려던 가고일의 발목을 붙잡았다. 얼핏 눈으로 봐서는 ★★★짜리 가고일처럼 보였다. 고작 3성으로는 나를 막을 수 없다.
콰득!
나는 가고일의 발목을 잡아 비틀었다. 그리고 곧장 가고일의 날개를 향해 은빛 화살이 날아갔다.
파바박!
륜이 쏜 화살은 정확히 가고일의 날갯죽지를 뚫었다. 한쪽 날개가 뜯겨나간 가고일은 중심을 가누지 못하고 그대로 비틀거리며 아래로 떨어졌다.
"계단을 올라갔으면 이놈들에게 분명 말벌처럼 뜯겼을 거야."
나는 계단 중간, 반대편을 향해 직선으로 이어진 통로에 기가 질렸다. 단순히 나선형의 구조가 아니라, 중간중간 층계를 나누어 놓은듯 공중에 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딱 계단에서 밀기 좋게 해놨네. 개같은 놈들."
"악질이네요."
"뭐...날아가면 저놈들에게 뜯길테니까, 어떻게 보면 수비에 있어서 최적화 된 던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느긋하게 라임이 만드는 길을 따라 움직였다. 새대가리들이 워낙 멍청한 탓에, 우리가 대놓고 길을 파내며 올라가도 별다른 대처를 하지 못했다.
슬라임 드래곤들이 구멍을 넓게 판다. 까마귀들의 부리는 닿지 않을 정도의 깊이로 굴을 판다.
그리고 뒤따르는 빅슬라임과 슬라임들이 위아래로 움직이며 벽을 허문다. 가운데 부분은 뒤에 바짝 따라붙은 나와 륜, 그레모리가 적절히 옆으로 밀쳤다.
파스스.
계단에는 흙더미가 내려앉고, 적 병력들이 열심히 노출된 우리를 공격하려고 날뛴다.
까아아악!!
거대 까마귀 한 놈이 딱따구리마냥 정확히 우리가 있는 곳에서 날개를 멈추며 부리를 박아넣으려 했으나 소용없다.
콰--앙!!
그레모리가 만들어낸 실드에 거대 까마귀는 부리를 찔러넣었다 화들짝 놀라며 뒤로 도망쳤다. 실드는 부서지지 않았고, 오히려 까마귀의 부리가 부러졌다.
"실드 어택!"
나는 까마귀의 부리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실드를 향해 내지른 주먹은 실드째로 까마귀를 튕겨냈다.
파바박!
그리고 그 틈에 륜이 화살을 장전해 저격한다. 이번에는 까마귀의 가슴을 저격했고, 거대 까마귀는 가슴에 은색 화살이 꽂혀 뒤로 크게 물러났다.
나, 그레모리, 륜.
적의 간부급 강자가 셋이서 작정하고 버티면서 각개격파를 해대니, 적들의 잡졸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당황해했다.
'너무 수월한데.'
약 1/3 지점을 돌파한 순간.
쿡쿡쿡쿡!!
"그래도 마냥 멍청이들은 아니네."
거대 까마귀들이 벽에 달라붙어 부리를 계속 박고 있다. 계단을 따라 비탈길을 파고 있으니, 우리가 파고 들어가는 루트에 맞춰 미리 벽을 파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쟤는 머리가 조금 돌아가는 것 같은데요."
"그러게. 역시 할파스한테 가는 길목을 지키는 놈이야. 보통 저런 놈이 간부들 중에 대빵이거든."
여전히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시체매-벌쳐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수많은 가고일과 거대 까마귀들을 조종하며 우리가 나아갈 벽을 파기 시작했다.
"슬슬 달릴까?"
나는 륜을 향해 등을 보였다. 륜은 싱글벙글 웃으며 내 뒤에 올라탔고, 그레모리가 내 허벅지를 발로 두드리며 신경질을 냈다.
"나는?"
"넌 날개 있잖아."
"야, 나 지금 타천사 된 지 2시간도 안 지났거든?"
"이번에 나는 연습하면 되겠네. ...에휴, 알았다."
나는 그레모리를 번쩍 안아들었다. 뒤에서 내게 바짝 안긴 륜이 이를 가는 소리가 귀에 들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앞뒤 바꾸느라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륜은 내게 안기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그레모리는 내게 이런 식으로 안기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그러니 내가 그레모리를 붙잡고, 륜은 팔과 다리의 힘으로 나를 꽉 붙잡는게 맞다.
"라임, 중간에 합류하자꾸나."
꾸르륵.
나는 라임에게 뒷 일을 맡겼다. 동굴파기는 라임의 전문 분야이며, 이제는 내가 라임에게 맞춰서 움직여야 했다.
까악, 까아악---!!
까마귀 들이 우리의 움직임이 이상해졌다는 것을 깨닫고 날개를 펼치기 시작했다. 우리가 나아가야 했을 벽은 벌써 1m 가량 움푹 파여있었다.
"꼼수로 1/3 커트 했으면 많이 온 거지."
구구구구구.
뒤에서는 여전히 라임이 땅을 파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손가락을 쓸어 문신을 활성화했다.
근력을 강화하고 혈류를 가속한다. 필요한 것은 오직 다리의 힘.
"륜, 방향은 네게 맡긴다."
"맡겨주세요."
륜이 뒤로 가야하는 이유. 그것은 륜이 나의 길잡이가 되어줘야 하기 때문.
"...나는 하는게 없이 안겨 가기만 하는데."
"하는게 없기는."
나는 그레모리의 옆가슴을 손가락 끝으로 꾹꾹 눌렀다. 다른 손으로는 엉덩이를 와락 움켜쥐었다.
"무게추가 되어주셔야겠어. 흐흐."
"......하아."
그레모리는 한숨과 함께 내게 몸을 맡겼다. 나는 가고일과 까마귀들이 움직이기 전, 먼저 힘차게 발을 뻗었다.
"계단, 오르지 않고는 못 베기겠어!!"
계단을 향해.
* * *
꼬끄오오곡!!
코카트리스들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워낙 충격적인 장면을 보고 있기도 하거니와, 그 컬쳐쇼크를 일으키는 행위가 자신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탁탁탁탁!
호수는 뭍에서부터 서서히 은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추잡한 수음 소리가 던전에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지하 1층의 간부, 천둥군주는 눈앞의 광경이 믿기지가 않았다.
"솔로몬 맙소사."
오크가 신성력을 사용한다. 이것도 이해할 수 없지만, 신성력을 사용하는 방법이 글러먹었다.
탁탁탁탁!
뷰르륵.
오크는 거근을 위로 들어올리며 힘차게 무언가를 발사했다. 입으로도 차마 말할 수 없는 그것은 포물선의 궤적을 그리며 호수를 더럽히기 시작했다.
사아아--
은빛의 신성력이 점점더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코카트리스들은 어느새 호수의 끝자락까지 밀려야했다.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나."
천둥군주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날개를 펼쳐 호수에 몸을 담궜다.
"때짱!"
"넌 좀 닥치라니까."
천둥군주는 혀가 짧은 갈매기 부관에게 주의를 준 뒤, 코카트리스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모두 섬으로 올라가라."
자신은 호수에 몸을 담그고, 코카트리스들은 섬에 다리를 디뎠다. 코카트리스 전부가 섬에 올라가기에는 공간이 부족했지만, 코카트리스들은 동료를 디디고 사이사이에 올라 탑을 쌓으며 섬 위에 모두 올라갔다.
"......건방진 오크놈! 신성력을 사용한다고 절대적인 강함이 달라지겠느냐!"
파지지직!
천둥군주에게서 막대한 양의 전기가 튀어올랐다. 호수 전체로 퍼져나간 전격은 신성력이 가득한 영역에 닿자마자 막대한 증기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파지지직!!
마족의 마기가 가득한 전격이 신성력이 담긴 물과 만나 서로 소멸되기 시작했다. 호수 전체를 뒤덮기에는 아직 갤러해드의 신성력이 그리 많지 못했다.
"더럽고 시건방진 놈!!"
지지지지직!!
천둥군주가 날개를 수면에 내리쳤다. 굵은 줄기의 전격이 튀어올라 갤러해드에게 날아갔다.
"큭!"
갤러해드는 그제서야 자신의 성검에서 손을 떼고 진짜 철검을 들어올렸다. 철검은 신성력이 담기기 시작했고, 갤러해드가 높게 휘두르니 전격은 금방 튕겨나갔다.
"뭐야. 진작에 검으로 싸웠으면 됐잖아?"
"귀찮게 일일이 잡아 죽이는 것보다 이쪽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해서."
"효율적이기는 한데...남들 보기 부끄럽지 않았어?"
"그대만 함구하면 아무 문제 없소. ...군단장님이라면 분명 이렇게 했을 것이오. 분명."
갤러해드는 바지를 추스리며 당당하게 검을 들어올렸다. 마치 용사와도 같은 자세를 취하는 게 샥스는 더 어이가 없었다.
"왜 설득력이 있지. ...하아, 진짜 이 군단이 왜 색욕이 아닌 거야?"
"그거야 솔로몬께서 아실 일이지. 그보다 어서 저것의 대처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해보시오."
갤러해드는 곁눈질로 물속에서 계속 전기를 흘려대는 천둥군주를 가리켰다. 스스로 내뿜는 전격에 대해 내성을 가지고 있는지, 천둥군주는 쉬지 않고 전격을 흩뿌렸다.
"간단해. 너 없어도 나 혼자 이길 수 있으니까 여기에 온 거야."
샥스는 갤러해드의 뒤에서 앞으로 튀어나왔다. 신성력을 내뿜는 검을 피해, 샥스는 물가에 서서 마나를 끌어올리려다 짜증을 부렸다.
"아이씨, 왜 향긋해?! 왜 냄새가 비슷하냐고!"
"그거야 내가 군단장님의 핏줄이라는 증거지."
"...여긴 진짜 미쳤어."
샥스는 손을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러자 천둥군주가 화들짝 놀라 날개를 좌우로 펼치며 전격을 마구잡이로 방출하기 시작했다.
"나도 미쳤고."
꾹.
샥스는 손으로 혓바닥을 살짝 눌렀다. 동시에 스스로 목구멍을 열어, 입 한 가운데에 마나를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호흐 허허우어야."
"...조금 더러울 거야?"
끄덕.
샥스는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머리를 살짝 뒤로 젖혔다. 검은 로브 아래에서 무언가 꿀럭거리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웁."
샥스가 잠시 입을 다물더니.
푸우우우-------
입에서 물줄기를 쏘았다. 줄기라고 표현하기 힘든, 마치 대포에서 포탄이 나가는 듯한 파괴력이었다. 그 수압은 마치 철판이라도 잘라버릴 듯한 기세였다.
"끄오오옷!"
천둥군주는 날개를 교차하며 날개 위에 보호막을 만들어냈다. 황색을 띄는 마나 실드 위에는 전기가 튀고 있었다.
파아앗--!!
샥스의 물대포는 천둥군주의 보호막에 막혀 사방으로 흩어졌다. 천둥군주의 뒤에 옹기종기 모인 코카트리스들은 몸을 웅크리고 벌벌 떨었다.
"지, 진짜 샥스 님 아니야?! 샥스님 기술이잖아!"
"샥스 님이 왜 우릴 공격해!"
"끼요오오옷?! 죽는다, 녹아 죽어!!!"
코카트리스들은 발광하기 시작했으나, 입만 시끄럽게 떠들뿐 움직이지를 못했다.
섬 근처에는 천둥군주가 뿌려놓은 전격이, 뭍에는 갤러해드가 뿌려놓은 신성력이, 그리고 천둥군주의 보호막 근처에는 샥스가 뿌려놓은 '반짝이는 물'이 두둥실 떠다니기 시작했다.
"후우."
물대포를 한 껏 뿌린 샥스는 손등으로 입을 훔쳤다. 갤러해드는 샥스가 보인 힘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우리 군단에 침입했을 때 강물을 소환했던 건?"
"그건 진짜 강물이야. ...나도 한 수는 숨겨둬야지."
샥스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그냥 마신 걸 뱃속에 저장해뒀다가 이런 식으로 뱉어내는 건데.... 내가 최근에 마신게 좀 특이한 거거든. 아, 목 아파. 신성력이라는 거 엄청 쓰리네."
"......뭐?"
"아니, 뭐. 그냥...."
샥스는 다시 손을 입술위에 얹으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다크엘프 여왕님께 어쩌다보니 은총을 받게 되어서 말이야. ...혀로 아래쪽 핥아드리다가 이렇게 됐네. 씁."
"......."
착각일까. 갤러해드는 왠지 모르게 샥스의 입에서 달콤한 향기가 난다는 느낌을 받았다.
"뭐...그게 아니더라도 독극물을 마시고 쏴도 그만이지. 역시 원래대로 하는 게 낫겠다. 너, 오늘 있었던 일은 서로서로 비밀이다?"
"......뭘 할려고-"
샥스는 입을 쩍 벌린 다음, 손가락을 목구멍까지 집어넣었다. 그리고.
"우에에에엑!!"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전방을 향해 힘차게 물대포를 토해냈다. 천둥군주의 마나 실드가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알싸하고 시큼한 냄새에 갤러해드는 직감했다.
"이기더라도 지하 던전은 폐쇄해야겠구만."
"위애애애애액!!"
갤러해드, 그리고 샥스.
둘은 성공적으로 지하 1층의 마물들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입구를 틀어막는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