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비만 오크-290화 (290/800)

# 290

던전의 지상 1층과 달리, 2층은 아주 높다란 첨탑이었다. 벽에 딱 달라붙은 나선형의 계단이 있기는 하지만, 계단이 몇 층이나 되는 지 감조차 오지 않을 정도로 높았다.

"샥스한테 듣던 거랑 다른데."

"조금 더 높아진 것 같은데요."

분명 듣기로는 그리 높지않은, 한 10층 빌딩 수준의 높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할파스 던전 순위만큼 층을 쌓아놓은 것 같은 높이였다.

"이 새끼들 첫 날 공격 실패하고 나서부터 수비하느라 던전을 더 확장한 건가?"

"저희 때문이거나...아니면 그 페닉스라는 던전 주인을 경계해서 그런 거거나."

가능성이 있다. 인장의 힘이든 아니면 던전의 특성이든 무슨 수를 써놓았기에 천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지 않겠는가.

"어후, 젠장. 계단으로 올라가려면 최소한 만 걸음은 걸어야겠네."

할파스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원동력은 이 계단이 아닐까. 올라가는 동안 지쳐서 쓰러질 법 한데, 겨우 올라갔더니 할파스와 싸워야 한다면 얼마나 힘들지 감이 오지 않았다.

'적의 체력을 빼는게 단순히 다치게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지구력을 빼는 건가. 한 수 배웠군.'

적이지만 훌륭하다. 자신들은 하늘을 날아서 올라가면 그만이니, 지상에 발을 붙이고 있는 자들은 계단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모든 지상병력은 언데드다. 똑똑하군. 괜히 30위대의 던전 주인이 아니야.'

포르네우스보다도 훨씬 더 똑똑한 것 같다. 물론 그 던전을 공략하는 나보다는 못하지만.

"정공법은 최후에 쓰는 선택이지. 라임아! 시작해라!"

나는 라임과 슬라임 드래곤에게 벽을 갉아먹도록 지시했다. 슬라임들은 곧장 벽을 파먹기 시작했다.

"어떠냐? 외벽이 나오냐? 여기 탑이야?"

꾸르륵.

"라임이 아니래요. 계속 흙만 나온다고 하는데요."

"역시."

할파스 던전의 탑은 높다란 동굴이었다. 가운데에 구멍이 있고, 계단을 만들어 첨탑 모양을 만들었으며, 중간중간 계단의 벽에 구멍을 만들어 마물들을 살게 하는 거대한 감옥이었다.

"이건 뭐 온통 검은색으로 되어있으니 알 수가 있나."

"저도 잘 안 보여요. 구분이 되지 않아요."

"병력들 대부분이 검은색을 띄고 있어. 여기 2층을 지키고 있는 병력들 마저도."

안드라스 종의 머리가 검은색이었던 순간부터 예상은 했으나, 할파스는 군단 전체를 검은색으로 물들여놓았다.

마치 검은색이 자기 자신과 마찬가지이며, 검은색이 닿은 모든 곳에 자신이 있다는 것처럼 세력을 과시하는 듯했다.

"이게 다 정신병이지. 이러다 인장도 까맣게 만들었는 거 아닐까?"

"그냥 하는 말인데 왜 네가 말하니까 음탕한 생각이 들지?"

"그레모리, 주인님이 말하시는 거 당신이 생각하는 거 맞아요."

"내가 무슨 생각을 했다고 그러느냐?"

"음...인장의 여인이 할파스한테 매일같이 능욕당해서 유두랑 음부가 까매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걸렸다. 역시 륜은 4성답게 기감이 몹시 뛰어났다.

"...크흠. 아니 뭐, 그럴 수도 있잖냐. 샤이탄도 매력적인 존재인데, 할파스라고 오만의 인장을 안 건드렸을 리가 없지 않겠어?"

"글쎄. 할파스는 조류 말고는 건드리지 않아서 모르겠는걸. 오만의 인장이 조인 계열이라면 모를까."

"쓰읍."

나는 하늘에 기도했다. 제발 할파스나 할파스 이전의 주인이 인장을 건드리지 않았기를. 그리하여 미개봉 상태로 내게 넘어오기를.

긴장은 이정도면 풀렸다. 3호기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 군단은 할파스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

"일단 인장이고 할파스고 옥상까지 가려면 이 거지같은 검은 계단을 계속 올라가야하겠지?"

"그렇죠. 쉽게 올라가지는 못하겠지만."

까악- 까악-

탑 가운데에 거대한 새 무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종류는 크게 세 종류.

전신이 검은 가고일 수 백.

안드라스 종의 원종인 듯한 거대 까마귀 수 십.

그리고 몸은 뼈로 이루어져 있으면서 깃털 대신 얇은 피막을 가지고 있는 검은 매 하나.

'저게 시체매인가.'

눈이 퀭하여 구멍이 뚫려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지뢰를 잘 깔게 생긴 외형이었다. 어쩌면 계단 곳곳에 지뢰가 설치되어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날개가 있는 놈들의 던전인데 계단이 있는 것부터가 함정이지.'

갑자기 발을 디디면 무너지는 함정이라거나, 계단처럼 만들어져있지만 아래로 빠지는 함정이라거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순순히 계단을 오르게 되면 저 막대한 조류계 몬스터들을 계단에서 상대해야 한다. 머리 위가 노출되어 있는 이상, 불리한 것은 우리다.

'그럼 전장을 바꿔버리면 되지.'

이번 전장의 일등공신은 샥스다. 샥스가 우리 군단의 일원이 되기로 하고 자신이 아는 정보를 모두 오픈해주었기에, 이리도 쉽게 탑을 공략할 방법을 알아냈다.

"싸우지 않고 목적지까지 가는게 상책이지. 라임, 합체다!!"

꾸르륵.

라임이 슬라임 드래곤의 위에 엎드리듯 누웠다. 그리고 두 마리의 슬라임 드래곤이 라임의 위에 양옆으로 달라붙었다.

"작전명 라임 드릴러!"

꾸르륵!

"파고 올라가!!"

슬라임 드래곤들이 시계방향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임은 슬라임 드래곤의 사이에서 운전을 하듯, 벽에 파고들어 계단이 붙은 벽 옆부분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구구구구.

3호기가 죽어서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다. '벽을 깎아서' 계단의 옆에 새로운 비탈길을 만드는 식이라, 올라가야할 거리도 길다.

'하지만 이러면 안전하지.'

까악, 까악!!

가고일들과 거대까마귀들이 황급히 아래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 지상조 지상 2층 공략대의 인원은 나, 륜, 그레모리, 그리고 슬라임이 전부.

꾸르륵!!

슬라임 드래곤들이 파고들어간 원통 모양의 길 옆으로 빅슬라임들이 땅을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륜과 그레모리를 안고 벽 아래의 구멍으로 들어갔다.

카앙---!!

거대까마귀가 강철같은 부리로 우리를 쪼아대려했다. 몇몇은 계단 옆에 비탈길을 만드는 슬라임 드래곤을, 몇몇은 그 비탈길로 확장되는 구멍으로 숨은 우리를 쪼으려 했다.

하지만 부리는 우리에게 닿지 않았다. 우리 군단에 닿지 않았다.

푹---!

라임을 노린 부리는 흙벽에 박혔다. 라임은 귀신같이 구덩이의 바깥쪽, 그러니까 벽 안으로 파고들며 방향을 꺾어버렸다.

카앙--!!

우리를 노린 공격 또한 통하지 않았다. 내가 앞장 서서 거대 까마귀의 부리를 위아래로 잡고 닫아버렸다.

"눈깔을 어디다가 달고 다니는 거냐?"

꾸드득!!

나는 부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부리를 구겨버렸다. 거대 까마귀는 날개를 퍼덕거리며 괴로워했다.

"야 이 놈들아. 이 정도 높이 계단을 만들면 말이야."

나는 한손으로 놈의 부리를 잡고, 다른 한 손을 뒤로 뻗어 주먹을 말아쥐었다.

"장애인 용 길을 만들 생각을 하란 말이야, 이 새대가리들아----!!"

퍼---억.

나의 주먹이 거대 까마귀의 정수리에 꽂혔다. 첫 번째 거대 까마귀는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바닥에 고꾸라졌다.

"어차피 나의 것이 될 던전!"

나는 천장을 향해 소리쳤다.

"내가 다니기 편하게, 리모델링해주마--!!"

시공비는 마석과 인장, 그리고 할파스의 목숨으로 받아가리라.

* * *

〈그 시각, 할파스 군단 지하 1층.〉

첨벙, 첨벙.

얕은 호수 위에 코카트리스들이 날개를 움직이며 물장구를 치고 있다.

대부분 샥스와 함께 공격대로 안드라스 던전에 들어갔다가 전사한 코카트리스들로, 할파스는 공격을 멈춘 사흘 동안 코카트리스들을 부활시켜 지하에 배치했다.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후방 교란.

지하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명령이 떨어지면 그 즉시 지상으로 뛰쳐나와 포털을 넘어간 다음, 적진으로 침투하여 인장을 강탈한다는 특명이 부여되었다.

꼬르륵.

코카트리스들은 비록 대장이라고 할 수 있는 샥스를 잃었으나, 다행히 그들을 인솔할 간부급 마물은 하나 더 남아있다.

"때짱!"

지상과 연결된 포털에서 급히 달려온 대형 갈매기 하나가 푸드득 거리며 호수를 가로질렀다. 호수의 한가운데의 섬에는 푸른 깃털의 괴조가 웅크리고 있었다.

"때짱 말때로야! 쩍의 일뿌가 올라깠어!"

"......너는 가급적이면 말하지 마라."

"왜?!"

"진화하고 나서 말 해. 성대가 완전히 진화하고 나면 말이다."

푸른 깃털의 괴조는 서서히 날개를 펼쳤다.

〈천둥군주〉라는 이명을 지는 그는 코카트리스들과 유사하지만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체구도 코카트리스보다 세 배는 더 컸고, 전신의 깃털은 전기가 뿜어져나올 것처럼 그 끝이 날카로웠다.

"인장으로부터 연락은...과연. 안드라스 놈, 인간들과 손을 잡은 건가. 역겹기 그지 없군."

"씬썽력또 싸용해!"

"말하지 마라."

천둥군주는 갈매기 괴조의 입에다가 깃털을 쏘았다. 파지직 거리는 깃털이 갈매기 괴조의 입안에 박혔다.

"끼에에엥!"

"쯧. 샥스는 왜 인질로 잡혀서 저딴 놈을 부관으로 만들게 하는지. 코카트리스 이 놈들아! 너희가 못나서 샥스가 잡혔지 않느냐!"

천둥군주는 호수에 떠다니는 코카트리스들에게 일갈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샥스가 방심한 것이 가장 큰 패인이지만, 코카트리스들이 전부 적에게 살해당하고 부활했다는 치부는 사라지지 않는다.

"망할 놈들! 일어나라! 요새는 전력질주로 뚫는다!"

"때짱! 쩌끼!"

"말하지 말라니까...음?"

저벅, 저벅.

지하 1층에서 지상 1층으로 올라가는 포털의 입구. 검은 로브의 여인이 입구를 막듯 서있었다. 여인이 머리에 뒤집어쓴 후드에는 노란 부리가 달려있었다.

"너...샥스...?"

"예, 오랜만이네요. 파랭이 아저씨."

샥스는 후드를 벗었다. 코카트리스들의 앞에서 보여주지 않은 '인간의 모습'에 코카트리스들은 혼란에 빠졌다.

"공주가 인간의 모습이다!"

"그럴리가! 할파스 님이 인간에게 알을 낳았다고?!"

"가짜다! 가짜라고!"

코카트리스들은 혼란에 빠졌다. 그들은 인간형을 멸시하여 '새'의 형태를 고집하는 세력이었다. 그런데 명백히 새의 모습을 하고 있던 샥스가 사실은 인간의 모습이었다? 인간형 마족이다?

"대장님!!"

"......끄응."

천둥군주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주변에 한가득 있는 닭대가리들에게 샥스가 태어난 배경을 설명하기에는 너무나도 복잡한 문제가 산적해있었다. 애초에 남들의 앞에서 얘기할만한 거리가 아니다.

샥스의 존재는 할파스에게 있어서 실수이자 치부이므로. 천둥군주는 재빨리 상황을 모면해야했다.

"......이 년, 샥스를 죽이고 샥스의 이름을 빼앗았구나!!"

"헐."

샥스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입을 쩍 벌렸다. 천둥군주와 샥스를 번갈아보던 코카트리스들이 꿱꿱거리며 날개를 펄럭였다.

"그렇지! 애초에 저런 외형도 아니야! 샥스님은 항아리같은 외형이라고!"

"목소리가 똑같은데?"

"바보야, 뭔가 수작을 부렸겠지!"

"그렇다! 저것은 샥스를 기만하는 자! 이름을 빼앗은 저 자부터 없애버리자!!"

파지지직!

천둥군주가 몸에서 전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코카트리스들 또한 날개를 펼치며 호수를 헤엄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

"거 보시오. 대화로 해결될만한 자들이 아니라니까."

샥스의 뒤에서 오크 성기사, 갤러해드가 검을 빼들며 앞에 섰다.

"이 자들을 설득해서 무엇을 하려고 했소?"

"......얘내들이 다 내 편이 되어주면, 군단에서 내 입지가 더 강해질 거 아니야. 키메리에스 보니까 듀라한들 싹다 데리고 부대장 하는데."

"과연. 당신만의 부대가 필요한 건가. 그렇다면 저들은 최악이오. 군단장님의 흥미를 끌만한 요소가 없거든."

첨벙, 첨벙!

코카트리스들이 다리를 들어올리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갤러해드는 로브를 좌우로 벗어던지며 바지를 내려버렸다.

"끼요오옷?!?!"

코카트리스들은 충격적인 장면에 발걸음을 멈춰섰다. 오크의 아랫도리에 달린 성검은 은빛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작전대로 하겠소. 내가 저들을 모두 죽여버리리다."

"...동참할게."

샥스는 갤러해드의 등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샥스의 몸에서 흘러나간 마력이 갤러해드의 하체로 모이기 시작했다.

"이건?"

"...군단장이랑 루나 님, 륜 님이 하는 거 보고 응용한 거야. 곁눈질로 배운 하급 성마법이지만...물이 부족하지는 않을거야."

"내가 무엇을 할 지 알고 있는듯 하구려."

"...이 군단에 있으면 싫어도 대충 알게 돼."

"흐흐. 눈치가 빠르군."

갤러해드는 다리를 살짝 좌우로 벌리며, 자신의 성검을 붙잡았다.

"군단장님의 성검에는 마나를 녹이는 성질이 있지.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이나, 나는 군단장님과 달라. 나는...."

갤러해드의 손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나오기 시작했다.

"나의 것에는 신성력이 있다."

탁탁탁탁탁.

쏴아아아-----

호수에서 서서히 은빛 안개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오크 성기사

신성력 사용에 따른 대가 -〉 일반 마물 병사들 동원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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