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6
기병에는 기병으로.
스켈레톤 무리에게는 신성력이 담긴 화살 세례로.
정면 힘싸움에서는 우리 군단의 압도적 승리였다. 이제 남은 것은 검은 안개를 흩뿌리며 등장한 노란 삼백안의 괴물.
"흐흐, 좀 하는 구나. 애송이."
"지금 너 말고 다 죽은 거 안 보이냐?"
"흐흐, 걱정마라. 어차피 다 살아서 다시 나타날테니. 너는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오산이다. 이 전투는-"
"쫑알대지말고 내려오던가, 아니면 위로 짜지던가."
"......."
안개 속 와이번은 침묵했다. 자꾸 신경을 거슬리게 해서 사람의 짜증을 일으키는 것도 정도가 있건만, 놈은 천장을 날아다니기만하며 일절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다.
"쫄았냐?"
나는 놈을 계속 도발했다. 쓸데없이 잔머리는 좋아서 아래로 내려오지 않고 있다. 아래로 내려와야 잡을 수 있는데, 〈금안의 와이번〉은 천장의 입구에 떠있기만 했다.
"내려오면 화살받이가 될까봐 겁나지, 응?"
"그래, 겁난다. 그러니 원군이 올 때 까지 기다리는 거지."
"아니, 진짜."
할파스 놈은 상도덕이 없는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윗층으로 올라가는 기믹'을 가진 부하를 저런 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말인가.
샥스 왈.
할파스 세력에는 세 마리의 조류형 간부가 있다고 했다.
지상 1층을 맡은 〈저주받은 와이번〉.
지하 1층을 맡은 〈천둥군주〉.
그리고 탑의 중심을 맡고 있는 〈시체매〉.
각각 노랑이, 파랑이, 빨강이라는 요상한 별명을 가지고 있는 녀석들은 각각 쓸데없는 기믹을 가지고 있었다.
열쇠.
다음 장소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저 놈들을 쓰러뜨려야만이 넘어갈 수 있다. 지상 1층의 페일 라이더나 스켈레톤 무리는 모두 죽여버렸건만, 저주받은 와이번은 무서운 건지 아래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쫄보마냥 언제까지 개길 거냐!"
"나는 쫄보니까 괜찮다. 그리고 이렇게 시간을 버는 사이에...."
다그닥, 다그닥!!
천장 구멍에서 말발굽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투명한 마나의 계단을 타고 나선형으로 내려오는 기수들은 우리가 방금 죽였던 페일 라이더 들이었다.
"이렇게 원군이 도착했으니까."
"부활시켰구나! 이 썩을 놈들!"
사자에 대한 예우라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처사였다. 아무리 언데드라고는 하지만 저런 식으로 병력을 운용하다니, 자살특공대와 다를게 뭐가 있다는 말인가.
"벌써 세 번째다! 일절 이절 삼절 했으면 그만 적당히 하고 직접 싸워, 이 새새끼야!"
"일절 이절 삼절이라. 좋군. 어디 한 번 십팔절까지 가보도록 하지."
"아니, 저 씹."
더이상은 참을 수 없다. 나는 하늘에서 높이 뛰어오르는 페일 라이더에게 구겨진 방패를 집어던졌다.
빠각--!!
페일 라이더의 두개골이 박살이났다. 쥐뿔만큼이라도 나의 경험치가 늘어나는 건 분명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문제는 마석을 회수하지 못한다는 것.
파사삭!
저주받은 와이번이 날개를 펄럭였다. 검은 깃털이 한 번 더 죽은 페일 라이더에게 사르르 내려앉더니, 곧 페일 라이더는 검은 안개가 되어 흩어지고 말았다.
'후방으로 자꾸 보내버리네. 썩을 놈.'
상처가 얕은 페일 라이더는 윗층으로 전송한다.
상처가 깊은 페일 라이더는 차라리 없애버린다.
그럼 다시 윗층에서 페일 라이더들이 망가진 뼈를 다시 붙여오거나 아예 인연소환으로 부활하는 식으로 다시 나타난다.
'이런 소모전은 사양인데.'
지치지 않는 언데드와 달리 이쪽은 피로가 누적되고 있다. 인간 모험가들은 페일 라이더들의 낫에 스치기만 해도 위험했고, 신성력을 사용하는 기네비어 또한 체력을 회복할 틈이 필요했다.
"주인님!"
"기병창은...큭. 다 닳았군."
죽음의 기사들 또한 준비한 스톤골렘 기병창이 모두 닳아있었다. 처음 한 번 돌진에서부터 승기를 가져오기는 했으나, 천장에서 낙하하듯 달려오는 미친 자살특공대를 상대로는 무기를 온전히 유지하기가 역부족이었다.
"더럽게 짜증나네. 재력으로 밀어붙이니까 답이 없는데?"
죽이면 마석으로 부활.
적당히 상처를 입혀놓으니 적당히 치료해서 오히려 죽여달라고 아우성.
그런데 휘두르는 낫은 또 날카로워서 상대하기 너무나도 까다롭다. 사람을 피말리게 하는 전투 방식에 나는 억장이 무너졌다.
"아이고, 마석 없는 놈들은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누구는 애들 죽이기 싫어서 몸에 방어구 덕지덕지 발라놓는데!"
우리 군단의 병력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방어구를 착용하고 있었다. 특히 레오타드와 스타킹으로 구성된 이너 아머는 한 명도 빠짐없이 착용하고 있다.
덕분에 낫에 급소가 찔리거나 베이지 않으면 그리 상처는 깊지 않지만, 사람이 육체적 정신적 피로가 쌓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씁, 안되겠다! 작전 2페이즈로 간다!!"
내 지시에 선봉 부대가 나를 중심으로 원진을 만들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놈을 저격하기 위해서는 역시 저격수가 필요했다.
"야! 저주받을 와이번!"
"저주받은 와이번이다, 이 놈!"
"주저하는 와이번이든 저주받아 뒤질 와이번이든 내가 알 바냐! 너, 싸움 그렇게 하는 거 아니다!"
"시끄럽다! 어떤 식으로 싸우든 결국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것이다!"
"그렇긴 하지."
그렇다면 나는 이겼다. 나는 노란 눈을 반짝이는 녀석에게 손을 흔들었다.
"내 승리다."
"......?!"
역시 눈치챘다. 하지만 타이밍이 늦었다.
새애애액---!!
은빛의 화살이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와이번은 황급히 몸을 움직여 화살을 피하려 했으나, 와이번을 저격하기 위해 처음부터 '포털 바로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저격수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파지직!!
신성력을 머금은 은빛의 바람 화살이 와이번의 한쪽 날개를 꿰뚫었다. 검은 안개가 사라지고, 와이번 특유의 피막 날개에는 농구공만한 구멍이 뚫려있었다.
"큭, 크윽...!"
와이번은 힘겹게 하늘을 날며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좌우의 밸런스가 무너진 이상, 아무리 천장에 체공하려고 해도 역부족이었다.
새애애액--!!
화살은 한 발이 아니다. 아직 몇 발은 더 남아있다. 와이번은 한쪽 날개가 찢겨나갈 정도로 화살을 얻어맞고 나서야 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어우, 올려다보려니 목이 뻐근해서 말이야."
"이 건방진 오크 새끼가...!"
"너때문에 힘손실 왔잖아. 조금이라도 더 아껴서 할파스 모가지에다가 박아넣었어야 했을 힘인데."
뒤에 사용할 패를 잠깐 먼저 꺼낸 상황이라 기분은 과히 좋지 않았다. 그러니 이 짜증과 분노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허리춤에 걸어둔 메이스를 집어들었다.
"기네비어, 승리의 주문을."
"...여신이시여."
기네비어는 한탄과 함께 내 메이스에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메이스를 쥔 손바닥에 정전기가 튄 듯 따가웠지만, 나는 더욱 손잡이를 꽉 쥐는 것으로 고통을 참아냈다.
"기네비어, 다시 '진짜' 승리의 주문을 말해봐라."
"...진짜 합니까?"
"물론."
기네비어의 옆에 있던 인간 모험가들이 낮게 웃었다. 전부 여자밖에 없는 상황이라, 남자라고는 나와 기네비어 둘 뿐이었다.
"......하아."
기네비어는 깊은 한숨과 함께, 목에 핏대를 세우고 소리쳤다.
"안드라스 맛있더라-----!!"
식용으로 낳은 알 얘기지만, 아무렴 어떠랴.
"이 역겨운 인간 놈들---!!"
바닥에 떨어진 와이번이 포효를 내지르며 땅을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코카트리스와 별반 다를게 없었다.
"샥스 말대로네."
코카트리스 하나가 변종으로 진화해서 와이번이 됐다고 하더니, 역시 날개를 잃자마자 대가리 굴리는 게 닭대가리 수준이다.
"얘들아! 와이번 껍질 벗겨서 튀겨먹자꾸나!"
저주받은 와이번의 노란 눈이 흠칫거렸고, 나는 그 틈을 노려 메이스를 높이 치켜들었다.
"죽음의 기사들은 페일 라이더들을 견제해! 모험가들은 사격 개시--!"
모험가들이 와이번을 향해 신성력이 담긴 화살을 퍼붓기 시작했다.
캬아아악!
와이번은 비명을 지르며 땅을 박차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화살을 몸으로 받아내며 달려오는 기색은 코카트리스. 페일 라이더와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한 놈이라도 더 데려가겠다는 의지가 눈에 엿보였다. 분명 마석을 통한 인연소환 부활을 믿고 깝치는 것일 터.
"어디서 시건방지게."
나는 발을 앞으로 크게 구르며 상체를 뒤로 넘겼다.
"땅에 발을 디뎠으면 흙먼지 좀 먹어봐야지!!"
시야가 붉어진다. 전신의 근육에 에너지가 폭발하기 시작한다.
"네놈의 모가지를 꺾어 얼큰한 닭개장으로 만들어주마!!"
나는 머리 뒤로 뻗은 메이스를 힘차게 앞으로 집어던졌다.
정면으로 달려오니, 정면으로 던졌다.
* * *
〈그 시각, 스피카 성 남작령〉.
가격도 저렴한 것이 성능도 좋고 재질도 뛰어나다. 비록 그 원재료의 출처는 오리무중이었으나, 사람들은 스타킹의 마력에 이미 푹 빠져버렸다.
스피카 성의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안에 받쳐 입기 시작했다. 다리에 자신이 있는 여인들의 치마는 아주 조금씩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고, 보온성만을 생각하는 노인들은 바지 안에 알음알음 챙겨 입었다.
그리하여, 스타킹은 스피카 성 내의 누구나 착용하는 의복이 되었다. 당장 스피카 성-남작령의 영주인 버지나니야 비르고 남작도 스타킹을 매일같이 바꿔 입으며 스타킹에 대한 애정을 과시했다.
- 그래도 상단에서 스타킹 판매하는 거, 다 그 짓 하려고 하는 거 아니야?
몇몇 사람들은 상단에서 스타킹을 판매하는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꼬집었다.
그들이 스타킹을 통해 섹스 어필을 하는 것을 넘어서, 실제로 술집 겸 여관의 지하에서 무언가 음습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지 지적하는 것이다.
- 돈 안 받잖아?
- 그게 다 노림수가 있는 거라니까?
- 진상짓 하다가 출입금지 당해놓고는 괜히 심통 부리기는.
잡화점, 그리고 술집을 겸하고 있는 두 채의 건물 〈아발론〉의 존재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대부분 아발론에 자리를 잡은 상단의 도움을 받아 추운 밤을 하반신만이라도 따뜻하게 지새울 수 있었거나, 혹은 스타킹 제작자의 본래 의도에 따라 밤을 뜨겁게 보낼 수 있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이 스피카 성 내에 국한되었다는 것.
그들은 모두 스타킹의 효능에 대해 알고 있으니 괜찮았지만, 스타킹을 처음 보는 이들은 충격과 공포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아니, 여인들의 치마가 무릎 위까지 올라간다고...?"
"저, 저저, 저저저저!! 사람이 귀에 토끼처럼...!"
"여신이시여.... 설마 저 엉덩이에 있는 꼬리가 제가 생각하는 그것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본래 며칠도 전에 스피카 성에 도착하기로 한 성녀의 특사단은 스피카 성에 도착하자마자 혼란에 빠졌다.
몸에 딱 달라붙는 검고 얇은 옷은 어디까지나 치마 아래에 받쳐 입는 물건이라 알려졌지만, 남들의 눈을 신경쓰지 않는 몇몇 중년 남성들이 스타킹만 아래에 신고 고간부만 대충 겉옷을 묶어둔 채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제작자가 봤다면 천인공노할 노릇이라며 자신의 눈을 찌를 행위.
동시에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여신교의 교도들로서는 문란하기 짝이 없는 행위였다.
"성녀님! 이건 도대체...!"
"......."
마차에 탄 성녀는 바깥의 혼란에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저 치마 아래에 받쳐 입은 검은 스타킹을 보고 '사제복 아래에 입으면 어떠려나'하는 심심한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저게 그렇게 우수한 방어구란 말인가? 허."
"...말하지 마세요."
"입냄새가 나서 그런가? 미안하군."
"아니, 입냄새가 문제가 아니라."
성녀는 맞은 편에 앉은 거구의 남자에 온 신경이 곤두 서있었다.
용사 오크.
성검 사용자 오크.
성검 〈타우러스〉의 주인인 '마물'.
다소 인간들의 삶에 익숙해보이는 걸로 보이는 오크는 다행히 자신의 정체를 숨겨야 한다는 걸 정확히 인지하고 있으나, 들켜도 상관없다는 듯 대담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성녀님께 무례하다. 사과하시오, ...크."
"미안하오. 내가 여성과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어서 경우를 잘 모르오. 사과하리다."
"...크흠."
덕분에 성녀 뿐만 아니라 함께 마차에 탄 기사단장도 몸이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차라리 막무가내로 나선다면 기사단장도 반발을 할 수 있었으나, 자신보다 강한 사내가 저자세로 나오니 뭐라 하기가 애매했다.
"성녀님. 정말로 괜찮은 겁니까?"
"...어쩌겠어요. 이렇게 됐는데."
기사단장은 믿을만한 존재다. 그래서 기사단장은 용사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다. 기사단장에게 까지 숨겼다간 성녀는 배가 쓰려서 매일매일 고통받을 것이다.
"성녀님. 아무리 생각해도 옼...으가 아닌 것 같습니다. "
"...그러니까 용사가 된 거겠죠. 사람들 중에서도 마왕군의 편에 서는 미친 놈들이 있는데, 그 반대라고 없겠어요."
끼이익.
마차는 스피카 성의 한 가운데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 순간.
찌릿.
성녀는 자신의 성흔이 반짝이는 것을 느꼈다. 어딘가에 마물의, 마족의 기운이 강렬히 느껴지기 시작했다.
"......."
"왜 그러시오?"
성녀는 한참동안 눈앞의 오크 용사를 노려봐야 했다.
"메어리 양, 곧 성녀님이 오신다고 하던데 함께 인사를 드리지 않겠습니까?"
"...그거 좋겠네요."
========== 작품 후기 ==========
의도치 않은 트랄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