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5
<-- 48일차 -->
때가 되었다.
나는 부하들에게 이너 아머를 지급했고, 날짜가 바뀌기만을 기다렸다. 선봉부대의 뒤에 지상조와 지하조가 각각 나뉘어 포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이제 역공을 펼칠 때가 된 것이다.
"모두 들어라."
나는 발을 쿵쿵 굴렀다.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울림은 군단의 전사들을 고양시키는 마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휴식을 취할 것이다."
내 말에 모두가 서로를 처다보며 웃었다. 휴식이 무엇인지 다들 알고 있는만큼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무기를 들어올렸다.
"길게 말하지 않는다. 작전대로만 하면 우리는 이길 것이다. 분노의 군단이 가진 힘을 똑똑히 보여준 다음, 승리를 거머쥐는 것이다."
싸워서 이기는 것 만큼 달콤한 보상이 또 어디에 있으랴.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라. 부활할 수 있으니. 하지만 가급적이면 죽지 말아줬으면 좋겠구나. 너희들 부활시키는데 마석을 쓰면, 그만큼 마액을 만들어내지 못하거든."
누군가 쿡쿡 소리를 내며 웃었다. 현실적인 문제임과 동시에, 부하들이 무엇보다도 본인의 생존을 우선시하게 하는 중요한 사안이다.
[30초 뒤에 문이 열립니다.]
"30초 뒤에 양방향으로 열린다!!"
샤이탄이 신호를 보냈고, 나는 그걸 모두에게 알렸다. 선봉에 선 죽음의 기사들은 투레질을 하며 언제든지 달려나갈듯 콧김을 내뿜고 있었다.
듀라한과 유니콘. 언뜻 어울리지 않는 조합의 마물들은 마물합성을 통해 하나의 짝이 되었다.
할파스 군단이 페일 라이더 부대를 보내 우리 군단을 급습했듯이, 나 또한 죽음의 기사 부대를 보내 전장을 쑥대밭으로 만들 것이다.
그 시작을 알리는 축포가 당연히 필요할 터. 나는 미리 챙겨온 넓다란 방패를 앞으로 쭉 뻗었다. 사람 두 명은 족히 가릴 방패는 샤이탄의 마법에 의해 보호막까지 씌워져 있었다.
쿵, 쿵쿵.
나는 포털의 바로 앞에 섰다. 죽음의 기사들이 무사히 돌격할 수 있도록, 나는 그 길을 잘 닦아놓아야 했다.
〈알림〉 포털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 방향: 양방향(〈=〉)
"우오오오오!!"
나는 방패를 앞에 들고 선두에 서서 포털로 뛰어들었다. 세상이 흐리게 변했고, 나는 나를 맞이하는 엄청난 마물들의 무리에 웃음이 나왔다.
'똑같은 생각을 한 건가?'
포털의 앞에는 스켈레톤 무리가 한 가득 자리를 잡고 있었다. 경계병인지, 아니면 나처럼 공격을 하려고 한 건지는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들은 우리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는 것.
"축포를 쏠 필요도 없겠네! 가라----!!"
히히힝----!!
내 옆으로 죽음의 기사들이 말발굽 소리를 내며 앞으로 질주했다.
키아아아악!!
선두에는 검은 마갑을 착용한 유니콘과 배틀 드레스의 듀라한-암두시아스와 키메리에스 페어, 던전 주인 둘이 하나가 되어 달리는 질주는 전차가 달려나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돌진 뒤에는 머리가 '달린' 듀라한들이 각자의 유니콘에 올라타 달리고 있었다.
카가가각!!
흑골의 스켈레톤들이 황급히 무기를 들어올리며 막아섰다. 하지만 이미 돌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퍼억, 파사삭!
유니콘이 발을 들어올려 늑골을 걷어찼다. 듀라한이 검을 휘둘러 척추를 갈라버렸다. 그리고 유니콘이 다시 뿔을 휘둘러 두개골을 꿰뚫는다. 스켈레톤들은 죽음의 기사들에 의해 맥없이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너무 약해.'
예상대로 약골이었다. 승리에 도취되기에는 너무나도 이르다. 하지만 설령 저것들이 잡졸이라고 해도, 기세를 타기 위해서는 화려하게 날뛰어야 했다.
"유린하라----!!"
할파스 던전의 지상 1층은 샥스에게 들은대로, 종합운동장 넓이의 평지였다. 즉, 던전의 다른 곳과 달리 기병이 날뛰기 좋은 장소였다.
다그닥, 다그닥!!
유니콘들이 앞으로 돌진했다. 선두의 키&암 페어가 움직이는 대로 죽음의 기사들은 기수를 돌렸다.
까아아악!!
맞은 편에서 우리의 존재를 눈치챈 적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운명의 장난일까. 마침 가장 먼저 달려오는 적들은 역병의 기수, 페일 라이더였다.
페일 라이더. 무엇이든 잘라내는 절삭력의 낫을 들고 달리는 죽음의 기수.
흐아아아!
키&암 페어는 페일 라이더를 향해 거대한 무기를 들어올렸다. 듀라한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검과 달리, 기병 돌격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석재 기병창이었다.
스톤골렘을 슬라임을 이용해 깎아낸 석재 랜스. 듀라한들은 모두 랜스를 손에 들고 질주했다. 페일 라이더들은 하나같이 낫을 치켜올리며 우리 죽음의 기사들을 노렸다.
"라스으으으으!!"
치킨게임을 하듯 서로를 향해 달려가던 죽음의 기사와 페일 라이더들은 한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를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기병창과 낫이 맞부딪혔다. 날카롭게 벼려진 낫은 기병창을 갈라버릴 듯 파고들었으나, 고작 5 cm 정도 날을 박아넣었을 뿐이었다.
'단순한 기병창이 아니지.'
기병창의 겉에는 검은색 옷감 같은 것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던전을 넘어오기 전, 조합장으로부터 받아온 폐기 옷감을 기병창에 붙였다.
카각!
또다른 페일 라이더의 낫이 마침 기병창의 검은 옷감 부분을 건드렸다. 날카롭게 베이기는 커녕, 오히려 단단한 갑옷이라도 된 듯 낫을 튕겨냈다.
?!?!
페일 라이더들이 당황하는게 한 눈에 보였다. 나는 방패를 들고 전장을 주시하며, 목청껏 소리질렀다.
"이 구역은 우리가 접수한다---!!"
먹히기 싫으면 내려와야 할 것이다.
할파스.
* * *
"귀찮구나. 시시해서 하품이 다 나올 정도다."
할파스는 둥지의 가장 높은 곳에서 포털을 타고 넘어온 안드라스의 하수인들을 보며 탄식했다.
"고작 저 정도의 힘에 샥스까지 패배했다는 말인가?"
푸르카스 따위가 죽은 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샥스가 패배한 것은 할파스로서도 다소 의외였다.
"페일 라이더와 비슷한 놈들이다. 우두머리 하나 말고는 다 고만고만한 놈들이야. 그런데 샥스가 저런 놈들에게 인질로 잡힌 건가?"
할파스는 지상 1층에서 날뛰기 시작하는 적의 존재에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직접 내려가기는 귀찮지만, 이대로 놔뒀다간 둥지를 넘볼 게 분명했다.
"페넥스 놈이 귀찮게 굴어서 안 그래도 짜증나는데...."
"제게 맡겨주시죠."
어둠 속에서 노란 삼백안이 반짝였다.
"보란듯이 먹어치우고 오겠습니다."
"가급적이면 생포할 수 있도록 해라. 인질을 잡고, 안드라스를 겁박할 것이니."
할파스는 고기를 씹어삼키며 이죽거렸다.
"안드라스와 그레모리를 제외하고 모두 다 페닉스 놈의 던전에 처박아버릴 것이다."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노란 삼백안의 마물은 조용히 사라졌다. 할파스는 시스템을 통해 전해지는 경고를 무시한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고작 63위 주제에 내게 반격을 하려고 하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할파스는 던전 밖에서 잡아온 기사의 시체를 씹어삼키며, 부하들이 승전보를 가져오기를 기다렸다.
* * *
죽음의 기사와 페일 라이더의 격돌은 우리가 승리했다. 페일 라이더가 자랑하는 속도는 유니콘들이 간신히 따라잡을 수 있었고, 그들이 또 자랑하는 절삭력은 기병창을 온전히 잘라내지 못했다.
기병대는 우리의 승리. 그렇다면 이제 보병들을 움직여 적의 주력을 꺾어야 할 때.
"우오오오!!"
나는 전력을 다해 방패를 앞으로 내던졌다. 흑골 스켈레톤들은 방패에 휩쓸려 전신이 박살났다.
"레인져들은 원거리에서 사격 개시!!"
인간 모험가들이 석궁과 활을 들고 스켈레톤들을 저격했다. 가고일 돌조각을 화살촉으로 삼아 그다지 살상력은 없었지만, 모험가들 사이에는 언데드들의 하드 카운터나 다름없는 존재가 있었다.
"신이시여!"
주변의 여성 모험가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미모의 사제, 기네비어가 인간 모험가들에게 축복을 걸었다. 마물들에게 극상성을 자랑하는 신성력인 만큼, 모험가들의 사격은 살상력이 배가 되었다.
파바바박!!
모험가들의 화살이 스켈레톤 무리에게 빗발치기 시작했다. 나는 남은 방패를 들어올려 한 번 더 앞으로 집어던졌다.
쿠드득!
스켈레톤 세 마리가 방패에 깔려 뼈가 분질러졌다. 나는 한걸음에 달려가 방패를 발로 찍어버렸다.
"할파스, 나와라! 쫄았냐?!"
쿵, 쿵쿵쿵!
나는 방패의 위에서 널뛰기를 하듯 뛰며 할파스를 도발했다. 얼굴에서 붉게 타오르는 문신은 주변에 오라를 뿌리며 군단 전체로 퍼져나가 사기를 북돋았다.
"크흠, 어쩔 수 없군. 이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네가 나오지 않으면 내가 말하는 수밖에!"
나는 천장을 향해 크게 심호흡을 하고 소리질렀다.
"안드라스는 내가 먹어치웠다!! 네 안드라스 쩔더라!!"
순간, 던전 전체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진득한 살기와 죽음의 기운이 물씬 풍겼다.
"......어우."
할파스가 히스테리를 부린 것이 틀림없다. 샥스의 기운과 조금 비슷한 듯 하지만 질적으로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기세만으로 죽겠다 싶을 정도였다.
"...흐흐, 그런데 어쩌냐!"
나는 긴장으로 떨리는 몸을 풀기 위해 일부러라도 소리를 높였다.
"안드라스 상대로 내가 알까지 낳게 했는데!!"
구구구구.
천장이 열렸다. 족히 5m는 될 천장에서 왠 괴상한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속하구나.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지껄이는 것이냐."
"네가 할파스냐?"
"아니. 할파스 님은 고작 너같은 약골을 상대로 내려오시지 않는다. 나는 할파스 님의 최측근-"
"아님 꺼져. 나는 할파스 잡으러 왔으니까."
"몹시도 시건방진 놈이군. 할파스 님의 귀를 더럽힐 필요도 없다. 너는 내가 죽여주마."
"크흑, 너는 내가 죽여주마란다. 아주 대-단한 놈이 납시셨어."
나는 천장을 날아다니는 노란 삼백안의 적에게 중지를 들어올렸다.
"와이번같은 놈이 까마귀 밑에서 일하고 있다니, 쪽팔리지도 않냐?"
"어디서 입을 함부로 놀리느냐!"
"할파스 던전에서, 이 머저리 놈아! 지네 던전에서 함부로 입을 놀리시는데 그것도 모르다니, 이 멍청한 놈!"
나는 문신의 힘을 활성화하며 두 팔을 쩍 벌렸다.
"내려와라, 할파스! 지금 내려오면 봐준다! 만약 네가 내려오지 않는다면...!"
나는 천장을 삿대질하며 크게 소리쳤다.
"안드라스는 인간에 의해 박히게 되는 꼴을 보게 될 것이다---!!"
안드라스를 인간박이로 만들겠다고 하는데,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 * *
"????"
지금 잘못 들은 것인가.
막 잠에 들려던 할파스는 오크가 씨부린 소리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오크가 되는대로 지껄이는 소리일 겁니다."
"방금 안드라스를 자기가 먹어치우고 인간에게 박게 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안드라스 종의 ★★짜리를 죽여서 먹어치웠다는 거겠죠. 인간에게 박게 한다는 건...그냥 군단장님을 현혹시키려는 술책입니다."
할파스의 옆에 앉은 금발의 여인은 단호한 목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지극히 상식 선에서 생각하자면 그 말이 맞는 말이었다.
"실제로 안드라스를 죽였겠습니까? 안드라스가 군단장님을 욕보이기 위해 스스로의 면을 깎으면서까지 하는 기만책입니다."
"아닌데. 저건 분명 남의 여자 자기가 먹어치웠다고 자랑하는 개새끼들의 말인 것 같은데. 안드라스를 먹었다고 했잖냐. 그게 성적으로 먹었다는 거 아니냐?"
"...설마 그럴리가요."
금발 여인은 등에서 식은땀이 다 흘렀다. 할파스의 표정은 점점 뒤틀리기 시작했고, 금발 여인은 어떻게든 할파스를 진정시켜야했다.
"오크는 꽤 강해보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군단장님께서 나설 만한 수준은 아닙니다.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인장이 나서는 건 그다지 좋지 않지만...뭐 좋다. 저런 저열한 도발을 하는 놈에게는 네가 딱이지."
"...예.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금발 여인은 속으로 울컥했지만 참아냈다. 자신이 이런 모욕을 들을만한 존재는 아니건만, 현실은 이보다도 더한 모욕을 듣게 된 처지였다.
"으헤헿, 나는 한숨 자고 있을테니 빨리 저 연놈들을 처리하거라. 노랑이도 내려갔으니, 파랑이와 빨강이도 데려가서 전부 없애버리거라."
"총력전입니까? 그랬다가는 페닉스 쪽 세력과의 전쟁에서...."
"전쟁을 무사히 치를 수 있도록, 거슬리는 놈들을 전부 죽이라는 말이다."
할파스는 흉흉한 눈을 빛내며 으르렁거렸다.
"감히 나의 것을 욕보인 놈을 가만히 보고 있을 생각이냐?"
"...명하신대로 움직이겠습니다."
할파스는 둥지에 고개를 묻었다. 금발 여인은 곧장 자리를 떠났다.
던전의 2층. 지상 1층과는 분리되어 있으며, 올라오는 층계 곳곳마다 마법진과 마물들이 배치되어 있는 구조.
그 꼭대기의 둥지에는 할파스가 있고, 바로 아래층은 여인-인장-의 구역이었다. 금발 여인은 한숨과 함께 자신의 구역으로 내려가 던전의 마물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할파스 님의 명령이다. 총동원. 적을...유린하라. 저 배불뚝이 오크만 빼고."
던전이 들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