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2
환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환상이 아니라면? 만약 이 세계가 진짜로 내가 포르네우스와 결혼한 세계고, 인간박이인 내가 갑자기 끼어든 세계라면?
"......에라 모르겠다."
인생은 내로남불. 나는 이기적인 놈이라 내 좋을 대로 해석할 뿐이다. 이 세계는 현실같은 환상인 것이다.
하지만 포르네우스와 내가 낳은 딸을 본 순간, 나는 이게 현실이어도 좋다고 순간적으로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리만큼 음심은 전혀 들지 않았지만, 내 딸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어...그러니까...."
내 시스템으로는 확인이 되지 않았다. 확인하려면 성감대를 건드려야 하는데, 손을 대고 싶지는 않았다. 인간에 슬라임에 유니콘에 갈치까지 건드린 내 쥬니어가 본능적으로 그건 아니라고 외치고 있다.
"이름이?"
"......아직은 없습니다만, 굳이 지칭을 하자면 그렇네요."
딸은 포르네우스와 나를 슬쩍 쳐다보고는 살포시 웃으며 자신을 가리켰다.
"포르네라스 어떻습니까?"
"오우야."
마치 나의 정체를 꿰뚫어보는 듯한 이름이다. 딸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위에 환상처럼 흔들거리는 ★ 6개가 환상이 아니란 말인가? 정말 이 아이는 태생이 6성이라는 말인가?
'트랄도 6성까지 성장은 가능하지만 태생이 5성인데.'
신은 어찌하여 6성인 딸을 포르네우스를 통해 낳게 했단 말인가. 운명의 장난에 나는 피눈물이 났다.
"...네라스로 하자꾸나. 포르네라스로 하면 조금 포르네우스 딸 같으니까."
"충분히 이해합니다."
"...어떻게?"
"그야 알에 있으면서 들었으니까요."
나의 딸, 네라스는 짖궂은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아래로 숙였다. 어쩐지 그냥 나오는 알 치고는 너무 급하게 나온다 싶었더니, 알에서부터 이미 의지를 가지고 살려고 발버둥 치는 게 맞았다.
"......불가항력이었다?"
"괜찮습니다.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후훗."
네라스는 입을 가리며 웃었다. 손동작 하나하나가 기품이 흘러넘쳤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뭔가 미묘했다.
"네라스, 네 생모는 누구지?"
"낳은 건 포르네우스입니다."
"그런데 왜...."
분명 외형적 특징은 포르네우스의 은갈치-해룡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지느러미를 형상화한 드레스라거나, 귓바퀴와 머리에 달린 조개 모양 장식은 포르네우스가 낳은 아이임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었다.
"너 왜 가슴이 그래?"
"훗."
네라스는 고개를 치켜들며 가슴을 활짝 열어젖혔다. 나는 트랄의 눈을 가렸다. 입으로는 절로 혀가 내둘러졌다.
"...거의 루나 급인데?"
"어느 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분도 상당한 듯 하군요. 아버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신 분...후훗."
"루나가 대단하기는 하지만 너도 대단하다는 얘기다. ...어떻게 포르네우스의 몸에서 네 스펙이 나오는 거지."
인간형 포르네우스의 머리통 두 개가 달려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네라스는 거대했다.
"형제여, 그만 손을 치워주시게."
"트랄, 아무리 너라도 쟤는 안 된다."
"형제의 딸은 곧 나의 딸. 걱정마시게."
"아빠가 오빠가 되고 오빠가 자기가 되는 거 모르냐?"
"형제여. 방금 그건 형제의 말을 빌려 '개소리'라고 하는 것이다."
"......."
나는 말문이 막혔다. 네라스라는 존재 때문에 트랄을 잠시나마 의심한 내가 어리석었다. 내가 어떻게 트랄을 의심할 수 있단 말인가.
"미안하다. 네가 남자만 아니었으면 믿는데."
"그런 거라면 이해하지. 형제여, 그보다 이제 어쩔 것인가."
트랄은 나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결단을 촉구하는 눈빛이었다. 네라스 또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래, 돌아가야지. 돌아가야 하는데."
자꾸만 돌아가기에 미련이 남는다. 트랄이 살아있고, 예쁜 딸이 옆에 있다. 포르네우스가 저렇게 있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곳에서 잠시 있어도 되는 거 아닐까.
"아오 씨, 자꾸 눈에 밟히네. ...모르겠다. 무책임하게 싸지르고 도망가는 것 같아서 미안하다, 네라스야."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빛을 보게 해주신 것 만으로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네라스는 나를 향해 허리를 꾸뻑 숙였다. 나는 너무나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어떻게 내가 있는 곳으로 데려갈 방법은 없었다.
"트랄, 엄마 역할 잘 해라. 잘 키워."
"물론. 믿고 맏기시게, 형제여."
"...하아. 진짜 머리 복잡하게 됐네."
포르네우스를 굴복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알을 낳게 했더니 6성 초특급 미녀 딸이 태어나 트랄에게 엄마라고 부르더라.
"......이런 세계, 나는 감당하기 어렵구만."
깽판이란 깽판은 다 쳐놓고 도망치는 격이라, 원래 이 곳의 나에게 몹시 미안해졌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포르네우스에게 가지고 있는 분노가 아직 식지 않았고, 아무리 예쁜 딸이 있다고 하더라도 포르네우스와 결혼 생활을 하고 싶지는 않다.
은갈치인게 문제가 아니다.
'그냥 포르네우스인 것이 문제지.'
아직 내게는 추가 임무가 두 개나 남아있다. 포르네우스는 완전히 굴복하지 않았고, ##을 이기는 건 누군지 불보듯 뻔했다.
'포르네우스 잡고 트랄 이기는 거라고? 무리지.'
나는 나의 한계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주어진 상황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할파스 군단이랑 전쟁 중인데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은 없다.'
이미 많은 시간을 지체했다. 물론 환상이니 실제로 깨어나면 그리 많은 시간은 지나가지 않겠지만, 나는 이제 할파스 군단을 어떻게 쓰러뜨릴 지 고민을 해야했다.
"크흠. 그럼 나는 간다."
"형제여. 나는 그대가 어디에 어떤 식으로 있든 응원하겠네."
트랄은 나를 응원했다.
"다시 뵙기를 바랍니다, 아버님."
네라스는 내게 인사했다. 나도 둘에게 손을 흔든 뒤, 기절한 포르네우스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미안했다. 크흠. 나도 몰랐지."
행복한 결혼 생활을 망쳐버린 것이 미안하기는 했다. 하지만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지 않고 제 힘으로만 사용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다음 생에는 좋은 엄마로 태어나길.'
나는 진심으로 포르네우스가 잘 되기를 기도했다. 자기만족이고 병주고 약주는 셈이지만, 결국에 나는 나의 군단이 제일 중요한 사람이다.
'색욕의 군단이잖아. 결국에는 내 적이나 마찬가지지.'
만약 포르네우스가 살아있어서 색욕의 군단을 이끌고 있다?
'그럼 한 번 더 똑같이 저지르는 거지.'
나는 탈출 스위치를 눌렀다.
"솔로몬은 빅자지!!"
〈알림〉 퀘스트가 끝났습니다.
세상이 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네라스도, 트랄도 물거품처럼 흩어지고 말았다.
아, 다행이다.
환상이어서.
만약 진짜 또다른 현실에 떨어진 거였으면, 나는 정말 양심의 가책 때문에 괴로워했을 지도 모른다.
내가 키우지도 않을 자식을 멋대고 낳고 버린 셈이 될 테니.
* * *
"으허어어억!!"
나는 눈을 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확인해야했다.
"샤이탄......?"
나는 내 주변의 광경에 숨이 턱 막혔다. 주지육림이라고 표현해도 모자랄 정도의 상황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게 도대체 뭐지?"
누가 시선만 보내도 임신하게 되는 광선이라도 쏜 것인가.
아니면 군단의 모두가 임산부 코스프레를 하는게 유행이라도 탄 것인가.
어떻게 하나같이 모두가 배를 부풀리고 있었다. 군단 내의 90%에 해당하는 여성들이 하나같이 전부 다!
"샤이탄, 이건 도대체...?"
"고생하셨습니다, 주인님."
샤이탄은 늘어난 배를 쓰다듬으며 게슴츠레 웃었다. 인장이 더 커진 듯 했고, 뿔도 살짝 자라 있는 듯 했다.
"주인님이 흡수하지 못한 마나는 저희가 흡수했습니다. 여기로."
"...어떻게?"
"채양보음?"
"...나 혹시 기절했었냐? 의식 잃은 지 얼마나 됐냐."
"기절하셨고, 이곳에 들어온 지 24시간이 지났습니다. 바깥은 물론 8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만...."
"......."
환상의 세계가 차라리 더 현실 같았다.
차라리 내가 방금 있던 곳이 사실은 포르네우스와 결혼한 평행세계고, 내가 그곳의 나에 빙의하여 군단 전체를 학살하는 깽판을 부렸다가, 포르네우스에게 맘토라레를 시전하고 네라스라는 딸을 낳게 한 다음, 트랄이 엄마라는 말에 충격을 받고 뇌정지가 와서 솔로몬 찬양을 읊었던 상황이 더 현실 같았다.
그도 그럴게.
"나...도대체 몇 명과 한 거냐."
"정확히 169명입니다. 저희들이 임신한 건 아니고...최상급마석의 마나 중 주인님께서 수용하지 못한 것들을 저희가 뱃속에 담은 겁니다."
"주인님, 묻지도 않고 해서 죄송해요. 하지만 주인님이 너무 열을 많이 흘리셔서...."
"......하하, 하하하."
169명의 여인과 떡을 친 기억, 포르네우스와의 정사로 대체되었다.
"...내 경험 돌려줘---!!!"
피눈물이 난다는 게 이런 심정인 건가.
* * *
170P를 했건 말건, 나는 일단 내게 주어진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파악해야했다. 그리고 두루 파악해본 결과, 나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어디 최상급 마석 남는 거 없을까?"
최상급 마석 하나로 나는 레벨이 무려 86까지 올랐다. 87, 88까지 오를 수 있기도 했지만, 그만큼의 분량은 내가 아닌 다른 부하들에게 분배되었다.
"아쉽지만 없습니다."
"씁. 마왕님께 지원 요청해볼까? 최상급 마석 혹시 남는 거 있는지."
"마왕군에서도 15개 정도밖에 없던 물건입니다. 마정석이나 환생결정을 만드는 원료라 지원은 안 될 겁니다."
"씁. 진짜 아쉽네."
몇 개만 더 있었으면 천하를 통일할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진심으로 아쉬웠다. 괜히 마석이 최상급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게 아니었다.
"그래서 다들 강해지기는 강해졌냐?"
"평균으로 치면 1.5레벨 정도 올랐다고 보시면 됩니다."
169명의 여성들의 평균레벨이 1.5레벨 상승한 택이었다. 심지어 개중에는 혼자서 5~6레벨 가량 올라간 이도 있었다.
"현재 누가 얼마나 상승했는지는 전수조사 중에 있습니다. 그만큼 주인님의 정을 많이 받았다는 뜻이기도 하죠."
"......혹시 내가 다른 애들 기억을 보거나 할 수 는 없을까? 내가 어떻게 169명의 배를 부풀게 만들었는지 꼭 보고 싶은데."
"방법은 찾아보겠습니다. 그보다 주인님. 환상 속 세계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주시겠습니까?"
샤이탄은 내가 겪은 환상의 세계에 대해 관심이 컸다. 나는 단서를 찾기 위해 내가 저지른 모든 행위에 대해 소상히 밝혔다.
"...과연."
"뭐 짚이는 부분이라도 있냐?"
"태몽 아니겠습니까?"
"......예? 뭐라고? 태몽? 샤이탄?"
"주인님은 강해지시고, 6성이나 되는 자식을 낳으셨지요. 그럼 태몽이 분명합니다. 자, 어서 제게 파종을, 아흑?!"
"좀."
륜이 샤이탄의 꼬리 끝을 붙잡았다. 샤이탄은 순식간에 무력화되어 자리에 주저앉았다. 륜의 배는 이전과 똑같이 매끈했다.
"륜, 너는 혹시 안 했냐? 그런 거라면 정말 다-"
"벌써 다 소화시켰어요. 엘프가 마나 다루는 건 뛰어나잖아요. 히힛."
"...그래. 다행이구나."
륜도 루나도 고간에 묻은 슬라임 점액 정조대를 치웠다. 둘 뿐만 아니라 다른 몇몇 이들도 배가 원래대로 돌아와있었고, 하나같이 레벨이 높아져 있었다.
"...어쨌든 군단의 전력 강화를 하는 좋은 방법이 생긴 건 좋은데 말이야, 참 그렇군."
내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마나를 정액으로 바꾸어 안에 사정하고, 상대는 체내의 마나를 흡수하여 자신의 힘으로 만든다.
륜, 에일라, 샥스, 키메리에스 등을 비롯한 169명의 여인들과 한 기억만 있다면 정말 행복하겠다 싶건만, 유감스럽게도 그 모든 행위는 포르네우스 환상으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다음 번에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의식을 차린 상태에서 움직이리라.
"...샤이탄아. 혹시 이 중에 파종이 이루어진 아이들은 있느냐?"
"아뇨. 기존에 파종이 이루어진 이들 말고는 제가 조치를 취했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만약 파종을 원하신다면 제가-"
"아니. 됐다. 그러지 마라. 책임지지 못할 자식은 낳는 게 아니니."
나는 몸을 일으켰다. 86레벨로 성장해서 그런지 아직 체력이 쌩쌩했다.
"간부급만 남고 나머지는 전부 자기 위치로 이동. 남은 간부들은...."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바깥의 시간이 이제 8시간 정도 지났다고 했으니, 이곳은 약 한 달이 지난 셈이었다.
"훈련을 좀 하도록 하지."
침대에서의 전투가 아니라, 실제 전장에서의 전투를.
"바깥에서 하루가 지나면 바로 할파스 모가지 꺾으러 간다."
우리는 충분히 강해졌다.
========== 작품 후기 ==========
네라스 쟝은 1회용 캐는 아니에요
미리 선공개 같은 느낌으로 등장했습니다
다음화부터는 드디어 할파스 군단이랑 전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