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3
〈쿰처쿠 척의 던전.〉
할파스 군단의 공격을 처음 받았을 때.
나는 루나가 가진 여왕의 권위를 이용해, 엘프들을 총동원하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그를 위해서는 우선 엘프들에게 루나가 여왕이라는 증거를 보여야했고, 그 증거는 오직 던전 안에서만 보여줄 수 있는 제약이 있었다.
- 그렇다면 여왕의 증거를 볼 수 있게 직접 데려오면 되는 것 아닌가?
...라는 억지에 가까운 주장은 아주 쉽게 먹혀들었다.
우리는 가만히 있을지언정, 이미 여왕의 존재를 인지하고 성행위의 즐거움을 깨달은 반반엘프들을 엘프의 숲에 투입시켰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감귤, 만다린.
"저 솔라입니다."
"미안하다. 감귤맛이라서 잠시 헷갈렸다."
"...정 부르고 싶으시면 만다린이라고 부르셔도 딱히 싫다는 건 아닌데."
만다린은 볼을 긁적이며 난감하게 웃었다.
이미 던전에 들어온 순간부터 다크 엘프가 된 그녀는 초코맛으로 바뀌었지만, 던전 밖으로 나가면 다시 귤맛을 되찾으리라.
"안에 있는 내 손자의 씨는 잘 익어가고 있느냐?"
"...아마도요."
솔라 만다린은 고개를 푹 숙이며 얼굴을 붉혔다.
한 생명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에 상당히 기쁜 듯 했고, 그 상대가 나와 똑 닮은 갤러해드라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오자마자 갤러해드를 찾다니, 그렇게 좋더냐?"
"루나가 당신께 빠져있는 이유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하긴. 내가 좀 잘생기긴 했지."
"......아무튼 갤러해드 님과 다시 만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솔라는 허리까지 꾸벅 숙이며 내게 예를 표했다. 솔라가 이 던전에 와서 반반엘프가 되어 씨를 받아간 것도 벌써 열흘이 되었으니, 이제 안에 있는 씨가 발아하려면 대략 20일 정도가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래서 왜 왔냐. 그것도 혼자서."
나는 솔라에게 다른 엘프를 데려오면 더욱 즐겁게 해주겠다고 알렸다. 하지만 솔라는 다른 엘프들은 두고 혼자서만 던전을 찾았다.
"다른 엘프들은 아직 이곳까지 오는 것에 허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여왕님이 계신 곳이라고 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상황이 변했다. 말해도 돼. 내가 성급하고 감질맛나서 너희들을 기다리기 정말 난감하구나."
"그것 때문에 온 겁니다만, 부디 듣고 노여워하지 말아주십시오."
솔라는 허리까지 숙이며 내게 부탁했다.
"부디 갤러해드가 취하는 엘프는 저와 다른 셋으로 끝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오호. 오호?"
솔라의 목소리에서 미묘한 독점욕이 느껴졌다. 그리고 어디선가 비슷한 상황을 보았던 데자뷰가 느껴졌다.
'마을을 습격했을 때 릴리가 딱 저런 상태였지.'
내게 잘 보여서 권력을 가지려고 했던 당시의 모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솔라의 눈빛이 딱 그 때의 릴리와 비슷했다.
"어디 한 번 계속 말해보거라. 너의 계획을."
"...예. 그리고 나머지 다른 엘프들은 다른 오크 분들과 짝을 짓게 해주십시오."
"흐흐, 내가 너의 생각을 알아내어보마."
나는 솔라의 귀를 붙잡고 그녀를 일으켜세웠다. 성감대가 만져졌음에도 솔라의 눈빛은 당돌했다.
"여왕의 자리는 이미 정해져있으니, 그 아래의 권력을 노리는게야. 성기사인 갤러해드의 파트너로서, 다른 엘프들보다 훨씬 높은 권위에 서려는 거지."
"정답입니다."
솔라는 비릿하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루나 여왕님은 신의 선택을 받아 여왕이 되셨습니다. 이제 엘프들은 이전의 수평적 관계에서 벗어나, 여왕의 명령 이하 수직적인 위계관계를 구축하게 될 것입니다."
"여왕을 보필할 가신들이 필요하겠지. 여왕이 명령만 내리면 인간들처럼 신분제, 계급제도 도입할 수 있을테고."
솔라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조금 더 장난을 쳐볼까.
"네 아이디어로부터 비롯된 제안이니 내가 혜안을 내려주마. 무엇을 원하느냐? 카스트 제도를 도입하게 해주랴, 아니면 귀족제를 도입하게 해주랴?"
"예?"
"흐흐흐. 합법적으로 엘프들을 노예로 만들 수 있는 상황인데 어찌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여왕의 명령을 듣지 않는 엘프가 있다? 그러면 그 엘프는 왕명에 따라 노예가 될 것이다. 다크엘프 여왕이라고 저항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 또한 노예가 될 것이다.
'이런 녀석을 이용해먹는게 제일 속이 편하지.'
괜히 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녀석보다 이렇게 제 욕망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녀석이 컨트롤하기 쉽다. 더군다나 현재 솔라는 몸과 마음이 모두 철저한 '을'의 위치에 있는 존재다.
"자, 너는 엘프들이 우리 군단의 일원이 되었을 때 높은 자리에 있기를 바라는 게지?"
"그렇습니다. 굳이 바라자면...여왕의 바로 아래 자리를 원합니다."
"흐흐, 좋다. 그 정도의 배포는 있어야지."
한 때 여왕 후보로서 자란 영향인지 아니면 다크엘프로서 생각하는 영향인지, 솔라는 일반 엘프라면 하기 어려운 말을 기탄없이 내뱉었다.
"그렇다면 솔라야. 네가 할 일이 있다. 아니, 임무다. 네가 임무를 얼마나 잘 성공하느냐에따라 결과가 달라질 것이다."
솔라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말씀하십시오. 드래곤을 잡아오면 되겠습니까? 아니면 성검을 훔쳐오면 되겠습니까?"
"...아니, 내가 그 정도는 안 시키지. 음. 내가 시킬만한 건 하나야."
나는 깍지낀 손가락을 좌우로 퍽퍽 부딪혔다.
"엘프의 숲으로 돌아가서 이렇게 전해."
내 전언에 솔라의 표정은 사색이 되었다.
"여기. 이 동굴에 엘프의 여왕이 있노라. 다크엘프가 여왕이 되었다고 말이야. 흐흐."
* * *
〈그 시각, 타우러스 영지 산길.〉
"아...큰일났다."
성녀는 완벽하게 무너져내린 던전의 상태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던전의 벽이 약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여신이 끊임없이 전해오는 괴상한 신탁에 정신이 혼미해진 탓에 까먹어버렸다.
'아니, 이건 정당방위야.'
당장 여신이 인간인 자신보고 오크와 12명의 자식을 낳으라고 시어머니마냥 재잘대고 있는데 어찌 혼란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 이건 전부 다 저 오크 때문이야.'
아무리 못생긴 남자라고 하더라도 차라리 인간이었다면 수용할 수 있을 법 하건만, 오크는 아니지 않은가. 성녀는 분노에 차올라 고개를 돌렸다.
"당신 때문에-"
"탈출구를 찾았소."
"엑."
오크는 고개를 들어 천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과 하등 다를게 없는 천정이었으나, 오크는 그곳을 탈출구라고 확신하는 듯 했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나의 ㅎ...흠흠. 나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이가 그런 말을 했지. 모든 던전에는 가장 깊은 곳에서 입구까지 나갈 수 있는 지름길이 있다고. 어...그러니까 '숏컷'?"
"비상구가 있다는 건가요?"
"그런 셈이지."
오크는 성검 타우러스를 잡고 하늘로 높이 집어던졌다. 성녀는 이미 오크의 행동에 대해서 해탈했기에, 검이 천정을 뚫고 지나가도 아무렇지도 않-
"어?"
성검은 천정에 박히지 않았다. 오히려 사라지고 말았다. 그제서야 성녀는 천정의 정체를 알아냈다.
"환상결계? 도대체 어떻게?"
"마나를 이용한 것이 아니오. 착시를 이용한 것이지. 스승이 이야기하더군. 결계같은 곳은 괜히 마나에 대한 기감이 뛰어난 자에게 걸릴 수 있으니, 물리적인 방법으로 지름길을 숨기는 것도 한 방편이라고."
오크는 씩 웃으며 무릎을 살짝 굽혔다.
"혼자서 뛸 수 있겠소?"
"이 높이를?"
"7m 정도면 충분히 제자리뛰기로 뛸 수 있지 않나?"
"......."
성녀는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성검 타우러스의 사용자는 아무래도 신체 스펙이 성녀의 상상을 뛰어넘는 존재인 듯 했다.
'단순 스펙만 두고보면 거의 변경백 이상...?'
"아...미안하군. 아무래도 그대에게는 다소 어려운 듯 하구려. 내가 올라가겠소. 다행히 밧줄이 있으니, 그것을 타고 올라오면-"
"당신이 안아서 뛰지는 못해요?"
"......가, 가능은 한데 그게 좀 그렇지 않소?"
"가능하면 그렇게 해요. 저 지금 온몸에 힘이 안 들어가니까."
성녀는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힘이 풀려버렸다. 오크는 난감한 얼굴로 자신의 어깨 갑주를 확인했다.
"...이곳이면 되겠군. 실례하겠소."
번쩍!
오크는 성녀의 등허리를 한손으로 잡고 번쩍 들어올렸다. 그러고는 자신의 어깨갑옷에 성녀의 배가 닿도록 하며 다리를 꽉 붙잡았다.
"이, 이 자세는...?!"
공주님 안기도 어부바도 아닌, 마치 짐짝처럼 들린 자세에 성녀는 얼굴을 붉혔다.
"제가 무슨 짐짝도 아니고-"
"그럼 가겠소이다."
타---앗!!
오크는 한걸음에 수 m를 뛰어올랐다. 성녀는 오로지 자신의 다리만 잡고있는 오크의 행동에 침이 꼴깍 넘어갔다.
'이 자...지켜봐야겠어.'
절대로 여신이 남편감이라고, 이 남자를 잃으면 평생을 결혼도 못하고 노처녀로 늙어 죽어야 한다는 신탁 때문은 아니었다.
* * *
솔라를 갤러해드가 있는 곳으로 보낸 뒤.
나는 당장 이해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엘프 둘이 자리잡고 있는 던전의 지하 1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초지종을 들은 륜과 루나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그러면 제 계급은 어떻게 되는 거죠?"
"무슨 생각을 하는...륜? 지금 그게 중요하니?"
"네."
"륜의 계급은 여왕보다 위지."
"야!"
루나가 빽 소리를 지르며 성질을 부렸다. 하지만 나는 루나의 화를 풀게 만들기 위해, 양 옆에 앉은 두 명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내 사랑이 당연히 엘프 여왕따위보다 계급이 위가 아닌가?"
"히힛. 당연하죠."
"미친새끼. 이번만 봐준다."
륜은 싱글벙글 웃고, 루나는 고개를 돌리며 툴툴거렸다. 하지만 입꼬리가 귀에 걸려있는 건 숨길 수 없었다. 나는 두 명의 가슴을 쥐락펴락하며 내 계획을 설명했다.
"엘프들은 크게 두 개의 파벌로 이루어져있지. 루나야. 다크엘프가 여왕이 되었다고 한다면 두 파벌이 어떻게 움직이겠느냐?"
"...1장로 파벌은 인정하지 않으려고 들 거야. 2장로 파벌은 싫어도 나를 모시러 오겠지."
전통을 지키려고 해도 다크엘프가 여왕인 걸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 자들. 따르기는 찝찝해도 전통이니 따라야하는 자들.
"루나야. 륜. 솔직히 말하마. 나는 엘프들을 두 부류로 나누고자 한다. 반반엘프와 순수한 다크엘프로 말이지."
"...오호."
루나는 눈을 반짝이며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부다 타락시키겠다는 거야?"
"주인님. 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잠깐만. 순서대로 이야기를 좀 하자. 그러니까 이런 식이지."
엘프들은 크게 두 가지 신분으로 재편될 것이다.
우리 군단에 합류하는 이들과 우리 군단에 저항하는 이들.
전자는 반반엘프가 되어 밖에서도 일반 엘프인 척 코스프레를 할 수 있다면, 후자는 완전히 다크엘프로 만들어버려 밖에서도 초콜렛 냄새를 풍기도록 만드는 것.
"비협조적인 애들을 노예계층으로 만들겠다는 거야?"
"비인간적으로, 마족적으로 사고를 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노예계층이라고 표현하기도 좀 그렇기는 하다. 다크엘프들이 일반계급이라고 한다면, 반반엘프들은 선택된 거지. 라스 신에 의해. 대외적으로는 인류연합을 상대로 그럴듯하게 보일 하얀 엘프들이 필요하지 않겠어? 흐흐흐."
마족과 행위를 하게 되면 결국 다크엘프가 될 수밖에 없다. 오크든 엘프든 어디 유사성행위로만으로 참을 족속들이 아니지 않은가.
결국 모든 엘프들이 다크엘프가 되는 것은 당연지사.
"우리에게 협조적으로 나오는 엘프들에게는 루나 너처럼 만드는 거지. 던전 안에서는 발정난 암캐마냥 굴어도, 밖에서는 예전처럼 하얗게 다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어떨까."
"발정난 암캐...."
"틀리냐?"
"아니, 정확하네. 쓰읍."
루나는 벌써부터 개처럼 박히는 걸 기대하며 은근슬쩍 가슴을 문질렀다. 나는 적당히 루나의 가슴을 애무하며 륜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하얀 엘프가 아예 없지는 않을 거다. 륜처럼 성인식을 치르지 않은 엘프들은 우리 군단에 들이지 않을 생각이야."
"좋은 생각이에요."
"륜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는 알겠지만.... 어린 엘프들 혼자서 어떻게 살라고 하는 거야?"
"신수님이 알아서 잘 해주시겠지."
신수의 입장에서도 타락한 엘프들보다는 순결한 엘프들이나마 남겨서 따로 키우는 것이 나을 것이다. 엘프 여왕이 있다고 한들, 아무렴 신수까지 일방적으로 명령을 내릴 수는 없지 않은가.
"인간들로 치면 모험가 요정들이 반반엘프고 목장에 있는 애들이 다크엘프라 이거지? 그런데 어떻게 구분할 거야?"
"일단 전부다 반반으로 만들고나서 까불면 소스 끼얹으면 되잖냐."
"하얗고 끈적한 소스 말씀하시는 거죠?"
륜과 루나는 동시에 웃으며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솔라가 돌아올 때까지 시간은 제법 남아있었고, 내 체력도 충분히 남아있었다.
"루나. 너는 지하 1층 지키고 있어라. 나는 륜 데리고 어디 갈 곳이 있다."
"뭐?! 지금 이 타이밍에 한 발 안 빼고 간다고? 너 누구야?!"
"누구긴 누구야. 지금 떡치는 거 말고 더 중요한게 있는데."
"시, 싫어요! 한 발 빼드리고 갈, 꺄악?!"
나는 륜을 내 어깨에 둘러메고 엉덩이를 때렸다. 반항기에 접어든 아이는 궁디팡팡이 제격이었다.
"오늘 성공하면 바로 박고 쌀 거야. 오늘 진짜 날 잡고 돌 거거든."
"어, 어딜요?"
"어디긴 어디야. 서브던전이지."
륜의 레벨 69.
"어제는 그레모리에게 마석을 몰빵했지. 오늘은 륜, 네 차례다."
여차하면 화염사자 던전부터 스켈레톤 던전까지 모든 서브 던전을 돌아서라도 륜의 레벨을 끌어올릴 것이다.
"70렙 찍고 4성 가야지."
"그래야 주인님이 제 안에다가 씨를 뿌리시니까요?"
"물론."
나는 륜의 엉덩이를 팡팡 두드리며 륜을 위로했다.
"륜아. 내가 왜 다른 엘프들을 다크엘프들로만 만들려고 하는 지 아냐?"
"왜 그러세요?"
"너 애 낳으면 하이엘프만 낳게 될 거다? 흐흐흐."
다크엘프가 평민. 반반엘프가 귀족층. 루나가 그들의 여왕이라고 한다면.
"네가 순수한 하이 엘프의 여왕이 되는 거다. 어때?"
"...주인님, 저 좋은 생각 있어요."
륜은 내 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주인님이랑 저랑 새로운 종을 낳아보는 건 어때요? 그러니까...그린 엘프? 후훗."
"......."
피부색이 녹색이 아니라 머리칼이 녹색이라면 그건 또 괜찮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