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1
〈늦은 밤, 타우러스 령 깊은 산골짜기.〉
"아아, 짜증나!!"
성녀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숲의 어둠과 달리, 슬슬 햇빛 자체가 사라지고 있을 시기였다.
"다들 어디로 간 거야?!"
성녀는 주변을 훑었지만 아무도 없었다. 얼핏보면 성녀가 길을 잃고 미아가 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성녀 말고 나머지 일행 모두가 결계에 갇혀 빠져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분명 이 근처인데...."
성녀는 바닥에 있는 온갖 마법진의 흔적을 찾아 열심히 지웠다.
"아으, 다들 어디있는 거야...?"
인식을 저해하는 숲의 결계는 깊이 들어갈수록 점점 더 미로에 가까웠고, 오직 성녀만이 바른 길을 찾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마물이라도 나오면 어쩌려고!'
까악, 까악.
마치 금방이라도 마물이 튀어나올 것처럼 주변 분위기는 음산했다. 사람을 찾기 전에 먼저 자신이 불귀의 객이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성녀는 불안해졌다.
"성기사단 단장이라는 사람이 성녀를 두고...."
사람의 수만 따지고 보면 일반 사제들이 중요하겠지만, 인류와 마왕군의 전쟁에서 성녀만큼 중요한 직위를 가진 존재는 없으리라.
"기도해야하나."
성녀의 표정이 잠시 일그러졌다. 여신에게 기도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은 되었지만, 괜히 여신의 신탁을 들어봤자 속만 썩힐 뿐이다.
"그래. 또 이상한 소리 듣느니 나 혼자 찾는 게 낫지."
성녀는 은색의 머리끈을 풀어 나뭇가지에 걸어두었다. 바닥에는 미미한 신성력까지 뿌려댔으니, 추후 기사단장이 이 흔적을 찾아 성녀의 뒤를 쫓아오기를 바랄 뿐이었다.
"분명 이 근방이었는데."
성녀는 마나가 다한 나침반을 들어올렸다. 동력이 다해 이제는 고물에 불과하지만, 아주 미약하게나마 '엘프 여왕'이 있는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또 반대네."
나침반은 비르고 남작령을 가리키고 있었다. 강을 따라 쭉 내려가면 남작령에 도착하겠지만, 반응이 소실된 곳은 이곳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던전까지 있고.'
성녀는 스태프를 들어올렸다. 을씨년스러운 기운과 짐승의 냄새는 성녀에게 있어 가장 짜증스러운 던전의 기운이 틀림없었다.
"엘프 여왕이 뭐하러 이런 던전까지 온담."
엘프 여왕의 반응을 찾아 타우러스 영지까지 왔건만, 불행히도 엘프 여왕의 반응은 다시 소멸되고 말았다.
반응 소멸. 그리고 던전.
"던전 지하로 내려갔나.... 그래서 반응이 안 나오는 건가.... 에이, 누구 하나 말동무가 될 사람도 없고. 혼자서 뭐하는 거람."
성녀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길을 따라 걸었다. 참새처럼 재잘거리는 성녀의 혼잣말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누구도 성녀를 향해 공격을 하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걸어갈수록 죽음의 기운만 물씬 풍겨, 성녀는 그제서야 입을 꾹 닫았다.
누군가 선객이 있다.
성녀는 던전 입구에 금방 도착했고, 주변에 흩뿌려진 시체들에 숨이 턱 막혔다.
'세상에.'
고블린, 트롤, 오크 할 것 없이 온갖 마물들이 학살당했다. 대부분 일검에 목이 날아간 듯 보였고, 그 흔적은 마물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깔끔한 인간의 검법이었다.
'엘프들이 인간의 검법을? 이거....'
"아리에스 검법?"
대륙 반대편에 있을 가문의 검법이 왜 여기에? 성녀는 기억을 더듬어 아리에스 가문의 가계도를 떠올렸다.
'사생아도 없는데?'
아리에스의 적통은 변경백과 실종된-아마도 죽은-백작 영애 두 명 뿐. 방계가 있다고는 해도 변경백 아래에 있지, 이런 곳에 있을 리가 없다.
'누가 몰래 전승한 건가?'
가문 외로 유출되는 걸 극도로 꺼리는 가문의 검법이 눈앞에 나타났다. 성녀는 침을 꿀꺽 삼키며 던전의 입구로 들어갔다.
'세상에.'
던전은 마치 드래곤이 나타나 브레스를 뿜어댄 것만 같은 흔적이 역력했다. 땅 곳곳이 가득 파이고, 던전의 주류 마물로 보이는 마물들은 전부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었다.
"이건...신성력?"
성녀의 머리가 점점 더 복잡해졌다. 신성력을 사용하는 아리에스의 기사. 성녀가 알기로는 단 한 명 뿐이었다.
'변경백 지금 수도에 있을텐데?'
왕도 조지아.
백작령에 상주하고 있던 변경백을 일부러 상경시킨 자는 다름아닌 성녀였다.
'최전선에서 성검을 휘두르라고 국왕 폐하가 설득할텐데 왜 여기에.'
본인은 어째서인지 비르고 남작령으로 올라가기를 바란다고 했으나, 국왕은 분명 최전선으로 변경백을 보낼 것이다. 최근들어 마왕군의 전력이 상당히 약해진 만큼, 지금이 인류 연합이 전선을 앞으로 밀 기회였으므로.
'변경백이 아니면...?'
"꿀걱."
성녀는 입술이 바짝 발랐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신성력의 폭격에 사살당한 마수들의 뼈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몸의 일부가 관통당한 흔적이 가득한 녀석들로만.
'밖이랑 안이랑 다른 사람인가?'
전투 방식이 완전히 달랐다. 둘 다 강하기는 하지만 밖의 존재는 깔끔하고 세련되었다고 한다면, 안의 존재는 패도적이고 난잡했다.
"도대체 무슨-"
멈칫.
성녀는 본능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자신의 로브를 속옷까지 잡아당겼다.
"이런 미친!"
가슴에 새겨진 성흔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성녀는 뒤에 있을 일행과 함께 해야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던전을 달렸다.
"드디어!"
던전의 안으로 달려갈수록 자신의 성흔도 빛나기 시작했다.
"성검 사용자가 또 한 명-"
쿵!
"억!"
성녀는 전방을 가로막은 무언가에 정면으로 부딪혔다. 몸에 신성력을 두르지 않았다면 코뼈가 부러질 정도로 들이박았고, 성녀는 울상을 지으며 코를 만지작거렸다.
"아파...."
"괜찮소?"
중후한 남자의 목소리. 하지만 변경백의 목소리는 아니다. 성녀는 침을 꿀꺽 삼키며 남자의 손에 잡힌 검을 눈으로 흘겼다.
'쌍검?'
한쪽은 이가 빠진 검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은은한 빛을 뿜어대는 장검이 들려있었다. 성녀는 상대가 던전 입구의 마물들을 쓸어버린 '성검 사용자'임을 깨달았다.
"흠흠, 괜찮습니다. 만나서 반갑-"
"다치치 않아서 다행이구려."
"힉."
성녀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반쯤 부서진 투구의 안쪽은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신성력 덕분에 실루엣 만큼은 보였다.
"무슨 일로 여기에 온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여기는 이미 아무것도 없소."
"아, 아니. 어째서 당신이 이걸...?"
성녀는 아노미 상태에 빠졌다. 신성력이 담긴 은빛이 비추는 남자의 얼굴은 피부가 짙은 녹색이었다. 남자-오크는 성녀의 패닉에 피식 웃으며 성검을 들어올렸다.
"이것 말이오? 저것을 잡고 나니 나오더군."
오크 남자는 성검으로 뒤를 가리키며 비켜섰다. 성녀는 공동 한 가운데에 놓인 거대한 석상을 보고 깜짝 놀랐다.
"수호자가?!"
"수호자라고 하는 것이오? 몰랐소. 들어오자마자 '시험을 하겠다'며 덤비길래 맞서 싸웠소. ...혹시 그대의 물건이오? 적당히 힘조절을 할 수 없어서 그만 부수고 말았소. 미안하오."
오크는 허리를 숙이며 성녀에게 사과했다. 성녀는 패닉에 빠져, 그만 습관적으로 기도를 하고 말았다.
"여신이시여...."
있어야 할 엘프 여왕은 없고, 소재가 불분명하던 성검의 주인이 나타났는데, 그 주인이 어지간한 기사 뺨치는 매너를 가진 신사 오크라. 성녀는 숫기없는 청년마냥 우물쭈물하는 오크에 넋이 나가버렸다.
"지, 진심으로 미안하오. 저런 골렘이면 분명 최상급 마석이 몇 개는 들어갔을텐데...자꾸 덤벼들기에 그만. 나도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오. 나가고 싶었는데 왠 요상한 결계를 치며 '둘 중 하나가 쓰러지기 전까지는 나갈 수 없다!'라고 하길래-"
"성검의 의식. 하하하."
성녀는 오크가 말하는 것을 대번에 깨달았다. 그리고 순간, 다리가 휘청거렸다.
"아-"
덥썩.
오크는 성검을 내던지고 한쪽 무릎을 꿇으며 성녀를 안아들었다. 성녀는 도움을 받았다는 것도 놀랐지만, 오크가 저지른 폭거에 아연실색했다.
"당신, 누군지는 몰라도 성검을 땅에 버리-"
"괜찮소? 안색이 좋지 않소. 휴식을 취해야 할텐데."
"내가 누구 때문에......하아."
성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찬찬히 자신을 내려다보는 오크를 올려다보았다.
아무리봐도 오크다.
근육이 터질 것처럼 탄탄하지만 오크다.
갑옷 아래 흐르는 땀내는 시큰하기는 커녕 오히려 진한 남자의 향기를 내게 할 정도였지만, 오크다.
얼굴은 눈썹이 짙고 이목구비도 선명하여 인간이었다면 성녀조차 설렐 정도로 잘 생겼지만 오크다.
......정황상 성검의 인정을 받아 성검의 시련을 겪고 수호자를 압도적으로 이겨내어 성검을 차지한 '용사'지만, 오크다.
그리고 인류에 대한 적의를 가지고 만나자마자 자신의 목을 쳐도 무방했을 오크, '마물'이다.
'도대체 왜?'
두근, 두근.
성녀는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조우에 혼란만이 가득했다. 오크는 진심어린 걱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덕분에 긴장마저 풀릴 지경이었다.
"......일단 이야기를 하죠. 흠흠. 저는 여신교단의 성녀에요."
성녀는 자신의 손을 가슴에 올리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오크에게 안겨있으면서도 자신의 정체를 가감없이 드러냈고, 오크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며 성녀를 일으켜세웠다.
"만나서 반갑소. 내 이름은 ㅌ...아니, 그 이름은 당분간 안 써야지. 형...그를 만나기 전에는. 미안하오. 대신 이 이름을 지칭하지."
'이름은 'ㅌ'로 시작하고 '형'이 있구나.'
성녀는 이 어리숙한 오크가 흘리는 말들을 전부다 주워 머릿속에 저장했다. 오크는 멎쩍은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나는 〈타우러스〉라고 하오."
타우러스.
성녀가 급히 달려온 영지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본래 그 영지의 이름 자체가 하나의 '성물'에서 따온 이름이다.
"...성검 타우러스."
성녀의 눈앞에 굴러다니는 장검의 이름. 고작 넘어지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쓰레기처럼 바닥에 내동댕이 쳐서 흙먼지가 묻은 성검의 이름.
"......일단 이야기를 좀 할까요?"
성녀는 얼굴을 식힐 시간이 필요했다. 머리가 아닌, 왠지 모르게 달아오른 몸을 식힐 시간이.
"좋소. 그런데 이곳은 장소가 좋지 않소. 피냄새와 짐승의 냄새가 너무 짙거든."
오크, 타우러스는 두 검을 주워 등에 X자로 교차한 칼집에 집어넣었다.
"밖에서 시원한 공기와 함께 이야기하십시다. 밤공기가 차기는 하나...모닥불을 피우면 될 것이오."
"......잠시만요."
성녀는 밖으로 나가려는 오크의 손목을 붙잡았다. 한손으로 잡히지 않을 정도로 오크의 팔은 두꺼웠다. 오크는 순순히 성녀에게 잡혔다.
"여기서 얘기해요, 여기서."
"...이곳은 좀 더러운데."
"괜찮아요. 전혀 신경쓰지 않아요. 일단 어디 앉아서...."
성녀는 오크의 팔을 잡아당기며 던전의 안으로 들어갔다. 오크는 아무 저항없이 성녀의 발걸음에 맞춰 움직였다.
"무엇을 찾는 것이오?"
"심처. 던전에 으레 있는 던전 보스의 방이요. 거기라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테니까."
"...그곳이라면 저곳이지만 좀 그렇구려."
오크는 제자리에 서서 맞은 편 문을 가리켰다. 성녀는 상당히 난감해하는 오크의 표정에 얼척이 없었다.
"무엇이 그렇다는 거죠?"
"...좁은 방에 아리따운 여성과 단 둘이 들어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들어서. 그러니까...미트우? 음, 잘 기억이 안나는데...."
"......."
성녀는 오크의 손을 슬쩍 놓았다. 그리고 허탈해졌다.
"저기요."
"왜 그러시오?"
"혹시 당신 말이에요...."
성녀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오크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인간인데 오크가 된 저주를 받았나요? 혹시 그 저주가 키스로 해주된다거나 하는...흠흠."
성녀는 괜히 입술을 핥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귀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오크는 시원하게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태어날 때부터 오크였다오."
"......잠시만요."
표정이 굳은 성녀는 벽으로 다가가 벽에 머리를 박았다. 아까는 몸이 달아오른 걸 식힐 시간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자괴감에 빠진 정신을 다독일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오크에게......."
성녀는 지금 이 순간을 자신의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가슴에 있는 성흔에서 무언가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으나, 성녀는 그걸 손으로 누르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젠장."
성녀는 상스러운 말까지 내뱉으며 괴로워했다. 그리고 차마 뒷말은 말할 수 없었다.
'신탁으로 내려온 남편감이 오크라니...!'
- 성검 타우러스의 주인이 되는 자가 네 불변의 짝이로다. 그 짝을 잃는다면 너는 평생 노처녀로 살게 될 것이야. 평생을 옆에서 지키며 함께 하도록 하라.
성녀는 자신에게 전해진 신탁을 곱씹으며 이를 갈았다.
"여신이시여---------!!"
성녀의 기도는 허망하게 메아리만 칠 뿐이었다.
- 참고로 타우러스의 주인은 너와 속궁합이 가장 잘 맞으니, 배를 맞추면 족히 12명의 아이를 낳고도 남을....
"아아아아악!!"
"괜찮으시오?!"
- 그가 가진 성검의 길이는 무려 22cm로, 끝까지 찔렀을 때 너의 속까지 딱 맞게 떨어질 정도의 길이와 두께인 만큼 네 처녀도....
"아아아아아아아악!!"
성녀는 벽을 사정없이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뒤.
구구구구.
"앗."
"음?"
곳곳에 구멍이 파여있던 던전 통로가 천장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예.
생각하시는 그게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