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1
작전은 완벽했다.
적이 이동하는 통로를 틀어막았을 때, 나는 샤이탄과 두 가지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책을 주고받았다. 이번 작전은 나와 샤이탄의 의견이 하나로 합쳐진 일거이득의 계책이었다.
- 적이 진격하지 못하도록 벽을 세워버리자.
- 벽을 막을 수 있다면 적의 퇴로를 막아버리자.
앞에는 가벽을 세워 쌓은 토벽이, 그리고 뒤에는 길 전체가 와르르 무너져내릴 것이다. 적은 결국 직선 통로 한 가운데에서 고사하게 될 것이다.
륜의 완벽한 임무 수행 능력 덕분에 우리는 기나긴 직선 통로에 적을 완벽하게 가두는데 성공했고, 이제 적은 이지선다의 기로에 놓였다.
하나, 완전히 무너진 통로를 뚫고 지나간다.
둘, 무너뜨릴 수 있는 벽을 통과하여 정면으로 온다.
전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 외의 루트로 우리 던전의 지상 1층에 올라올 방법은 없다.
'솔로몬의 마법 시스템은 절대적이야.'
아무리 지하 1층과 지상 1층이 연결되어 있다고는 해도, 마법적인 결계로 막혀있는 이상 물리적인 방법으로 천장을 뚫고 올라갈 수는 없다.
'그러니까 여기로 와야 해.'
고로 지상 1층으로 올라가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지키고 있는 최종 요격실에 있는 계단 뿐이다.
적 대장의 성향이 어떨지는 모르지만, 과연 어떤 선택을 내리게 될까.
"륜, 적의 움직임은 어떠냐?"
"...벽을 부수고 오는 것 같아요."
"역시. 네 말대로 다혈질인 것 같구나."
륜이 말한 적 대장-펭귄녀의 성향을 봐서는 벽을 부수자 마자 금방 달려들 것으로 예상되었다. 우리 군단은 펭귄녀와 코카트리스들을 위해 마련한 지옥구덩이 앞에서 한참동안 경계상태로 기다려야했다.
"자, 와라. 치킨 시켜놓고 배달 기다리는 마음이야, 지금."
30분.
"...뭐, 30분 안에 안 올 수 있지. 오히려 30분이면 빠른 편이니까. 흐흐."
1시간.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긴 하는데."
륜의 청각 이외에는 어떻게 적이 얼마나 벽을 뚫고 오는지 판단할 방법이 없었다.
'위아래로 후방을 공격당한 이후에는 확실히 대처하는군.'
지하의 플레어 판테라나 천장의 슬라임들이 접근한다싶으면 바로 푸르카스가 낫을 바닥과 천장에 찍어댔다. 괜히 정찰병을 소모할 필요는 없었고, 나는 푸르카스의 위치를 통해 적의 전진 속도를 읽어내야만 했다.
'느리기는 해도 계속 우리 쪽으로 오고 있어.'
단지 적 병력이 오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과연 그들이 무슨 수로 벽을 부수고 있는지, 또 무슨 능력을 사용하고 있는지, 코카트리스들의 전투력은 어느정도 수준인지 나는 전혀 알 방법이 없어 조마조마했다. 뭔가 알아낼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다.
"이래서 정찰병으로 클로킹 유닛 쓰는 구나."
"클로킹이요?"
"은폐 유닛. 뭐...투명한 상태로 움직인다거나 하는 것들이지. 밴시 같은 거?"
정찰병이 보이면 바로 제거당하니까 적이 공격할 수 없는 방법으로 정찰하는 건 나도 이미 익히 실천하고 있다. 토벌군을 상대로 안드라스와 하피 부대를 보내 공중정찰을 했듯이, 나는 정보의 중요성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근데 던전은 안 되네.'
천장과 지하를 통해 적의 움직임을 알아내려고 온갖 발악을 했지만, 결국에는 같은 공간에 있는 존재다보니 완전히 무적은 아니었다.
그걸 직접 체감하니 확실히 정찰 수단을 다양화 할 필요성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던전같은 폐쇄된 공간이라면 더더욱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기는 했다.
"륜, 엘프들은 정찰을 어떻게 하느냐?"
"저희요? 바람의 정령에게 물어보죠. 그런데 던전은 불가능해요. 여기는 정령이 살 수 없는 환경이니까요."
"아쉽군. ...진짜 밴시를 뽑아야겠어."
던전의 동굴 벽을 통과할 수 있는 실체 없는 존재들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쨌든 지금 당장은 플레어 판테라들과 슬라임들을 이용해 적의 움직임을 계속 살펴야 했다.
"어디보자. ...아직도 제1 요격실 중간인가?"
우리가 너무 많은 벽을 만든 건지 아니면 그들이 나를 피말리게 만드는 건지 알 수는 없었으나, 적들은 너무나도 느긋하게 벽을 부수며 직선 코스를 주파하느라 내 속이 다 탈 지경이었다.
"주인님, 어떻게 미리 벽을 몇 개 허물기라도 할까요?"
"음....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해서라도 맞짱을 뜨고 싶기는 한데, 그래도 괜히 모험을 하기보다는 안전하게 하자. 어차피 시간을 끌면 지들만 손해아니냐."
나는 적들이 이렇게 시간을 허무하게 소비하는 것에 감사했다.
"기다려봐라...곧 한 방 크게 벌 수 있을테니."
시간은 절대적으로 우리의 편이다.
* * *
〈그 시각, 스피카 성 잡화점 '아발론'.〉
라스 상단의 잡화점은 오늘도 마찬가지로 영업을 시작할 준비를 마쳤다.
스타킹의 물량이 상당히 많이 판매되기는 했지만, 하루동안 판매하기로 한 물량을 제한한 만큼, 입소문을 타서 점점 많은 사람들이 산다고 가정을 하더라도 사나흘은 거뜬히 버틸만큼 스타킹은 충분했다.
고로 반드시 라스베가스로, 던전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스피카 성에 파견된 상단의 책임자, 메어리는 던전으로 귀환해야 한다고 판단을 내렸다.
"던전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
"참아. 그랬다가는 의심할 수 있어."
그에이는 당장이라도 짐을 싸고 떠나려는 메어리를 말려야했다.
"아직도 여관에는 자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네가 갑자기 사라지면 의심할 거 아니야."
"어차피 다 자고 있을 걸? 다들 정기 뽑히느라 지쳐서 일어나지도 못할 거야. 서큐버스들도 던전으로 돌아가서 정기를 마석으로 변환해야하고."
밤 사이 아발론에는 영주부터 시작하여 정말로 많은 손님들이 다녀갔고, 요정들은 원하는 손님들을 지하로 내려데려가 꿈의 세계로 인도하였다. 지하 토굴을 통해 넘어온 서큐버스들은 요정들에 의해 재워진 인간들을 대상으로 꿈을 통해 정기를 갈취했다.
"쳇, 포털만 만들어졌어도 금방 돌아가는데...."
"그레모리 님이 올 수 없다고 하잖아. 그래도 지금 상황을 조금이나마 전해들을 수 있는게 어디야."
만약 포털이 있었다면 서큐버스들은 던전으로 열린 포털을 통해 굳이 넘어가지 않아도 정기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서큐버스들 또한, 그리고 메어리 또한 분노의 군단과 할파스 군단간의 쟁탈전에 참가할 수 있었으리라.
"설마 하루만에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어. 혹시 적들이 뭔가 모종의 방법으로 알고 있는게 아닐까?"
"너무 억측인데."
하지만 아직 포털은 설치되지 않았고, 기습적으로 열린 전쟁으로 인해 서큐버스들은 스피카 성에서 체류하게 되고 말았다. 큰 문제는 없었지만, 던전의 소식을 시시각각 전해받을 수 없는게 크나큰 낭패였다.
"너 아까 지하에서 오크 라이더한테 전갈을 받았다고 했지? 아빠가 뭐랬어?"
"...샤이탄 님께서 말씀을 전하셨어."
'공격을 당했지만 안심하고 사업에 전념하라'는 전언이 끝일 뿐.
중간중간 두 시간 간격으로 지하를 달려오는 오크 라이더를 통해 전황은 전달받고 있었으나, 여전히 전투가 실시간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건 메어리로서는 불안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도와야 할 것 같아."
"돕는다니? 무슨 방법으로?"
"우리 군단의 원래 계획대로 말이야."
메어리는 보따리 한아름 가득한 마석을 들어올렸다. 서큐버스들이 뽑아낸 정기는 아직 서큐버스들의 체내에 남아있으나, 스타킹과 물물교환으로 벌어들인 마석은 온전히 그 마나를 머금고 있었다.
"아빠 던전에 매일매일 보내드려야겠어. 당장 여기 마석을 사용할 것도 아니잖아."
"만약 마석을 내놓으라고 하면?"
"그런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서 네가 있는 거 아니야?"
"그렇긴 하지. ...알았다.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막을 수 있겠냐. 준비는 이미 끝내뒀어."
그에이는 아발론에서 스피카 성 밖으로 통하는 지하 통로의 비밀 문을 가리켰다. 그 입구에는 라임과 슬라임 드래곤들이 메어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메어리는 슬라임 드래곤 한 마리의 위에 올라탔다.
"라임 엄마랑 같이 잠깐 다녀올게."
"야. 책임자가 자리를 비우면 어떻게 해?"
"금방 다녀올 거야. 포털 있는 곳 까지만."
메어리는 슬라임 드래곤의 등에 올라타 상체를 최대한 숙였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나 찾는 사람 있으면...밤에 스타킹 재료 구하러갔다가 늦게 들어온다고 전해줘."
"...그걸 내가 말하는 것도 이상한...이런."
메어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슬라임 부대와 함께 길을 떠났다. 그에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비밀 통로가 이어진 방으로 돌아왔다. 창고 방 안에는 정장을 갖춰입은 요정이 스타킹이 든 박스를 들고 올기려했다.
"어머. 기사님, 마법사님은요?"
"...잠깐 본진에 다녀올 것 같은데."
"아하. 마석은 바로바로 보내는 거예요? 다행이다. 그거 괜히 관리하기도 난감했는데 잘 됐네요. 그리고 군단에도 도움이 될 거구요."
"그렇다면 다행이기는 한데."
스타킹을 판매한 대금으로 벌어들인 마석. 비록 하급 정도에 불과하지만 조금이라도 마석이 보급되면 할파스 세력과의 전쟁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으리라.
"후후, 그러면 저희는 저희대로 싸우러 갈게요."
요정 여인은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며 자리를 떠났다. 당장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남자 셋을 상대로 술을 마시며 지하로 이끌었던 여인이 정숙한 복장을 하고 있자 그에이는 침이 절로 넘어갔다.
요정 여인은 안에 바니걸 복장을 입은 채, 그 위에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에이는 달아오른 자신의 아랫도리를 가라앉히며 숨을 골랐다.
"......빨리 하르퓨이어 보고싶다."
그에이는 입맛을 다시며 1층으로 올라갔다. 1층은 한창 영업 준비로 분주했고, 메어리의 부재로 인해 영수증을 쓰게 된 요정은 부랴부랴 메뉴얼을 익히며 일을 숙지하고 있었다.
"문 열 시간인데, 내가 열까?"
"고마워요. 그래주시겠어요?"
그에이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잡화점의 문을 열었다. 이미 창밖은 많은 손님들로 북적북적거리고 있었지만, 그에이의 병사들이 줄을 세워놓고 있었....
"오. 그에이 경, 설마 자네도 여기서 잤는가?"
그에이가 연 문 너머에는 영롱한 눈을 반짝이는 여인이 기대감에 잔뜩 부푼 얼굴로 들떠있었다. 그에이는 순간적으로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영주님?"
수도의 사교계에 나갈 때 수준으로 아름답게 꾸미고 온 영주-버지나니야 비르고는 옅게 웃으며 흰장갑으로 입을 가렸다.
연분홍색 꽃을 형상화한 듯한 원피스는 꼭 누군가를 연상케하는 색이었다. 드레스 아래로 남작의 검은 스타킹이 한 눈에 들어왔다. 남작은 헛기침을 하며 그에이의 눈치를 봤다.
"흠흠. 아침부터 실례인 것은 알면서도 왔다네. ...메어리 양은 안에 있는가? 괜찮다면...함께 아침 식사라도 하고 싶은데."
"이 시간부터...말입니가?"
아직 태양은 지평선에서 올라간 지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그에이의 기억 상, 남작은 이 시간에 일어나고 있어야 했을 시간이었다.
"그렇다네. 내가 메어리 양과 담소를 나누고 싶어서...새벽에 절로 눈이 떠지더군."
하지만 그런 남작이 준비에 최소 1시간을 걸릴 수준의 꽃단장을 마치고 나타나버렸다.
"안에 있는가? 안내해주시게."
비르고 남작의 기대에 찬 얼굴에 그에이는 입안이 바싹 말랐다.
* * *
"슬슬 다왔습니다...."
푸르카스는 펭귄의 부리 위에 두개골이 들린 채 마지막 벽의 앞에 섰다. 펭귄은 열 세개의 벽을 뚫고 푸르카스가 언급한 제2 요격실로 통하는 벽 앞에 서서 팔을 찔러넣었다.
"여기네. 오크의 냄새가 느껴져. 그것도 여럿. 진하게."
쩌적, 쩌적!
벽이 순식간에 물에 젖었다 얼어붙었다. 마지막이라는 것에 푸르카스는 안도했고, 펭귄은 얼어붙은 벽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와장창!
얼어붙은 흙벽은 유리창마냥 산산조각나며 비산했다. 펭귄은 뻥 뚫린 정면에 쾌감마저 들었다.
"환영한다! 네 놈의 이름은 무엇이냐!"
통로의 맞은편에는 검은 로브 차림의 오크가 두 팔을 벌리고 환영하고 있었다. 펭귄은 아무 말 없이 아래를 한참동안 내려보다가, 부리 위에 올려둔 푸르카스의 두개골을 집어들었다.
"바닥에 수작질 했네?"
데구르르.
펭귄은 푸르카스의 두개골을 앞으로 살포시 던졌다. 푸르카스의 머리는 바닥에 떨어지기는 커녕 더 깊게 떨어졌다.
"공주-"
화르륵!
푸르카스의 두개골이 땅에 닿자마자 바로 바닥이 불타올랐다. 깊숙히 파인 공간에는 불구덩이가 치솟았고, 푸르카스의 두개골은 불구덩이에서 익어가기 시작했다.
"......."
오크의 표정이 굳었고, 펭귄은 오크를 향해 부리를 딱딱 부딪혔다.
"어디서 개수작이야?"
"...젠장."
오크가 야심차게 준비한 지옥구덩이는 페일 라이더 푸르카스의 두개골을 태우는 것으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