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
"공주님, 엘프 냄새가 나는 건 당연합니다. 적 중에 엘프가 있으니까요."
"아 참, 그랬지. ...흠, 그래도 조금 짙게 나는데? 잔향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더 짙어."
"벽 너머에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분명 공기를 통해 냄새가 넘어오는 걸 겁니다. 적은 분명 벽을 세워놓고 시간을 번 다음, 저희가 도착하면 화살을 난사하려고 들 겁니다."
"그런가.... 뭐 좋아. 아니어도 딱히 상관은 없지. 다 때려 죽이면 그만이니까."
펭귄과 푸르카스는 계속 벽을 부수기 시작했고, 코카트리스들의 위를 지나가던 륜은 십년감수했다. 그리고 적이 조류 군단인 것에 감사했다.
나중에 주인에게 이 상황을 얘기하게 되면 꼭 이야기하리라. 적이 새대가리라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킁킁, 어째 더 짙은 것 같기도 하고...."
"분명 벽이 이제 얼마 안 남은 걸 겁니다. 보십시오. 엇차. 이 공터가 바로 저희가 적의 구울 부대와 마주친 곳입니다. 이제 다음 공터에 적의 악랄한 함정인 불구덩이 지옥이...벽이 먼저 나왔군요."
"야! 우리가 적을 죽이러 왔지 벽이나 부수러 왔어?! 도대체 너는 왜 바보같이 적을 한 번에 죽이지 못하고...."
륜은 성질을 내는 펭귄을 뒤로한 채 목적지를 향해 빠르게 기었다. 코카트리스들이 천장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의아해했지만, 후미에서 이상을 눈치챈다고 최전방까지 닿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륜은 이미 목적 지점까지 도착했다. 륜은 자신의 앞에 나아가던 슬라임들을 향해 바닥을 가리켰고, 슬라임은 넓은 구멍을 만들었다. 륜이 내려가기 딱 안성맞춤인 구멍이었다.
"작전 개시."
꾸르륵!
슬라임들이 긴 원통을 그리며 수직으로 땅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가벽 따위는 필요 없었고, 은밀 기동을 포기한 슬라임들의 작업은 신속했다.
끼에에엑!!
천장의 반응을 눈치챈 후미의 코카트리스들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돌렸다. 통로에 두 발을 딛고 선 륜은 그들을 향해 한 차례 손을 흔들어 준 뒤, 활을 잽싸게 코카트리스들에게 겨누며 싱긋 웃었다.
"죽여서 미안해? 주인님 대신 말하자면...."
륜은 표정을 굳히며 활에 세 발 씩 바람 화살을 장전했다.
"내가 ★★★★으로 진화해서 주인님 아이를 가질 수 있도록 죽어줘야겠어."
파바바박! 륜의 바람 화살이 코카트리스들의 눈을 향해 날아갔다. 세 발을 하나처럼 겹쳐서 쏜 바람화살은 삼각편대를 갖춘 전투기마냥 허공을 가로질렀다.
끼에엑!!
가장 뒤에 있던 코카트리스가 바람 화살에 눈을 맞고 쓰러졌다. 강한 관통력을 가진 바람화살을 세 개 겹쳤음에도 불구하고, 코카트리스는 고작 한 마리만 눈이 터지고 쓰러졌다.
"칫."
관통상이 아닌 것에 륜은 혀를 차면서도 재빨리 바람 화살을 만들어냈다. 슬라임들이 작업을 마치기 전에 최대한 많은 코카트리스들을 자신의 손으로 잡아야 했다.
다행히 동굴의 폭은 그리 넓다고는 할 수 없었고, 코카트리스들은 일렬로 선두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방향을 조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쏘기만 하면 끝이었다. 난사는 륜의 주특기였다.
파바바박!!
끼이익!!
방향을 선회하여 륜을 공격하려던 코카트리스가 목에 화살 세 대가 꽂히며 벽에 머리를 처박았다. 그리고 잠시 뒤, 어디선가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저 멀리서 메아리처럼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엘프 년 죽여버려---!!!
"들켰네."
푸르카스 덕분에 무사히 넘어가나 싶었더니, 아무래도 펭귄은 끝까지 의심의 끈을 놓지 않은 모양이다. 륜은 슬쩍 머리 뒤 천장의 슬라임들을 눈으로 흘겼다.
"...조금 빠듯하려나?"
파바박!
륜은 뒷걸음질을 치며 달려오는 코카트리스를 향해 화살을 쏘았다. 코카트리스들은 두 발로 타조처럼 던전을 달리며 륜의 바람화살이 날아오는 궤적을 읽고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화살을 피했다.
파바바박!
륜은 코카트리스들이 피할 수 없도록 더 많은 화살을 난사했다. 최전방의 코카트리스는 땅에 발을 딛다가 발목에 구멍이 뚫리며 쓰러졌다.
끼이익!!
뒤따르던 코카트리스가 쓰러진 코카트리스를 밟고 뛰어넘었다. 륜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고, 화살을 쏘려던 손까지 굳어버렸다.
퍽, 퍽, 퍽퍽퍽!
코카트리스가 문제가 아니었다. 저 멀리, 코카트리스의 대가리를 밟고 달려오는 검은 덩어리의 물체가 문제였다.
"너 이 엘프 년 죽었어---!!"
펭귄은 코카트리스들의 대가리를 밟으며 던전을 역주행했다. 상상 이상으로 빠른 스피드에 륜은 식겁하며 크게 뒤로 물러섰다.
"얘들아, 더 빨리!"
카가가각!
슬라임들 또한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끼고 천장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륜은 최대한 적의 돌진을 늦추기 위해 화살을 마구잡이로 쏘아댔다.
파바바박!
코카트리스 하나가 몸에 칼로 쑤셔진 것 마냥 피를 흘리며 고꾸라졌다. 그 옆에 있던 코카트리스는 펼치려던 날개에 구멍이 뻥 뚫려 옆으로 고꾸라졌다. 바닥에 빌빌거리던 코카트리스는 뒤에서 달려오는 코카트리스에 깔려 목뼈가 부러졌다.
"감히 나를 기만하고 후방을 공격해?!"
"흥."
륜은 달려오는 펭귄을 향해 활 시위를 겨눴다. 적의 대장처럼 보이는 이를 사살하면 주인이 과연 어떤 포상을 내릴까. 륜은 짧게 심호흡을 하고 남은 마력을 쥐어짜냈다.
새애액---!!
륜이 쏜 바람화살은 그 어느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허공을 날았다. 코카트리스들의 위로 스치듯 날아간 화살의 목표는 당연히 펭귄. 면적이 넓은 만큼, 펭귄이라는 과녁은 몹시 넓었다.
"웨리야--앗!!"
그리고 펭귄은 전혀 피하지 않았다. 바람 화살의 궤적을 읽어낸 펭귄은 손을 높이 들어올려 수도를 내리쳤다.
푸--욱!!
펭귄은 두 개의 바람화살을 땅에 쳐냈고, 살아남은 하나의 바람화살은 펭귄의 옆구리를 관통했다. 바람 소리와 함께 펭귄의 옆구리는 휑한 구멍이 뚫렸다.
"어?"
륜은 순간 눈을 의심했다. 마치 솜이불에 구멍이 뚫린 것 마냥, 펭귄의 옆구리에는 피도 살점도 튀지 않았다. 코카트리스 부대의 대장이라고 생각하기가 무색할 정도로 펭귄은 약했다.
아니다.
"살이...아니야?"
"이건 위장이야, 이 바보야!"
펭귄의 부리가 쩍 벌어졌다. 안에서 검은 빛깔이 비쳤고, 륜은 그 검은 실루엣을 한눈에 파악하고 놀라 자빠질 뻔 했다.
"끼아아앗!"
괴상한 비명과 함께, 펭귄은 륜을 향해 발을 들이밀었다. 코카트리스 들을 도움닫기 삼아 날아오는 날라차기는 륜의 허리를 분질러버릴만큼 빠르고 강력해보였다.
닿으면 죽는다. 륜은 침을 꿀꺽 삼켰다.
"풉."
륜은 절로 웃음이 터져나왔고, 동시에 천장에서 아주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
딱.
륜은 손뼉을 쳤고, 그와 동시에 천장이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뭣-"
"이건 벽이라는 거야, 이 멍청아."
륜은 흙무더기 사이로 보이는 펭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꼭 너랑 닮았지?"
"너어어어----!!"
와르르르ㅡ.
천장이 무너져내렸다. 족히 1m는 넘는 두께의 격벽이 통로에 생겼고, 륜은 급히 뒤로 세 발자국 물러섰다.
쿠---웅!!
륜이 보고 있는 벽이 순간 흔들릴 정도로 벽에 무언가가 크게 들이받았다. 하지만 벽에 구멍이 뚫린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죽을 뻔 했네."
륜은 십년감수한 얼굴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슬라임들이 천장을 무너뜨리는게 1초만 늦었더라면, 아마 륜은 펭귄의 발길질에 허리가 꺾여 영영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 될지도 몰랐다.
"...그럴 수는 없지!"
륜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재빨리 슬라임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작전 2단계 시작! '∩'자 모양으로 계속 천장을 파고 가!"
꾸르륵, 꾸르륵.
슬라임들은 륜의 명령에 따라 자신들이 만든 천장의 터널을 계속 이어나갔다. 륜은 통로를 따라 달리며 활짝 웃었다.
"임무 성공--!!"
벽 너머에서 히스테리섞인 비명이 들려오는 것 같았지만, 륜은 상큼하게 무시했다.
"...아."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또 여자야...힝."
말하지 말까. 하지만 륜은 주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 감히 자신이 발견한 것을 누락하는 행위는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보고하면 분명 좋은 일이 생기리라. 륜은 자신의 보고에 함박웃음을 지을 주인을 생각하며 몸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냈다.
"이히히!"
륜은 직선 통로를 빠져나와, 던전 아래를 달리는 플레어 판테라들의 인도에 따라 던전을 달렸다.
* * *
퍽, 퍽퍽!
펭귄은 푸르카스의 오른팔을 떼서 푸르카스의 대가리를 후려쳤다.
"내 감이 맞잖아! 네가 옆에서 이상한 소리만 안 했어도 엘프년 죽였다고! 이게 뭐야!"
퍽, 퍽퍽.
펭귄이 휘두르는 검은 팔은 푸르카스의 머리를 연신 때리고 또 때렸다. 전혀 아프지는 않지만, 푸르카스는 마음이 아팠다.
"죄, 죄송합니다...."
펭귄이 푸르카스의 말을 듣지 않았다기 보다는, 푸르카스가 하나의 생각에만 집중하고 있어 문제가 생겼었다.
복수.
빨리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생각에, 자꾸만 주변을 살피고 가려는 펭귄과 합이 맞지 않았다. 만약 푸르카스가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천장에 구머을 만들어 후방으로 이동하는 엘프의 존재를 금방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다.
"제가 조금만 오지랖을 안 부렸더라면...."
"정황은 충분히 이해해! 하지만 왜 내 감을 믿지 않은 거냐고!"
퍽, 퍽퍽.
펭귄은 검은 팔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씩씩대며 발로 짓밟았지만, 팔은 흙먼지만 조금 묻을 뿐 전혀 아프지 않았다. 펭귄은 그저 성을 낼 뿐이었고, 푸르카스는 그게 더 죄송스러웠다.
"짜증나! 이 던전, 안드라스고 뭐고 다 박살내버릴 거야! 도대체 뭐야?! 엘프가 왜 던전에서 부하짓을 하고 있는 거야?!"
"그...오크가 있는 걸로 봐서는 오크에게 범해진 엘프가 아닐까요?"
"......너 그냥 오늘 말하지 마라. 그냥 내 감을 믿을래."
"......."
푸르카스는 무안함에 고개를 숙였다. 말한 자신도 어이가 없다 싶을 정도였다. 엘프가 오크에게 범해져서 부하가 되었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펭귄은 무너진 벽 사이로 손을 밀어넣으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아버지-할파스 님이 안드라스를 먹고 싶어서 이런 자존심 상하는 짓을 저질렀다고 해도, 부하인 우리까지 그런 걸 생각하면 안 되는 거야."
파삭, 파사삭!
펭귄이 흘린 물이 벽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푸르카스는 낫을 들고 다가섰지만, 펭귄은 푸르카스를 막아세웠다.
"이거 못 뚫어. 정면으로 가야해."
"예? 아까처럼 뚫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아까처럼 얇은 벽이 아니야. 두께가 이-만 하다고."
펭귄은 양 팔을 쭉 벌리며 자신의 마나로 느낀 거리를 푸르카스에게 알렸다.
"그러니까 엄청 두껍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통로 자체가 무너진 것 같아. 지금 우리 갇힌 거라고. ...정면으로 오라는 것 같네. 그러니까 후방을 막았지."
펭귄은 손을 툭툭 털며 부리를 열어젖혔다.
"안드라스 빼고 다 죽여버리자. 응. 그래. 아무래도 그냥은 못 넘어가겠어."
펭귄은 부리 안으로 손부채질을 하며 씩씩거렸다.
"조금 열 좀 식히고 가야겠어. ...아으, 여기 왜 이렇게 뜨거워? ...벗어야겠네. 쳇."
펭귄의 부리 사이로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분명, 사람의 손이었다.
* * *
"주인님!"
"륜!"
나는 흙먼지 가득한 륜을 와락 끌어안았다. 륜은 완벽하게 임무를 수행해냈고, 플레어 판테라들과 합류하여 지하 통로를 통해 무사히 최종 요격실로 돌아왔다.
"들어온 입구는 잘 막아 두었느냐?"
"네! 슬라임들이 마지막에 내려오면서 천장을 무너뜨렸어요. 중간중간 지하 통로도 무너뜨렸고요. 지하로 숨어들어오지는 못할 거예요."
"그래. 설령 4번째 웨이브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일 거다. 후후, 이제 정면에서 맞이만 하면 되겠군. 륜, 배고프지? 이거 먹을래?"
나는 진갈색으로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커다란 알을 륜에게 건넸다. 륜의 가슴만한 알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건 뭐예요?"
"알을 구웠지."
"...누구 알이요?"
"하피랑 안드라스 알."
목장이 안정화되면서 식용 알들이 정상적으로 공급되었고, 나는 그중 몇 개의 알을 챙겨와 지옥불이 들끓는 바닥에 밀어넣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나는 온천에서나 볼 수 있는 맥반석 달걀을 실현하는데 성공했다.
"하나만 먹어도 한 끼 식사는 거뜬하게 할 수 있을 것 같구나. 당장 뭐 찍어 먹을 것이 없는게 아쉽군."
"왜 없어요? 그거 듬뿍 발라서 먹으면 되는데."
"기특한 말이지만 음식 가지고 장난치는 거 아니다."
나는 륜의 귀를 잡고 만지작거리며 륜에게 벌을 내렸다. 조금 아프겠다 싶을 정도로 만져야만이 륜은 쾌감 이상으로 꾹꾹 누르는 자극을 느낄 수 있었다.
"어디보자...레벨 68? 대단하군. 몇 마리를 잡은 거냐?"
"한 셋은 넘게 잡은 것 같은데요. ...주인님, 그보다 기쁜 소식!"
륜은 까치발을 들어 내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륜의 말을 들은 나는 침이 꼴깍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안에 여자 인간이 들었다고? ...이쁘냐?"
"네, 엄청."
륜은 임무를 성공하는 걸로도 모자라 최고의 정보까지 물어왔다.
"그래서 륜. 혹시 원하는 거 있느냐?"
"저 구운 달걀에 그거 한 번 뿌려서 먹어봐도 돼요?"
"......."
결국 성마법을 이용해 조금 뿌려줬다. 장난을 치는게 아니라 정말로 맛있게 먹어줘서 뭔가 더 기분이 요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