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8
잠시 뒤.
나는 륜이 경계를 서고 있는 지하 1층으로 다시 내려왔다. 동굴 벽에 메아리치는 적의 대화를 들을 수 있는 륜이 보초를 서준 덕분에 내가 잠시 쉴 수 있었고, 이제 휴식을 교대할 때가 되었다.
"륜, 루나에게 가서 쉬거라. 이제 내가 망을 보마."
"저는 주인님 곁에서 쉬는 게 쉬는...언니 냄새 나는데요."
"당연하지. 루나 위에서 잤으니까."
"초콜릿 향이 진하게 나는 걸요. 주인님, 했죠?"
"어."
"다음은 제 차례에요."
"그래. 1:1로 해주마."
륜에게 금방 들켰고, 륜에게 금방 용서를 받았다.
'빡칠 만 하지.'
자기는 한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적의 용태를 살피고 있었는데, 정작 나는 10분 뒤에 내려오기로 해놓고는 한 시간 동안 루나랑 붕가붕가 하고있었다면 륜의 기분이 어떻겠는가.
'루나처럼 하게 해줄까.'
꿈속에서 륜과 사이단이 함께 나오도록 하는 것도 재미있으리라. 할파스 군단과 전투가 끝나고 난 뒤의 온갖 희망사항을 속으로 삼키며, 나는 륜에게 전황을 물었다.
"적의 용태는?"
"아직 별 움직임이 없어요. 플레어 판테라들이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불을 지피는데, 죽는 듯 죽는 것 같지는 않아요."
륜은 제2 요격실의 땅밑을 가리켰다. 아직까지도 열기가 가득한 구덩이는 사실상 플레어 판테라 말고는 들어갈 수 없는 불지옥이 되었고, 그 불구덩이는 던전 전체의 지하로 가지처럼 뻗어나가 있었다.
"아래에서 구멍을 파내서 불구덩이를 쏘는 건...어렵겠군. 땅밑에 있는 걸 알고 있으니 낫이 박힐 것이야. 위험해."
플레어 판테라들이 워낙 빠르게 달려대는 탓에, 그리고 슬라임들이 파놓은 온돌 구멍이 생각보다 깊은 덕분에 페일 라이더들의 낫은 땅을 관통해도 플레어 판테라들을 찌르지 못했다.
"공격은 불가능해도 약간 구멍 정도는 뚫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떤 거 하시려고요?"
"그냥 사선으로 구멍 만들어서 정찰하는 거지. 이걸로는 보이거든."
나는 시스템 창을 두드렸다. 부하들과 시야가 연동이 되는 만큼, 바닥을 돌아다니는 플레어 판테라들의 시야는 곧 내 시야가 되었다. 대부분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각도였으나, 그것 만으로도 충분히 적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푸르카스 놈은 베이스 캠프에서 쉬고 있는 건가. 망할 놈. 남의 던전에 쳐들어와놓고는 텐트까지 세웠다니. 보통 쓰레기가 아니군."
"멀리서 불을 지르면 어떻게 불타지 않을까요?"
"일정 거리 이상으로 접근하면 눈치챈다. 쟤들도 마냥 바보는 아닌 것 같다. 쯧."
푸르카스는 시체마의 위에서 흉흉한 살기를 뿜어내며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부하들은 텐트 안에서 휴식을 취하는 듯 했고, 그런만큼 텐트를 불태우면 안에 있는 페일 라이더들도 무사하지는 못하리라.
"그런데 가만히 있는다라.... 샤이탄, 이런 패턴에서는 어떻게 한다고 했지?"
[아군의 전력이 적보다 약할 경우, 적이 시간을 주면 최대한 그 시간을 이용해 전력을 강화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래. 방심하는 동안 우리는 힘을 기르는 거지."
아직은 공세를 취할 타이밍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당분간은 수비에 집중해야했다.
시간을 버는 것. 그것이 우리 군단이 살아남기 위한 길이었다.
"그러면 슬슬 공사를 하도록 하지. 륜, 혹시나 적의 움직임이 있으면 바로 얘기해다오. 공사를 즉시 멈추는 한이 있더라도 그 때는 또 다르게 대응해야하니."
꾸르륵.
슬라임들이 다시 흩어졌다. 나는 그들을 일일이 명령을 내리며 지하 1층의 바닥을 더욱 확장시켰고, 또 몇 가지 '기믹'을 즉석에서 만들어냈다.
"쉽게 뚫기는 어려울 것이다."
뚫으면...상으로 머리에다가 도끼를 때려박아야 하나. 나는 새삼 우스은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공사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시간이 되었다.
* * *
〈포털 앞, 할파스 군단 임시 주둔지.〉
아침이 되었다.
던전 내부는 아침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었지만, 푸르카스는 포털에서 빛이 나는 것을 통해 시각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침 6시 6분 6초.
의미 심장한 시각인 만큼 푸르카스는 남은 병력을 수습해 포털의 앞에 다가섰다. 빛이 반짝이던 포털에서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머리에 하얀색 배, 그리고 머리에 난 노란 부리.
파후우가 봤다면 '뗑컨'이라고 불렀을 존재-펭귄이었다. 크기가 2m에 이르는 대형 펭귄.
"페일 라이더들이 다 죽었다는 건 아버님께 들었어.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송구합니다. 공주님."
푸르카스는 검은 펭귄 앞에 부복했다. 펭귄의 눈에는 순간 짜증이 치밀었고, 습하고 후끈거리는 열기에 펭귄은 주변에 마나를 흩뿌렸다. 펭귄을 중심으로 수증기가 미세하게 피어올랐다.
"어우, 뜨거워. 뭐야. 여기 불쓰는 마물 살고 있어?"
"...그것이."
푸르카스는 자신이 어떤 식으로 적의 간교한 계책에 당했는지 설명했다.
적은 나약하지만 악독하고 잔인하여 함정에 자신들을 빠뜨리고 불을 지르기까지 한 괴물같은 집단임을 강력하게 어필했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자괴감이 들었지만 그게 자신의 자신감을 살리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뭐야. 네가 약해서 쳐발린 거잖아."
"크윽...."
펭귄의 일침에 푸르카스는 더이상 변명할 수가 없었다. 펭귄의 말대로 자신이 강했다고 한다면 이런 졸전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푸르카스는 오히려 자존심만 더 상해버렸다.
"그보다 그건 재미있네. 적이 인간들을 이용해?"
"예. 적들은 인간 모험가들을 동원해 저희 페일 라이더 부대를 공격했습니다. 함정에 빠뜨리고 불을 질러서...."
"네가 어떻게 당했는지는 관심 없어. 그보다 여기 왜 이렇게 덥다니. 들어오자마자 땀이 줄줄 흐르네."
펭귄은 부리를 열고 손으로 안에다가 부채질을 했다. 마나로 주변을 식혀도 금방 데워지는 공기에 펭귄의 체온이 금방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어우, 더워. 던전에 무슨 짓을 한 거야? 너희는 안 더워?"
"...시체마들은 완전히 퍼졌습니다. 저희는 사실상 더이상 돌격이 불가능합니다."
페일 라이더들은 기수와 기마가 떨어질수록 힘이 약해졌다. 따라서 아직은 살아있는 생명체인 시체마들이 더위에 숨을 헐떡일수록 페일 라이더들의 전투력은 바닥을 길 수밖에 없었다.
펭귄은 포털을 넘어 뒤따라오는 병사들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에이, 그러면 괜히 부활시켰네. 쯧."
펭귄의 뒤로 죽었던 페일 라이더들이 다시 전장에 복귀했다. 할파스가 부활시킨 페일 라이더들은 복수를 다짐하며 들어왔다가 뜨거운 던전에 화들짝 놀랐다.
사람 한 명 없다 싶을 정도로 을씨년스럽던 던전이 어느새 바닥에 눕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뜨거워졌다. 아래에서 불의 강이 흐르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제2 요격실에서 시체마가 불타 죽으며 사망한 페일 라이더들이 열기에 침음성을 흘렸다.
"뭐해? 뭐 불타죽었니? ...진짜? 미안하네. 근데 그러면 더 불을 이겨내려고 해야지! 근성이 없어, 근성이!"
펭귄은 팔을 휘저으며 언성을 높였다. 부리가 위아래로 딱딱거리며 페일 라이더들을 향해 비난이 수도 없이 퍼부어졌다. 페일 라이더들은 그저 묵묵히 펭귄의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에이, 이래서야 내가 나서야 하잖아. 푸르카스! 적 병력에 대해 얘기해봐. 던전 구조도 내놓고. 파악 끝나면 내가 갈 거야."
"공주님께서 직접 가신다는...?"
"그럼 내가 가야지 누가 간다는 거야?"
펭귄은 노란 부리를 빛내며 이죽거렸다.
"군단을 이어받을 자라면 당연히 그만큼 활약을 해야하지 않겠어? 잘 봐봐. 내가 안드라스 던전을 박살 내는 모습을."
펭귄의 부리 속 그늘에서 검은 빛이 반짝거렸다.
"잘 봐봐. 할파스 군단의 유일무이한 공주가 어떻게 던전을 이겨내는지."
* * *
"이야, 던전에서 뗑컨을 직접 눈으로 보네."
나는 플레어 판테라들의 시야를 통해 적의 세번째 웨이브를 눈으로 확인했다.
플레어 판테라들은 던전 바닥을 뛰어다니며 알음알음 숨구멍을 만들었고, 그 숨구멍을 통해 나는 시야를 공유하여 적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샤이탄, 저런 마물 혹시 본 적 있냐?"
[아뇨. 신종입니다. 아마 할파스 군단의 고유개체인 듯 합니다.]
"그래.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도 어떻게든 교배했겠지."
아무 곳에나 씨를 뿌려서 만들어낸 뒤틀린 산물이 저 뒤뚱뒤뚱 걸어오는 펭귄일 것이다. 나는 펭귄의 뒤에 따라오는 다른 병력들에 집중했다.
"...펭귄이면 펭귄으로 통일을 하지, 왜 또 뒤에는 코카트리스야."
펭귄의 뒤를 따라오는 마물들은 키가 2m를 훌쩍 넘는 거대 수탉이었다. 검은 깃털 사이사이에는 파충류와도 같은 갑각이 눈에 띄었다. 그 수가 눈으로 대충 훑어도 족히 100은 훌쩍 넘어보였다.
'페일 라이더들은 진짜 맛뵈기였구만.'
코카트리스들은 하나같이 역전의 용사같은 얼굴로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덕분에 아주 작은 숨구멍으로 플레어 판테라들이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걸릴까봐 병력들을 물려야 할 지경이었다. 만약 화염표범들이 들킨다면 펭귄과 코카트리스 부대는 바로 바닥을 파내기 시작하리라.
"아그니에게. 전 화염표범들을 이끌고 '아궁이'로 빠져라. 정찰은 끝이다."
[슬라임들을 지정된 장소로 이동시키겠습니다.]
샤이탄의 지시와 함께 스타킹 안에 들어간 슬라임들이 꾸멀꾸멀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타킹이 길게 이어지는 덕분에 슬라임들은 3성 슬라임 드래곤처럼 길게 몸을 늘어뜨려야만 했다. 스타킹을 입었다고는 해도 사실상 천장에서 적에게 들켜 찔리기라도 하면 바로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상대적으로 수인들보다는 슬라임들을 정찰병으로 쓰는 쪽이 더 심적으로 편했다.
저벅. 저벅.
슬라임들이 천장을 통해 이동하며 바로 아래로 이동하는 적 부대를 발견했다. 슬라임은 가만히 빈 공간을 향해 고개를 내밀었고, 막 통로를 돌아가는 적 병력을 볼 수 있었다.
"약하니까 건드리지 말아야 할텐데. ...통과했냐?"
[펭귄은 눈치챘습니다. 하지만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렇지? ...슬라임들이 약해서 다행이군."
약한 슬라임 따위는 건드리기도 귀찮다 이건지, 펭귄과 코카트리스 부대는 직선 통로의 초입에 들어왔다. 사실상 일직선으로 쭉 달리기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역시 페일 라이더 들에게 한 번 주의를 받은 건지 움직임이 몹시 신중했다.
"슬라임들을 눈치채고도 그냥 지나가다니, 보통 녀석이 아니군."
뒤뚱뒤뚱.
"과연.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텔레포트 한다고 누가 뭐라고 하더니만 딱 그 꼴이야. 아주 신중해."
뒤뚱뒤뚱.
"...거 참새 짹짹도 아니고 드럽게 천천히 오네."
시간이 아무리 우리편이라고 해도, 갑자기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했다.
페일 라이더들은 불과 1분도 지나지 않아 직선 루트를 주파했건만, 닭대가리들은 오열에 발의 방향까지 맞춰 펭귄의 속도에 따라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아마 시속으로 따지면 3km/h 정도는 되지 않을까.
"저거 펭귄 놈 일부러 저러나? 나 빡치게 만들려고?"
[그냥 함정이 있는지 없는지 천천히 살피는 것 같습니다.]
"...에휴. 다행이군. 늦게 오면 올수록 우리만 더 좋지. 좋아. 작전의 2단계로 들어간다."
나는 라스베가스에서 공수한 최강의 무기를 들었다.
"던전 내 오크들은 모두, 무기 들어."
쿵, 쿵, 쿵!
내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오크들은 등에 매고 있던 무기를 들었다. 그건 내가 든 물건과 똑같은 형태의 물건이었다. 베기, 찌르기, 때리기 모든 것이 가능하고 거기에 즉석에서 던전을 공사할 수 있는 최강의 물건.
"지금부터 우리는 삽질을 시작하겠다."
땅 파내는 소리가 최종 요격실을 중심으로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아직 리모델링 안 끝났다."
정면에서 이기기 힘든 적이라고 한다면, 다른 방법으로 때려잡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