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6
잠시 뒤, 그레모리 던전 포털 입구.
"살려줘! 으아악!!"
아미는 비명을 지르며 고통을 호소했다.
"제발, 도와달라고! 죽을 것 같아! 으아악!!"
겉으로는 따가운 신성력에 노출되어 피부가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고, 속으로는 생살이 갉아먹히는 듯한 고통이 연이어 이어졌다. 그리고 내장에 직접 투입된 미약 덕분에 달아오른 몸은 도저히 식을 줄을 몰랐다.
"이 새끼들아, 너희들이 그러고도 내 부하더냐!!"
아미는 눈에 핏발이 가득한 상태로 소리쳤다. 열심히 키워온 부하들은 선뜻 앞에 나서지 못했다. 아미의 위에서 흩뿌려지는 은은한 빛의 기운에 수십의 마물들은 옹기종기 모여 찌그러져야했다.
"저거랑 어떻게 싸워요!"
"신성력을 사용하는 오크라니, 이건 사기야!!"
아미의 부하들이 분통을 터뜨렸다. 아미의 목에 칼을 겨눈 당사자인 갤러해드는 아미의 부하들이 시끄럽게 떠들건 말건, 차가운 얼굴로 아미의 등허리를 짓밟을 뿐이었다.
"커흑, 크허헉!!"
아미는 눈이 뒤집힐 뻔 했다. 뱃속에서 꿈틀거리는 이물감은 벌레가 속에서 기어다니는 것만 같았다. 신성력에 눈이 잠시 먼 사이에 당한 일이라, 적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레모리이이!!"
"나는 또 왜 불러? 시끄럽게."
퍼--억!
그레모리가 구두 앞굽으로 아미의 고환을 걷어찼다. 아미는 소리없이 고개를 바닥에 처박았다. 갤러해드는 아미가 괴로워하건 말건 아미의 목에 검을 겨눈 채 부동자세를 취했다.
"군단장님께서는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응. 그쪽이 상당히 위험한 모양이야. 대신 전갈은 전해받았으니까 됐어."
그레모리는 품에 안고 온 슬라임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럼 시작해줄래?"
꾸르륵.
슬라임은 적당한 크기로 원통을 만들어 땅을 파내려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성인 남자 한 명은 거뜬히 안에 들어갈만한 공간이 만들어졌고, 슬라임은 정확히 '아미가 목까지 파묻힐 만큼' 땅을 파냈다.
"갤러해드, 넣어줘."
"예."
갤러해드는 아미의 목덜미를 잡고 강제로 일으켜세웠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아미는 저항하기 위해 몸을 비틀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퍽, 퍼억!
"끄허어억...."
"우리 군단장 대신이야."
그레모리는 아미의 고간을 향해 좌우로 한 번씩 차올렸다. 순간 콰득 소리가 날 정도로 그레모리의 발길질은 날카로웠고, 아미는 게거품을 물며 축 늘어졌다.
털썩.
아미는 구덩이에 몸이 박힌 채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었다. 팔다리는 여전히 묶여있어 땅을 짚고 빠져나올수도 없었고, 팔다리에 묶인 밧줄을 풀 시간도 없었다.
"이대로 흙을 파묻습니까?"
"아니. 이걸로."
쿵! 검은 토시와 스타킹을 신은 오크 둘이 거대한 슬라임 드래곤을 통째로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레모리는 아미의 정면에 서서 구둣발로 아미의 이마를 짓밟았다.
"끄어억...!"
"남의 던전에 쳐들어왔으면 책임을 져야지. 안 그래?"
"왜 배신을 한 것이냐...그레모리!"
아미는 이마가 밟히고 있음에도 눈을 부라리며 그레모리에게 분통을 터뜨렸다. 갤러해드가 검을 포털쪽의 부하들을 향해 돌린 탓에, 아미는 상대적으로 잠시나마 이야기를 나눌 여유가 생겼다.
"할파스 님을 왜 배신한 것이냐!"
"내가 그걸 말해 줄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그레모리는 발을 좌우로 움직이며 손가락으로 아미의 구덩이를 가리켰다.
"좋은 거 하나 알려줄까? 슬라임 드래곤의 체액은 말이야, 시간이 어어엄청 지나면 그대로 굳어버린다?"
"뭐?"
"부어."
그레모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미는 등뒤에 느껴진 차갑고 께름칙한 감각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려고 해도 돌릴 수가 없었다.
"그냥 조용히 뒤에서 후방 지원이나 하려고 했는데, 너 때문에 내가 상대적으로 무능한 년이 되었다고. 인간은 멋드러지게 활약했는데, 나는 이게 뭐니?"
꿀럭, 꿀럭!
오크들은 슬라임 드래곤의 체액을 구덩이 속으로 밀어넣었다. 아미는 발 아래에서부터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하는 끈적한 감각에 겁에 질렸다.
"이, 이거 뭐야?!"
"응, 공구리라고 하는 거래.
차라리 불구덩이 속에서 타오르기라도 한다면, 차라리 얼음 마법에 걸려 아래에서부터 얼어붙기라도 한다면 이리 무섭지는 않으리라.
"뭔진 모르겠지만 살려줘어어!!"
"응, 살려주려고 이러는 거야. 네가 죽인 오크 아버지가 너 직접 때려죽이겠다고 벼르고 있거든. 그 동안은 살아서 여기 계속 보고 계셔야 하니까 참아줘."
그레모리가 손가락을 튕겨 마나로 만들어낸 얼음 조각들을 구덩이를 향해 던졌다. 점액과 닿은 얼음 조각은 빠르게 주변 점액들을 굳게 만들었고, 아미의 몸은 돌 속에 갇힌 것 마냥 하반신부터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이, 이런, 으아아악!!"
"거 참 시끄럽네. 갤러해드, 뭐 막을 거 없니?"
"잠깐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거기 자네, 이리 오시게."
갤러해드는 슬라임 드래곤에서 점액을 긁어내던 오크의 다리를 가리켰다. 오크는 우물쭈물 하며 갤러해드의 앞에 섰다.
"자네, 어느 부대 소속인가?"
"예! 아더 님 분대에 소속되어있는 아서라고 합니다!"
"그렇군, 자네에게 아더님의 복수를 대신할 기회를 주도록 하지. 스타킹, 벗으시게."
"......예?"
아서는 당황했다. 아더-자신의 부친에 대한 복수와 스타킹을 벗는 것 사이에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을까 잠시 얼을 타버렸다.
"얘, 너는 라스군에 있으면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니? 그거 벗어서 이 새끼 입을 막아버리자 그 말이야."
"...아!"
아서는 급히 자신이 하반신 방어구로 입은 스타킹을 벗었다. 돌돌 말린 검은 스타킹에는 아서가 흘린 땀으로 열기가 풀풀 나고 있었다.
"뭉치고, 입에 쑤셔넣으시게."
"알겠습니다!"
아서는 자신이 벗은 스타킹을 돌돌 말아 구형으로 만들었다. 아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기 시작했다.
"안 돼! 제발! 그것만은!"
"참 나. 너 미쳤어? 하극상 벌여놓고, 우리 군단장 아들 죽여놓고 자비를 바라는 거니? 푸훗,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감사히 생각해."
"으으읍!!"
아미는 이를 악 물고 입술을 꾹 닫았다. 그러자 그레모리는 코를 찡그리며 마나를 아래로 튕겼다.
파지지직!
전격이 아미의 남근을 향해 날아갔다. 아미는 짜릿한 충격에 입이 쩍 벌어지고 말았다.
푸--욱.
"우우우우웁!!!"
"하나는 뱉어낼 것 같은데...저기, 너 얘랑 교대해. 너도 벗어봐."
스타킹 하나가 입에 물려지고, 그 위로 스타킹이 재갈마냥 칭칭 휘감겼다. 아미는 땀내나는 검은 스타킹이 눈을 가린 이후로, 그냥 정신을 놓고 말았다.
- 이런 곳인 줄 알았으면 안드라스 던전을 공격하는데 자원하는 건데.
아미의 의식은 흐릿해졌다. 어쩌면 그에게는 의식을 잃은 것이 축복일지도 모른다.
서걱, 서걱! 화르륵!
"우리 군단장 명령이야. 너희 대장 말고는 다 죽어도 되거든?"
"겁 먹지들 마시게. 깔끔하게 일격으로 다 죽여줄테니."
적어도 그의 부하들이 마녀와 오크 성기사에 의해 몰살당하는 것은 직접 보고 듣지 못했기에.
* * *
시멘트를 구할 수는 없다.
대신 시멘트의 역할을 대신해줄 재료는 있었다. 나는 슬라임 서브 던전에서 슬라임 드래곤 한 마리를 잡아다가 아미를 묻은 구덩이에 붓도록 지시를 내렸다.
'발기한 상태에서 땅에 묻히면 난리가 나겠군.'
목 아래가 미약이나 다름없는 슬라임 점액 속에 굳게 될테니 발기할 때마다 벽에 부딪히지 않을까. 발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주변이 굳게 된다면, 아마 발기할 때마다 물건이 몸과 벽에 눌려 괴사할지도 모른다.
'괴사 하던지 말던지.'
우리 세력을 공격한 걸 생각해도 살려줄까말까 하는데 아더까지 죽였다? 결코 살려둘 수 없다. 무조건 죽여야했지만, 당장 죽이기에는 쟁탈전 적으로 여유가 없으니 죽기 직전인 상태로 계속 살려둘 뿐이다.
'그러면 그레모리 쪽은 상황이 종료된 건가.'
아미의 던전을 통해 새로운 적이 넘어오지 않는 이상 후방은 이제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혹시나 아미의 포털로 이상한 적이 나타날 수 있으니, 지금 당장 그레모리 던전에 있는 병력들을 우리 쪽으로 뺄 엄두는 나지 않았다.
'있는 병력으로 승부를 봐야해.'
유동적인 대처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수비를 위한 최소 인원이라는게 꼭 필요하다. 그 최소 인원이 없다면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모른다.
가령 라스베가스의 주민들이 도망을 시도했다거나.
"주인님, 에일라의 전언이에요. 라스베가스에 있던 직공 열 명 정도가 밤사이 도망치려고 했다고 해요. 여섯 명은 붙잡았지만 네 명은 놓쳤다네요."
에일라가 대군을 이끌고 포털을 넘어온 걸 라스베가스 주민이 인지했던 모양이다. 만약 그들이 도망갈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면, 내가 생각해도 최적의 타이밍은 오크들이 던전으로 빠진 순간이었다.
"전투 중에 도망치려고 했다라...잡은 놈들은 왜 도망갔지?"
"다들 라스를 핑계로 대고 있지만, 스타킹을 세 겹씩 신거나 한 가방 가득 챙겨서 도망쳤대요. 아마 스타킹을 팔아서 한 몫 단단히 챙기려고 하는 것 같아요."
"쯧. 적당한 가격으로 낮춘게 그나마 다행인가."
견물생심이라고, 그들의 눈에는 스타킹이 금덩어리마냥 보였을 것이다.
"됐다. 지들도 제정신이면 어디 봇짐 팔 때 라스베가스에서 직접 가져왔다고는 말 못하겠지. 도망친 놈들의 신상 정보는 기록해두라고 전해라. 언젠가 군단이 대륙을 통일했을 때, 현상수배를 내리겠다."
죄목은 절도죄.
도망을 친 것보다 스타킹을 훔쳐 달아났다는 것이 너무나도 괘씸했다.
"그러면 잡힌 녀석들은 어떻게 할까요?"
"륜아. 집행유예라고 들어봤느냐? 한 번 죄를 지은 자가 있으면 바로 실형을 내리지 않고 유예 기간을 주는 거지."
"아. 그러면 그 기간 동안 다른 죄를 저지르면…?"
"가중처벌을 내리자꾸나. 무슨 수가 좋을까? 죄질이 심하면 구울을 만들어? 아니면 죄질에 따라서 알을 낳게 할까? 하루에 24개씩. 어떠냐?"
"평범한 인간이라면 복상사하지 않을까요?"
"적어도 죽기 전에 쾌감과 함께 죽는 거지. 얼마나 인도적인 죽음 아니냐. 일단 에일라에게 전해라. 못살겠다고 그냥 자기 짐만 챙겨서 도망치려고 했던 놈들은 훈방, 군단의 재물을 건드린 놈은 목장행이다."
라스베가스의 문제는 그걸로 끝이 났다. 하지만 설상가상이라고, 최소 병력의 부족으로 인한 잡음은 라스베가스로 끝나지 않았다.
"플라우로스 님의 전언입니다. ...모험가들에 의해 던전의 위치가 발각되었습니다."
한 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며 부랄도 같이 부활한 플레어 판테라, 아그니(전 플라우로스)는 텐타클 드라실(현 플라우로스)의 보고를 대신 전했다.
"어쩌다 발각이 되었지?"
"저희 쪽에서 최근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그 여파로 숨겨두었던 던전의 입구가 열리면서, 모험가들이 발견해버렸습니다. 아직 잔챙이들밖에 없어서 플라우로스 님이 천장에 묶어두고 있습니다."
"잘했다. 라스화 작업에는 차질이 없도록 해라. 그리고...비비안의 듀라한 부대를 너희 쪽에 보내겠다. 플레어 판테라들은 모두 여기로 집결해라."
나는 수비의 용이함을 위해 일부 부대의 배치를 변경했다. 특히 지금 당장 우리 던전의 지하 1층에 필요한 마족은 플레어 판테라 들이었다.
"아그니. 드디어 너희가 활약할 차례다."
나는 바닥에 한창 공사중인 구멍을 가리켰다.
"이 층 전체를 따뜻하게 만드는 거다."
자고로 손님을 맞이하는데 차가운 방에서 맞이할 수는 없는 법. 그건 집주인으로서 예의가 아니다.
"들어오자마자 아주 지옥같게 만들어버리는 거지. 흐흐흐."
아주 뜨겁게 환영해주마.
* * *
"허억, 허억!"
페일 라이더 부대의 대장, 푸르카스는 포털의 바로 앞에 설치한 진지에 도착하자마자 체력이 다해 엎어졌다. 스켈레톤 워리어가 베이스가 된 푸르카스는 지치지 않지만, 죽어라 달리고 다리까지 다쳤던 시체마의 체력이 방전되었다.
일심동체가 되었기에 어느 한쪽이 죽게 되면 수명이 다하는 운명공동체였다. 적은 그걸 귀신같이 눈치채고 상대적으로 더 고통을 잘 느끼는 시체마를 집중적으로 공격하려 들었다.
"이런, 미친 새끼."
푸르카스는 숨을 헐떡이며 뒤따라오는 생존자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들 자신보다 상태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로브는 전부 불에 타버려서 검은 스켈레톤 워리어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었고, 자신 또한 로브가 반쯤 타버려서 앙상한 다리뼈가 훤히 드러났다.
"...패배다. 젠장, 다음 녀석들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 알겠느냐?"
"예...."
자신을 바라보는 부대원들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푸르카스는 역정을 내며 소리를 질렀다.
"어차피 할파스 님께서 부활시켜 주실 거다!"
"예...."
사기는 바닥을 쳤다. 어떻게 좋은 방법이 없을까 싶은 순간, 푸르카스는 던전의 분위기가 뭔가 이상해졌다고 직감했다.
"...뭐지?"
던전이, 조금씩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 * *
"주인님, 이건 뭐예요?"
"아아, 이것은 온돌이라고 하는 것이다."
========== 작품 후기 ==========
뜨거운 환영(리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