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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비만 오크-235화 (235/800)

# 235

지옥이 있다면 이곳이리라.

아래에서 터지는 불구덩이에 페일 라이더들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시체마들은 다리에 불이 붙은 채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고, 그 위에 올라탄 기수들도 넝마같은 로브에 불이 붙어 난리를 피웠다.

끼이이이익!!

페일 라이더들은 비명을 지르며 구덩이에서 몸을 빼냈다. 우리측에서 원거리 사격 말고는 더이상 견제할 방법이 없어, 기수들은 잽싸게 시체마를 구덩이에서 꺼냈다. 그리고 그들은 도망친 푸르카스의 뒤를 쫓아 던전 반대편으로 달렸다.

"주인님, 또 도망가요!"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꼬리와 전신에 불이 붙은게 부스터라도 되는 것 마냥 페일 라이더들은 처음 돌격했던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반대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죽이지 않으면 불을 끄고 상처를 회복할 게 분명했다.

"쳇!"

어중간하게 놓친 건 아쉽지만, 몇 마리라도 수를 확실하게 줄여야했다. 나는 모험가로부터 건네받은 단검을 잡고 우리의 지근거리에 있는 페일 라이더들을 가리켰다.

"구덩이에 완전히 빠진 다섯! 저 놈들이라도 확실히 죽여!"

우리는 열기를 참아내고 원거리에서 공격을 날렸다. 페일 라이더들이 불에 타들어가면서도 낫을 휘두르며 화살을 요격했지만, 집중적으로 쏟아지는 화살비에는 견디지 못했다.

푸-욱!

내 단검이 페일 라이더의 늑골을 통과해 시체마의 정수리에 꽂혔다. 그리고 그 궤적을 따라 륜의 바람화살이 날아가 단검 주변을 꿰뚫었다. 시체마가 고개를 푹 떨구며 절명하자, 기수 또한 관절과 관절이 떨어지며 무너져내렸다.

"나이스!"

"후우...."

륜은 호흡을 고르며 제2 요격실의 너머를 주시했다. 귀를 쫑긋 세우며 집중하고 있길래, 나는 륜의 엉덩이를 토닥여 긴장을 풀게 만들었다.

"전투는 끝이다. 그만해도 돼."

"그치만 주인님. 혹시나 시간이 되기 전에 공격을 들어오지는 않을까요?"

"걱정마라. 그 정도로 혼쭐이 났으면 다시 돌아오지는 못할 거다. 아마도 네가 얘기한대로 6시간...아니 5시간 이후에나 3번째 웨이브에 섞여서 오겠지."

푸르카스와 급히 도망친 페일 라이더들을 제외하면, 우리가 쓰러뜨린 페일 라이더만 아홉이었다. 전력의 절반 이상을 날려먹었으니, 3번째 공격대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전투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더럽게 피곤하네.'

계속해서 연전이 이루어졌고, 쉴 틈 없이 싸웠다. 모험가들은 페일 라이더들을 이겨낸 것에 기뻐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당장 필요한 건 승리의 기쁨이 아니었다.

"휴식!"

"후아아!"

모험가들은 내가 소리를 지르기 무섭게 바닥에 퍼질러 앉았다. 누군가는 아예 대자로 누워버렸다.

우리의 전투는 고작 1시간이 채 되지 않았지만, 그 짧은 시간동안 살얼음판을 걷는 듯 죽음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다.

"에일라, 피해는?"

"사망자는 없습니다. 다만 페일 라이더에게 당해 치료가 필요한 이들이 많습니다. 20명 정도가 최소 하루는 요양을 해야할 겁니다."

"안 죽은 것 만으로도 용하군. 모험가들은 들어라! 어, 아니. 일어나지 마. 다리 후들거리면서 일어날 거면 그냥 누워서 들어."

다시 싸우게 할 것도 아닌 만큼, 나는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담아 편하게 대하고자 했다. 아무리 상대가 마물이라고 하더라도, 목숨을 걸고 우리 군단을 위해 싸워준 이들을 막대할 수는 없었다.

"너희는 에일라와 함께 라스베가스로 돌아가라. 에일라, 너도 이만 라스베가스로 돌아가다오. 내가 없는 동안 이곳을 지켜줘서 고맙다."

"......휴식을 취하게 한 뒤, 여차하면 바로 포털을 넘어갈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인간 모험가들은 들으라! 이곳에서 10분 휴식 후, 라스베가스로 이동하겠다! 그곳의 강물에서 땀을 씻고 휴식하겠다!"

"우오오...."

인간들은 죽어가는 목소리로 환호했다. 이제 그들은 더이상 던전이 아닌 도시에서 살아가게 되었지만, 전투의 짙은 피로로 인해 환호할 기력도 없어보였다.

"주인님.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아, 릴리냐. ...다친 건가?"

릴리는 어깨를 부여잡으며 내게 다가왔다. 팔다리는 아무런 상처가 없었지만, 어깨의 가죽갑옷은 낫에 베인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리 깊지는 않습니다. 약초를 바르고 치료하기만 하면 됩니다. ...인간은 주인님처럼 회복력이 좋지 않기에, 회복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리긴 합니다만."

릴리의 눈은 아직까지도 바닥에서 불덩이가 용솟음치는 제2 요격실과 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까지 전투가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닌데 후방으로 퇴각하는게 상당히 신경쓰이는 모양이었다.

"걱정마라. 너희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더 위험했어. 큰 신세를 졌다. 나머지는 이제부터 마족들의 일이다."

"주인님, 저...."

릴리는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스레 목소리를 낮추며 내게 속삭였다.

"제가 계속 모험가들을 이끌어도 되겠습니까...?"

"음."

릴리는 자리 욕심이 상당한 여자였다. 마냥 무능하다면 경계를 해야했지만, 릴리는 부하로서 어느정도 충분히 유능한 존재였다. 무엇보다도 릴리를 통해 낳은 아이들을 생각하면 릴리를 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유가 되면 랜슬롯의 동생을 한 번 만들 수 있도록 해보자꾸나."

"네? 그거 저 더이상 안 되는 거 아니었나요...?"

"오크들이 늘어나면 당연히 분대장도 늘어나야지. 이참에 너랑 나랑 같이 기사단 만들어보자 이 말이다. 크흐흐."

엘프도 여왕으로 만들어버리는 시스템이 있는데 하물며 릴리를 진화 못 시킬까. 일부러 인간들에 대해서는 성장을 억눌러왔지만, 라스의 깃발 아래 들어온 인간들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진화 딱 기다리고 있어라. ...뭐, 나이 젊어지는 정도가 끝이겠지만-"

"저, 꼭 기다리고 있을게요!!"

릴리는 눈을 반짝이며 내 목에 입을 맞추고 떠났다. 나는 릴리의 애교에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고, 륜은 뜨뜻한 눈으로 릴리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주인님의 사랑을 받아서 젊어진다는 건 좋은 거죠. 히힛."

"...그러냐. 잠깐만 륜아. 이리로 와보거라."

나는 륜의 귀를 대뜸 붙잡았다. 륜은 다른 인간들의 눈치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역시 전투 이후라 목이 마르시죠?"

"그렇긴 한데 그거보다 잠깐 다른 거 확인하는 중이다."

"칫."

륜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고, 나는 한손으로는 륜의 귀를 만지며 한 손으로는 륜의 입에 손을 집어넣고 혀에 벌을 내렸다. 검지로 륜의 혀를 지긋이 누르니, 륜은 울상을 지으며 살살 눈웃음을 쳤다.

"하호해허호오오...츄릅."

륜은 내 손가락을 나의 쥬니어마냥 삼키며 연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륜의 머리 위에 뜬 정보를 살피며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륜. Lv.66.

진화까지 남은 레벨이 앞으로 4. 이제 '조만간'이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륜의 성장은 독보적이었다. 어쩌면 나조차도 따라잡겠다 싶을 정도로.

"륜, 일단 지금은 공사를 끝내놓고 서로 갈증을 채워주도록 하자꾸나."

"네. 츄릅. 그런데 공사요?"

"그래. ...즉석이기는 하지만, 도망친 페일 라이더들이 쉽게 넘어오지 못할 그런 곳으로 말이야."

제2 요격실에 갖춰진 지옥구덩이를 보고 좋은 계획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계획을 세우기에 앞서, 나는 다른 곳의 전황을 살폈다.

"샤이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우리 쪽은 적을 격퇴했다. 그레모리 쪽은 어떻게 되었느냐? 다른 곳은 문제가 없지?"

[플라우로스 던전, 라스베가스는 아무 이상 없습니다. 아미의 던전에 포털이 열린 그레모리 던전은...주인님께서 직접 보고 판단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만.]

"왜?"

샤이탄의 목소리에는 불안감보다는 난감함이 묻어있었다. 덕분에 그레모리가 패배했다거나 하는 걱정은 없었지만, 나는 괜히 그레모리가 이상한 짓을 저질렀나 걱정이 되었다.

"설마 몸으로 막아냈다거나 하는 일은 없겠지?"

[그건 아닙니다. ...주인님, 아무리 그레모리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설마 주인님을 두고 아미를 상대로 몸을 바치겠습니까?]

"......나 그냥 육탄공격 얘기한 건데? 크흠, 분신을 이용한 자폭이라거나 말이야."

[......저도 비슷한 생각이었습니다. 흠흠.]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설마하는 심정으로 그런 생각을 했듯이, 샤이탄 또한 그런 생각을 아예 안 한 건 아닌 듯 했다.

"흠흠. 아무렴 그레모리라도 그렇게는 안 하겠지. 그래, 그레모리 던전에 무슨 일이 있길래 내가 직접 봐야 할 문제라고 하는 것이냐?"

[아미를 잡았습니다.]

"뭐?"

샤이탄이 전한 소식은 내게 충격과 공포를 남겼다.

[아미를 포로로 잡았습니다. 아직까지 죽이지는 않은 상태입니다.]

"헐."

내가 할파스의 군단을 틀어막고 있는 사이, 그레모리는 이미 하극상을 제압한 듯 했다.

* * *

"그래도 내가 지금 더 강한 녀석을 상대하고 있는데 내가 가는 건 무리지. 안 그래?"

"그러게. 이쪽도 너무 당황스러워서 말이야."

그레모리는 분신을 보냈다. 푸르카스라는 존재를 눈앞에 두고 내가 벗어나기에는 아직까지 전력이 온전하지 못했다.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 봐. 무슨 일이야?"

"오크들이 시간을 버는 동안 갤러해드가 아미를 잡았어."

그레모리 왈.

에일라가 보내준 오크 부대는 그레모리와 함께 맹렬히 싸웠다. 당장 등 뒤에 목장이 있었기에 오크들은 목숨을 걸고 싸웠다. 수많은 비전투원들과 알들을 지키기 위해 오크들은 자신이 다쳐도 한 명을 더 죽일 기세로 전투를 치뤘고, 오크들이 입은 피해는 무지막지했다.

살아남은 오크의 수는 고작 열 다섯. 사망한 오크들 중에는 나의 장남이라고 할 수 있는 아더도 있었다.

"아더가 죽었다고? 어쩌다가?"

나는 잽싸게 인연소환의 목록을 확인했다. 대부분의 오크들은 그레모리의 부하로 등록해놓았지만, 분대장인 내 자식들은 내 던전에 등록을 해두었다.

그리고 인연 소환의 명단-사망자 리스트에는 아더가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갤러해드는 씁쓸하게 웃었다.

"자기 목숨을 바쳐서 갤러해드의 신성력이 아미에게 닿을 수 있도록 도왔어. 사실상 그 방법밖에 없었거든. 미안해."

그레모리는 어쩌다가 아더가 전사했는지 소상히 알렸다. 물 마법을 이용해 아미가 쓰는 불채찍들과 부딪혀 수증기를 만들고, 그 틈을 타서 갤러해드가 신성력을 모아 아미를 찌르려했다.

그래도 아미는 58위 던전의 주인인 만큼 쉽게 당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했고, 아더가 시선을 끌어 불채찍에 목이 졸려 죽었다고 했다.

"아미 어디있어?"

자세히 들은게 화근인지, 지금 당장 달려가서 아미의 목을 졸라 죽여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레모리는 그런 내 심정을 십분 이해한다는 얼굴로 위를 가리켰다.

"내 던전에. 아주 요긴하게 써먹고 있어."

"써먹어? 어떻게?"

"인질로."

그레모리의 말에 나는 분노가 살짝 가라앉았다. 곱게는 죽이지 않을 것이니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고, 포로가 아니라 인질로 써먹고 있다는 게 더욱 마음에 들었다.

"누굴 상대로 인질을 써먹어? 아미 본인을?"

"그래. 적 부하들이 생각보다 충성심이 대단하던 걸?"

그레모리는 내 앞에 수정구 하나를 놓고 마나를 끌어올렸다. 시야가 연동되는 것인지, 그레모리 던전의 포털 입구에 대치중인 마물들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마라! 거기서 움직이면 이 놈의 배는 터진다!]

[크윽, 우오오!!]

아미는 사지가 묶인 채 바닥에 벌레마냥 꿈틀거리며 괴로워했다. 갤러해드는 아미의 목 위에 검을 겨눈 채 맞은편 포털에서 넘어오는 마물들을 향해 으름장을 놓고 있었다.

"과연. 신성력을 계속 뿌리고 있으니 아미가 날뛰지 못하는 거군. 그런데 그런 것 치고는 너무 괴로워하는데?"

"저놈 뒤에다가 그걸 넣었거든. 크흐흐."

그레모리는 입꼬리를 비틀며 아미를 비웃었다. 손가락은 자신의 엉덩이쪽을 향했고, 나는 아미가 아더를 한 번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살짝 불쌍해졌다.

"직장을 통한 흡수가 그렇게 엄청나다고 하던데."

"그래? 그건 몰랐네. 그럼 다음에 나한테 실험해 봐."

그레모리는 후의 일을 이야기할 정도로 여유가 넘쳤다.

"그런데 뭘로 넣은 거야?"

"스카 트올로지 안에 슬라임 점액 꽉꽉 채워서 거꾸로 올라가게 만들었지."

"......잘했다, 그레모리. 아더를 죽였는데 고작 때려 죽이는 걸로는 부족하지."

아미의 청년막은 벌레에게 파먹히고 말았다.

"그래서 그레모리야, 내가 판단해줘야 할 문제가 뭐냐?"

"이건 갤러해드 제안이야. 제법 괜찮기도 하고. 너도 느꼈겠지만, 쟁탈전이 끝났다고 해서 며칠간 회복할 시간이 있는 건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

당장 나조차도 바퓰라의 던전을 털었다가 쟁탈전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로 할파스와의 쟁탈전이 시작되었다.

"만약 우리가 아미를 쓰러뜨린다고 하더라도, 금방 바로 할파스 군단의 또다른 녀석이 올 수 있겠지? 그럼 이건 어때?"

그레모리는 수정구 속 아미를 가리키며 손으로 목을 그었다.

"저렇게 아미를 인질로 잡고 버티는 거야. 그리고 네 쪽 전쟁이 끝나고 나서 싹다 죽여버리는 거지. 그러면 적어도 후방이 공격당할 일은 없을 거 아니야?"

"......제법이군. 샤이탄, 행여나 포털이 두 개 이상 열릴 가능성은 있나?"

[불가능합니다. 쟁탈전에 의한 포털은 무조건 하나로 끝입니다.]

즉, 아미와의 포털이 연결되어 있는 이상 그레모리 던전으로 공격을 들어오는 적은 아미의 군세가 끝이나 마찬가지.

"좋구나. 좋은 계획이야. 하지만 거기에 더 살을 덧붙이자꾸나."

나는 바닥을 한창 공사중이던 슬라임을 하나 꺼내 그레모리에게 넘겼다.

"일단 공구리부터 치자고. 아미가 빠져나올 수 없게. 그리고...."

나는 갤러해드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아미의 부하들을 가리키며 손으로 목을 그었다.

"아미 빼고 그냥 싹다 죽여버려."

"...완벽하네."

그레모리가 나를 향해 활짝 웃었다. 그 미소는 5연 절정을 갈 때보다도 훨씬 더 생동감 넘치는 미소였다.

"그래야 내 주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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