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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비만 오크-233화 (233/800)

# 233

"마물끼리 합체를 시킨다고?"

"정확히는 짝을 이루도록 하는 겁니다. 전우조라고 할수도 있겠지만, 서로 다른 두 개체를 하나로 만드는 겁니다."

페일 라이더.

3성 스켈레톤과 3성 시체마의 조합. 4성은 불가능하지만 3.5성 정도의 성능을 낼 수 있다는 샤이탄의 말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럼 우리도 가능한 거냐?"

"예. ...대신 한 쪽이 죽으면 다른 쪽도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맙니다."

잠시 지하 1층으로 내려온 샤이탄은 바닥에 쓰러진 네 기의 페일 라이더를 가리켰다. 나와 하서스에 의해 척추를 뽑아버린 기수가 죽어버리자, 아래의 시체마는 얼마 지나지 않아 뼈만 남기고 소멸해버렸다.

둘이서 하나. 완전히 둘을 뒤섞어버리는 방식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의 개체로 묶어버리는 마법같은 방식이었다.

"만약 우리 쪽에서 운용한다면 워울프와 유니콘들을 타고 다닐 전용 부대를 육성해야만 하겠군."

"한 번 설정을 하고 나면 영원히 떨어뜨리지 못합니다. 그...반경 200m만 떨어져도 둘 다 힘이 압도적으로 줄어들고 맙니다."

"그건 좀 그렇군."

아무리 전우조라고 해도 24시간 내내 붙어있기는 곤란했다. 상황에 따라 조합을 달리하고 유동적으로 대처하는게 우리 군단의 병력 구성인 만큼, 아예 고정된 부대를 운용하는 것은 조금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였다.

"힘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지. 당장 이 전투에 크게 쓰일 것 같지는 않으니 차차 생각해보도록 하자. 너희들은 크게 다친 곳 없느냐?"

"주인님이 앞에서 공격 다 받아내셨잖아요."

륜은 붉게 긁힌 내 옆구리를 보며 울상을 지었다. 피는 나지 않고 손톱으로 세게 긁은 것 마냥 허리에 긴 자국이 생겼다. 페일 라이더의 낫이 긁고 간 흔적이었고, 최강의 방패인 뱃살 덕분에 무사히 견뎌낼 수 있었다.

"나야 이건 다친 것도 아니지. ...하서스는 조금 그렇지만."

페일 라이더의 검고 낡은 로브를 뒤집어 쓴 하서스는 후드를 뒤집어 써서 머리를 가리는 것도 모자라 현재 원래의 투구에서 다른 투구로 바꿔 쓴 상태였다.

'호빵 머리가 얼마나 잔인한 건지 알겠군.'

잘려나간 단면이 고스란히 보이는게 상당히 역했다. 나는 모험가 부하(예정)들을 위해 하서스의 뚜껑을 이중 삼중으로 덮었다. 하서스는 다행히 자신의 머리를 가리는 걸 충분히 이해해줬다.

"구울 기사가 투구에 머리까지 잘려나갈 정도로 강력한 공격들이다. 다행히 그 수가 많지는 않지만, 공격력 하는 대단해. 그러니까 내가 선두에 서야한다."

눈에 들어온 페일 라이더의 수는 13. 그 중 넷을 으깨버렸으니 이제 남은 놈은 9마리 뿐이다. 그리고 그놈들 중에서 대장처럼 보이는 개체도 있었다.

"륜, 기억하느냐? 그 뾰족한 투구를 쓰고 있던 놈."

"그 퇴각하라고 소리지르던 녀석이요?"

"...응?"

나는 순간 륜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페일 라이더들은 그저 한 번 들이박고 네 명이 박살난 뒤 곧장 기수를 돌렸다. 그 어떤 고함도 명령도 들리지 않았다.

"너 혹시?"

"네. 잘 들려요. 지금도."

륜은 귀를 쫑긋 세우며 까딱거렸다. 아무래도 륜은 이제 우리 던전의 마물 뿐만 아니라, 내 귀에는 들리지도 않는 적 마물의 대화마저 들리는 모양이었다.

"하이 엘프 청력 상당히 좋네. 역시 귀 덕분인가?"

"으읏, 지금 만지시면."

워낙 많이 만져댄 바람에 살짝 누르기만 해도 복숭아 향기가 새어나올 정도였다. 륜의 귀는 사실상 스위치가 되었고, 그렇게 만든 장본인은 나였다.

"륜, 혹시 또 들리냐?"

"네. 메아리쳐서 들리기는 한데...자꾸 만지시면 집중 못 해서 안 들려요."

나는 잽싸게 손을 놓았다. 나와 에일라, 그리고 모험가들은 모두 숨소리조차 죽이고 륜이 집중할 수 있도록 침묵했다.

"......들려요. 그, 우회로를 찾아보고 없으면 30분 뒤에 다시 공격한다고 하네요. 만약 그래도 뚫지 못하면 여섯 시간 뒤에 후속 팀과 함께 돌격할 거라고 해요. 적 대장의 이름은...풀가스?"

"푸르카스 일 겁니다. 50위 던전의 주인입니다."

륜이 들은 청각 정보를 샤이탄이 교정했다. 그리고 나는 새삼 내가 앞에서 틀어막지 않았으면 무슨 사단이 일어났을 지 살짝 기가 질려버렸다.

"씨발, 지금 짬때리는 거에도 발리게 생겼네. 그레모리랑 등급 차이가 고작 6개 밖에 안 나는데 뭐 이래? 푸르카스 놈의 부대는 할파스 군단 아래에 들어가면서 전력도 조금 깎였을 거 아냐."

"그레모리 때도 주인님께서 활약하신 거를 제외하면 사실상...."

"그래. 요행으로 이기기는 했지."

침대에서 2차전을 벌여 이긴 덕분에 그레모리가 아군이 되기는 했지만, 명백히 수컷에 까마귀로 확인된 할파스를 침대 2차전을 벌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렇다고 안드라스를 던져줄 생각도 없었다.

"우선 30분 뒤에 올 놈들을 막자꾸나. 샤이탄, 마석 수급은 어느정도 진척되었지?"

"...송구합니다. 이제 스켈레톤 던전 2회, 슬라임 던전 1회를 돌파했습니다. 안드라스 던전은 한창 진행 중입니다."

"아직 시간이 걸리겠군. 그럼 어쩔 수 없다."

나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1층에 있는 그 녀석들, 싹다 긁어 모아!"

작전명, 꿩 대신 닭.

"30분 되기 전에 모든 작업을 끝내겠다!"

내 지시에 따라 모든 부하들이 시시각각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간을 벌기 위해.

* * *

〈쿰처쿠 척의 던전 지하 1층, 포털 입구 근처.〉

"10분 내로 임시 진지를 구축하라. 진지 마련 이후 적진을 향해 진격하겠다."

우회로를 찾겠다는 야심찬 계획은 허탕으로 끝났다. 푸르카스는 던전의 구조에 대해 확실하게 파악했고, 모험가 부대를 뚫지 못하면 다음 층으로 갈 수 없다는 걸 분명히 깨달았다.

'보험을 들어야 해. 뭔가 이상하다.'

던전의 구조는 들리는 소문과는 조금 다르지만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침입자가 시간을 허비하게 만들기 위해 빙빙 꼬아놓은 미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일자로 쭉 이어진 통로는 분명히 안드라스 던전의 구조가 확실했다.

하지만 그들을 맞이하는 적은 안드라스의 부하들이 아니었다. 할파스의 저주로 머리가 할파스의 머리처럼 변한 안드라스 종 또한 아니었다.

"설마 군단인가?"

푸르카스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쩌면 안드라스의 세력이 어떤 군단 아래에 들어간 것은 아닌가.

'그레모리와 동맹을 맺은게 아니라, 그레모리와 하나의 군단으로 합쳐진 것이라면?'

적은 안드라스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63위 안드라스, 56위 그레모리. 거기에 어쩌면 또 다른 던전의 주인이 하나-혹은 복수로 힘을 합쳤을 가능성이 있다. 아랫것들이 삼삼오오 모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할파스가 했던 것처럼 고위급 존재가 두 세력을 자신의 군단으로 끌어들였을 가능성도 있다.

'설마 페넥스가?'

어쩌면 할파스를 죽이겠다고 벼르고 있는 37위 페넥스가 수작을 부렸을지도 모른다. 푸르카스의 머리는 맹렬히 돌아가기 시작했고, 후에 있을 사태에 대비해 사전 작업은 철저히 해둬야했다.

'아미 쪽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겠군.'

위에서 찍어누르는 이쪽과 달리, 58위 아미는 그레모리에게 하극상을 일으켰다. 할파스는 아미에게 자신의 간부를 내어주면서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푸르카스의 생각이 깊어지는 동안, 페일 라이더들은 말에 올라탄 상태에서 열심히 안드라스 던전에 진지를 구축했다.

"주인님, 진지 구축이 끝났-"

퍼-억.

부관은 날의 등으로 가슴팍을 얻어맞았다. 푸르카스는 낫을 부관의 목에 겨누며 으름장을 놓았다.

"너의 주인은 할파스 님이다. 나의 주인도 할파스 님이지. 뭐라고 했느냐?"

"...실례했습니다. 대장님."

"그래."

푸르카스는 낫을 거두고 기수를 돌렸다. 미로를 빠져나가 긴 통로만 지나면 모험가들이 있다.

"이번에는 내가 선두에 서마. 오크는 내가 잡을테니, 너는 그 구울의 목을 날려라. 나머지는 인간들을 도륙하라. 다 잡으면...생기를 먹어 치워도 좋다."

"""우오오오오!!"""

지쳐있던 페일 라이더들이 푸르카스의 허락에 환호하기 시작했다. 군단에 들어간 이후로 딱히 생명체의 기운을 먹은 적이 거의 없었고, 매번 고블린이나 슬라임같은 저급의 생기만 먹으며 간에 기별만 보냈다.

이미 죽어 인연 소환의 명부에 보내진 놈들을 제외하면 한 명당 족히 5명씩은 먹고도 후식으로 배를 채울 수 있으며, 하물며 인간은 페일 라이더들에게 최고의 특식이었다.

"진격한다."

푸르카스가 가장 먼저 시체마의 배를 박차고 치고 나갔다. 직진 통로를 달려나가며 죽음의 기운을 널리 퍼뜨리니, 그 손에는 2m가 훌쩍 넘는 거대한 검은 낫이 만들어졌다.

다그닥, 다그닥!

푸르카스의 뒤를 따르는 여덟 페일 라이더들은 말발굽 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푸르카스의 뒤를 따랐다. 그들 모두가 푸르카스보다는 작지만 거대한 낫을 들고 있었고, 구울 나이트의 머리통 정도는 사과 자르듯 잘라버릴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쏴아아아----!!

푸르카스는 기선제압을 위해 전방에 죽음의 기운을 퍼뜨리며 돌격 자세를 취했다. 비록 기병창에 비해서는 돌파력이 부족했지만, 시체마가 달려나가는 힘을 이용해 낫을 휘두른다면 그 절삭력은 예사롭지 않을 것이다.

끼아아아악!!

신속하게 직진 루트를 주파한 시체마들이 매끄럽게 우회전으로 길을 돌았다. 전투의 흔적이 즐비한 공터를 빠르게 지나니, 마찬가지로 나온 공터의 맞은 편에 금발의 여기사와 하이엘프 하나가 빠져나가는 통로를 지키고 있었다.

'가소로운 것들.'

두 여자를 내어놓고 도망쳤구나. 푸르카스는 시체마의 배를 발로 차며 더 속도를 높였다. 낫으로 머리를 날릴 것도 없이 말에 치여 죽게 만든 생각이었다.

"어디 한 번 쏴보거라!"

하이엘프는 푸르카스가 일갈하기가 무섭게 활을 들어올렸다. 푸르카스는 순간 죽음의 기운이 물씬 풍겼지만, 너무나도 약해보이는 하이엘프의 모습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설령 죽더라도 할파스가 부활시켜 줄 수 있으니 두려울 게 없었다.

파아앙!!

활 쏘는 소리가 무언가 폭발한 것처럼 공동을 울렸다. 푸르카스는 낫을 비스듬히 세워 보이지 않는 바람의 화살의 궤도를 향해 휘둘렀다.

서걱!

하이엘프의 바람 화살은 반으로 갈라져 힘을 잃었다. 하이엘프는 자신의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자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고, 푸르카스는 낫을 빠르게 회수해 자세를 잡았다.

'활 째로 베어버릴까.'

화살을 갈랐던 것과 똑같은 각도로 베어버리리라. 푸르카스는 낫을 꽉 붙잡았다. 이제 조그만 더 달려나가면 하이엘프의 앞에 닿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시체마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발을 살짝 들어올린 순간.

"지그으으음---!!"

여기사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천장에서 무언가가 후두둑 쏟아졌다. 푸르카스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무언가에 낫을 휘둘렀다.

첨벙!

물 튀기는 소리와 함께, 푸르카스는 미끌거리는 무언가를 잘라냈다. 미끌거리는 무언가.

"슬라임?"

정확히는 슬라임의 점액이었다. 천장에서 점액은 폭우처럼 쏟아지기 시작했고, 페일 라이더들은 천장에서 떨어진 점액을 적의 공격인 줄 알고 고삐를 잡아당겼다.

히히히힝!!

시체마들이 상체를 들어올리며 뒷 발로 섰다. 천장에서의 기습이 고작 슬라임 점액이라는 것이 몹시도 당황스러웠지만, 바닥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감각이 시체마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뭐, 뭐야?!"

"이거요."

어째서일까. 하이엘프의 말은 이미 죽은 망령이나 다름없는 페일 라이더의 귀에 쏙쏙 들이박혔다. 맑고 청명한 목소리였으나 그 저변에는 푸르카스에 대한 조롱이 담겨있었다. 하이엘프는 자신의 치마를 슬쩍 들추며, 그 아래에 있는 검은 옷을 가리켰다.

"이건 스타킹이라고 하는 건데, 특수 제작이거든요?"

하이엘프는 바닥을 가리켰다. 한순간에 천장에서 붉은 불길이 치솟았다. 푸르카스가 천장으로 고개를 들어올리니, 천장 곳곳에 난 구멍에서 조금 덩치 큰 슬라임들이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질겨서 날붙이에는 단단하지만 옷이라서 불에 잘 타고, 또 심각한 약점이 있죠."

찌걱. 하이엘프는 스타킹에 바닥에 튄 슬라임 점액을 슬쩍 묻혔다. 엄지로 문지르니 곧 검은 부분이 녹아내리듯 사라지고 흰 피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렇게 슬라임 점액에 닿으면 구멍이 생긴답니다. ...그래요."

금발의 여기사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푸르카스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신의 주변 상황을 보고 여기사의 말을 깨달았다.

"스타킹 위를 달리니까 어때요? 후훗."

찌직! 찌지직!

하이엘프의 조롱섞인 웃음과 함께, 푸르카스를 비롯한 페일 라이더들의 몸이 진창에 빠진 것 마냥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러게 계속 달리셨어야죠."

구덩이를 숨기고 있던 검은 스타킹들이 슬라임 점액에 녹아내리고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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