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9
58위 던전의 주인, 아미는 그레모리를 상대로 하극상을 일으켰다.
악랄한 마녀로 소문난 그레모리는 오랫동안 그 이름을 지켜온 강자였으나, 그보다도 그 뒷배나 다름없는 할파스가 가장 두려운 존재였다.
- 그레모리를 공격했다가는 할파스의 복수를 당할 수 있다.
할파스는 그레모리와 모종의 밀약을 맺고 있다고 떠벌리고 다녔고, 그레모리는 그 밀약을 통해 할파스의 힘을 하나 둘 빌리며 세력을 늘려나갔다. 아미는 언제든 그레모리를 칠 수 있었으나, 할파스가 두려워서 시도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끈이 떨어졌다.
"크흐흐, 어리석은 녀석. 안드라스와 연계해서 할파스 님에게 저항할 생각을 하다니."
그레모리는 할파스를 배신했다. 서로 이용할 생각으로 밀약을 맺기는 했지만, 할파스가 ★★★★ 고레벨 마물을 빌려줬음에도 돌려주기는 커녕 죽여버리고 할파스와 거래를 한 값도 치르지 않았다.
'어리석은 것.'
순순히 안드라스를 공격해서 할파스에게 바쳤다면 56위의 자리는 커녕 그보다 훨씬 윗단계인 45위 언저리는 노려볼 수 있었을 것이다.
"자존심 때문에 일을 그르쳤구나, 그레모리!"
하지만 그레모리는 안드라스를 치지 않았다. 오히려 아미의 냉철한 통찰에 따르면 안드라스와 동맹을 맺었다고 보는게 더 적절했다.
"손을 잡고 할파스 님께 뒷통수를 날렸어!"
안드라스는 할파스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그레모리 또한 할파스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보이지 않는 하극상을 일으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고로, 내가 싹을 자르기 위해 왔도다!"
아미는 불이 타오르는 채찍을 전방으로 휘둘렀다. 아미를 직접 맞이한 그레모리는 소문과 달리 낙타는 타지 않은 채, 직접 마도서를 들고 아미를 요격하러 나왔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쏴아아!
그레모리의 마도서 페이지가 넘어가기 무섭게 막대한 양의 물줄기가 치솟아올랐다. 불의 채찍은 물의 방벽을 두드리고 힘을 잃었고, 아미는 역정을 내며 채찍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등급은 내가 낮을 지 몰라도! 내 세력은 너보다 훨씬 강하다! 얘들아!"
아미의 주변으로 마물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불타오르는 뱀을 채찍처럼 손에 들고 있었다.
"박살내버려!"
아미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부하들은 불타는 뱀채찍을 마구잡이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물의 방벽은 금방 수증기를 내뿜으며 약해지기 시작했고, 그레모리는 입술을 깨물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크윽...!"
"약하도다!"
아미는 채찍 사이로 달려 자신의 뱀채찍을 세로로 휘둘렀다. 물의 방벽이 좌우로 갈라지기가 무섭게, 아미는 빛처럼 달려 그레모리의 멱살을 붙잡았다.
"흐하하, 벌써 몇 번째 분신이냐?!"
"세 번째. 숫자도 못 세니? 등신."
"압도적으로 패배하니 현실을 깨닫지 못하는군! 고작 하는 게 모욕이라니!"
"퉤."
그레모리는 아미의 얼굴을 향해 피가 섞인 침을 뱉었다. 분신이지만 그 의지 하나는 충분히 전달할 수 있었다.
"...이 시건방진 년이!"
짜--악!
아미는 그레모리의 뺨을 채찍으로 후려쳤다. 빰에 붉은 실선이 생기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레모리의 얼굴 살은 움푹 패여버렸다. 분신이라는 것을 안 이후로 아미의 공격은 손속에 잔혹함이 늘어만 갔다.
"네 년의 마법 덕분에 산 줄 알아라! 언제까지 분신만 계속 보낼 수 있을 것 같으냐!"
"하아, 하아."
그레모리는 달뜬 숨을 내쉬었다. 얼굴에 피가 줄줄 흐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열락에 빠진 듯한 소리에 아미는 잠시 기가 죽었다.
"뭐, 뭐야?"
그레모리는 설마 맞는 것에 쾌락을 느끼는 존재였나? 아미의 머릿속에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고, 놀랍게도 그 추측은 진실이었다.
"하아, 하아. 젠장...분신 감각 설정을 잘못했어."
툭, 투둑.
그레모리의 치마 아래로 물방울이 툭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미는 그 물방울의 정체를 깨닫고 경악했다. 그리고 멱살을 잡고있던 그레모리를 멀리 집어던졌다.
"이 더러운 년 같으니라고! 그레모리, 네 년을 내 수하로 들이려던 내가 생각을 잘못했다!"
"하하, 하하. 그거 안 됐네. 미안하지만 너는 나를 감당할 수 없거든."
그레모리는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바닥을 굴렀다. 마도서는 불에 타들어가기 시작했고, 더이상 그레모리의 분신이 활약할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착각하지 마. 아직 너 이긴 거 아니야. 고작 그걸로 나를 이겼다고 생각하는 거야? 오산이지."
"채찍에 맞아봐야 정신을 차릴...아니지, 그러면 기뻐하면서 지리겠지. 이 변태같은 년!"
"이 지옥같은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변태가 되야만 했지. 흐흐, 너 그거 알아? 솔로몬 님은 말이야, 사실 여러군데 씨 뿌리고 다니는 녀석을 좋아하신대."
"이 녀어어언!!"
아미는 얼굴이 시뻘게져 채찍을 휘둘렀다. 그레모리의 어깨에 불붙은 뱀이 스쳐지나갔고, 그레모리는 어깨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 고개를 푹 떨구었다.
"끄으으윽, 흐응, 흐으윽! 고통을 쾌감으로 만들었더니...!"
"정상이 아니구나, 비정상이야! 네 말대로라면 솔로몬 님께서 너같은 녀석을 좋아한다는 말이 아니더냐! 인정할 수 없다! 마왕님의 명예를 더럽히지 마라!"
"...인류 연합과 전쟁일으키는 것도 여신 따먹겠다고 하는 건데 지랄은."
그레모리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다리는 후들후들거렸지만, 아직까지 설 힘은 남아있었다.
"너 내가 왜 계속 분신으로 시간 벌었을 것 같아...?"
"흥! 무슨 짓을 저지르든 내 적수는 되지 못한다!"
"...그래?"
짝. 그레모리는 손뼉을 쳤다. 분신은 금방 마나가 되어 흩어졌고, 반대편에서 그레모리가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유니콘을 몰고 나타났다.
"뭣? 변녀가 유니콘을 타고 나타나...?"
"변녀라니, 말이 심하네."
그레모리는 옆으로 선 유니콘의 위에서 다리를 꼬며 여유를 부렸다.
"분신으로 시간 버는 동안 내가 뭘했게?"
"그러니까 무슨 짓을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
아미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귓불에서 화끈한 감각이 달아올랐고, 귓불을 스쳐간 무언가는 아미의 바로 뒤에 있던 부하의 미간에 꽂혔다.
퍼---억!
"이, 이건...?"
"그래, 돌팔매질이라고 하는 거야."
붕, 붕붕, 붕붕붕-
그레모리의 뒤로 검은 스타킹에 돌덩이를 집어넣고 빙빙 돌리는 오크들이 떼거지로 나타났다.
"어디 한 번 내가 당한대로 고스란히 당해보라고."
"어디서 이런 오크들이?!"
"어디서 왔겠어?"
그레모리는 두 팔을 벌리며 외쳤다.
"라스베가스!"
* * *
빠르게 퇴각을 해야했다. 차원석을 챙긴 것 이외에는 따로 무언가를 챙길 겨를이 없었다.
"군단장님, 이 여인은?!"
"아 씨...!"
기절한 발라크는 막말로 짐덩어리였다. 타락 천사가 발라크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입 한 번 대고 끝날 존재였지만, 그래도 마족이 되었는데 버리고 가기에는 미안했다.
시간만 여유롭다면 마석들을 전부 챙겨갈 수 있겠지만, 한 손에 들고 갈 수 있는 건 사자들의 사체나 발라크 뿐이었다.
"젠장, 모르겠다! 갤러해드, 기네비어! 일단 챙겨!"
거구의 사자를 들고 달리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따라서 과감히 바퓰라의 사체는 포기하고, 나는 상대적으로 무게가 적은 발라크만 챙기도록 지시를 내렸다.
"감사합니다!"
동변상련의 입장이나 마찬가지인 기네비어는 기뻐하며 발라크를 챙겼다. 여신의 사제인 만큼 한 때는 여신의 추종자였던 천사를 챙기고 싶은 사명감 같은게 엿보였다.
'사제들이란 대단하군.'
기네비어에게서는 음심이라고는 일절 보이지 않았다. 랜슬롯의 남편이라면 응당 그래야하겠지만, 그걸 이런 위급 상황에서 직접 실천하는게 대단하다싶었다.
"기네비어, 적에 대한 응전은 너와 갤러해드에게 맡기마."
"예?"
"루나의 신성력을 회복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너희들은 그 시간을 벌어다오."
워낙 많은 양의 신성력을 쏟아부은 탓에 루나의 신성력은 이제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난사에 가깝게 사용하여 낭비했기 때문이지만, 던전 공략이 끝나자마자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면 결코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아오, 쓰벌 드럽게 기네!!"
바퓰라 던전의 구불구불한 일자형 길에 나는 화가 치밀었다. 우리가 바퓰라 던전을 거꾸로 달리는 동안 내 던전에 무슨 일이 일어난게 아닐까, 그레모리는 또 괜찮을까 너무나도 걱정이 되었다.
"젠장, 시스템으로 연락도 지금 안 돼."
"주인님, 진정하세요."
"그래.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우리는 젖먹던 힘까지 사용하여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전투를 벌이게 된다면 회복도 하지 못하고 전투를 치르게 되겠지만, 그건 일단 던전에 도착하고 난 뒤에 판단할 문제였다.
"륜, 내가 바퓰라 던전의 포털을 어디에 열었지?!"
"슬라임 서브 던전 옆이요!"
라스촌 방향. 금방 공동을 지나 지하 1층으로 내려가면 될 위치였다. 샤이탄이 남겼던 말을 생각하면 적은 지하 1층의 가장 먼 곳에 포털이 설치된 게 틀림없었다.
'지금은 완전히 비어있는데!'
샤이탄 말고는 병력들을 지휘할 간부급 개체도 없고, 병력들도 핵심 전력이라고 할 수 있을만한 녀석들은 따로 배치되었다. 포털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심적으로 불안해졌지만,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다리는 멈추지 않았다.
"주인님, 포털!"
"그래!"
이미 던전 쟁탈전은 우리의 승리로 끝이 났으니 포털은 양방향 포털로 바뀌어있었다.
"우오오오!"
던전의 주인이 돌아왔노라. 부하들에게 나의 목소리를 널리 알려 안심시키기 위해 나는 일부러 목청껏 포효했다. 만약 포털 앞에 누군가가 있다고 한다면 바로 날려버리리라.
"내가 간다!!"
사라락--!
시야가 한순간 암전되었고, 나는 내 던전에 도착하자마자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나 벌써 먹힌 걸까?
"샤이타------안!!"
[오셨군요!]
샤이탄은 내 목소리를 듣고 바로 반응했다. 샤이탄의 주변에는 오크들이 내지르는 고함소리와 창칼이 부딪히는 전장의 피냄새가 자욱했다.
[지하로 와주십시오!]
"오냐!"
의문을 가질 시간은 없었다. 샤이탄이 지하라고 했으니, 지하 1층으로 무조건 달려야했다. 내 뒤로 바퓰라 던전에 공격을 들어갔던 멤버들이 포털 너머로 복귀했다.
우우웅!
공격대가 모두 귀환하자마자 야속하게도 포털은 닫혀버리고 말았다. 바퓰라 던전의 핵심인 차원석이 내 손에 있는 탓이기도 하겠지만, 다른 던전과의 쟁탈전이 시작됨으로 인해 발생한 현상이리라.
'귀환은 하게 해줘서 고맙군.'
행여나 포털이 닫히게 된다면 대륙 전체를 횡단하여 내 던전으로 돌아올 뻔 했다.
'쟁탈전 새로 시작되었다고 포털 바로 닫히는 식이었으면 좆될 뻔 했어.'
다행히 그런 불상사까지는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친 던전주인적인 설계를 해둔 솔로몬을 향해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리고 원코인 찬스를 받은 만큼, 두뇌를 맹렬히 회전하여 빠르게 움직여야했다.
"루나는 발라크를 포로 감옥에 집어넣고 침대에서 휴식! 신성력 어느정도 회복되면 바로 내려와!"
"알았어. 나 갈 때 까지 무리하지 마?"
"물론!"
루나 개인도 물론 강하기는 하지만 신성력을 회복하는 쪽이 더 중요했다. 기네비어는 발라크를 루나에게 인계했고, 나를 뒤따라 공동으로 달렸다.
공동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대신 어찌된 영문인지 유니콘의 형태로 모습을 바꾼 암두시아스와 두 마리의 워울프가 우리를 보고 활짝 웃고 있었다.
"뭐야?"
"샤이탄 님이 보냈습니다! 타세요!"
"오냐!"
나는 륜을 안고 잽싸게 암두시아스의 위에 올라탔다. 기네비어와 갤러해드도 아주 멋드러지게 워울프의 등에 올라탔다. 암두시아스는 내가 올라타자마자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전황은?!"
"저도 모릅니다! 샤이탄 님이 여기서 대기하다가 주인님 오시면 모셔오라고 하셔서!"
"칫!"
암두시아스에게 화를 낼 문제는 아니었지만, 나는 아쉬움에 암두시아스의 배를 발로 두드리며 달리기를 재촉했다.
"일단 달려!"
암두시아스와 두 워울프는 공동을 지나 매끄럽게 유턴을 하며 지하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도착했다. 암두시아스는 도착과 동시에 모습을 여인으로 변했고, 나는 암두시아스의 허리를 붙잡고 계단을 황급히 내려갔다.
"죄송해요!"
"죄송할 문제가 아니다! 던전이 거지같은 거지!"
세 칸씩 뛰어내려가며 지하 1층으로 진입하니 진한 혈향이 내 코를 찔렀다. 진입을 하며 잠깐 시야가 검어진 사이, 바닥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우리 군단병들과 적의 손아귀에 잡힌 샤이탄이 생각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샤이탄----!!"
"오셨습니까."
내 호통에 응답한 목소리는 너무나도 여유로우면서도 근엄하고, 또 믿음직스러운 목소리였다. 그리고 여기에 있을 거라고는 예상할 수도 없던 목소리였다. 샤이탄은 목소리의 주인 옆에서 발그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네가 왜...?"
"제 임무는 라스베가스의 수호. 하지만...."
금발의 공주 기사, 에일라는 바닥에 찍은 검을 잡고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라스가 있는 곳이 곧 라스베가스. 저는 멍청히 도시만 지키고 있을 년이 아닙니다. 주인님."
"사랑한다, 에일라!"
나는 고맙고 기특한 마음에 에일라에게 달려가 키스를 했다.
츕, 츄릅, 쮸으으읍!
...나는 입술만 부딪힐 생각이었다.
혀는 에일라가 썼다.
========== 작품 후기 ==========
대활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