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1642일차 -------------------------
"극단이야."
"아니지, 경비병 무르프헐트 말 못 들었어? 남작님이랑 얘기하는 거 옆에서 들었다잖아. 옷을 팔러 온 거라니까?"
"그런 옷을 판다고? 미쳤네. 여신님께서 '이 놈!'하시며 경을 칠 일이야. 세계가 아무리 말세라고 해도 나락까지 떨어져서는 안 되는 거라고."
주민들은 상단의 정체에 대해 갑론을박하기 시작했다. 막대한 돈을 가진 상단의 방문은 아는 사람은 아는 내용이었지만, 설마 그들이 전부 여성으로 이루어져있으며-파렴치하다 못해 상스러워 보이는 복장을 하고 올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대부분 그들의 방문에 불편함을 내비치고는 있었지만, 알음알음 서로의 본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거 좀 예쁘지 않았냐?"
"얼굴은 죄다 반반하게 생겨가지고, 몸매가 어우."
"아까 들어올 때 봤어? 아주 당당하게 토끼처럼 걸어가는데, 나 보고 눈웃음을 치면서 손을 흔들었다고. 씨발, 한 번 자보고 싶다."
"미친 놈. ...나도. 우리 마누라한테 저거 입혀서 한 번 해보고 싶어지는데."
바니걸 복장은 남정네들의 입에 금방 오르락내리락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어휘의 모든 것을 총동원하여 보지 못했던 이들에게 바니걸의 외형과 여인들의 외모를 찬양하며 떠들기 시작했다.
"천박해."
"어떻게 저런 복장을 입고 다닐 수 있지? 인류 연합이 마족과 전면전을 벌이고 있는 이 시국에?"
"어디 몸 팔러 다니는 것도 아니고...쯧쯧."
여성들이 모여있는 곳에서는 바니걸 요정들에 대해 성토가 주를 이루었다. 누구는 얼굴이 못났네, 옆구리에 튼살이 있네 하는 건 애교 수준이었고, 대부분 야한 옷차림을 한 바니걸 요정들을 모욕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검은색 바지는 뭐래니? 웃옷...인가? 그거 안에 받쳐 입고 있던데?"
"그게 바지야? 속살이 훤히 비쳐 보이더구만."
"...아니, 근데 그거 좀 예쁘지 않아?"
"......밤 일 할 때 남편 새끼 좆나게 발정시키기에는 딱 좋겠더구만. 옆으로 살짝만 벌리면 막 안에 찌를 수 있게 되어있는 거 아니야? 킥킥, 미친."
그리고 극히 일부의 여성들이 그들이 입고있던 옷에 대해 품평을 하기 시작했다. 바니걸들의 미모와 외형에 질시를 할 지언정, 의외로 그들이 입은 옷에 관해서는 냉철한 비평을 하고 있었다.
"...저거 왠지 갑옷 안에 받쳐 입으면 피부 안 쓸리고 좋을 것 같지 않냐?"
"지금 190넘는 떡대 네가 토끼귀부터 구두까지 입겠다고? 미쳤냐?"
"......한 번 해봐?"
...일부 이상한 존재들도 있기는 했으나, 어찌됐든 바니걸 요정들이 일으킨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스피카 성은 잠깐이나마 마왕군에 관한 문제에 대해 잊을 정도로, 하루종일 상단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잠시나마 활기를 되찾았다.
* * *
"정말로 술집...겸 잡화점을 내기 위해 이곳을 찾으셨다?"
"예."
메어리는 남작을 상대로도 거리낌없이 당당했다. 그 당당함은 어깨를 활짝 편 것으로 나타났고, 남작은 자신이 훨씬 고귀한 존재임에도 눈앞에 당면한 존재감에 괜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이미 건물은 제가 수배해뒀습니다. 가져오신 금전이 워낙에 많아서 두 채나 사들일 수 있었죠. 남작님, 무려...."
"아는데...."
남작은 메어리의 상단이 가져온 금화 덩어리에 침이 꼴깍 넘어갔다.
만성 적자에 시달리는 비르고 영지로서는 당장 내일 먹고 살 돈이 부족했다. 모험가들에게 선입금으로 지불했던 돈도 그들이 불귀의 객이 되면서 증발해버렸다. 세수를 거둘만한 상황도 아니었고, 곧 있으면 피스케스 백작령에서 귀한 손님이 와서 접대를 해야하기도 했다.
"음...."
"역시 정체 불명의 상단이 시기적절하게 나타난 게 마음에 걸리십니까?"
메어리가 선수를 쳤다. 남작은 속이 읽힌 것만 같아 살짝 기분이 언짢아지면서도, 메어리가 만만찮은 존재가 아님을 직감했다.
당장 입고있는 옷부터가 차이가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은 영주임에도 불구하고 사교계에 입고 나갈 수도 없는 수수한 드레스인 반면, 상대는 수도의 사교계에 유행을 선도할 디자인의 의복을 입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왜 우리 영지에?'
남작은 선물로 받은 스타킹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하나 질문하겠습니다. 이 옷, 스타킹이라는 것은 어디서 어떻게 가져온 것입니까?"
"유통망과 공급처에 대한 문제에 관해서는 제가 직접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비르고 지부의 책임자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건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메어리는 품에서 깃털 하나를 꺼냈다. 남작으로서는 치를 떨 수밖에 없는, 검은 괴조의 깃털이었다.
"그 스타킹은 마물의 깃털을 뽑아 만든 물건입니다."
"......설마?"
"예. 안드라스라고 불리우는 까마귀 괴물. 저희는 그 놈들이 나오는 던전에 들어가 주기적으로 재료를 '채집'해옵니다. 그런데 마침...이곳에서도 나오기 시작했다는 말이 들려서요."
"마물의 깃털을...? 어떻게?"
"영업 비밀입니다. 그리고 아까 보셔서 아시겠지만."
메어리는 한쪽 다리를 들어올렸다. 어떻게 저 큰 가슴을 지탱하는지 모를 정도로 가느다란 다리는 각선미가 훤히 드러났고, 남작은 괜히 침이 꼴깍 넘어갔다.
"이렇게."
화륵.
메어리의 손에서 갑자기 불길이 치솟았다. 불길은 메어리의 무릎 위에서 타오르기 시작했고, 남작은 깜짝 놀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괜찮으세요?!"
"......."
메어리는 새된 비명을 지른 남작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남작 또한 아무렇지 않은 메어리를 보고는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흠, 흠흠, 크흠!"
"......예, 저는 마법사입니다. 그리고 아주 낮은 등급의 파이어볼 수준으로는 불에 타지도 않고, 오히려 따스하기만 하죠."
촤락.
메어리는 이번에는 손에서 물덩이를 만들어내 무릎 위에 붙은 불을 꺼뜨렸다. 수증기가 차오르며 촉촉해진 스타킹의 모습에 남작은 한 번 더 침을 꼴깍 삼켰다.
"남작님. 직접 입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예?"
"후훗, 여차하면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이 스타킹이야말로 새로운 패션계를 이끌어갈, 정숙의 상징이자 섹시함의 아이콘으로 만들 것입니다."
"그, 그게 무슨...?"
"보십시오. 이렇게 다리를 가리고 있기에, 치마를 짧게 입어도 되지 않습니까? 후후."
메어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치맛단을 가리켰다. 손가락 한 뼘보다 약간 긴 정도의 검은 치마 아래는 무엇이 보일까 남작의 상상력을 자극시켰다. 그리고 메어리처럼 입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적어도 남자들은 제대로 미쳐 날뛰겠네.'
죽은 부친이 봤다면 바로 스타킹을 전부 매입하여 애인들에게 입히고 씌웠을 것이다. 남작은 선대 남작을 생각하니 달아오른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흠흠, 그래서 스타킹의 상품 가치에 대해서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쪽 상단의 직원들 옷차림에 대해서는 제가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이지요."
메어리는 기다렸다는 듯 웃었다.
"그런 상스러운 복장, 인정할 수 없습니다."
"주류를 판매하는 여급의 복장이 될 겁니다. 일종의 호객행위지요. 물론 남작님께서 우려하시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 그들은 웃음을 파는 여인들이지, 몸을 파는 자들이 아닙니다."
"......하지만 음심 가득한 남자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 지 모릅니다."
"그들은 전부 전 모험가 출신으로 제 한 몸 건사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상대가 어떤 남자든 이겨낼 수 있죠. 설령 고블린, 오크 등이 상대라고 해도 그들은 능히 1:1로 상대할 수 있을 겁니다."
가만히 있던 그에이가 '크흡'소리를 내며 웃었다. 남작은 그에이의 실태에 눈을 찌푸리며 경고했다.
"지금 웃음이 나오는가?"
"...실례했습니다. 그 옷을 입고 오크들을 상대한다는게 그만."
"하긴 그대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지."
"아무렴요. 검 하나로 까마귀를 보내버리셨잖습니까? 후후."
"...크흠."
한 번 납치당했던 것을 언급하는 메어리의 농담에 그에이는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며 입을 닫았다. 남작은 짧은 한숨과 함께 서랍에 있던 양피지를 꺼냈다.
"승인합니다. 하지만 당분간 지켜볼 겁니다. 경비병도 붙일 것이고.... 그에이, 잘 지켜보도록 하세요."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남작님."
메어리가 활짝 웃었다. 남작은 그 미소가 왠지 모르게 어디선가 멀리서 본 것만 같아, 살짝 겁에 질렸다.
* * *
# 14-2
비르고 영지 스피카 성 안에 태어나고 자란 중년 사내, 푸트 자브러는 독신이다.
연인이 있었고, 한 때는 아내도 있었지만 그녀-아니 그년은 젊은 총각과 사랑의 도피라는 이름으로 푸트 자브러의 재산을 모두 들고 도망갔다. 결국 그는 토끼같은 자식을 홀로 키워 아카데미에 보냈고, 수 년째 독수공방을 하고 있었다. 여자의 살냄새를 맡은게 언제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그는 오랫동안 굶주려있었다.
'오늘 자기는 글렀군.'
푸트 자브러는 오랜만에 성난 자신의 물건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무릎에 화살을 맞아 경비 일을 하게 된 이후로, 오늘같이 자극적인 시각 테러를 일으키는 방문객은 처음이었다. 토끼들은 하나같이 '그쪽'을 의심하게 할 정도로 야시시한 복장을 갖추고 있었고, 푸트는 투구의 눈가리개 사이로 그들을 관음하느라 혼이 날 지경이었다.
'진짜 그런 사람들인가? 하지만 그럼 영주님이 들일 리가 없잖아.'
비르고 남작이 남작위에 오르자마자 한 첫번째 작업은 성 내의 뒷골목을 소탕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나름 매음굴은 깔금하게 청소가 되었고, 푸트도 그 부분에 있어서는 공감하고 있었다. 매음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만, 전 아내가 매음을 하던 청년 놈의 아랫도리에 반해 도망갔던 것을 생각하면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부르르. 그리고 그의 고환도 떨렸다. 자꾸만 눈앞에 토끼털과 검은 그 '스타킹'이 눈에 아른거렸다.
"아오. 혼자 해결해?"
이미 수차례 잡았다 놓기를 반복했다. 이대로 청년 시절 때 하던 것처럼 해결하면 끝날 것 같기도 하지만, 구차하게 스스로 해결하기에는 자신이 너무나도 불쌍했다.
"씁, 시간됐네."
푸트 자브러는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나가기 직전 아들 핸드 자브러의 초상화가 자신을 향해 인사하는 듯 했다.
"다녀오마."
아무도 없는 빈 집에 홀로 말하고 일하러 떠나는 푸트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했다. 안그래도 쓸쓸한데, 영지는 어수선하고, 일은 많아지고, 옆구리는 시려서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은 이제 그 번뇌를 만든 장본인들의 주거지 근처에 '경비'를 서야하는 입장이었다.
"여신의 가호를. 푸트 자브러, 복귀했습니다."
"그래. 어서 오시게."
기사 그에이는 상단의 책임자-가슴이 큰 분홍머리 처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푸트 자브러는 그에이에 가린 그녀를 보지 못했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허리를 숙였다. 어쨌든 허리는 숙여야했다.
"담소 중에 실례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닐세. ...자네, 그러고보니 지금 혼자였던가?"
"그건...?"
"음...."
"뭐야. 이 분 챙겨주려고 그러는 거야?"
분홍머리 처녀는 키득거리며 그에이에게 편하게 말을 놓았다. 푸트 자브러는 경비병들끼리 농담삼아 주고받던 말이 사실에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다. 역시 눈앞의 아가씨는 보통 존재가 아닌, 기사와 친분이 있는 존재였다.
"뭐...원하는 사람 있으면? 경비야 나 혼자 서면 되고, 또 안타깝잖아. 다들 고생하는데."
"어이구, 좋은 상사 나셨네요. 알았어. 흠흠, 저기요."
"예, 예?!"
푸트 자브러는 여인이 자신에게 존대를 하는 것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여인은 존대를 멈출 생각이 없어보였다.
"안에 잠깐 들어가계실래요? 들어가서 쉬세요."
"들어가시게, 명령이다. 다른 경비들도 이미 들어가서 쉬고 있으니."
"아, 예."
푸트 자브러는 얼떨떨한 상태로 불이 꺼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얼떨떨한 마음에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 안에는 오후에 봤던 토끼 아가씨가 웃으며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어머, 턱수염 짙은 오빠네? 만나서 반가워."
"어, 어어. 그, 반갑소."
"이 오빠 상당히 딱딱하시네? 호호, 거기도 딱딱할까?"
토끼는 천천히 푸트 자브러의 가슴 근육을 만지작거렸다. 푸트 자브러는 재빨리 뒤로 물러서며 표정을 굳혔다.
"이거 설마 성접...."
"어머. 그런 말하면 안 돼. 큰 일 날 소리. 우리 그런 거 싫어해."
토끼는 엄한 표정을 지으며 검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어린 시절 모친에게 혼나던 기억이 나서 푸트 자브러는 괜히 주눅이 들었다.
"원래는 영업 전인데, 오늘은 특별히 개장 전에 가오픈...? 하는 거야. 오빠는 특별 손님. 기사 님도 다 아시는 걸? 잘 들어봐."
토끼는 안쪽으로 들어가는 나무문을 가리켯다. 푸트 자브러는 문을 향해 귀를 기울였고, 그 안에서는 남녀가 나뒹굴며 합을 맞추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 그거 알아? 토끼는 365일 발정난 동물이래. 후후."
토끼는 푸트 자브러를 안쪽 문으로 잡아당겼다.
"여기까지 왔는데 설마 모르지는 않겠지? 아닐 거라고 믿어. 그러면...."
끼이이익. 문이 열렸다. 그곳에는 여인의 향기를 가득 풍기는 토끼들이 남자의 등장에 슬며시 웃고 있었다.
"누구랑 한 잔 하시겠어요, 손님?"
"......저기, 저 분으로."
푸트 자브러는 탁자 위에서 다리를 꼬고 있던 토끼 여인을 가리켰다. 그의 눈은 여인의 발, 구두를 벗어 형태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검은 발에 집중되어 있었다.
"어머, 나?"
여인은 키득거리며 바로 몸을 일으켰다.
"저기...나 취향 좀 독특한데 괜찮아? 왜 나를 선택한 거야?"
"...바, 발이 가장 예뻐보여서."
"푸흡."
여인은 푸트 자브러의 앞에 섰다.
"잘 됐네. 오늘 나한테 한 번 제대로 깔려봐."
여인은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웃으며 바지 앞섶을 발로 살살 문질렀다.
'여신이시여.'
푸트 자브러는 천국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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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