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231일차 -------------------------
하루가 지났다.
나는 공터에서 폭포로 향하는 길 중간, 약 20일 넘게 막아둔 채로 방치한 지하 1층으로의 통로에 부하들을 소집했다.
지하 1층.
던전의 시설 등급을 올렸을 때 개방된 지하 1층은 아직까지 그 입구가 막혀있었다. 진작에 지하 1층을 뚫었으면 그만큼 공간도 늘어나고 정원도 늘어나서 온갖 다양한 시설들을 확충할 수 있었을테지만, 현실적인 여건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위험해서.
지하 1층의 아래에 있는 놈들이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나는 내려가보지도 못하고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를 막아야했다. 그레모리 던전까지 털었으면서 무엇이 무섭냐고 한다면 나로서는 할 말은 없지만, 변명거리는 넘쳐났다.
"그 날. 나는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를 발견하고 일단 막자고 생각했지. 갑자기 지하에서 슬라임들이 쏟아지면 난리가 나니까."
"쫄았네."
"당연히 쫄지. 여기가 모름지기 옛 바알의 던전 아니냐. 지하에 뭐가 있을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냥 내려가냐. 만반의 준비를 해야지."
당장 이 던전만 하더라도 처음 들어왔을때 3성짜리 슬라임 드래곤이 중심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천장을 파고들다가 차원석이 나왔던만큼, 지하의 존재에 대하여 나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걱정했는데 알고보니 아무것도 없는 빈곳이었다고 하면 너 진짜 개멍청한 거다?"
"멍청한게 차라리 낫지. 야, 네가 그걸 직접 보지 못해서 그래."
일단 막고보자고 생각하고 막을 통나무를 가져오게 했던 때. 나는 계단의 입구 앞에 서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하에서 금방이라도 올라올 것 같은 무언가와 눈이 한 번 마주쳤다. 그것은 나를 보자마자 바로 도망쳤지만, 나로서는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충격이었다.
"내 귀가 잘못된게 아니라면, 분명 아래에서 엄청나게 꾸물거리는 소리가 들렸거든?"
"환청이겠지."
"너 진짜 나를 못 믿는구나. 어디 한 번 열어서 분신만 정찰대로 보내봐? 어떻게 되는지 확인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나는 모른다?"
그레모리는 질색을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험한 플레이를 좋아한다고 해도 그건 플레이니까 가능한 것이지, 실제로 마물에게 분신이 능욕당하는 것은 본인도 나도 반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내가 분신을 운운한 것은 그레모리가 나를 전혀 믿지 않는 태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제는 확인할 방법이 생겼다는 거지. 솔직히 아예 포기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마침 행여나 던전 지하에 가득 차있을지도 모르는 적을 쓰러뜨릴 존재가 여기 있네?"
나는 랜슬롯이 꼭 껴안은 기네비어, 그리고 두 부부의 자녀이자 안드라스 5인방 직전까지 솔로 공략에 성공한 갤러해드를 가리켰다.
"기네비어, 갤러해드, 메어리, 륜, 나. 요렇게 다섯 명이서 공략 들어간다. 다른 마물들은 신성력을 사용하면 데미지 먹으니까, 최대한 아군에 피해가 없는 존재로 편성하는 거지."
"주인님은 괜찮으십니까? 그래도 신성력인데."
"몸에 불도 지르고 뛰어다니는데 신성력 쯤이야. 나는 안 아프더라고."
신성력 버프를 받은 루나와 레슬링까지 했는데 그정도 쯤이야. 거기에 로브가 있다면 어느정도 신성력의 영향이 크게 문제는 없었다. 살짝 햇빛에 그을려 피부가 따끔거리는 정도일 뿐.
"나보다는 다른 애들이 걱정되지. 넷 다 장비 잘 챙겼냐?"
나는 가장 먼저 기네비어와 랜슬롯의 장비 상태를 확인했다. 인간들로부터 노획한 갑옷을 챙겨입은 둘은 위에 검은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안드라스의 깃털로 뽑아낸 실로 만든 로브로, 방적공들이 뽑은 실로 만들어낸 외투였다.
"갤러해드, 혹시나 불편하면 혁갑으로 바꿔라. 위에 덧입기라도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제겐 이것이 편합니다."
갤러해드는 자신이 소환되던 순간부터 입었던 정장을 고수했다. 얇은 옷감 치고는 실제로 어느정도 방어력이 있지만 않았어도 나는 바로 갤러해드를 하서스급 중갑 전사로 만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본인이 정장을 포기하지 않으니 내가 강요는 할 수 없었다.
"이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오크들의 전투복입니다. 그리고 적과 마주하는 것은 아무 문제 없습니다. 제게는 검과 방패가 있고, 신성력이 있으니까요."
"...그래, 여러모로 틀려먹었기는 한데 지적은 하지 않으마.
괜히 지적만했다가 내가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갤러해드조차도 코트 대신 검은 로브를 옷 위에 입었다는 점. 안드라스사(絲)는 예상외로 내구도나 방어력이 상당했다.
"기네비어. 이미 랜슬롯의 포로인 네가 나의 뒷통수를 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믿어도 되겠느냐?"
"......."
아직 기네비어는 <포로>의 상태지, 완전히 굴복한 부하라고는 보기 어려웠다. 랜슬롯이 너무 마음에 들어해서 자유를 주었고 본인 또한 탈출에 대한 의지가 없어서 가만히 놔두고 있지만, 부하가 아니니 불안요소가 없지는 않았다.
"이번 전투는 철저히 마물들을 소탕하는 것이다. 여신교의 사제로서 눈 가리고 아웅할 생각일랑 하지를 마라. 랜슬롯, 내 딸을 취한 너는 랜슬롯이 사는 던전을 위해 기여할 의무가 있다."
"...그, 제가 취한게 아니라 제가 먹혔...."
"에에이, 시끄럽다. 갤러해드 동생 만들고 싶으면 오늘 최선을 다해라. 알겠느냐?"
"......."
기네비어는 끝까지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내 철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나로서는 꼴도 보기 싫은 무기였기에, 결국에는 기네비어가 다시 무기를 챙기기로 했다.
"주인님, 안심하세요. 혹시나 쟤가 주인님 뒷통수를 날리려고 하면 제가 저 인간의 뒷통수에 바람 구멍을 내버릴테니까. 랜슬롯에게도 미리 말해뒀어요."
륜은 웃으면서 살벌한 말을 대놓고 이야기했다.
륜의 말마따나 랜슬롯이 아무리 이뻐하는 남자라고 할지라도 군단의 우두머리는 나였다. 설마 랜슬롯이 이름값을 한다면 나로서도 랜슬롯에 대한 처우를 달리할 수 밖에 없지만, 전쟁 중에 상급자에게 하는 프래깅은 즉결처형을 해도 모자랄 사안이었다.
"기네비어. 내 뒷통수를 후릴 것이냐?"
"...적어도 지금은 생각없습니다."
기네비어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썩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었지만, 이런 식으로 타협을 해나가다 보면 어느순간 우리 군단을 위해 일하고 있을 것이다. 삼각형은 그 끝을 깎을수록 최종적으로 원이 되니까.
"좋다. 그렇다면 네게 주어진 여신의 힘, 마음껏 발휘하여 어둠을 밝히도록 해라. ...진입하지."
쿠웅!
가벽이 안쪽 통로를 향해 넘어졌다. 라임은 천장을 통해 가벽을 무너뜨렸고, 우리는 그 가벽을 옆으로 치우고 지하 1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발 내가 그냥 개병신이기를.'
내가 30분간 경계를 서면서 느꼈던 모든 불안과 공포는 그저 환상이기를. 나는 나선형 계단을 통해 지하 1층으로 내려갔다.
<알림> 지하 1층으로 진입합니다.
1층과 달리 칠흑같은 어둠만 가득했고, 인간 사제와 오크 성기사가 여신의 은빛을 반짝거리며 지하 1층을 비췄다.
꾸르르르륵.
"어우, 씨발."
절로 쌍욕이 튀어나왔다. 나는 허리춤에 걸어둔 도끼 두 자루를 양손에 움켜쥐었다. 지하 1층 공략을 충분한 전력을 쌓은 다음에 내려오겠다는 내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내 뒤를 따르던 넷도 곧장 안쪽을 보고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바알 개새끼야아아!!"
꾸르르르르르륵???
계단을 통해 내려간 지하 공터.
"아무리 급해도 이사를 하면 집 청소는 하고 가야 할 거 아니야!!"
그곳에는 막대한 양의 슬라임 드래곤이 슈퍼밀웜마냥 꿈틀거리고 있었다.
* * *
파후우가 지하 1층의 슬라임 드래곤 무리들을 마주친 그 시각.
던전 1층에서는 언제든지 가벽을 무너뜨릴 수 있도록 준비만 해둔 채, 파후우와 성기사 일행이 최대한 빨리 돌아와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새삼 놀랍긴 하네. 여기가 바알 님의 옛 던전이라니."
"슬라임들이 넘쳐나는게 괜히 그런게 아닙니다."
가벽 앞에 선 이들이 슬슬 다른 이야기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파후우와 부하들이 어디 하나 다치지 않고 돌아올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이 있었기에, 그들은 걱정을 잠시 접어두고 잡담을 할 수 있었다.
"하긴 지난번에 소환쇼 할 때도 이상하게 슬라임 비율만 더럽게 높았지."
"그것은 순수하게 랜덤이라 주인님의 운이 슬라임에 맞춰진 것 아니겠습니까?"
"정말?"
그레모리가 눈을 흘기자 샤이탄은 눈을 감아버렸다.
"후후, 내가 들은 게 있는데 말이야...?"
"낭설입니다. 그분의 시스템은 정교하여 그 어떤 오류도 없습니다."
"그래. 솔로몬 님께서 만든 시스템이 이상이 있을 리가 없지. 그런데 말이야. 내가 걔 없으니까 솔직히 톡 까놓고 하는 말인데."
그레모리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신경질을 부렸다.
"'해당 던전의 부하 목록을 파악하여 가장 많은 종으로 파견한다.' 이 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일언반구도 할 필요없는 근거없는 낭설입니다. 그렇다면 기존의 종과 완전히 다른 별개의 종이 왜 소환되겠습니까?"
"의심되니까 그렇지. 나도 맨날 소환하면 고블린, 가고일만 떴는 걸."
"그건 당신의 운이 그런 겁니다. 시스템은 모두에게 공평합니다. ......뭐, 저도 모든 걸 자세히 아는 입장은 아닙니다만."
샤이탄은 꼬리를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소환 시설의 기반이 되는 마석이 누구의 마석이냐에 따라, 그 영향이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속설이 있기는 합니다."
"그런가. 그럼 애매한 걸. 나도 남의 던전 빼앗은 거라서 말이지."
그레모리는 능청스레 웃었다. 샤이탄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가벽으로 눈을 돌렸다.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듯 자세를 더욱 칼같이 바로잡았다.
"얘."
"또 뭡니까."
"바알 님은 왜 이 던전을 버리셨던 거야?"
"......널리 퍼지게 되면 바알 님의 명예가 실추됩니다."
"나만 알고 있으면 되잖아. 혹시 알아? 바알이 왜 이 던전을 빼앗겼는지 알아낸다면, 우리가 그에 대처할 수 있는 거잖아. 예를들어서 어디 비밀 통로가 있다거나. 그것 때문에 바알 님이 큰 부상을 입었다거나. 혹시나 똑같은 경우가 우리한테도 발생될 수 있잖아."
"...과연."
그레모리의 감언이설에 샤이탄은 홀라당 넘어갔다. 그레모리는 이미 샤이탄을 손바닥 안에 놓고 가지고 놀고있었다.
"그런 문제라면 주인님께 해가 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도 바알 님이 왜 던전을 두고 이탈하였는지 자세하게는 모릅니다. 다만."
샤이탄은 던전을 위아래로 가리켰다.
"바알 님께서 성검 사용자인 용사와 이 던전에서 일전을 벌이셨고, 용사를 삼키는데에는 성공했지만 성검을 삼키지 못해 던전을 버리셨다는 소문은 있습니다."
"...성검?"
"예. 어디까지나 소문입니다."
샤이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낮게 웃었다.
"바알 님께서 성검이라면 정말 치를 떠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혹시 성검이 이 던전 안에 있는 거 아닐까?"
"내기하시겠습니까?"
샤이탄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 던전에서 성검이 나온다면 그레모리 님의 부탁을 하나 들어드리겠습니다."
"내 부탁이 뭔지 알고?"
"적어도 주인님께서 허락하실 수 있는 부탁이라면."
"...그래?"
그레모리는 샤이탄의 날개와 꼬리를 유심히 보며 입맛을 다셨다.
"좋아. 내기하자. 대신 내가 지면 네가 나를 원하는대로 해도 돼. 꿈에서 정기를 빨아먹어도 된다, 이 말이야."
"주인님께서 말씀하시길, 당신 맛 없다고 하셨습니다만."
"이게 죽을려고."
티격태격하는 둘의 잡담은 하서스가 급히 달려올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멈췄다.
* * *
"우오오오!!"
나는 발을 들어 이빨을 들이미는 슬라임 드래곤들의 대가리를 발로 걷어찼다. 우리는 결국 계단까지 밀리게 되었고, 슬라임 드래곤들의 수는 차고 넘쳤다.
"하아, 하아...!"
"괜찮으십니까, 아버님?"
"괜찮, 허억...!"
기네비어가 너무나도 빨리 리타이어했다. 체력은 충분했지만 신성력의 총량이 너무 낮아서 적진을 돌파할 수 없었다.
"쓰벌, 거의 100마리 가까이 잡았는데...."
"아직 900마리는 더 있는 것 같아요."
륜의 손도 퉁퉁 부어있었다. 쉴 틈 없이 바람화살을 날려도 슬라임 드래곤들은 일격에 죽지 않았다. 아마 대부분 레벨이 55, 3성 만렙에 이르렀을 정도로 그들은 강했다.
'닫아놓길 정말 잘했네.'
1층에서 내려오는 입구를 막은 건 신의 한수가 되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 이 전력으로는 지하 1층에서 입구컷을 당하게 생겼다. 우리가 신성력으로 태워 죽이거나 대가리를 날려 죽인 슬라임 드래곤은 다른 슬라임 드래곤의 먹이가 되었고, 결국 또 강해진 놈이 나타나 우리를 공격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젠장...."
"아빠. 이거 더이상...."
메어리까지 마나가 고갈된 듯 현기증을 일으키며 주저앉을 뻔 했다. 결국 나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퇴각! 일단 오늘은 100마리 잡았으니 됐다!!"
륜과 갤러해드가 각각 메어리와 기네비어를 부축하였고, 나는 계단을 틀어막고 우리쪽으로 기어올라오는 슬라임 드래곤을 하나하나 때려잡았다.
"으아아, 젠자아앙!!"
일거에 소탕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아오, 씁, 마석 처먹지 마 이 새끼들아!!"
슬라임 드래곤을 죽이기에 급급해서 마석을 챙길 새가 없었고, 그러면 시체는 슬라임 드래곤 사이로 흘러들어가 마석과 함께 사라졌다. 결국 내가 챙긴 것은 내가 직접 손을 넣고 뽑아낸 중급 마석 12개 뿐이었다.
"기다려라, 중급 마석 900개들아! 내가 지혜를 짜내어 너희들을 다 털어먹어주마!!"
나는 계단을 뛰어올랐다.
100마리를 잡았다치더라도 88개의 마석이 손실되었다. 그것도 중급 마석으로만.
내 눈에서 땀이 흘렀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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