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829일차 -------------------------
샤이탄.
군단.
여러 개의 성검.
분노의 인장.
1년의 시간.
그 모든 걸 감안하더라도 결국 해야하는 것은 하나 뿐이었다.
"가챠 달린다!"
"주인님, 여기서 가챠라 함은?"
"확률에 따라 소환하는 걸 말하시는 거예요. 뽑기죠."
"아하."
샤이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왕의 딸이라는 엄청난 신분을 가진 존재이나, 결국에는 나의 부하로 소환된 존재이다. 스스로 군사의 역할을 자처했으니 써먹는 수 밖에.
'그래도 조심은 해야지.'
괜히 딸내미 울렸다가는 눈에서 피눈물 흘리는 소년마왕이 나타나 나를 파/후/우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서큐버스고 륜에게 한 행위에 대해 거부감이 없는 걸 봐선, 추후 기회를 봐서 노리는 걸로.
"크흠. 큰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넓은 도화지도 필요하지만, 그 그림을 채워나갈 물감도 필요한 법이다. 우리가 가진 물감이 현재 뭐가 있지?"
나는 자문자답하며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오크, 하피, 안드라스, 구울, 슬라임. 이게 내 던전의 주력이고, 그레모리 던전까지 활용하면 고블린, 가고일, 조카멜이 끝이지. 즉,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건 이게 끝이라는 거야."
"......이왕 이렇게 됐으니 밝힐게. 하나 더 있어. 잠시만."
그레모리가 이실직고 했다. 도대체 뭐가 있을까 싶었더니, 그레모리가 마법을 써서 중얼거리니 무언가가 치마 아래로 후두둑 떨어졌다.
"......허어."
그 때의 촉수 괴물을 똑 닮아있는 괴물들이 튀어나왔다. 분명 이름이....
"스카 트올로지. 촉수형 괴물로 던전 내 화장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형종입니다. 지금은 새끼로 보입니다만."
"백과사전이 여기있구만. 그런데 그레모리야. 너 설마 이거...."
"......내 배 아파서 낳은 새끼들이야, 일단."
"아니. 그건 상관없는데 너 지금 이걸 어디에 넣고 있었냐?"
"......."
그레모리는 대답을 회피했다.
"샤이탄, 그레모리 같은 마족도 화장실을 가고 그러나?"
"먹는게 있으면 나가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스카 트올로지는 마왕군이 결성되기 초창기에 정화조 시설을 담당했던 마물입니다."
"......."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졌다. 내가 이상한 표정이 되니, 샤이탄이 처음으로 인상을 굳히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는 쓰지 않습니다. 저도 써본 적 없습니다."
"그레모리가 이상한 거네, 그러면. 누가 더 러븐 스카트러 아니랄까봐."
"야!"
그레모리는 빽 소리를 지르며 부들부들 떨었다. 여러 모로 도움이 되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레모리의 이상 성욕은 때때로 나도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존중한다. 왜냐면 그레모리도 저 스카 트올로지 들도 라스를 즐기며 살아가는 이들이니.
"그래, 그래. 뱃속에 넣어뒀구나. 그래서 화장실을 안 가는 거였어. 대단한 녀석. 아무튼 잘 키워봐. 걔들은 주인 공격하고 그러진 않지?"
"물론이야."
"그럼 우리도 그걸로 정화조 시설 좀 돌려보자고."
사람은 많아지고, 더욱이 포로든 부하든 인간들도 많아지니 그걸 처리하기 위한 수단이 필요했다.
더이상 설명은 생략한다.
어쨌든 큰그림을 그리기 위한 황갈색 물감이 하나 늘었다. 나는 이제 물감의 색을 12색을 넘어, 24색, 60색으로 늘리고자 했다. 부하들은 옆으로 물러섰고, 나는 소환 시설의 앞에서 소환권을 잡았다.
"49연차인데 설마 같은 종이 나오지 않겠지?"
빠르게 9연차. 나는 아홉 장을 겹쳐서 동시에 찢었다.
<소환> 슬라임 ★ 이 소환되었습니다.
<소환> 슬라임 ★ 이 소환되었습니다.
<소환> 빅슬라임 ★★ 이 소환되었습니다.
<소환> 슬라임 ★ 이 소환되었습니다.
<소환> 슬라임 ★★ 이 소환되었습니다.
<소환> 구울 ★★ 이 소환되었습니다.
<소환> 슬라임 ★ 이 소환되었습니다.
<소환> 구울 ★★ 이 소환되었습니다.
<소환> 슬라임 드래곤 ★★★ 이 소환되었습니다.
"......?"
아홉 장의 소환권은 쓰레기가 되었다. 내 고개가 절로 샤이탄에게로 돌아갔다. 샤이탄은 난처한 얼굴로 아랫배 앞에 놓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 주인님 말고도 오늘 아마 소환을 하려는 자들이 많을 겁니다. 메세지는 주인님께서 저를 소환하신 걸로 모든 던전에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마지막이었습니다."
"아오, 너 진작 소환할 걸."
전쟁 때문에 신경을 못썼고, 존버 하겠다고 생각했더니 졸지에 꼴지로 스타트를 해버렸다. 딱히 문제는 없었지만, 그래도 샤이탄의 말을 곱씹어보면 소환 상태가 개판인 건 당연해보였다.
"72개 던전에서 싹다 소환하느라 난리났겠군. 마왕님께서는 당분간 엄청나게 찍어내실테고 말이야."
파종으로 부화한 마물들을 뿌린다고 생각하면 사실상 저등급 개체들이 판을 치고 있을 때였다. 소환 시설의 확률이라는 거, 결국에는 무한대에 가깝게 하면 그 확률에 수렴한다는 얘기지 100번하면 1번은 꼭 뽑힌다는 얘기가 아니니까.
"그래도 슬라임이랑 구울만 주는 건 좀 많이 실망스러운데."
"주인님, 어쩌실 거예요? 라임한테 보낼까요?"
"...아니, 그냥 갈자."
나는 유일하게 건진 슬라임 드래곤을 제물의 관으로 보냈다.
"아. 생각해보니 나 3성위로 안 되던 거 아닌가...?"
"안드라스 던전을 공략하시면서 안드라스 던전으로 등록된 이후, 그분께서 조정하셨습니다. 제가 소환되면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내 탓이군. 그럴 수 있지."
그 정도 실수야 샤이탄을 보내준 것으로 눈감아 줄 수 있다.
"라스투자드, 쟤들 갈아라."
[예, 분노의 군주시여.]
라스투자드의 손길이 슬라임 드래곤에 닿았다. 제물의 관이 활성화 되었고, 나는 가차없이 여덟 마리의 마물들을 슬라임 드래곤의 제물로 바쳤다.
가가가가가각.
무언가 갈려나가는 소리와 함께, 슬라임 드래곤은 레벨이 6이나 올랐다. 슬라임 드래곤은 든든하게 배를 채운 것 마냥 소리 없이 트림을 했다.
"슬라임 드래곤 4호기는 저기 중앙에서 대기. 그럼 다음 10연차 가보자고."
"주인님, 혹시 ★이 낮은 개체들은 전부다 이렇게 제물로 바치실 생각이십니까?"
"기존에 있던 종족들 말고는 ★★이하는 다 갈아버릴 생각인데. 왜? 찝찝해?"
"아닙니다. 과연, 효율적이십니다."
샤이탄은 혼자 고민에 빠진 듯 했다. 샤이탄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나 또한 솔로몬이 저지른 행동이 상당히 효율적이며 효과적이며 사악한 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예로부터 혈연은 강력한 동맹의 상징이지.'
에스투를 먹기 위해 반란을 생각하던 나 조차도 샤이탄을 보고 솔로몬에게 없던 충성심마저 생길 지경이니, 다른 던전 주인들은 어떻겠는가.
"대가리 잘 돌아가네."
"예?"
"나 말이다."
괜히 오해하지 않게끔 자화자찬 했다. 오직 륜만이 내 표정을 읽고 입술을 깨물었다. 귀가 쫑긋 서는게 웃음을 참는 듯 했다.
"그러면 다음 10연차 간다."
"주인님, 나중에 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어차피 나중에는 더 없을 거야. 없으면 없는대로 살면 돼. 그럼 간다!!"
첫 번째 10연차에서는 샤이탄(확정)과 슬라임 드래곤을 건졌다. 그럼 다음 10연 뽑기에서는?
"하지만 이왕 있으면 좋은 것들로!!"
<소환> 슬라임 ★★, 구울 ★, 빅슬라임 ★★, 구울 ★☆, 하피 ★☆, 구울 ★, 하이 구울 ★★, 가고일 ★★, 오크 ★★ 가 소환되었습니다.
오크? 나는 문구를 다시금 확인했다. 오크는 오크가 분명했고, 소환진에서 걸어나오는 10명의 마물 중 가장 마지막에는 탄탄한 근육질의 오크가 호방하게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형제여, 내가 그대의 도움이 되기 위해 왔다네!"
"나는 귀하의 형제가 아닙니다. 라스투자드!"
던전에 소환된 오크를 바로 제물의 관으로 밀어넣었다.
"혀, 형제여?!"
"너는 형제 아니라니까. 내 형제 한 명 뿐이다."
슬라임 드래곤의 레벨은 10까지 올랐다. 슬라임부터 시작하여 죄다 갈려나갔고, 감히 내게 형제를 운운한 오크는 슬라임 드래곤의 한 끼 배부른 식사거리가 되었다.
"내 형제는 한 명 뿐인데 어디서 지 멋대로 형제를 자처하고 있어. 뒤질라고."
"죽이셨잖아요."
"그래, 그래서 죽였지."
이 던전에서 살아갈 수 있는 오크는 내 씨가 뿌려진 오크들과 트랄 뿐이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10장의 소환권을 집어들었다.
"아니, 솔직히 다른 종류로 하나 뜰 때는 됐잖냐!!"
"주인님, 그냥 추후에 소환을 하시는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냐! 드래곤이든 유니콘이든 뭐든지 분명 문고리 잡고 기다리고 있을 거다! 슬라임 드래곤도 아니고 조카멜도 아니고, 진짜 브레스 뿜는 드래곤이나 유니콘이! 간다, 30연차아아아!!"
마법진이 보라색 연기를 내뿜으며 마물들을 쑤컹쑤컹 쏟아냈다. 슬라임 한 마리, 슬라임 두 마리, 슬라임 세 마리....
단적으로 말해서 폭사했다.
누가 슬라임 던전 아니랄까봐 슬라임만 오지게 나왔다. 이런 식이라면 차라리 서브 던전에서 슬라임들을 채집해오는게 훨씬 낫겠다 싶은 정도였다.
"마왕 미쳤나? 슬라임만 이런 식으로 많이 뽑으면 어떻게? 좀 더 병력의 다각화를 위해서 리자드맨도 좀 뽑고 정령도 뽑고 드라이어드도 뽑고 그래야지! 슬라임 치즈러시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냐고!!"
분노한 나는 라스투자드에게 소환한 부하들을 밀어넣었다.
슬라임 드래곤은 레벨이 14가 되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1렙 마물들로만 슬라임 드래곤이 35레벨을 찍을 기세였다.
"으아악! 모르겠다, 다음 가챠!"
"주인님, 진정하세요!!"
소환권을 다시금 집어드는 내 손에 부하들이 내 로브자락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마치 도박을 끊지 못하는 가장을 몸으로 가로막는 가족들처럼 눈물을 글썽이며 애걸복걸했다.
"주인님, 제발요! 오늘은 텃어요! 안 된다고요! 다른 거 해요!"
"나중에 뽑자, 응? 오늘은 정액이나 뽑고, 마물 같은 건 나중에 뽑으면 되잖아."
"아니, 아니다!! 지금 지르면 뜬다!!"
나는 간신히 사수한 한 장의 소환권을 하늘 높이 치켜들고 찢었다. 그러자 소환 시설의 마석이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보라색 연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안개에 휩싸인 실루엣은 내가 생전 처음 보는 마물이었다.
"우오오, 우오오! 뉴페이스, 뉴페이스!!"
<소환> 스톤골렘 ★★☆ 이 소환되었습니다.
새롭게 우리 군단에 들어온 부하는 머리가 공동의 천장에 닿을 정도의 거인이었다. 다리는 얄쌍하지만 상체만 운동한 듯 어깨가 넓고 팔이 두꺼웠다. 힘을 멈출 수 없을 것 같은 외형이었고, 나는 스톤골렘의 등장에 두 팔을 벌렸다.
"환영한다, 새로운 마물이여!"
구구궁.
스톤 골렘은 나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상체가 갸우뚱 기울며 소환시설이 망가질 뻔 했지만, 다행히 크게 무너지지는 않았다. 문제는 시작부터 말썽을 일으킨 말썽쟁이 스톤 골렘의 말썽은 그걸로 끝이 아니라는 것.
"야. 일어나 그리고 던전 밖으로 나가보자."
그르르.
스톤골렘은 내가 뚫어놓은 던전의 구멍으로 나가질 못했다. 워낙에 키가 커서 낮은 천장을 통과하지도 못했다. 기껏 구한 회색 물감은 밖에서 써보지도 못하고 방구석 안에서만 사용하게 생겼다.
"그레모리야. 일단 소환은 했으니까 다음에 마석 소환으로 불러낼 수 있겠지?"
"그렇겠지...? 마석 소환은 마왕군에 실시간으로 발주 넣는 거니까."
"스톤골렘 정도면 상당히 자주 소환되는 단골입니다."
"그래? 흐흐, 어디보자."
나는 스톤골렘의 키를 눈대중으로 측정했다. 이 정도의 키면 나의 라스베가스 강화 플랜에 정말로 큰 도움이 될만한 존재였다.
"좋아. 31번째에서 스톤골렘 하나 건졌군."
"좋은 건가요?"
"지금 확률 상태 꼬라지 봐서는 하나라도 건진게 다행히다 싶기는 하다."
중간 결산. 건진 거라고는 샤이탄, 슬라임 드래곤, 그리고 스톤 골렘 셋 뿐이었다. 나는 호흡을 고르고 아홉 개의 소환권을 찢었다. 이번에도 슬라임이 나오겠지만, 나는 그저 마음을 비웠다.
'원래 높은 거 나온다고 생각하면 안 나오는 법이지. 여기서는 오히려 역으로 슬라임들이 나올 거라고 예상을 해야-"
<소환> 슬라임 ★ 가 소환 되었습니다.
<소환> 슬라임 ★★ 가 소환 되었습니다.
<소환> 슬라임 ★★ 가 소환 되었습니다.
<소환> 빅슬라임 ★★☆ 가 소환 되었습니다.
<소환> 빅슬라임 ★★ 가 소환 되었습니다.
<소환> 슬라인 ★★ 가 소환 되었습니다.
<소환> 슬라임 드래곤 ★★★☆ 가 소환되었습니다.
"아아아아아아앆!!!!"
공동이 내 비명으로 가득찼다. 돼지 멱따는 소리가 공동을 가득 메웠다. 진실로 숨이 넘어가는 듯 했다.
"아아아ㅏ아아ㅏ아아ㅏ아아ㅏㅇ악!!!"
이미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기 시작했다. 4성으로 진화 가능한 존재가 하나 떴다. 슬라임 드래곤. 아아, 이 얼마나 기쁜 일이란 말인가. 슬라임의 진화 가능성을 하나 더 엿 볼 수 있게 되었다니.
"주인님, 저, 저기...."
"흐흐흐, 흐흐흐!
"하나 남았는데, 어째 형태가...?"
"앗."
크르르.
소환진에는 피부에 전기를 튀기는 거대한 늑대가 나를 향해 사납게 이빨을 벌리고 있었다.
<소환> 워울프 ★★★☆가 소환되었습니다.
"......심봤다."
역시 레이더 하면 늑대지. 딱 40번째에 가장 바라던 종류의 마물이 뜨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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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디션이 좀 안 좋아서 일단 자정에 한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