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928일차 -------------------------
아침이 되었다.
간신히 부대를 수습한 남작은 뻐근한 뒷목을 잡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
일어나지는 못했다. 자신의 사지에 결박된 가죽끈 때문에 누군가가 풀어주지 않는 이상, 스스로의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엄한 일을 당하는 게 아닐가.
"......내가 미친 년이지."
실상은 그 반대였다. 엄한 일을 당하는 것도 그렇지만, 엄한 일을 할까봐 걱정한 그에이가 묶어둔 것이었다.
괜히 아무 남자에게나 다리를 벌리지 않도록.
괜히 또 자신을 범하러 오는 남자의 급소에 검을 찌르지 않도록.
"쳇."
남작은 모처럼 좋은 기회를 놓쳤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들었다.
기사 그에이를 자신의 남자로 만들수만 있다면 중앙 정계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명문 가문과 혈연을 맺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이는 귀신같이 자신의 의도를 눈치채고 기절시킨다는 극단적인 수단까지 취했다.
"...거기 누구 있느냐."
남작은 다시 근엄한 목소리로 사람을 찾았다. 곧 막사의 문이 열렸고, 오랫동안 남작가에 공헌한 노기사가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간밤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주군."
"별 일 아니오. ...간밤의 일은 불문에 부치겠소. 그에이 경은?"
"병사들을 수습하고 진지를 정리했습니다. 임무도 완수를 하였으니, 지금 바로 공세를 취할 수 있습니다."
"...원래는 그에이 경이 돌아오는대로 바로 공성을 하려 했건만."
남작은 맥없이 당한 자신의 치태에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미약 테러를 감행하여 진지를 못쓰게 만들고 병사들의 전력 손실을 일으킨 적이 밉고 짜증이 났다.
"지금이라도 당장 공격하러 가야겠구려. 갑시다."
"그, 주군. ...지금은 아직 나오지 않으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 그러시는가?"
"...아직 병사들이 물을 빼고 있는 중이라."
"???"
남작은 은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남작이 병사들의 앞에 나서서 전병력을 집결시킨 건, 모든 병사들이 아랫도리의 분노를 충분히 가라앉히고 난 뒤였다.
그리고 잠시 뒤.
기사 그에이를 지휘관으로 하는 토벌군의 1진이 자비야바의 북쪽으로 서서히 진격했다.
* * *
쿵, 쿵쿵, 쿵.
병사들이 발을 구르며 전의를 불태웠다. 천이백의 인간 병사들은 오열을 갖추고 사거리 밖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애들 표정 봐라, 다들 잠 제대로 못 잔 얼굴이구만. 흐흐흐."
거리가 제법 멀었지만 그 표정이 훤히 보였다. 다들 피곤에 절어있고, 눈이 흐리멍텅했다. 적어도 인 당 세 발은 족히 뽑아낸 것 같았다.
"어떠냐, 그레모리야. 전력 상당히 깎아먹었지?"
"그래, 효과는 있네. 그리고 너는 아주 쓰레기같은 악마 새끼야."
그레모리는 면전에서 내게 쌍욕을 퍼부었다. 그레모리의 뒤에 있던 다른 간부들도 얼굴로 나를 욕하고 있었다. 아주 대놓고 욕을 하지는 못하지만, 내 잔악무도한 계획에 다들 이골이 나있었다.
"마족이 마족답게, 오크가 오크답게 행동하는게 뭐 어떠냐."
"오크는 명예로운 전사라고 알려져있잖아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오크가 있어. 전투와 명예를 중시하는 전통적인 오크,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기 위해 싸우는 오크. 나는 어디까지나 후자란다."
그래서 이번에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나는 손에 든 쇠사슬을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찢어진 죄수복같은 낡은 옷을 입은 릴리가 앞으로 나왔고, 내가 쥐고 있는 쇠사슬은 릴리의 목에 연결되어 있었다.
"...아프진 않냐?"
쇠사슬은 경비 초소에서 진짜로 죄수를 상대로 쓰던 물건이었다. 낡고 표면이 거칠어 벌써부터 쇠사슬이 묶인 피부가 벌게져있었다.
"조금 피부가 쓸리긴 하는데 괜찮아요."
"그럼 됐고. 혹시나 아프면 작게라도 얘기해라. 적당히 조절하면 되니까. 그럼 아더. 앞으로 나와."
내 지시에 따라 아더가 쇠사슬을 네 개나 쥐고 앞으로 나왔다. 여자 사냥꾼들은 꺅꺅 거리며 함께 손을 잡고 앞으로 나왔다. 복장이 죄수복이 아니었다면 데이트를 나서는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그들은 신이 나 있었다.
"아더야, 너 혼자서 할 수 있겠냐?"
"해보겠습니다."
아더는 의지를 다졌다. 형제들 중에는 그래도 레벨 값을 하는 녀석이었고, 내가 그러하듯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어느정도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아무 부담없이 넷을 아더에게 맡겼다.
"그럼 그 다음, 너희들은...."
"헉, 허억, 군단장님...!"
라스촌 사냥꾼들은 벌써부터 헉헉거리며 몸을 떨었다. 평소에 입고있던 옷과 달리, 마찬가지로 죄수복이 입혀진 그들의 몸에는 하얀 깃털들이 자꾸만 스쳐댔다.
"저, 저 혹시 조금만 줄여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안 돼. 바꿔줄 생각 없어. 그냥 해."
사냥꾼 중 한 명, 조루남의 '분대'는 무려 열 명의 하피와 하피 엔젤로 구성되어있었다. 그의 몰골을 볼 때마다 항상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더 많은 준비를 하면 그만이지만.
그리하여 사냥꾼들에 대한 준비는 완료. 배우는 모두 준비되었으니, 이제 무대를 설치할 때였다.
"그럼 설치 시작!!"
하피 엔젤들이 발톱을 이용하여, 넓고 두꺼운 판자를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가운데 구멍이 송송 뚫려, 목책의 위에 끼우면 딱 맞아 떨어지겠다 싶은 넓은 판자는 사람 다섯이 올라타도 거뜬할만큼, 단단했다.
"릴리."
나는 이번 작전의 핵심 배우라고 할 수 있는 릴리를 끌어당겼다. 륜이나 에일라가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기는 했지만, 이 역할은 릴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 믿냐?"
"물론이죠."
끼이익, 쿵.
하피 엔젤들이 망루 사이사이에 스테이지를 설치했다. 하늘에서 정찰을 하던 안드라스가 마침 내려왔다.
"주인님, 적이 북쪽으로 진군하고 있어요."
"...그래?"
쌔하긴 하지만 이미 다 준비는 끝났다. 나는 릴리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럼 인사를 해야지. 우리 군단에게 점령당한 도시들은 어떻게 되는지, 전세계에 낱낱이 알려주자고."
라스베가스의 진면목을 보여줄 때다. 나는 안드라스가 가리킨 북쪽의 망루를 향해 릴리를 데리고 올라갔다.
* * *
병사들은 북쪽으로 향했다. 상대적으로 가장 망루의 수가 적은 위치였고, 문만 있다면 얼마든지 드나들기 쉬운 곳이었다.
"그에이 경, 이곳이 예전에 문이 있었다는 걸 아십니까? 목책이 세워지기 이전만하더라도 이곳과 남쪽으로 긴 길이 이어져있었죠."
파이즈 경은 아련한 눈빛으로 북쪽에서 자비야바로 이어진 가도의 흔적을 눈으로 훑었다. 목책이 세워지기 전에는 울타리는 커녕 망루조차 없던 조용하고 평화로운 도시였건만, 마왕군과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길은 끊어지고 통나무가 일렬로 늘어졌다.
"선대 남작님께 자비야바의 방비를 강권하셨던 분이 라마티오 경입니다. 그런 분이 힘들게 쌓은 목책을 저런 식으로 욕보이는 마왕군 무리에 복수를 하고 싶습니다."
"예...."
빼지말고 열심히 싸우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에이는 나름 그래도 이 토벌군에서 자신이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가장 성과를 많이 낸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건만, 그간 보여준 한량 이미지가 자신의 족쇄가 되고 말았다.
'상관없다.'
그에이는 이번 던전 토벌에서 멋지게 활약하여, 그 공로를 인정받아 수도로 바로 떠버릴 생각이었다. 안전한 후방이 더이상 안전하지 않다면, 그 후방의 이점을 살려 화려하게 성과를 내면 그만이니까.
"반드시 복수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적들은 비록 자비야바를 점령했다고는 하나, 결국 마물에 불과한 존재들입니다. 그런 적을 상대로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프란시스 사제님과 모험가들도 있으니, 이 전투는 충분히 승기가 있습니다."
"돈으로 산 용병들에게 전투를 맡겨야 하는 꼴이라니.... 아, 아닙니다. 그들을 무시하는 건 아닙니다만."
"괜찮습니다. 대의가 아닌 돈을 보고 전투에 참가한 승냥이들이지요."
그리고 그 승냥이들이 이번 전투의 핵심이자 일등 공신이 될 것이다. 그에이는 추후 던전을 토벌할 때 주목을 끌면 그만이었다. 던전 주인의 목을 날린 기사, 그에이. 그를 위해서라면 지금은 숨을 죽이고 있을 때다.
"파이즈 경, 아무리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고는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저희의 역할은 시선을 끄는 것입니다. 적들이 저희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물론입니다. 하지만 그에이 경, 제게 선봉을 맡겨주십시오. 제가 직접 방패를 들고 사다리를 올라, 목책 너머로 뛰어넘겠습니다."
"그야 얼마든...응?"
그에이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올렸다. 그의 지시에 따라 뒤에서 대기하던 궁병들이 활을 들어올렸다. 목책 너머에서 검은 옷의 하피들이 하늘로 날아올랐고, 그들은 발톱으로 밧줄을 쥐고 목책 위에 두껍고 넓은 판자를 끼웠다.
"그에이 경. 저게 무엇처럼 보입니까?"
"...사다리를 설치하는 걸 방해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오히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기 쉽게 도와주는 꼴이었다. 궁수들을 배치하여 사격을 하려고 하는 걸까 싶기도 했지만, 그런 것 치고는 난간 하나 없이 판자만 덜렁 놓여있었다.
"대관절 저게 무엇이란 말인가?"
"으하하하하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목책 너머로 울렸다. 목책 근처의 망루에서 녹색의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그에이를 비롯한 수많은 병사들이 흉측한 오크의 모습에 경악했다.
"라스베가스에 온 걸 환영한다, 이 작은 인간들아!"
얼굴에 붉은 문신을 한 오크는 자신의 배를 손으로 크게 두드리며 소리쳤다. 하반신의 앞만 천으로 가린 오크는 나신에 가까운 상태로 갈색의 포대기를 허리에 들고 나타났다.
"이곳은 라스베가스! 우리 분노의 군단이 점령했다! 썩 꺼져라!"
"네 놈이 이 도시를 점령한 마왕군의 수괴냐!"
그에이는 목청을 가다듬고 문신 오크에게 소리쳤다. 배불뚝이 오크는 씩 웃으며 자신의 배를 북마냥 두드렸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도시 전체가 울릴 지경이었다.
"크하하, 이 무슨 편견과 선입견에 가득 찬 발언이란 말이더냐! 내가 오늘 너희들의 편견과 선입견을 깨주마! 개안하라, 그리고 똑똑히 보아라!"
파--악!!
문신 오크가 갈색 포대기를 뒤로 집어던졌다. 갈색의 로브로 칭칭 휘감겨있던 안에는 죄수복의 여인이 공포에 질린 채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저, 저저저!"
그에이는 목에 핏대가 절로 섰다.
"네 이 놈!! 인질을 잡다니 비겁하다!"
"뭐 이 놈!! 싹 다 안 죽인 것 만으로 감사해라! 역시 이래서 인간들에게 자비를 베풀면 안 되는 것을! 도시만 점령하고 살려서 보내줬더니, 다시 우리의 라스베가스를 빼앗으려고 창칼로 보답한 놈들이 말이 많구나!"
"닥쳐라! 네놈들이 더러운 발로 짓밟고 있는 땅은 우리 인간들의 땅이다!"
"이제 내 땅이니까 꺼져!!"
돼지 오크는 안하무인이었다. 그에이는 궁병에게서 활을 빼앗아 쏠까 생각도 해봤지만, 망루 위의 오크들은 전부 활을 아래로 겨눈 채 지시만 기다리고 있었다. 토벌군이 사격을 하는 즉시, 오크들은 응사할 것이다.
"너 이놈들, 마침 온 김에 잘 됐다! 나의 라스베가스를 탐하려는 자, 어떻게 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여주마!!"
부우욱!!
오크는 자신의 허리에 휘감아놓은 천을 잡고 하늘높이 던져버렸다. 인간들은 오크가 꺼낸 구렁이에 헛구역질이 남과 동시에, 두려움에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것은 남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했다. 금발 여인의 팔뚝과 비슷할 정도로 굵은 남근은 목책 위에서 덜렁거렸고, 그 물건은 의식을 잃고 고개를 떨군 여인의 치마 아래에서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에이는 상식을 벗어난 사태에 머리가 새하얘졌다.
"저, 저...."
"보아라! 이것이 라스베가스를 침략한 인간들의 말로다!"
오크는 여인의 상체를 아래로 숙였다. 그리고 동시에, 토벌군이 생각만 하던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푸--욱!
"으으읍!!"
입마개가 채워진 금발 여인은 비명을 질렀다. 오크는 여인의 목에 채워진 쇠사슬을 손으로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이것이 라스베가스를 탐하려는 자들의 말로이니라!"
퍽, 퍽퍽.
오크는 무자비하게 여인을 상대로 허리를 튕겼다. 치마 아래, 여인의 몸속으로 들어간 오크의 거근이 추잡한 물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충격적인 정사 장면에 넋을 잃었다.
"우오옷!"
오크가 여인의 배를 번쩍 들어올렸다. 덕분에 여인의 몸이 전체가 들어올려졌고, 오크는 두 손을 여인의 허리를 붙잡고 허리를 튕겼다. 여인은 허공에 띄워진 채 오크에게 일방적으로 당했다.
"똑똑히 보아라, 이 도시는 라스베가스!"
"흐허엉, 흐으읏!!"
살이 부딪히는 소리, 입마개가 씌워졌어도 튀어나오는 여인의 교성소리, 비만 오크의 거친 숨소리, 그리고 병사들이 침넘어가는 소리만이 라스베가스 주변에 울렸다.
"세계에서 가장 개방된, 향락의 도시이니라!!"
오크는 여인의 사타구니 아래로 빠르게 손을 집어넣어, 두 다리를 좌우로 활짝 벌려버렸다.
"어우야."
너무나도 격하고 개방적인 환영에, 그에이는 검을 떨어뜨릴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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