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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비만 오크-147화 (147/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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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으, 씨벌 춥다."

엔티엘은 제대로 갖춰지지도 않은 방한복을 부여잡으며 밤공기의 추위를 견뎌냈다. 횃불이나 장작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주변 공기를 따뜻하게 데웠지만, 애초에 한밤의 찬 공기는 그런 모닥불로 견뎌낼만큼 약하지 않았다.

"쓰벌, 재수 옴붙었네. 이런 날 야간 경비라니...."

"아저씨, 그런 말 잘못하면 기사 나으리한테 목날아가요."

상대적으로 젊은 청년이 머리에 맞지도 않은 투구를 쓰고 이죽거렸다. 이미 진지 밖에는 남작의 험담을 하다가 귀족 모독죄로 기사에게 처형당한 모험가 하나가 본보기로 널브러져 있었다.

"내가 뭐 남작님한테 뭐 말 실수라도 했나? 누구처럼 막 우하우하 하고 싶다고."

"얼굴에 음탕함이 가득하구만 무슨. 마음속에도 마찬가지네요. 마음속에 색욕이 가득하십니다?"

"그거야 내 생긴게 원래 이꼬라지라서 그런 거고. 애새끼 말 버릇하고는."

청년은 피식 웃으며 투구를 다시 반듯하게 정돈했다.

"아저씨는 왜 토벌군에 참가했어요?"

"돈 준다고 해서. 집 잃어서. 여자 구하러."

아주 빠르고 간결하지만 누구든 엔티엘이 토벌군에 참가한 이유를 한 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여자?"

"어. 있어. 아내는 아닌데, 아무튼 있다."

"...흐흠."

청년은 뭔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엔티엘을 노려봤고, 엔티엘은 괜히 찔려서 헛기침을 했다. 아는 지인의 여자를 구하기 위해 토벌군에 발을 들였다는게 문제 될 건 없지만, 그 여자가 아는 지인의 아내라면 여러모로 난감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시구나. 부디 살아계시길 바랄게요."

"아무렴. 그런데 너는 왜 참가했냐?"

"마왕군 때려잡으려고요."

청년은 허리춤에서 이가 다 낡아빠진 철퇴를 들어올렸다. 본래는 제법 형태가 잡혀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철퇴에는 피가 잔뜩 서려있었다. 엔티엘은 침을 꼴깍 삼켰다.

"이게 뭔지 아세요? 신께서 수많은 마족들을 때려잡으라고 보내주신 겁니다. 이 철퇴에 맞아죽은 마물의 수만 무려 백이 넘습니다."

"......거 대단하시구만.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데, 젊은이가 죽였는가?"

"아뇨. 제 거는 이거."

청년은 등에 매어둔 또다른 철퇴를 가리켰다. 그것은 여신교의 신성기사단에서 사용하는 철퇴였고, 엔티엘은 그제서야 상대방의 정체를 깨달았다.

"사, 사제님?!"

"여신의 인도가 함께하시길. 그런데 지금은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서 이야기하죠. 산책하다가 온 거니까 신경쓰지 마세요."

"아, 예...."

엔티엘은 절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아무리 여신교의 사제라고 하더라도 속마음까지 읽어낼 수는 없을 터. 엔티엘은 이전보다 더 굳어진 자세로 정면을 응시했다.

"아저씨는 이번에 후방으로 배치되었나요?"

"예, 유감스럽게도 야습에는 참가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유감이 아니라 천만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다. 초개와도 같이 목숨을 내다버리면서 엔티엘은 자비야바를 탈환하는데 열을 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의 집과 재산을 되찾고 싶었지만, 목숨까지 잃으면서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시구나. 그럼-"

철푸덕.

청년 사제, 프란시스의 투구에 물컹한 무언가가 떨어졌다. 프란시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엔티엘은 긴장으로 굳어버렸다. 하늘에서는 새때가 밤하늘을 날아가는지 푸드덕 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치워드릴까요, 사제님?"

"부디."

엔티엘은 구역질을 참고 투구 위에 떨어진 무언가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더 덩어리 진 것에 역겨움과 의아함을 느꼈다. 새똥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이질감이 느껴지는-

"으악?! 이거 뭐여, 씨벌!"

엔티엘은 횃불에 비친 정체불명의 무언가를 바닥에 집어던졌다. 주먹만한 크기의 붉은 무언가가 흙바닥을 굴렀고, 엔티엘의 손은 그 덩어리에서 묻은 점액으로 덕지덕지했다.

"......잠깐!"

엔티엘의 손을 본 프란시스는 사색이 되어 엔티엘의 손을 잡았다. 강제로 손을 펼치게 하여 불에 비쳐 확인한 뒤, 프란시스는 손가락으로 엔티엘의 손을 쓸어 혀에 대었다. 엔티엘은 토할 뻔 했지만,

"슬라임?"

프란시스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리고 자연히, 고개가 하늘로 올라갔다.

"......사제님, 하늘에서 뭔가가--"

붕, 붕붕붕붕!

무언가가 빙그르르 도는 소리와 함께, 엔티엘의 얼굴을 향해 하늘에서 돌덩어리같은 무언가-유리병이 떨어졌다. 엔티엘은 그대로 뒤로 넘어졌고, 유리병은 엔티엘의 안면을 때리고 산산조각 났다.

철퍽, 철퍽!

유리조각이 사방으로 퍼지는 가운데, 유리병 안에 들어있던 슬라임의 점액 또한 충격으로 사방으로 흩어졌다. 프란시스는 엔티엘이 뒷통수가 깨지지 않도록 간신히 잡아세웠지만,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름끼치는 소리에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여신이시여...."

눈으로도 보이지 않는 높은 상공.

수 십개에 이르는 유리병이 막사를 향해 마구잡이로 쏟아져내렸다.

* * *

"아, 실수로 흘렸다."

안드라스는 바닥에 떨어진 슬라임의 점액에 눈앞이 아뜩해졌다. 주인의 명령에 따라 마개가 제대로 열리지 않으면 병목을 부서버리라고 해서 부섰건만, 그 힘이 워낙 강해서 안에 들어있던 점액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그래도 크게 문제는 없네. 얘들아~"

안드라스는 이미 떨어뜨리고 없는 유리병 대신, 허리띠에 매달아놓은 나무통을 들어올렸다. 기다란 컵같은 형태의 나무통에는 마찬가지로 슬라임 드래곤의 체액이 들어있었다. 안드라스는 불과 3주 전, 먹을 것이 없어 나무컵에 슬라임 드래곤의 체액을 담아 마시던 때가 떠올라 눈물이 핑 돌았다.

"이게 이런 식으로 쓰이다니, 흑."

"대장? 울어?"

"아냐, 눈에 깃털이 들어가서 그래. 다들 준비 됐니? 아직 유리병 안 떨어뜨린 애들 없지?"

안드라스가 이끄는 백여마리의 하피 부대는 전부 손톱을 펼쳤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허리띠에 묶어놓은 나무통 말고는 이미 전부 바닥에 집어던졌다. 이미 인간들의 막사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다들 투척 준비~!"

안드라스는 느긋한 목소리로 허리띠에서 나무컵의 손잡이를 들어올렸다. 'ㄱ'자로 붙여놓은 손잡이 덕분에 안드라스나 하피 엔젤들은 허리띠에 걸어둔 나무컵을 잃어버리지 않고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애초에 야습을 위해 아주 천천히 날아오기도 해다.

"얘들아, 우리는 꼭 노리고 안 날려도 되거든? 그런데 주인님이 하나 보상을 걸으셨어. 나한테는 아주 특별한 임무를 주셨지."

안드라스는 혀로 입술을 핥으며, 나무컵의 손잡이를 쭉 뻗었다. 모든 하피 엔젤들이 양손에 묵직한 나무컵을 들었다. 그 무게는 족히 하나에 1L는 훌쩍 넘을 정도였다.

"이걸로 병사들 맞춰서 죽이기라도 하잖아? 그러면 걔는 내가 나중에 전투 끝나고 주인님께 따로 말씀 드릴 거야. 알겠니? 그러면...아참, 너희들."

안드라스의 입꼬리가 더할 나위없이 올라갔다.

"주인님 자제분들과...으흐흣."

"끼요오오오옷!!"

"아오, 시끄러워! 조용히들 해! 귀 아파 죽겠네! 흠흠, 다시 집중!"

하피 엔젤들이 꺄꺄거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안드라스 또한 그 마음을 십분 이해하기에, 헛기침으로 하피 엔젤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아래에는 소란에 뛰쳐나온 병사들이 수두룩했다.

"슬슬 인간들이 나오기 시작했네. 그럼 얘들아, 셋, 둘, 하나-"

통.

안드라스가 나무컵을 살포시 놓았다. 그에 맞추어 하피 엔젤들도 함께 나무컵을 놓았다. 나무컵 안에는 표면이 싸늘하게 식어 굳은 슬라임 드래곤의 체액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모두 엄폐! 머리 보호! 방패 위로 들어!!

기사의 외침이 진지 전체를 울렸다. 병사들은 황급히 원형 방패를 들어 몸을 보호하거나 머리를 보호했다. 최초의 유리병보다 나무컵이 훨씬 가벼워서 그런지, 상당히 높은 상공에서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에게 큰 피해는 없었다.

우박 정도일 뿐이다! 투구 벗고 나오지마, 이 병신들아!!

"칫."

안드라스는 안타까운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더이상 효과가 없다고 판단하여, 허리에 강하게 묶어둔 허리띠의 매듭끈을 풀어버렸다.

"전부 다 부어!"

안드라스의 지시에 따라 하피 엔젤들이 손톱을 세워 허리띠를 끊어냈다. 허리에 주렁주렁 매달려있던 나무컵들은 허리띠 자체가 끊어지며, 힘없이 단번에 지상을 향해 떨어졌다.

파바바박!

나무컵이 흙바닥, 상자, 방패, 투구 등에 부딪혀 산산조각났다. 최초에 안드라스가 유리병으로 얼굴을 맞춘 병사 이후, 하늘에서 우박처럼 떨어지는 나무컵에 사망이나 중상을 입는 병사들은 없었다.

못해도 피멍이거나 타박상이 전부.

"음...."

회심의 공습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안드라스는 하나도 남김없이 점액을 쏟아낸 것에 만족했다. 진지에는 슬라임 드래곤의 점액으로 흥건했다.

"저거 나름 맛있었는데...."

공습에 쓰인 슬라임 드래곤만 무려 10마리.

사흘 동안 서브던전에서 사냥하여 끌고나온 슬라임 드래곤은 공습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기습에 비해 사상자는 그리 많이 발생시키지 못했으나.

"임무완료."

안드라스는 싱글벙글 웃으며 하피 엔젤들에게 손을 까닥였다. 무게가 훨씬 가벼워진만큼, 그들은 빠른 속도로 상공에서 이탈할 수 있었다.

"꺄하하하!!!"

안드라스와 하피 엔젤들은 간드러지는 비웃음을 내뱉으며 라스베가스로 귀환길에 올랐다. 성난 인간들이 하늘을 향해 화살을 쏘았지만, 이미 하피 엔젤 부대는 화살이 닿지 않는 높이까지 도주했다.

* * *

하피들이 1차 공습을 하고 돌아왔다. 다행히 다친 이들은 없었다. 꽉 조아놓은 허리띠 때문에 허리에 붉은 선이 생기기는 했지만, 살이 쓸린 것도 아니고 이 정도면 다쳤다고 보기에도 민망한 상태였다.

그리하여, 나는 하피들을 통해 나무통 테러를 일으키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내 1차 작전을 직접 눈으로 보겠다며 망루로 오른 그레모리는 헛웃음을 지으며 나를 질타했다.

"하피들을 통한 공습. 확실히 기습이라는 의미에서 의도는 좋았지만, 효과가 이래서야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

그레모리는 금방 소요가 잦아든 적진을 가리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횃불들이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공습 테러에 따라 소요가 일어날만큼의 혼란은 아니었다.

"어디 돌 덩어리라도 쏟아낸 것도 아니고, 차라리 칼날조각을 만들어서 뿌려버리지 그랬어. 진지를 써먹지 못하게."

"그것도 좋은 생각이군. 다음 번에 써먹도록 하지. 하지만 성내지마라, 그레모리야."

나는 그레모리의 분노를 풀어주기 위해, 뒤에서 끌어안으며 몸을 살살 간질였다. 그레모리는 싫은 듯 하면서도 내 손길을 그대로 느끼고 있었다.

"흥, 그래서 어쩔 거야. 이제 적들은 공습에 대해 철저히 대비를 할 건데. 많이 죽이지도 못했잖아."

"흐흐, 애초에 이번 작전은 살상이 목표가 아니다? 디버프지."

"...뭐?"

그레모리는 내 의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륜이나 에일라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성별에서 오는 차이였고, 경험에서 오는 차이였다.

"군인이라는 건 말이야, 상당히 억압되어있는 환경에 놓여서 불합리한 처사를 받기 마련이지. 주기적으로 욕구를 배출할 곳이 없다 이 말이야."

나는 유리병에서 라임의 체액을 한움큼 꺼내들었다. 슬라임 드래곤보다 몇 배는 더 효과가 좋은 라임, 그러니까 슬라홀의 체액은 조금만 접촉하게 되더라도 몸이 달아 오르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우리가 하피 엔젤을 이용해 공습을 한 주 목적은 유리조각이나 나무통으로 머리를 으깨려고 하는 게 아니야. 바로 이거, 이게 주 목적이지."

안에 무게를 싣기 위해 집어넣은 슬라임 드래곤의 체액. 그것은 단순한 무게추가 아니라, 그 슬라임 드래곤의 체액을 진지 전체에 뒤집어 쓰게 하는 게 작전의 목표였다.

"고작 1톤도 되지 않을 양이기는 하지만, 어차피 그게 다 미약 덩어리 아니냐. 흐흐."

과연 구축해놓은 진지를 모두 옮겨버릴 것인가, 아니면 치우고 그대로 사용할 것인가. 어느쪽이든 여러모로 볼만한 장면이 연출될 게 틀림 없었다.

"세상에는 말이야, 딸쳐도 전력 손실이 일어난다고 영창 보내는 군대도 있어요. 흐흐흐, 남작은 어떻게 하시려나?"

아랫것들인 기사나 간부들이라면 몰라도, 대장인 남작이 여자인 이상 남자 병사들의 고통은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더군다나 잔뜩 달아오른 욕구를 혼자서 해결하라고 하지도 못하게 통제한다면.... 생각만으로도 짜릿했다.

"크흐흐, 이제 부대 전체가 발정이 나서 어쩔 줄을 몰라할텐데."

제대로 한 판 붙기 전, 적의 전력을 깎아먹는 것은 언제나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분노의 군단 전용 디버프기.

광역 분노.

인간의 3대 욕구 중 하나를 자극하는 이 테러를 두고 과연 토벌군은 얼마나 냉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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