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527일차 -------------------------
토벌군을 소집하겠다고 의기롭게 나선 것은 좋았지만, 당연히 사람이 하는 일인데 바로바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비르고 남작에게는 안타까운 말이지만, 토벌군이 제 구실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구색을 갖추기에는 제법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비르고 남작이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게 한 수많은 장애요인이 있었다.
가령, 비르고 남작령 전체에 퍼뜨려놓은 경비병들을 다시 스피카 성으로 복귀시키는데에 시간이 걸렸다. 스피카 성에서 퍼져나간 파발들은 각지의 경계를 위해 파견한 경비병들을 성으로 되돌렸으나, 그들이 돌아와 재편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영지 전체에 수비병력을 분산하여 파견한 것. 남작에게 첫번째 장애 요인이었다.
그리고 둘째.
"영주님이 직접 나서시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으랴!"
"자비야바에서 죽은 내 형의 원수를 갚겠소!"
"마왕군 새끼들 와보라고 그래! 내가 배때지에 칼을 쑤셔넣을테니!!"
영주의 친정 소식을 듣고 너도 나도 나선 젊은이들, 자비야바에서 죽은 가족들에 대한 복수를 위해 칼을 든 이들, 그리고 마왕군과의 전쟁에 끓는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참전한 용사들.
그 모든 이들이 한 무리의 토벌군으로 편제되기까지도 시간이 걸렸다. 영지를 오랫동안 좀먹던 기생충인 집사장을 처형한 것은 많은 영지민들의 환호성을 받았지만, 역설적으로 남작령에서 행정을 도맡은 이를 무작정 처형하는 바람에 행정의 공백이 생긴게 두번째 장애 요인이었다.
그리고 세번재 장애 요인.
"남작이 집사장을 죽인게 사실은 사기라는데? 선대 남작님도 독살당했잖냐. 혹시 알아? 아비고 나발이고 권력에 눈이 멀어서...."
"쉿. 그런 말 공공연히 하면 잡혀가요, 이 사람아."
"내가 들은 건데 말이야, 어디가서 말하지 말어 사실 집사장을 반역자로 몰아서 죽인 것도, 집사장의 재산을 꿀꺽하려고 하는 거야. 착복한 재산? 너는 그 말을 믿냐?"
비르고 남작에 대한 온갖 음모론이 팽배했다. 안그래도 작위를 승계하는 과정에서 흉흉한 소문이 짙었건만, 남작은 졸지에 재산을 위해 패륜을 저지르고 인륜을 저버린 쓰레기가 되어버렸다.
"던전을 발견하고서도 알고도 방치했다잖아."
"사실은 던전의 괴물에게 사주를 받은 마녀 아닐까?"
"천 명이 죽었잖아. 괜히 살아돌아오는 사람 한 명도 없이 다 죽었겠어? 남작이 마왕군을 위해 제물로 바친 거야."
비르고 남작에 대한 음모론은 겉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한 번 물살을 타고 흘러가기 시작한 음모론에 남작령은 발칵 뒤집혔고, 남작은 길길이 날뛰며 자신에게 씌워진 오해의 올가미를 적극적으로 떨쳐내고자 했다.
"내 반드시 던전을 공략할 것이다!"
기사 파이즈는 집사장의 자택에서 막대한 양의 금화와 마석을 발견했다. 확실히 일개 남작령의 집사장이 모았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양이었고, 족히 수도의 중산층 집 한 채를 구매할 수 있을만큼의 재산이었다.
"내 이 재산을 금화 한 개 남기지 않고 모두 던전 토벌에 쓸 것이다!"
남작의 의기는 대단했다. 성내의 상인들에게서 정당한 값을 지불하여 병장기를 구매했고, 그걸 그대로 토벌군에 지급했다. 그리고 거기에 멈추지 않고, 금화를 이용해 모험가들을 대대적으로 고용하고자 했다.
"청사자 길드가 멸망한 던전? 56위라며? 제법 짭짤하겠지?"
"의뢰 수주만 받아도 안 다치면 본전이야."
"도시를 점령한 오크 무리라.... 이거 오랜만에 몸 좀 풀겠는 걸."
어중이떠중이부터 시작하여 이름께나 날린다 싶은 용병들까지 합류했다. 그 모든 군세가 하나의 토벌군으로 편성되기까지가 무려 이틀.
자비야바를 점령당한 지도 어느덧 나흘째.
기사 라마티오가 이끈 1차 토벌군이 전멸당한 이후, 그 사이 남작은 영지의 모든 병력들을 긁어모으고 용병들을 고용해 대대적인 토벌군은 급조해냈다.
기존의 영지병이 500명.
혈기왕성한 신병이 600명.
그리고 용병으로 구한 모험가 집단이 약 100명.
영지에 가신으로 있는 기사 다섯까지 포함하여, 2차 토벌대도 약 천이백 명의 대인원을 편성했다. 라마티오의 1차 토벌대보다 수가 조금 더 많은 정도였지만, 남작의 호언장담대로 병력의 질은 1차 토벌대를 훨씬 상회했다.
그리고 아침.
남작은 토벌대의 앞에 서기 위해, 자신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가죽갑옷을 챙겨입었다. 가솔의 도움없이 스스로 입기는 힘들었지만, 남작은 어찌어찌 힘겹게나마 갑옷을 입는데 성공했다.
똑똑.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남작은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정돈하고 헛기침을 했다.
"누구냐."
"그에이 입니다, 주군."
"들라."
문이 열리며 투구만 벗은 중장갑의 기사가 방안에 들어왔다. 남작은 근엄한 얼굴로 자신의 갑옷을 가리켰다.
"이 정도면 선봉에 서도 아무 문제 없겠지 않나, 경?"
"...저와 있을 때는 어깨의 힘을 푸셔도 좋습니다. 주변에 아무도 없으니."
끼이익. 그에이는 문을 닫았고, 비르고 남작은 잠시 쭈뼛거리다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긴장한게 느껴졌습니까?"
"예. 너무나도 잘."
"긴장을 하지 않을 수가 없죠. 이 토벌군마저 패배하게 되면 제 영지는 끝장인데. 다른 던전도 아니고 56위의 던전이 아닙니까. 분명 막대한 병력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으으, 이럴 줄 알았으면 자비야바가 점령되기 전에 토벌대를 꾸리는 것을...!"
남작은 가슴을 두드리며 자책했다. 그에이는 미약한 죄책감에 시선을 돌렸다. 막말로 그 날, 자신이 화전촌에서 기수를 돌리지 않았다면 던전을 당일에 발견할 수도 있었을테니.
다행히 남작 또한 자신의 실수와 오판을 통감하고 있었기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적어도 둘은 같은 생각을 하고 의견에 동의한 공범이었다.
"...그에이 경, 아니 그에이 님."
비르고 남작은 그에이에게 존칭을 붙였다. 그에이는 손사레를 치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주군! 저는 그저 한낱 기사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수도에 자리잡은 명문가의 차남이죠. 작위를 물려받으면 저보다 훨씬 높은 작위에 오르실 분. 그러니 미리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비르고 남작은 그에이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손을 꼭 붙잡았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게 된다면, 저를 데리고 수도로 가주세요."
"...무슨 일이 생길 리 없습니다. 주군. 남작님. 마음을 단단히 먹으십시오. 결코 약해지시면 안 됩니다. 남작님께는 천 백의 병사가 있고, 백의 용병이 있으며, 기사만 다섯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제가 있고요."
그에이는 남작을 두둔하며 용기를 불어넣었다. 남작이 불안감에 빠질 수록, 그에이는 희망적인 말을 하며 남작을 정신적으로 지탱했다.
"그러니 희망을 가지십시오. 이제 총사령관 아니십니까? 사기를 북돋아 주셔야지요."
"...예. 알겠습니다. 후우, 후. 그에이 경이 없었다면 저는 진작에 무너졌을 겁니다."
남작은 그에이에게 손을 건넸다. 그에이는 정중한 자세로 남작의 손을 잡고 남작을 일으켜 세웠다. 남작은 그에이와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영주성을 나갈 때까지만 잡아주시겠습니까?"
"에스코트하겠습니다. 주군."
"...이럴 때는 레이디가 아닐까요."
"주군은 주군인지라."
그에이는 끝까지 남작을 수도로 데려가겠다는 말에 답을 하지 않았다.
* * *
제법 빠르다면 빠른 시간안에 결성된 제 2차 토벌군은 스피카 성을 빠져나왔다. 남작이 직접 말에 올라 선두에 섰고, 기사와 보병들이 뒤를 이었다.
최후방에는 급히 용병으로 고용한 모험가들이 자리를 잡았다. 자유분방한 모험가들을 상대로 체계적인 명령 전달과 상명하복이 어려운 만큼, 남작은 모험가들을 일종의 유격부대로 편성했다.
그리고 당연히 그 유격부대에도 우두머리가 있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남작은 자신의 옆에 말을 타고 따라오는 앳된 외모의 소년 사제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프란시스 사제님 덕분에 모험가 분들에 대한 시름을 덜었습니다."
"하하, 아닙니다. 간악한 마왕군의 괴뢰들에게 신의 철퇴를 내려치는데 응당 나서야지요."
사제, 프란시스는 멎쩍은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선두의 기사들을 포함해 가장 어려보이는 외모였지만, 실제 나이나 배경이나 지위를 생각하면 결코 소년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존재였다.
"<신벌> 프란시스. 제가 사제님으로 불러도 괜찮을 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저는 평범한 사제인 걸요."
"사제님께서 평범하시다뇨. 그 무슨 겸양을."
남작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프란시스는 금테 모험가로서 단독으로 68위 벨리알의 던전을 공략한 것으로 모자라, 50위 푸르카스, 43위 사브나크 공략전 등에도 참가했던 명망있는 사제였다.
본인이 순회사제 신분을 고수하지 않았다면, 여신 교단에서는 진작에 그를 신성기사단의 일원으로 영입했을 것이다.
"사제님께서 대장을 맡아주신다는 말이 돌자마자 30명이 용병으로 자원을 했지요. 덕분에 전력이 많이 향상되었습니다."
"다들 마왕군의 간악함에 의기를 다진 겁니다. 제가 아니더라도 그들은 기꺼이 여신님의 종복으로서 마왕군을 물리쳤을 겁니다."
모험가들은 프란시스가 모험가 부대를 이끄는 대장이 되는 것을 금방 수긍했다. 대부분의 모험가들이 목테나 동테였고, 간간히 있는 은테도 현역 금테 앞에서는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그…30위 포르네우스 공략전에도 참가하셨다고 하셨죠?"
남작은 가장 최근 프란시스가 나섰던 던전 토벌을 떠올렸다. 남작가의 힘으로는 결코 승리할 수 없는 30위의 던전. 아리에스 백작령에 자리를 잡은 던전은 결국 완벽히 토벌되었지만 많은 피해가 있었다.
"예. 그 때도 지금처럼 1차 토벌군이 전멸되었습니다. 제가 참여한 2차 토벌군 또한 전멸 당할 뻔 했죠. 변경백께서도 크게 다ㅊ...흐흠."
프란시스는 헛기침을 하며 말을 골랐다.
"...변경백께서 성검을 크게 휘두르시니 간악한 오크 무리들이 일거에 쓸려나가셨죠. 아마 영지가 조금만 가까웠다면 변경백께서 달려오셨을 겁니다. 오크는 변경백님께 있어서 따님의 원수이니."
"......."
아는 사람이 튀어나왔다. 에일라 아리에스. 도도하고 오만한 기사로서 변경백의 딸로 태어난 것 말고 특출난게 없었건만, 그녀는 그 신분의 힘으로 한 기사단의 대장이 되었다.
'나도 남작령이 아니라 백작가의 여식이었으면….'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아무렴 오크들은 위험한 존재니까요. 호전적이고 야만적. 그래도 고작 100마리 밖에 없어서 다행입니다."
"남작님."
사제 프란시스의 목소리에는 살짝 두려움이 담겼다.
"...단순히 상대적으로 낮은 등위의 던전에서 나온 선발재라고 해도 무시하시면 안 됩니다. 그들은 도시 하나를 점령하고, 천 명의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일만큼의 전력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더욱이."
프란시스는 목소리를 낮췄다.
"특히 오크라면 더더욱."
"...혹시 제가 뭔가 주의해야할 것이라도 있습니까?"
"예. 남작님, 이것은 그냥 흘려들으십시오."
프란시스는 이를 악 물며 말을 이었다.
"꼭 던전의 등급이 해당 던전의 전력과 곧이곧대로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성기사단의 단장님과 부단장님이 그러하듯, 대장보다 훨씬 강한 부하가 있는 경우도 있죠. 이건 그냥 질문입니다."
프란시스는 무서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정작 어린 아이가 장난삼아 위협을 하는 것 같아 남작은 속으로 웃었다.
"던전 10위급 안에 들어갈 정도의 던전은 왕국 전체와 맞먹을 정도지요. 그런 던전의 주인들은 하나 하나가 일기당천, 아니 수 만 명의 몫을 홀로 해내는 강자들이고요. 그런 존재가 갑자기 30위, 아니 56위 던전에서 하수인으로 튀어나온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랬다가는 인류 연합에 있어서 대재앙이 되겠군요. 혹시-"
"변경백의 성검은 부러지지 않았습니다. ...여기까지만 말씀드리죠. 슬슬 도착한 것 같습니다."
스피카 성에서부터 자비야바까지 이어진 가도로 진군한 토벌군은 자비야바로 흘러가는 강에 도착했다. 돌다리는 여전히 굳건하게 이어져 있었지만, 그 돌다리 너머 멀리서 보이는 자비야바의 모습은 남작의 기억과는 사뭇 달랐다.
"......저거 뭐야?"
남작은 급히 말을 몰아 앞으로 나갔다. 멀리서 잘 보이지 않았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라 직접 보고 확인코자 했다.
"위험합니다!!"
조용히 뒤따르던 기사들이 황급히 앞으로 나섰고, 프란시스도 등에 묶어둔 철퇴를 들어올렸다. 적당한 거리에서 말을 멈춘 남작은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여신이시여…."
자비야바의 목책은 이전보다 1.5배는 더 높아져 있었으며, 두께는 더욱 단단해져 있었다. 심지어 목책의 끝에는 날카로운 가시덩굴이 박혀있었다.
오크들은 고작 그 며칠만에 자비야바를 완벽한 '요새'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남작이 충격에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이.
콰아아앙!!
거대한 폭음와 함께, 남작을 향해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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