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423일차 -------------------------
밤이 되었다.
나는 병사들에게 집을 주고 잠깐의 휴식을 취하게 한 뒤, 다시 부하들을 광장에 모았다. 우리는 라스 베가스를 손에 얻었지만 완전히 점령한 것이 아니고, 남작령에서 대대적인 반격을 맞받아 칠 준비를 해야했다.
"아더는 숲에 가서 나무를 베어와 무너진 목책을 다시 세워라."
수성전을 감안하였기에 최대한 방어시설을 부수지 않고 싸웠다. 무너진 부분만 복구하면 다시 원래의 기능을 되찾을 수 있었고, 아더는 분대원을 이끌고 바로 인근 숲으로 향했다.
"퍼시발은 주민들을 관청으로 모아. 각자 집에서 이불과 배게를 챙겨서, 당분간은 관청에서 자게 해라. 그리고 자는 동안 '그걸' 준비하게 해."
집을 약탈하지는 않았지만 쉽사리 재우기는 난감했다. 주민들이 아직 내게 충성을 바친다는 확신은 없으니, 나는 주민들을 관청에 몰아두었다. 그들은 내가 부여한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두려워했다.
"호, 혹시 관청의 입구를 막고 불을 지른다거나 하시지는...."
"내가 그 정도로 미친 놈은 아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그런 짓을 하면 내 아랫도리에 불 지른다. 됐냐?"
걱정하는 주민들에게 약속을 하고 나서야 주민들은 순순히 관청으로 들어갔다. 모든 병력들을 집집마다 지키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주민들도 당장은 우리의 감시를 받아야 한다는 걸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퍼시발을 따로 불렀다.
"퍼시발, 잊지마라. 저들은 아직 우리 군단에 충성을 맹새한 자들은 아니야.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는 자들이다. 그럼 놔줘. 괜히 시체 치우기 귀찮으니까. 하지만 만약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다면...."
"그때는 제 손으로 직접 때려죽이겠습니다."
"아니, 퍼시발아. 너 이제 검도 들었잖냐. 깔끔하게 목을 날려. 옷은 속옷 빼고 전부 다 벗기고."
"군단장님께서 말씀하시는대로."
퍼시발과 분대원들은 완전무장을 갖추고 관청 주변을 에워쌌다. 관청 내부는 일반 관공서처럼 30명이 충분히 용변을 해결할 시설이 갖춰져 있었고, 나는 혹시나 그들이 공복을 호소할까봐 식량 창고의 일부를 털었다.
"나머지는 우선 망루를 수복하고, 장비들을 챙겨. 그리고 경비를 서라. 횃불을 들고 야습을 하러 오는 적들을 경계해. 에일라, 네가 나머지를 이끌어라."
에일라는 나머지 오크 부대를 이끌고 떠났다. 이제 남은 것은 광장의 유일한 포로인 마법사 근처에서 상시 대기 중인 륜의 부대. 나는 륜과 함께 식량 창고에서 가져온 식량을 들고 관청으로 들어갔다.
"히익!"
주민들은 삼삼오오 모여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침 내 얘기를 하고 있었는지 대화의 흐름이 끊겼다. 나는 나무 상자에 한아름 넣어온 식량을 그들에게 내밀었다.
"인원수 맞춰서 가져왔으니까 알아서 나눠 먹어라. 오늘 저녁 겸 야식이다."
"...저녁? 야식?"
"뭐야, 니들 간식은 안 먹냐?"
"그, 아침에 한 끼 먹고 오후 좀 지나서 한 끼 더 먹고...."
"사람이 다이어트를 하는 것도 아닌데 삼시 세끼는 먹어야지."
나는 주민들의 대표격인 조합장 노인을 불러 완장을 채웠다. 연륜이나 지위나 그가 이제 주민들의 대표였고, 나는 그에 걸맞는 권력을 부여했다.
"네가 책임지고 식량을 나눠라. 애초에 사람 수 맞춰왔으니까 중간에 착복하면 바로 걸릴 거다."
"......이걸 한 명이서 하나요?"
조합장은 또다시 당황한 얼굴로 내게 되물었다. 나는 상자에 담아온 식량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팔뚝의 반정도 되는 호밀빵, 육포와 말린 과일 한 줌. 물이야 관청 내부에 나무통으로 비치되어 있으니, 저녁 한 끼 배 채우기에는 충분해 보이는 양이었다.
"많냐? 에일라한테 물어보니까 이 정도면 한 끼 식사로 충분하다고 하던데."
"충분.... 예, 예! 충분합니다!"
조합장은 고개를 조아리며 연신 감사했다. 나는 벌써부터 군침을 흘리며 이쪽을 바라보는 주민들을 보고 아차싶었다.
'에일라 이 녀석.'
누가 백작가 적녀 아니랄까봐 귀족 감수성을 발휘했구나. 평민이나 농노에 가까운 이들이 보기에는 거의 만찬 수준의 식사임에 틀림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닌 먹는 것에 있어서 만큼은 내 촉이 정확했다.
'우유까지 내줬으면 오늘 바로 충성심 최대로 찍었겠는데.'
창고에 보관중이던 우유 일부를 분출할까 생각을 해봤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처음에 잘해주면 그 다음부터는 조금만 못해줘도 안 좋은 감정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확실히 선언했다.
"오늘만 특별히 주는 것이다. 내일부터는 너희들도 일을 해야만이 식량을 받을 것이야. 이것이 최후의 만찬이라 생각하고 먹어라."
밥 먹는데 초쳐서 미안하지만 초쳐야만이 나중에 뒷말이 없을 터. 나는 주민들을 일렬로 서게 하였고, 륜과 조합장에게 배식을 하도록 지시했다. 내가 직접 주려고 하니 모양새도 그랬고 주민들도 싫어했다.
주민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식사를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천천히 씹어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환호성을 터뜨렸다.
"오오, 이런 부드러운 빵이라니!"
"니들 주식으로 빵 먹는다며?"
"...그, 엄청 딱딱한 빵을 묽은 수프에 적셔 먹는 지라."
너무나도 안쓰러운 주민들의 말에 나는 안쓰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평소에 뭘 먹나 싶어서 가장 낡은 옷차림의 남자에게 집에 있던 빵이 있으면 들고오라고 했더니, 왠 벽돌을 가져오더라. 오크의 이가 간신히 들어갈 정도로 딱딱했다. 망치로 깨부서 먹는 것도 아닌데.
부웅-!
나는 그들이 주식으로 먹는다던 빵을 들고 휘둘렀다. 쉰내가 나고 어찌나 딱딱한지 어지간한 둔기라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끝부분을 억지로 손으로 떼어 입에 한조각 물었다.
"음...."
겉은 딱딱하지만 그래도 속은 푸석푸석했다. 돌을 씹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물에 좀 적시면 톱밥 씹는 수준은 되어보였다.
"이 정도 딱딱함이면...."
나는 테스트를 위해 관청을 나섰다. 륜이 내 뒤를 따랐고, 관청의 문은 굳게 닫혔다. 내가 사라지기 무섭게 주민들의 소곤대는 소리가 문밖으로 흘러나왔다. 나는 곧장 광장으로 달려와 기절한 마법사의 볼기짝을 빵으로 내리쳤다.
찰싹!
"꺄악!"
마법사는 기절해있다가 내 볼기짝 스매시에 깨어났다. 빵에 오크들이 뿌린 정액이 잔뜩 묻어있었고, 나는 그걸 마법사의 앞에 던졌다.
"먹어라."
"이, 이건...?"
"먹기 싫으면 버리던가."
나는 빵과 함께 슬라임 드래곤의 체액 일부를 그릇에 담아 내어놓았다. 마법사는 몸이 판자에 묶여있었고, 고개를 옮기면 충분히 빵과 슬라임 체액을 먹을 수 있었다.
"이, 이...!"
"죽이라는 말은 안 하네? 살고 싶냐?"
마법사는 고개를 숙였다. 나는 머리에 하얀 가루가 덕지덕지 말라붙은 마법사에게 쪼그려앉아 그릇을 내밀었다.
"살고 싶으면 조용히 닥치고 있었어야지. 그러길래 왜 엘프를 노렸어?"
"...엘프가 제일 위협적이었으니까."
"눈이 좀 많이 안 좋네. 상관없다. 사람을 죽이려고 했으면 응당 그에 준하는 대가를 치뤄야지."
"푸흡."
마법사는 내 말이 우스운 건지 헛웃음을 실실 흘렸다. 고개를 들어올린 마법사의 눈에는 핏발이 서려 있었다.
"누가 마물 아니랄까봐 개소리하는 것 좀 봐. 자기는 아닌 줄 아나?"
"물론 나도 마찬가지지. 내가 남을 죽이려 들면, 남도 나를 죽이려 드는 게 인지상정인 건 나도 안다. 그래서...."
나는 빵의 끝을 잡고 마법사의 입에 툭툭 밀었다.
"죽기 싫으면 먹어라. 굶어 죽어도 상관없고."
"퉤. 마물이 주는 음식 따위...!"
"죽던지."
나는 가차없이 몸을 돌렸다. 륜은 뒤를 흘기며 내 뒤를 졸졸 따라오며 물었다.
"진짜로 죽이실 생각이세요?"
"본인이 안 먹으면 굶어 죽겠지. 죽으면 죽는 대로 또 쓰임새가 있어."
나는 라스 베가스의 정문으로 향했다. 망루에 대기하고 있던 오크 부하가 내 도착과 함께 바깥을 주시했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머리 위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나는 정문의 문을 좌우로 열어젖혔다.
"어떻게 약속시간을 이렇게 정확히 맞추지?"
"대략 계산한 거지."
등에 혹이 세 개 달린 낙타를 탄 붉은 머리의 여인이 라스 베가스에 도착했다. 낙타의 등에는 슬라임 드래곤의 표피 보자기로 감싼 깃털과 마석이 한 가득 쌓여있었다.
"환영한다. 그레모리 분신. 그 사이에 뭐 별 일 없었지?"
"그건 본체한테 물어봐야지. 후후, 생각보다 깔끔하게 제압했네? 어디 시체는 쌓아놨어? 제물은?"
"이래서 마족들은 안 된다니까. 다 쫓아냈다. 저항하던 경비병 70명 정도 죽인 거 말고는 다 쫓아냈어."
그레모리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미쳤어? 그럼 그 놈들이 전부 다 본성으로 들어가서 상황을 알릴 거 아냐? 제정신이야?"
"하여튼 마족 놈들 유전자에는 몰살이 패시브로 들어가있다니까. 륜아, 너는 절대 저런 거 닮아서는 안 된다. 내가 왜 인간들을 풀어줬는지 그레모리에게 설명해줄래?"
"음...."
륜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손뼉을 쳤다.
"더 강해져서 돌아와라!"
"아니, 그건 다른 놈 얘기고."
"아, 그랬나요? 음.... 기억났어요. 올 때 메로나?"
"그건 무슨 개소리야? 너야말로 엘프한테 이상한 거 가르치지마. 메로나는 또 뭐야?"
"그냥 개소리지. 크흐흐. 근데 뭐 틀린 말은 아니잖냐."
나는 망루 위에 활을 든 오크들을 가리켰다.
"쫓겨난 놈들이 이제 토벌대를 데리고 돌아올 건데, 그 놈들을 잡아먹어야 하지 않겠냐?"
그리고 그걸 위해서 그레모리를, 분신을 불렀다. 나는 그레모리가 가져온 봇짐에서 중급 마석을 꺼냈다. 내가 언젠가 중요한 날이 있을 때를 대비하여 아끼고 아껴둔 중급 마석들. 어쩌면 소환 시설의 등급 상승에 필요할 지도 모르지만, 당장 필요할 때는 과감하게 써야했다.
"나 너 믿는다. 진짜 실수 없이 잘 해."
"흥, 분신도 본체랑 똑같이 똑똑하거든. 실수 없어. 안심해. 고작 이 정도 거리인데 실수하는 게 이상하지. 그래서 어디다가 하면 돼?"
"당연히 광장이지."
나는 그레모리를 광장으로 안내했다. 그레모리는 품에서 책 한 권을 꺼낸 뒤, 책을 한 장 한 장 뜯으며 게슴츠레 웃었다.
"역시 뭘 좀 아네."
"포털은 당연히 마을 광장이 국룰 아니냐."
낙타에서 내린 그레모리가 분수 앞에 서서 종이를 바닥에 일정하게 놓기 시작했다. 종이에 그려진 소형 마법진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레모리의 마법이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주인님, 그럼 이제 저희 애들 준비시킬게요."
"응. 그래. 크흐, 이걸 내가 만들게 될 줄이야."
나는 점점 붉은 빛이 차오르는 마법진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주인님, 이건 뭐라고 부르실 건가요?"
"이거? 크흠. 그래."
나는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아, 이건 나이더스 커널이라고 하는 것이다."
라스 베가스와 라스촌 사이에 포털이 이어졌다.
"...땅굴관? 그냥 마법이잖아요."
"비유야, 비유."
결국 그냥 포털이라고 명명하기로 했다.
***
오크 무리에 의해 자비야바가 점령당했다.
스피카 성에는 자비야바에서 온 대량의 난민이 발생했고, 그에 따른 대처로 남작은 위경련이 올 지경이었다.
"......."
때려칠까. 하지만 전시에 준하는 상황에서 귀족 작위를 포기하고 도망치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귀족으로 살아온 남작이 어찌 귀족 작위를 포기하고 도망친단 말인가.
"......."
가신들은 전부 남작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인류 연합과 마왕군의 전투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남작령에도 결국 악독한 마왕군의 마수가 뻗쳤고, 그들은 이런 상황에 전혀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그에이 경은 아직도 감감 무소식인가?"
"예. 수도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아직 본가에서 요양중이라고 합니다."
"쯧. 여기도 저기도 오크가 문제군. 한낱 마물 따위가 뭐 이리 강한지. 에휴."
남작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얀 깃털이 달린 지시봉을 들어, 테이블에 펼쳐진 지도를 가리켰다.
"우선 자비야바의 주민들은 신전과 임시 막사에 최대한 수용하겠다. 자네는 신부에게 협조를 요청하라. 난민의 발생에 따른 소요는 기사들과 영지군이 나서서 진정시켜라. 고작 오크 100여마리에 불과한 전력을 두고 남작령 전체가 두려움에 빠지는 건 용서할 수 없다."
남작은 일일이 명령을 내렸고, 지휘봉을 테이블에 찰싹 내리치며 선언했다.
"그리고 내일 아침! 상비군을 제외한 영지군 전체를 이끌고 자비야바를 되찾겠다. 선봉에는…."
남작은 기사들을 훑었다. 다들 자신이 넘쳤고, 자신을 선봉에 세워달라고 강력하게 눈으로 어필하고 있었다. 남작은 중견 기사인 라마티오에게 지휘봉을 가리켰다.
"라마티오 경. 그대가 자비야바를 되찾아와주시오. 그리고 자비야바를 중심으로 다시 진지를 구축해야 할 것입니다."
"반드시 자비야바를 되찾겠습니다."
라마티오는 이를 훤히 드러내며 시원하게 웃었다.
"오크 100마리 쯤이야, 일도 아니지요."
라마티오의 강한 자신감에 남작은 안도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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