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123일차 -------------------------
알티엔은 아내를 침대 아래에 숨겼다. 하필 자비야바를 습격한 마물들은 어떤 방법을 썼는지 몰라도, 경비대를 피떡으로 만든 그 잔학한 손길은 알티엔 가족을 겁에 질리게 만들었다.
"여보...!"
"절대 소리를 내어서는 안 된다!"
알티엔은 검을 빼어들었다. 부인을 능욕당할 바에야 차라리 자신의 손으로 베고 자신도 자결할까 생각이 들었지만,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믿는 안경 너머 아내의 얼굴을 보니 차마 그런 미친 짓은 할 수 없었다.
쾅!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다른 집에도 오크들이 들이닥치기는 했지만, 하필이면 자신의 집에는 로브의 오크가 들어왔다. 로브 겉으로 보이는 오크의 몸은 근육이 넘쳐흐르고 얼굴에는 붉게 빛나는 문신이 있었다. 배는 그냥 겉으로 봐도 뚱뚱해보였다.
"뭐야. 여기에도 사람이 있었나?"
"이, 이 놈! 여기에는 나 혼자 뿐이다!"
"씨알도 안 먹힐 구라는 집어치우고, 당장 가족들 데리고 밖으로 나와라."
"......?"
알티엔의 검이 잠시 흔들렸다. 오크는 귀를 후비적거리며 짜증을 부렸다.
"시간 지체하기 싫다. 그러니까 포르네우스도 알아듣을 수 있는 수준의 선택지를 세 개 주마."
오크는 손가락을 세 개 들어올렸다.
"하나, 죽어서 시체가 되어 집을 나온다. 둘, 다리가 분질러져서 끌려나온다. 셋, 그냥 순순히 집밖으로 걸어나온다. 10초 주마. 10초 안에 안 나오면 적어도 마지막은 아닐 거다."
오크는 등을 돌리고 바깥으로 걸어나갔다. 알티엔은 벙찐 얼굴로 검을 떨어뜨릴뻔 했다. 알티엔의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이 복잡하게 맴돌기 시작했다.
정말로 순순히 나가기만 하면 살려주는 걸까? 아니면 밖으로 나가는 순간 찔리게 되는 걸까. 알티엔은 침을 꿀꺽 삼키며 침대 아래로 시선을 보냈다.
내가 먼저 나가서 확인할테니 기다려.
알티엔은 머뭇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그곳에는 이미 수많은 가족들이 광장의 분수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무릎을 꿇고 있었다. 몇몇 장정들이 얻어맞은 흔적이 있었지만, 저항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폭력이 없었다.
"혼자냐? 안에 더 없지?"
알티엔이 바깥으로 나선 순간, 밖에서 기다리던 로브의 오크가 알티엔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 안 돼!!"
끼이이익.
오크는 들어가자마자 침대를 들어올렸다. 아래에는 바짝 엎드린 모녀가 눈물을 흘리며 겁을 먹은 채 벌벌 떨고 있었다.
"직접 기어나올래, 아니면 머리채가 잡혀서 나올래? 나 팔 아프다. 언제 이거 떨어질 지 몰라. 셋, 둘, 하나-"
알티엔의 아내는 잽싸게 바닥을 굴렀다. 동시에 오크는 침대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조금만 판단이 늦었어도 알티엔의 아내는 침대 아래에 깔려 죽었을지도 몰랐다.
"허억, 허억."
"나와."
오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알티엔은 황급히 안으로 들어가 아내를 끌어안았다.
"여보!"
"바, 밖에 사람들 많아. 일단은 시키는 대로 하자."
"밖에 오크들 천지잖아! 미쳤어?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부부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당장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빠져나와야 했다.
똑똑.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아까전의 오크와는 다른, 큰 체격의 쾌남같은 오크였다. 오크에게 쾌남이라는 말을 붙이기도 웃기지만, 인간으로 치면 외모가 출중한 존재였다.
"저항하면 죽인다. 저항하지 않으면 죽이지 않는다. 우리는 무의미한 살육을 바라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오크는 밖에 나와있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우리는 인간고기를 먹지 않는다. 하지만 말을 듣지 않는 인간들은 죽이지."
오크가 손가락을 접기 시작했다. 알티엔 일가는 오크가 손가락을 다 접기 전까지 급히 집을 빠져나왔다. 오크는 새끼손가락만 펼친 채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나왔으면 저기 대충 앉아라. 너희같은 인간들이 지금 한 둘이 아니야."
알티엔은 부인과 함께 광장에 쪼그려앉았다. 다들 혼란스러운 얼굴이었고, 알티엔은 마침 친구인 엘티엔을 발견했다.
"어떻게 된 거요?"
"...나도 모르네. 그런데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아."
"오크잖소?"
"오크인데 이러고 있으니까 이상한 게지."
둘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누군가 정답이라도 알려주기를 바랐지만, 아쉽게도 그걸 알려줄 이는 없었다. 그저 대장으로 보이는 로브의 오크가 뭔가 말해 주기라도 기다리는 방법 밖에.
저벅, 저벅.
오크들이 한 군데로 모였다. 로브의 오크는 간부로 보이는 이들을 향해 무언가 장황한 설명을 하였고, 간부 오크들은 삼삼오오 조를 짜서 흩어졌다. 포로들은 자신들을 에워싸는 일반 오크들의 모습에 침을 꼴깍 삼켰다.
드디어 단체로 잡아먹으려고 하는 걸까?
"하나, 둘, 셋, 넷...."
오크들은 수를 세아리기 시작했다.
저 오크의 손에 자신들의 생사여탈권이 들려있었다. 과연 무슨 의도일까. 마왕군의 의식을 위한 제물? 그도 아니면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겁탈?
인간 포로들의 불안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안경을 낀 여인이 남들 모르게 바닥에 손으로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여보?"
엔티알이 아내의 행동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내는 로브의 오크를 바라보며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게 꼭 마법의 주문을 외우는 것 같아, 엔티알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 * *
"전체 672명. 남자 320명, 여자 352명입니다. 노인과 어린 아이의 수가 대략 200가까이 되며, 젊은 여성의 수는 마찬가지로 200명 정도입니다."
"나는 그냥 사람 수만 세라고 했는데 왜 굳이 젊은 여성의 수를 묻는 거냐?"
"왠지 필요하실 것 같아서."
"좋아, 에일라야. 잘했다."
어차피 다 쫓아낼 대상이기는 했지만, 앞으로도 이렇게 열심히 일해준다면 나야 고마운 일이었다. 중간에 저항을 하던 경비병이나 장정들은 결국 슬라임 드래곤의 먹이가 되었고, 그들을 제외하고도 약 670명이나 포로가 되었다.
"륜, 뭐 딱히 특출나보이거나 하는 애들은 없었지?"
"네. 메어리 정도는...없었어요!"
륜은 따로 모아둔 젊은 여성들을 눈으로 스캔하며 잠재력을 살폈다. 일일이 성감대를 찾아 누르며 등급을 확인하고 다닐수도 없는 노릇이니, 나는 륜에게 병아리 감별사 역할을 맡겼다.
"정말로 없던 거 맞아?"
"주인님, 혹시 저 못 믿으시는 건가요?"
"네 궁술 실력만큼 믿지."
"......오늘 잘했는데?"
"그래. 칭찬이다. 오늘 너 백발백중 아니였냐."
던전 밖으로 나오니 륜의 저격 실력은 일품이었다. 망루 위의 경비병들은 모조리 무력화되었고, 위협적인 놈들은 전부 머리에 바람구멍이 났다. 그 놈들 또한 슬라임 드래곤이 맛있게 먹어치웠다.
자비야바, 이제는 라스 베가스가 될 곳에 인간의 시체는 사양이었다.
"그럼 이제 이 670명을 다 쫓아내야하는데."
"주인님, 진심이십니까?"
에일라는 내가 이들을 전부 쫓아낸다는 말에 상당히 뭔가가 걸리는 모양이었다. 같은 인간으로서 무일푼으로 쫓겨난다는 것에 동정심이라도 생긴 걸까. 나는 에일라에게 따끔한 한마디를 장전했다.
"에일라야."
"노예로 부리지 않고요?"
"......?"
"주인님이시라면 남자는 전부 죽이고 여자는 노소 가릴 것 없이 전부 씨받이로 만드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평소에 네 속에 나의 이미지가 어떤지는 잘 알겠구나. 물론 그 생각도 안 한 건 아니지만, 이들이 여기에 있으면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이 펼쳐져서 안 돼."
터전을 빼앗긴 자들의 분노와 복수심은 상당할테지만, 적어도 사자의 뱃속에 기생충이 자리잡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나는 륜과 에일라를 불러 포로들이 듣지 못하게 조심스레 내 의도를 설명했다.
"어차피 남겨봐야 분란만 남을 것들이다. 차라리 전부다 내쫓은 다음에 부하들을 이쪽으로 데리고 오는 편이 나아."
"...주인님 혹시 여기를 오크 마을로 만드실 생각인가요?"
"비슷하지."
애초에 울타리도 그렇고 도시를 최대한 온전하게 점령한 이유는 하나 뿐이었다.
"라스촌 일일이 만들려고 하니까 속이 터져서 못해먹겠더라."
"그래서 인간들의 도시를 빼앗았다는 말씀이십니까?"
"오크나 인간이나 살아가는 방식은 그닥 다를게 없지. 그리고 에일라야. 여기는 오크만의 도시는 아니다. 마족이든 마물이든 인간이든 엘프든 종족을 초월하여, 우리 군단의 수도가 될 곳이야."
인간들의 도시를 점령하는 것만큼 군단의 힘을 과시하기에 좋은게 또 무엇 있을까. 인류 연합에 정면으로 칼을 들이미는 행동이었지만, 설령 패배하더라도 여차하면 그레모리 던전으로 빤스런 하면 그만이다.
"향락의 도시, 라스 베가스가 되는 거지."
"과연. 주인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더욱 노예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주인님의 자식들이니 그...성욕도 왕성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에일라야. 우리는 그냥 마왕군과 차별화할게 하나 있단다."
기존의 마왕군은 포로고 뭐고 닥치는 대로 죽였지만, 분노의 군단은 마왕군과 달리 일반 민간인에 대해서는 건드릴 생각이 없었다.
"저런 애들 백날 잡아봐야 여기사 하나 잡아서 능욕하는 것만 못하다."
"윽."
"아무 힘없는 애들 잡아봐야 뭐에 쓰겠냐. 우리에게 창칼을 내민 모험가들이나 여기사들, 마법사들 잡아다가 능욕한다면 모를까. 그래, 바로 지금처럼!"
나는 몸을 돌려 주먹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송곳같은 얼음창이 내 주먹에 분쇄되었다. 얼음창은 정확히 륜의 얼굴을 노리고 있었다.
"......주인님?"
"흐흐, 능욕당할까봐 지레 겁먹고 저질렀구나. 어리석은 마법사야. 아니, 그냥 마법을 좀 쓸 줄 아는 놈인가?"
672명의 포로 중에 마법을 쓰는 놈이 있다. 나는 느긋한 얼굴로 포로들을 살폈다.
"한 명이 돌발행동을 하였구나. 흐흐, 한 명이 무모한 짓을 한 덕분에 나머지 671명이 죽게 생겼어. 아아, 마법을 쏘았는데 마법사를 찾지 못하겠군."
나는 에일라에게서 몽둥이를 건네받았다.
"그럼 일일이 하나씩 족치는 수밖에. 마법 아닌가? 남녀노소 누구든 마법 정도는 쓸 수 있을 거야. 그렇지?"
인간들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할 만큼 무식하지 않았다. 한 명 때문에 전부다 죽게 생긴 현 상황에 인간들은 도대체 누가 마법을 쓴 건지 서로를 흘기기 시작했다.
"......."
그리고 한 명. 내 눈에 남들의 시선을 똑같이 따라하면서도 전전긍긍하는 안경 낀 여인이 보였다. 그녀는 홀로 주변인들의 시선을 따라하며 마치 자신이 한 게 아니라는 듯 강하게 어필하고 있었다.
사실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를 가리키는 약 세 명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차마 직접 누구인지 밝히지는 못하지만, 여인이 마법을 사용했다고 각기 다른 방향에서 눈으로 제보를 하고 있었다.
"나는 누군지 알고있다. 순순히 자백해라. 10초 안에 자백하면-"
"그 놈의 10초, 10초! 닥쳐! 내가 쐈다, 왜!"
여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여인은 로브 안에서 작은 지팡이를 내게 겨눴다.
"죽어라!"
여인의 지팡이에서 전격이 튀었다. 나를 짜릿하게 구워버릴듯한 전격이 내 주변에 튀었다. 하지만 전혀 아프지 않았다.
"너, 고작 그런 걸로 나를 죽이려 한 거냐?"
나는 자리에서 번쩍 뛰어올라 여인의 앞에 떨어졌다. 여인은 도망치려 했지만, 주변에는 다른 인간들이 있어서 도망치지도 못했다.
퍼--억!
나는 여인의 앞에 떨어지자마자 뒷통수를 후렸다. 죽지 않을 만큼. 죽어서는 안 된다. 여인은 꺽꺽 소리를 내며 바닥에 침을 토했고, 나는 여인의 멱살을 잡고 분수로 돌아갔다.
"아, 아아. 크흠! 모두 주목!"
나는 마법사 여인의 멱살을 쥐고 분수의 위로 올라섰다. 여인은 아둥바둥거리며 내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에일라가 검을 휘둘러 지팡이를 쳐냈다.
"잘 들어라, 라스로 태어난 작은 인간들아."
회심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간 마법사 여인에게는 본 때를 보여줘야했다. 나를 노렸다면 그냥 몇 대 쥐어박는 것으로 용서해주려고 했지만, 감히 륜을 죽이려 노린 것은 용서할 수 없었다.
"나는 너희들을 추방할 것이다. 이곳은 이제 나의 소유가 되었으며, 너희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나는 하나도 파괴되지 않은 도시를 가리켰다.
"여기에 남아서 나의 치하 아래에 살던가, 아니면 지금 당장 이 도시를 떠나던가. 번복은 할 수 없다. 한 번 떠나면 그곳으로 끝이니. 정확히 30분 뒤, 나는 이 도시의 정문을 열어주겠다. 도시를 떠날 놈들은 30분 뒤에 이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라. 나의 정자를 걸고 맹새하마. 순순히 떠나는 자들은 순순히 보내줄 것이다. 허나."
나는 마법사 여인을 높이 치켜들었다. 륜이 분대장으로 있는 분대의 오크들은 벌써부터 내 의도를 알고 씩씩거리고 있었다.
"이 년처럼 저항을 한다거나 우리 군단에 해를 끼치는 경우에는 우리도 신사답게 행동하지 않는다. 당한 것 이상으로 갚아주는게 나의 신조."
찌이이익!
"꺄아아아악!!"
나는 마법사 여인의 옷을 강제로 찢어버렸다. 여인의 살결이 광장 한가운데에서 훤히 드러났다. 포로들은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감았지만, 일부 포로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설마 진짜로 하겠어. 그런 눈빛이었다.
"잘 봐둬라. 저항하면 어떻게 되는지."
나는 고개를 돌려 륜의 뒤를 살폈다. 이미 륜의 분대원들은 분대장이 다칠뻔 했다는 것에 분노를 아랫도리로 표출하고 있었다.
"이게 우리 군단식 처벌이다."
나는 성난 오크들에게 마법사 여인을 집어던졌다.
30분이면 10명의 오크가 분노를 터뜨리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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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기념으로 3편인 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