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214일차 -------------------------
파후우와 륜이 그레모리의 던전에서 종적을 감춘 그 시각.
던전에 남은 이들은 침입자를 처리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별 것도 아니었다. 흥."
메어리와 에일라는 일망타진한 한 무리의 모험가들을 덩쿨 밧줄로 구속했다. 값비싸 보이는 물건이나 짐은 모조리 강탈했고, 속옷 한 장까지 전부 벗겨버렸다. 3명의 남자와 4명의 여자.
제법 많은 수의 모험가들이 던전을 찾았고, 불행히 죽은 이들을 제외하면 무려 7명이나 생포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 인류의 배반자들! 어떻게 마왕군의 편에 설 수 있어!"
"사, 살려주세요! 여기에서 있었던 일은 밖에다 얘기하지 않을게요! 같은 사람이잖아요!"
모험가들은 저마다 각자의 반응에 따라 생명을 구걸하기도 하고 에일라와 메어리를 비롯한 인간 부하들을 매도했다. 메어리는 시큰둥한 얼굴로 포로들을 감옥에 밀어넣었고, 에일라는 쓰게 웃으며 자물쇠를 채웠다.
"너희들도 그분의 사랑을 받으면 생각이 달라질 거다."
"타락한 기사...! 미쳤어!"
"그래. 나는 그분에게 미쳤다."
에일라는 자신을 향해 진절머리치는 여인을 향해 검을 빼어들었다.
"당장 너를 죽이지 않는 것은 주인님의 관대함 덕분임을 알아라. 반항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이는가?"
에일라는 공동 한가운데에서 산 채로 라인에게 잡아먹히는 여자를 가리켰다. 도적 출신의 여자는 밧줄을 풀고 도망치려고 했고, 구울에 의해 잡혀 결국 인간 형태의 슬라임의 먹이가 되었다.
"...정말 신경 쓸 곳이 많군. 포로 감옥이 꽉 차면 어쩌지?"
"글쎄요. 일단 덩쿨로 묶어두죠. 아빠가 오시면 물어보고."
"빨리 이쪽에서도 공격을 할 수 있게 되면 좋으련만."
시간은 벌써 몇 시간이 지났지만 파후우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파후우는 그 누구도 연이어서 들어오는 걸 거부했다. 2성 만렙의 안드라스를 1:1로 쓰러뜨릴 수 있는 자만이 파후우의 옆을 지킬 수 있었다.
"...둘이서 잘 보좌하겠지?"
"아무렴 제일 강한 두 명이니까요."
에일라와 메어리는 천장으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언제나처럼 천장에서 대기를 하고 있던 최강의 슬라임이 지금 이곳에는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남의 던전 굴파러 가는 건 좀...."
"그저 좋은 결과가 일어나기를 바라는 수밖에."
둘은 파후우의 승전보를 기대했다.
* * *
시스템은 분명 솔로몬이 던전 운영에 있어서 지원을 해주는 기적같은 기술이었지만, 여러모로 구멍이 많았다.
내가 그 구멍들을 노리며 빠른 발전을 시도하다가 관리자인 에스투를 소환했던만큼, 시스템은 결국 허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 허점이 보인다 싶으면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로 했다. 내 싸구려 도발에도 그레모리는 나오지 않았고, 우리는 그 사이 아주 그럴듯한 진지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흐흐, 지금쯤 우리 찾고 있겠지? 아, 라임아. 앞에 뭐 있으면 바로바로 얘기해줘."
꾸르륵.
벽에 머리를 박은 라임은 오랜만에 타원형의 슬라임 형태로 벽을 파먹었다. 나와 륜 둘이 동시에 나란히 서기 조차 힘들 정도로 라임이 파고 있는 길은 좁았다.
"날개옷 아래에 숨어있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거다."
라임은 처음부터 륜의 옷속에 착 달라붙어 숨어있었다. 혹시나 모를 사태에 대비해 륜의 방어구 역할도 겸했고, 무엇보다 슬라홀이 넘어왔다는 건 철저히 숨겨야했다.
"통로에 진을 치고 있을게 뻔한데 뭐하러 그쪽으로 가겠어? 길은 새로 만들면 되지."
시간은 많다. 내가 가고일을 전부 때려잡고 소강상태에 이른 사이, 륜에게서 떨어진 라임은 포탈 바로 옆 벽의 아래쪽에 구멍을 만들었다. 나는 네발로 기어 간신히 구멍을 비집고 들어갔고, 라임은 우리가 구멍에 들어간 이후 삼켰던 흙을 토해내어 구멍을 메웠다.
우리는 그레모리의 던전의 벽에 또다른 길을 만들어 숨었다. 그레모리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주인님. 이러다가 적에게 들키면 어떻게 하죠?"
륜은 계속 노심초사하며 뒤를 예의주시했다. 포탈로부터 이미 한참 떨어진 곳까지 전진했음에도 불구하고 륜은 적이 우리의 작전을 눈치채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너무 위험한데요...."
"위험하기는 하지. 하지만 괜찮아. 들켰으면 포털 옆에서부터 구멍 파던 순간부터 알아챘을 걸? 만약에 네가 우리를 발견했으면 어떻게 했겠어?"
"음, 벽에다가 화살을 쏘거나 창으로 찔러버렸을 거예요."
"그치? 그런데 지금 전혀 안 그러고 있잖아. 미니맵에도 안 나오는 거야. 우리가 새로 파고 있는 통로를 발견하면 모를까."
자기 던전이 실시간으로 개조당하고 있는데 그걸 시스템이 알려주고 있다면 진작에 병력들을 보냈을 것이다. 나는 손을 들어 옆 벽을 노크했다.
"이거 봐. 밖에서 모르잖아."
"주인님!!"
륜이 새된 비명을 지르며 내게 주의를 줬다. 노크는 텅텅 소리를 낼 정도로 잘 울렸다. 나는 두 손을 들어올렸다.
"라임, 이쯤이면 됐다. 우리 설 수 있게 공간 좀 넓혀줘."
꾸르륵.
허리를 숙이고 엎드려 가던 높이만 파던 라임이 몸을 위로 쭉 뻗었다. 이전보다 동굴을 파먹는 속도는 더뎌졌지만, 덕분에 나와 륜은 허리를 피고 앞으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꾸르륵.
그리고 앞으로 조금 더 나아가려던 순간, 라임이 뭔가 반응을 일으켰다. 나와 륜은 숨을 죽이고 라임과 수신호를 주고받았다. 오른쪽. 라임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왼쪽으로 손을 움직이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구르르륵.
구멍에서 몸을 뺀 라임이 우리의 왼쪽으로 몸을 벌려 다시 흙을 파먹기 시작했다. 비스듬히 나아가던 라임은 적당한 위치에서 다시 직선으로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나는 라임이 기존에 멈췄던 곳에 난 손가락만한 구멍에 눈을 들이밀었다.
"헙."
그곳에는 형언할 수 없는 형태의 촉수 괴물이 천장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진짜 전형적인 마족 다운 괴물이 심해어의 촉수같은 돌기를 전신에 달고 있었고, 괴물의 아래에는 여러 여성들이 아래에 붙잡혀 있었다.
하아, 하아.
'인류 연합에 소속된 종족들이군.'
대부분은 인간이었지만 개중에는 고양이귀를 한 수인족이나 체구가 작은 드워프, 거기에 천족까지 있었다. 심지어 타락한 다크엘프까지 있었다. 그들은 전부 촉수에 사지가 결박된 채 침을 질질 흘리며 경련하고 있었다.
으이힛, 살려, 살려주세요오....
아, 알이 나와...!
'촉수 괴물에 의한 자동화된 산란 시스템이라.'
그레모리, 가슴에만 신경쓰는 치녀인 줄 알았더니 의외로 제법 머리가 잘 돌아가는 마족이었다. 역시 그냥 먹고 죽이기에는 조금 아쉬운 존재였다.
"주인님, 뭔가 재미있는 거 있어요?"
"너는 보면 안 될 거 있다."
나는 륜이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린 뒤 옆으로 슬쩍 물러났다. 륜은 불만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적어도 안의 광경을 보고 비명을 지르는 것보다는 나았다.
"안에 무시무시한 괴물이 있더라고. 너 보고 깜짝 놀라서 괴물이 우리 눈치채면 어떻게 되겠니. 지금 벽 두께가 거의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인데."
"...그렇게 무서운 존재예요?"
"응. 적어도 너는 보여주면 안되겠다 싶을 정도로."
내 호들갑 섞인 경고에 륜은 꼬리를 말았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이기는 하지만, 저곳은 륜이 절대로 가서는 안 될 곳이었다. 나는 촉수 괴물이 있는 방의 위치를 확인하고 다시 라임이 만드는 통로를 따라 걸었다.
"라임이 엄청 길을 잘 파네요."
"1성 시절부터 길 뚫는 것부터 연습했으니."
라임은 슬라인 때부터 내 던전의 천장 공사를 가라로 할 정도로 상당히 똑똑한 아이였다. 그리고 그 지능을 이용해 상대 던전의 통로 바로 옆에 새로운 통로를 파내고 있었다. 그 속도는 무척 더뎠지만, 우리는 종종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던전의 구조를 대충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음, 주인님 아까 거기…."
"왜? 안에 뭐 신경쓰이는 거라도 느껴졌니?"
"...아녜요. 그냥 찝찝해서요."
륜은 눈을 깜빡이다가 다시 뒤를 주시했다. 찝찝함이 촉수 괴물 때문인지 잡힌 다크 엘프 때문인지는 모를 일이었고 이유를 알 필요도 없었다.
'딱 봐도 건드리면 륜 납치하려 들겠지.'
아직 나도 먹지 못한 륜의 처녀를 고작 촉수 괴물 따위가 먹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나는 륜의 가슴을 살짝 움켜쥐며 륜을 위로했다.
"나중에 던전 공략 끝나고, 안전한 곳인지 파악 끝나면 데려다 줄게. 됐지?"
"...네. 알겠어요."
륜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미지수였다.
그리하여 약 수 시간.
우리는 라임이 파고 들어가며 만들어나가는 통로를 아주 천천히 나아갔다.
아아아주 천천히. 대략 5초에 한 걸음 수준으로. 나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며 던전의 외곽 지역을 순회했다. 안 들키게 움직이는 건 좋았지만, 그 속도가 너무 더뎌서 적의 심처를 찾기도 전에 공수가 전환될 것 같았다.
"조금만 더 빠르게 파면…."
"안 돼요. 아까 그러다가 고블린들한테 들킬 뻔 했잖아요."
내 의견에 륜은 단칼에 쳐냈다. 실제로 처음에는 라임이 최고 속도에 준하는 속도로 길을 팠다가, 마침 옆 통로를 지나가던 고블린 무리에 들킬 뻔했다. 놈이 벽을 향해 찔렀던 단검은 아슬아슬하게 내 고간 앞을 스쳤었다.
사각. 사각.
라임이 던전 벽을 파먹는 소리는 아예 없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벽과의 거리를 멀리 떨어져서 나아가자니 애로사항이 많았다. 마냥 멀찍이 떨어져서 나아가기에는 엉뚱한 곳으로 빠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곳은 그레모리가 낙타들에게 둘러쌓여 앙앙거리고 있을 침실.
그곳을 찾기 위해 라임은 종종 벽에 아주 작은 구멍을 뚫어 내부를 염탐했다. 촉수 괴물이 있는 방을 발견한 것처럼, 우리는 수 시간 동안 던전의 구조를 어느정도 파악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목적지에 다다랐다.
...리 찾아! ...스가 손 쓰기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벽 너머에서 들려왔다. 성난 그레모리의 목소리였고, 라임은 아주 천천히 구멍을 넓혔다. 나는 송곳처럼 작은 구멍을 통해 그레모리를 주시했다.
"젠장, 어떻게 6시간이 지나도 아직까지 못 찾을 수 있어!"
"그, 쿠륵, 스크롤로 도망친 게 아닐까요."
"마력 반응은 전혀 없었다고! 도망쳤으면 시스템에서 반응이 있었겠지!"
"그, 그렇게 말씀하셔도 소인은 마왕님의 은총을 받지 못한지라...."
비굴하게 생긴 고블린 하나가 머리를 조아리며 벌벌 떨었다. 낙타 괴물에 대해서는 호의적으로 대하면서도 고블린들은 아주 깔보는 모양이었다. 그레모리는 수염난 고블린의 대가리를 후려치며 마법서로 히스테리를 부렸다.
"이 던전 어딘가에 있어! 샅샅이 찾으란 말이야! 하이엘프 부하를 구하는 게 쉬운 줄 알아?! 확률만 따지면 0.1%보다 더 낮은 확률이라고!"
"......."
륜이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싱긋 웃었다. 나는 륜을 향해 엄지를 척 들어올려준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마침 라임이 륜도 볼 수 있는 두번째 구멍을 뚫었고, 나와 륜은 좌우에서 그레모리의 침실을 살폈다.
'복장이 제법 자유롭네.'
'그러게요. 자려고 하는 걸까요?'
그레모리는 나와 마주쳤던 순간과는 다른 검은 네글리제 드레스로 침대에 퍼질러누웠다. 수염난 고블린은 아닌척 그레모리의 시스루를 감상하고 있었다.
"...응? 어디서 더러운 시선이 느껴지는데."
"소, 소인은 아닙니다!"
"거짓말은. 흥, 네 그 발정난 아랫도리만 봐도 알겠어. 짜증나니까 그만 돌아가."
그레모리는 고블린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방 안에는 그레모리는 남아있었고, 그레모리는 마법서를 들고 허공을 만지작거리며 뭔가 조치를 취하는 듯 했다.
'시스템 다루고 있는 중이네.'
'저는 안보이지만요.'
'나도 마찬가지다.'
던전 주인끼리라도 콘솔은 공유가 안 되는 듯 했다. 나는 그레모리가 아직까지도 우리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에 놀라웠고, 어떤 식으로 그레모리를 족칠 지 고민했다.
'붙으면 반반...?'
얼핏 눈으로 보면 루나급의 강자처럼 느껴졌다. 마법서를 들고있는 걸 봐서는 전형적인 마법사인 듯 했다.
싸울까, 아니면 퇴각을 했다가 시간을 벌까. 내가 고민하던 순간.
"...!!"
그레모리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켜세웠다.
"이런 미친?! 통로를 새로 팠다고?! 어떻게?!"
저리 화들짝 놀라주니 이쪽도 감개무량하다. 나는 륜에게 신호를 보냈고, 라임에게 지시했다.
콰득!
라임이 벽을 전체를 집어삼켰다. 침실의 벽이 와르르 무너지며 라임이 좌우로 퍼져버렸고, 그레모리가 깜짝 놀란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벽을 허물고 침실로 뛰어들었다.
"어, 어느새! 큿?!"
그레모리는 마법서를 움켜쥐며 마력을 일으켰다. 나는 라임이 만들어낸 구멍 사이로 달렸고, 그레모리는 빈 손을 내게 뻗으며 무언가를 빠르게 중얼거렸다.
"어리석은 놈!"
마법이었다. 수정같은 거대 송곳이 나를 찌르려했다. 나는 일생일대의 도박을 걸었다.
"류-----운!!"
침실을 가득 메우는 호령과 함께, 륜의 바람 화살이 내 뒤에서 쏘아졌다. 각도는 그레모리와 전혀 맞지 않는 엉뚱한 방향이었고, 외려 내 옆구리를 향해 쏘아졌다.
"흥, 바보같은-"
"흐어업!"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바람화살은 옆구리를 쓸고 좌우로 도탄되었다. 륜은 정확히 내 양 옆구리를 노리고 화살을 퍼부었고, 옆구리살에 튕겨나간 바람 화살이 침실 전체를 휩쓸었다. 그 덕분에 일부 송곳들이 파괴되었다.
콰과광!
흙먼지가 일었다. 하지만 그레모리는 흙먼지 속에서도 나를 향해 아직 남아있던 송곳을 조준했다.
"죽어버려!"
험한 소리와 함께 그레모리의 송곳 하나가 정확히 내 배를 향해 날아왔다. 나는 승리를 직감했다.
"넌 실수했다!"
내 몸에서 페니스보다 더 단단한 곳을 공격하다니. 나는 철구를 휘두르던 죄수 파이터의 움직임처럼, 전방을 향해 배를 튕겼다.
타--앙!
송곳을 내 배를 찌르지도 못하고 튕겨나갔고, 빙그르르 돌던 것이 그레모리의 볼을 스쳤다.
"뭐--"
"방심했구나, 흐하하!"
퍼-----억.
나는 배치기로 날아가는 자세 그대로, 그레모리의 얼굴을 배로 깔아뭉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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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띠!